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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교교는 욕심 없는 생활에 자족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밥을 지어 먹고 내화호를 만들기에 여념 없었
다. 그렇게 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은 차곡차곡 모아 놓았다.
딱히 쓸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씀씀이가 헤픈 한한이 떠나
자 밑 빠진 항아리처럼 솔솔 빠져나가던 돈이 자연스럽게 모아
졌을 뿐이다.
내화호를 수놓는 사람은 극히 귀해서 만들기가 무섭게 비싼 값
으로 팔려나갔다. 주문도 밀려서 제 날짜에 넘겨 주기가 벅찰
지경이었다.
일하는 재미, 돈 모으는 맛.
허름한 집에서 혼자 쓸쓸하게 지낼망정 교교는 인간다운 삶을
만끽했다. 부족한 것도 느끼지 못했고, 더 바라는 것도 없었
다.
"시집 안 갈 거야? 중신 서줄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해 오는 옆집 아주머니의 말에도 교교
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나이가 되었으니 혼인하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사내가 그립다거나 필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으니 서
둘러 혼인하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반여량.
유일하게 사내로 부각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인가 언니가 심하게 앓았다. 사실은 그렇게 심하지 않
은 몸살에 불과했지만 워낙 엄살이 심한 언니는 이불을 깔고
누워서 끙끙 앓았다.
반여량은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꼬박 밤새워 간호했다.
이틀을 그렇게 지새고 난후 한한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섰
다.
"어머! 피곤해 보이네."
"괜찮아. 몸은 좀 어때?"
"날아갈 것 같은데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몸이 끈적거려 목욕
물 좀 데워 줄래?"
반여량은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목욕물을 데웠다.
"언니, 언니 때문에 이틀 밤을 꼬박 밝힌 사람인데 어떻게 그
런 일까지 시켜?"
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신 외에는 조금도 고
려치 않는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에 가끔 짜증이 치밀곤 했다.
그날도 그랬고, 그래서 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게 되었다.
"바보야, 사내들은 한시도 쉬게 해주면 안 돼. 쉬면 엉뚱한 생
각만 한다니까."
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가 봐도 매혹적인 웃음을 던졌다.
언니는 그런 여자였다. 사내를 한시도 쉬게 하지 않는 피곤한
여자. 그런데도 반여량은 묵묵히 그녀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미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 만큼.
그런 일들을 시키는 것이 여인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언니, 그
런 일을 하는 것이 애정이라고 생각하는 반여량. 둘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 처음으로 묵직한 사내의
향기를 맡았다.
언니는 방 안에만 있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 사람이 오잖아."
"오면 기다리라고 해. 이렇게 좋은 날 어떻게 방 안에만 틀어
박혀 있니?"
그런 날이면 반여량은 방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밖에서 서
성거렸다. 연인의 동생이니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을
따질 계제가 아니련만, 그는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한한이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교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들어와서 기다리라는 형식적인
인사치레조차 건네지 않았다.
"언니, 그 사람이 오는 날에는 나가지 마. 밖에서 기다리는 모
습을 보면 신경이 쓰여..."
"들어오라고 하면 되잖아. 뭐 처음 보는 사이니?"
"어떻게 그래? 이렇게 좁은 방에..."
"바보. 그럼 어떠니? 너 혹시 마음에 있는 것 아냐?"
"어머! 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교교는 필요 이상으로 역정을 냈다.
"어머! 얘 좀 봐. 아니면 그만이지 왜 인상을 쓰고 그러니?"
하지만 그 날, 폭우(暴雨)가 기승을 부리던 그 날은 교교도 어
쩔수 없었다.
언니는 아침부터 장터나 둘러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 에
있는 돈이란 돈은 모조리 긁어 나갔다. 반여량이 찾아온 것은
사시(巳時) 무렵, 그는 여느 때처럼 감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
아 한한을 기다렸다.
폭우는 정오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어린아이 손가락만한 장대비였다. 일시적으로 퍼붓다
가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한 시진 내리 쏟아진 장대비
는 도무지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화호를 수놓기에 여념이 없던 교교는 배가 고파옴을 느끼고
일손을 놓았다. 그리고 부엌으로 가기 위해 방문을 여는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갔겠거니 생각했던 반여량이 그 비를 다 맞고 앉아 있었다.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장대비를 포근한 이불 마냥 뒤
집어 쓴 처량하기도 하고 일면 안쓰럽기도 했다. 아니다. 부아
가 치밀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어멋! 이 비를 다 맞고...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마."
"정말 미련하게 왜 이래요?"
"..."
"어서 들어가요."
"안 돼. 한한은 질투가 많아."
"그게 이유예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곧 자
부( 夫와 매매(妹妹:처제)가 될 사이인데 꼭 이런 격식을 따
져야 되나요?"
맡을 하고 난 교교는 내심 자신을 질책했다.
격식을 따진 것은 그녀도 같았다. 언니의 질투가 두려웠다. 말
도 안 되는 일을 꼬투리 잡는 언니이고 보면 어떤 일이 불씨가
되어 터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점보다 더욱
두려운 점은 그녀 자신의 마음이었다. 반여량을 볼 적마다 가
슴 한구석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수롤 놓다
가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바늘로 손가락을 찌른 적이 어
디 한두 번이던가.
교교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여념 없었다.
"글을 아신다고 들었어요?"
"..."
비로소 반여량의 고개가 치켜 올려졌다.
"글을... 가르쳐 주세요. 장래 매매가 될 사람에게 글을 가르
쳐 준다는데 언니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방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비야. 비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 날부터 반여량은 방안에 들어와 기다렸다.
성심 성의껏 글을 가르쳐 주었음은 물론이다. 자상하고 포근하
게, 때로는 아버지처럼 엄하게 천자문부터 중용(中庸)까지 배
웠다. 그러는 가운데 짙은 사내의 향취를 맡게 되었고, 은은히
방심(放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했다. 어머니가 타
계하신 후에는 교교가 그 역할을 짊어졌다. 하지만 부족한 것
은 느끼지 못했다. 어머니나 교교 자신이나 가장 역할만 하기
에도 하루가 바빴다.
반여량을 알게 되면서부터 혼선이 일기 시작했다.
사내라는 존재는 능력이 있고 없고를 불문하고 묵직하게 앉아
있다는 자체로 기둥이 되어 주었다. 반여량이 그런 점을 일깨
워 주었고, 은근히 언니가 출타하기를 기다리는 날이 잦아졌
다.
"언니,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
"호호호! 그저 그런 사내야. 교교, 세상은 넓어. 반여량 같은
사내는 지천에 널려 있어."
"그런데 왜 사귀는 거야?"
"솔직히 사내다운 매력이 없는 것은 아냐. 상방에서 그만한 사
내도 없고."
"혼인 할 거야?"
"혼인? 호호호! 몇 번 만나고 선물 좀 받았다고 전부 혼인해야
되니? 그럼 세상을 어떻게 사니? 괜찮기는 한데 나에게는 처지
는 상대라 고민 중이야."
'언니가 진정 그런 생각이라면... 언니는 죄를 짓는 거야.'
교교는 그 말을 꺼내놓을 수 없었다.
언니는 한사내로 만족할 수 없는 넓은 호(湖)였다.
반여량 이외에도 많은 사내가 있었고, 그들과는 몸도 섞은 모
양이었다. 그 사실은 반여량도 알고 있는 듯한데 겉으로 내색
하지 않았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는 것이 언니의 태도였고,
반여량은 헤어나오지 못했다.
언니도 반여량을 마음에 두기는 두었던 듯하다. 그 많은 사내
들중 집까지 가르쳐 준 사람은 반여량뿐이었으니.
어쨌던 그 후로도 반여량은 끊임없는 애정을 표시했고, 언니는
그런 공세를 즐겨 받았다.
교교는 언니 덕분에 남녀간의 애증을 싫증나도록 알아 버렸다.
체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깨달은 남녀관계란 안 좋은
것뿐이었다. 어머니와 두 아이만 남기고 일찍 타계하신 아버
지, 애끓는 가슴을 안고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식으로 처
분만 바라던 반여량. 그 속에는 즐거움이 있을지 몰라도 괴로
움이 훨씬 컸다.
교교는 시원한 아침 공기를 들이키며 실과 바늘을 잡았다.
오늘 수놓을 내화호는 높이 두 치 가량의 투명 자기 속에 들어
가야 한다. 상방성 마대야(馬大爺)가 주문했고, 노친의 회갑연
(回甲宴)에 선물할 것이라 했다.
내화호는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라야 수놓을 수 있다.
코 하나만 빠트려도 안 되고 코와 코 사이는 너무도 세밀해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따그닥, 따그닥...
난데없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뜰 앞에 와서 멈춰졌다.
권롱촌에서 말을 본다는 것은 진귀한 일에 속했다. 말 한 마리
값은 소 한 마리 값과 버금갔고, 당장 농사에 필요한 소조차
갖지 못한 권롱촌 사람들이니. 더군다나 사는 형편이 거지도
드나들지 않는다는 정도이니 말을 타고 찾아올 만한 사람도 없
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교교는 봉목(鳳目)을 크게 떴다.
무인인 듯한 자가 말 뒤에서 커다란 봇짐을 내리더니 곧장 뜰
을 가로질러 걸어왔다. 교교에게 온 손님이었다.
"여기 교교라는 소저가 살고 있을 텐데?"
"전데요?"
"한한 소저가 보낸 물건이오. 이건 서찰."
무인은 들고 있는 짐을 툇마루에 올려놓고 품속에서 곱게 봉해
진 서찰을 꺼내 주었다.
'서찰? 언니가 글을?'
의문이 치밀었지만 낯선 사람 앞이라 내색치 않았다. 언니도
같이 글을 배우자는 제안에 코웃음을 치던 언니였지 않은가.
"들어오셔서 차라도..."
"아니오. 물건을 전해 주었으니 이만 돌아가겠소."
무인은 이마를 찡그리며 구경차 몰려든 권롱촌 사람들을 휘둘
러보았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느꼈을 게다. 곳
곳에서 퇴비 썩는 냄새가 진동하니 차마실 기분이나 나겠는가.
무인이 툇마루에 걸터앉지도 않고 떠나간 후,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머...! 이거 비단이잖아? 곱기도 해라. 역시 한한은 인물값
을 한다니까."
"시집을 잘 가긴 잘 간 모양이지?"
"그럼! 강서성에서 제일간다던데...?"
교교는 그들의 입담을 귓전으로 흘려 들으며 서신을 개봉했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 약동하는 힘이 절로 느껴지는 명
필이었다. 획순(畵順)이 고르고 정연해 학문의 경지를 짐작케
했다.
언니가 이런 글씨를?
교교는 피식 웃어 버렸다.
'대필(代筆)이겠지.'
- 교교(翹翹)
잘 있겠지? 물론 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는 세상 어느 곳에
내놔도 행복하게 살아갈 테니까.
나는 행복하게 잘 있단다.
너무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야.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홍화점(紅華店)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 정도는 아랫것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더구나. 좌 상공께서 선물한 물건들은... 푸훗!
손화장에 와보니 정말 형편없는 것들이었어. 그런 것을 받고
그리 좋아했으니 좌상공이 얼마나 경멸했을지 생각만 해도 얼
굴이 빨개지는 것 있지?
좌상공도 잘 있단다.
요즘 가업을 배우느라 눈코뜰새없이 바쁘기는 하지만 하루라도
내 결에 오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얼마나 투정을 부리는
지. 조만간 장주로 등극한다고 하니 호랑이가 날개를 달은 형
국이지 않니?
보고 싶지?
그래도 여기 찾아오면 안 돼.
손화장이 내 손에 들어오는 날, 내가 부를게. 그때, 우리 정겨
운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그 동안은 숨어 사는 것 알지?
참! 아직도 권롱촌에 있니?
거기서 떠나 줬으면 좋겠다. 혹여 좌 상공께서 네가 거기 산다
는 것을 알게 되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니? 언니가 망신당하지
않게 알아서 처신하렴.
호호호! 그럼 다음에 또 쓸게.
안부를 묻는 글귀는 어느 구석에도 보이지 않았다. 온통 자신
의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점이 조금 섭섭하기는 했지만 원래
그런 언니였으니 크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서신만 읽어
봐도 언니가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고, 그러면 족했다.
'반여량... 그 사람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언니를 떠올리자 반여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야속한 사람... 거진 일 년이 다되어 가는데 소식 한 장 없다
니. 하기는 상방성은 생각하기도 싫을 거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교는 서늘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추슬렀다.
쉬익!
야밤에 월장한 손님은 익숙하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손본 지가 오래된 나무문이라 약간만 짓쳐도 부서질 듯 삐걱거
렸는데 희한하게도 그의 손이 닿자 조그만 기척도 흘려내지 않
았다.
휘이잉...!
여름으로 들어서는 계절이기는 했지만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날
씨가 제법 차가웠다.
교교는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눈을 떴다.
휘황하게 비치는 밝은 달빛을 가로막아선 검은 그림자.
"헉! 누구...?"
교교는 너무 급박하게 다가온 그림자에게 말도 몇 마디 토해
놓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과 함께 깊은 나락으로 젖어
들었으니까.
마을 사람들은 교교가 실종된 것에 대해서 전혀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았다. 낮에 어떤 무인이 가져온 비단이면 권롱촌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한 재물이었다. 누구라도 그만한 재물을 지녔
으면 권롱촌에서 살지 않으리라. 단지 아무런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진 것이 조금 섭섭할까.
* * *
"교교라는 계집을 잡아왔습니다."
"한한의 동생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음...! 차라리 한한을 직접 손대는 것이 좋지 않았나?"
"그건 위험합니다. 손화장은 만만히 볼 곳이 아닙니다. 비록
장사치에 불과하지만 관부(官府)를 자극하게 됩니다."
"쯧쯧! 그만한 일도 소문 없이 처리할 수 없대서야..."
"..."
"허허허! 놈을 반드시 죽여야 해. 놈은 내 아들을 죽였어. 허
허! 일개 감여가 놈에게 오히려 농락당하다니."
"죄송합니다. 놈이 안철주나 남저명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교교가 우리 손에 있는 이상 놈
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그자가 추풍인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만
약 놈이 추풍이라면... 그놈이야 말로 위험한 놈이야. 구궁산
에서 놈 때문에 겪은 고초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존명!"
"교교로 안 되면 한한을 손대. 쯧쯧! 손화장 정도를 가지고...
천려일실(千慮一失)이야. 거대한 제방도 작은 구멍으로 무너지
는 게야. 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죽여야해."
"..."
"교교라는 계집을 잡아온 자는 어디 있나?"
"영원한 안식을 찾아 떠났습니다."
"잘했군. 비밀이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새어나가지 않는 법
이지."
주렴(珠簾) 밖에서 보고를 하던 무인은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일 각 가량이 흐른 후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곽모천의
입이 열렸다.
"원방파는 어떤가? 요즘 움직임이 활발한 것 같던데."
"총수가 실종되었으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습
니다만 원방파를 접수하시겠다는 생각은 위험부담이 너무 많았
습니다. 산귀는 그때 바로 죽이셨어야..."
"그만!"
"..."
"놈들이 밀옥을 빠져 나왔으니... 동목은 연환궁을 만들 테고,
조중은 눈에 불을 켜겠지? 집안이 폭삭 무너졌으니... 그것보
다 산귀가 문제야. 놈이 감여가들과 접촉했다가는 모든 게 끝
나."
"그건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강서성 모든 감여가들을 감
시하고 있으니까요. 섣부른 행동을 한다면... 산귀의 무덤이
됩니다. 연환궁도 그렇습니다. 연환궁이 제 위력을 펼치려면
강철로 주조되어야 합니다. 강서성에 있는 대장간 중에 연환궁
을 만들 장인(匠人)은 아무도 없습니다."
"확신하나?"
"확신합니다. 밀옥을 탈출한 놈들은 곧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때,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신지...? 먼저 결단을 내
려 주셔야 합니다."
경륜과 함께 힘이 가득 실린 음성은 행동을 촉구했다. 천장에
서, 벽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가 집무실을 웅웅 울렸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두 죽이라는 말인가?"
"그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음...!"
곽모천은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미지의 인물도 입을 다물
었다. 그는 조용히 침묵할 순간을 잘 아는 듯했다.
"자네 생각으로는... 다섯 아이 중 누가 가장 문제라고 보는
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가 문제입니다. 일을 일으킨 대공녀(大公女). 대공녀가
밀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가 장악했던 열일곱 분타를 정리했
습니다. 대공녀는 손발이 잘렸습니다."
"완전히 끝났나?"
"계속 조사하고 있지만 끝난 것 같습니다."
"오래 걸렸군. 몇 명이나 죽었나?"
"분타주 열일곱 명, 그에 동조하던 자 천이백이십칠 명입니다.
탈명화검의 죽음을 기화로 일거에 치기 시작했으니...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혈단은 얼마나 당했나?"
"광창조가를 칠 때 당한 인원까지 대략 천 명 가량..."
"..."
곽모천이 입을 다물자 미지의 인물은 계속 자기 생각을 피력해
나갔다.
"대공녀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럼 이공녀(二公女)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공녀가 장악한 조직은 신계각. 쇄심파는
그 중에 정대원 사십삼 명을 장악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전해
온 밀마에 의하면... 혈단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
고 이제는 이공녀(二公女)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가장 손상을
받지 않은 세력이기는 하나 힘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머리. 내부에 분열이 있는 한 함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럼 다행이군. 이제는 쇄심파에게 힘을 실어 줘야겠어."
"그렇습니다. 쇄심파가 진정한 신계각주가 되는 날, 이공녀는
자연히 무너집니다."
"허허허! 자네도 간과한 것이 있구먼."
"..."
"소중분은 요연이가 선택했어. 한담거사의 재력을 사용하고 있
고... 놈이 아내와 사부를 칠 수 있다고 보는가? 또 한담거사
가 소중분을 제자로 받아들인 이유, 요연이가 놈을 낭군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미궁이야. 큰 변수가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
"명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는 것은 저희가 합니다. 소중분
은 숨어 있는 혹을 드러내 주기만 하면 됩니다."
"허허허...!"
"가장 문제가 되는 사람은 삼공녀(三公女)입니다."
"선연이? 흠...! 그래, 그렇겠군."
"삼공녀가 육 할 넘게 장악하고 있던 비수당과 비화당은 뿌리
째 뽑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삼공녀에게는 비금당과 비
목당이 있습니다. 비록 삼공녀가 장악한 무인이 사 할이 채 되
지 않는 인원이라 하지만 그들이 누군지 모르는 한, 일시에 움
직인다면 방비하기가 극히 힘듭니다. 만약 삼공녀에게 조중이
탈출한 소식이라도 전해지는 날에는... 비목당과 비금당이 움
직인다고 봐야 합니다."
"허헛! 한 사내에게 애정을 쏟아 붓는 것은 영락없이 제 에미
인데... 그놈에게 조중을 붙여 주기를 아주 잘했어. 허허허!
사내를 돌보듯 하기에 힘들 줄 알았는데. 허허허! 그게 여자의
한계야, 조중의 생명을 담보로 잡지 않았다면 진작 일이 터졌
을 거야. 그만한 힘을 가지고도 망설이다니. 허허! 조중이 아
니었다면 선연이에게 꼼짝없이 당할 뻔했어."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삼공녀가 가진 힘에다 사공녀(四
公女)까지 가세한다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무연이가 장악하고 있던 일심각은 제거하지 않았나?"
"신창윤가가 남아 있습니다."
"그들 정도는..."
"아닙니다. 신창윤가에는 윤명을 능가하는 창법의 고수가 분명
히 있습니다. 문도도 크게 늘어 이백여 명에 이릅니다. 광창조
가를 멸문 시킬 때 혈단원 삼백 명이 죽은 것을 염두에 두십시
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선연이가 광창조가를 부추겨
조중의 행방을 탐문하지만 않았어도..."
주렴 밖에 있던 무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자신의 생각을
계속 피력해 나갔다.
"더군다나 지금 윤명은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윤명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일신의 영달을 위해
서라면 부모형제조차도 과감히 버릴 겁니다. 신창윤가가 끼여
드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세력을 너무 키워 준 것 아닌가?"
"어쩔 수 없었죠. 당시에는 손을 댈 처지가 아니었으니."
"음...! 모두가 내 탓이지. 그 아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
혀 모르고 있었으니. 그래, 선연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가장 좋은 방법은 오 공녀를 일시에 죽이는 겁니다."
"소연이까지?"
"물론입니다. 오공녀(五公女)야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언니
들이 죽게 되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겁니다. 오공녀는 책을 많
이 읽은 현자(賢者). 행동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
다."
"허허! 자네도 독하구먼. 계속 말해 봐."
"오 공녀를 일시에 죽이지 못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이공녀였
습니다. 신계각 자체가 워낙 은밀한 곳이라 반도(叛徒)를 찾아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중분이 거의 찾아낸 듯하
니... 이제 남은 것은 신창윤가와 삼공녀가 장악한 비목당, 비
금당."
"아직도 그 아이들이 무슨 방법으로 그들을 장악했는지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나?"
"..."
미지의 인물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더라도 그 원인은 반드시 찾아내. 곽가장
에 입문한 것을 영광으로 알던 무인들이 반심을 품은 사건은
중차대한 것이야. 원인을 모른다면 앞으로도 이런 일은 반복될
수 있어, 보게. 지금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르고 있는가? 만약
혈단이 없었다면 어찌할 뻔했나?"
"죄송합니다. 제가 감찰(監察)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자네를 추궁하는 말이 아니야. 쯧쯧!"
"..."
"소중분이 거둬들인 사십삼 명을 제외한 모든 정대원을 참살
해. 한 명이라도 놓치면 안 돼. 쯧쯧! 소중분이 제 몫을 못해
줬으면 한정 없이 기다릴 뻔하지 않았나."
"..."
"그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다섯 아이를 일시에 참살해."
곽모천은 참살령(斬殺令)을 내렸다. 자신의 여식들을 죽이라는
명령. 그러나 그는 그런 명령을 내리면서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마치 강 건너 불 구경하듯 극히 태연했다.
"혈단이 정식으로 곽가장 문도가 되는 방법을 모색해 봐. 혈조
수의 후인들이라는 악역을 말끔히 제거해야 공분(公憤)을 사지
않을게야. 혈단만 정식 문도가 된다면 비목당이나 비금당은 문
제되지 않아."
"이번에 밀옥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사지를 절단하되 죽이지는 마라. 놈들은 다섯 아이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만천하에 알려 줄 놈이니까."
"조중도 말입니까?"
"선연이를 죽인다면 조중도 이용가치가 없지. 죽여라."
"동목과 석수는?"
"그놈들? 허허허! 불쌍한 놈들이야. 나야 기물도라도 챙기려고
놈들을 버렸지만, 요연이는 신계각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놈들
을 버렸어. 이쪽 저쪽에서 모두 버림받은 놈들이지."
명령은 떨어졌다. 모두 죽이라는 명령.
"동목이 가진 무기제조법도 포기합니까?"
"집안도 단속하지 못하면서 무슨 강남무림을 통일한다고..."
밀옥에서 동목에게 가한 악형(惡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목은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강서성을
장악하는 것으로 자족(自足)하던 야망을 다시금 꿈틀거리게 만
들던 창병가. 그들이 가전비기(家傳秘技)를 지키려는 결심은
너무 굳건해서 신무귀부에게서도 동목에게서도 알아낼 수 없었
다. 이제 창병가의 기물도는 포기한 것이다.
"산귀도 죽여야 합니다. 그는 혈단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정대가 무너진다면 감여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방파를 흡수할 수는 없습니다."
"허허허! 자네는 요즘 너무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하는군. 안
되는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서 자네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실망시
키지 마."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태산처럼 요동 없는 곽모천의 등에서는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가
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피어 나왔다.
"그럼 대계(大計)를 접으시는 겁니까?"
"대계는 나중이다. 그보다는 곽가장을 물려줄 후손이 급해.
혼이가 죽었으니... 후인이 없는데 대계가 무슨 소용인가. 화
호 요와. 그녀를 데려와라. 털끝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심은?"
"욕정이 일지 않아."
한 마디면 족했다.
반여량을 반 년 동안이나 숨겨 놓은 것만 해도 죽음을 받기에
충분한 죄목이었다. 분파에 남만에서만 활동하는 쥐가 들끓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분타주 방겸이 근원을 추적하지 않았던
들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조차 몰랐을 게다.
호소봉왕 가심은 모든 사실이 발각되자 방겸을 일장에 때려 죽
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곽가장으로 전서가 날아간 후였다.
가심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무녕 분타주가 높고 명예로운 직위이기는 하지만 목숨보다 중
요하지는 않았다.
혈단이 뒤를 추적했고, 무려 이십여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사
로 잡을 수 있었다. 그것도 혈함망, 혈영일검이 나선 후에야.
그만큼 정교하게 다듬어진 투월채법은 무서웠다.
곽모천은 호소봉왕의 색기(色氣)에 관심을 가졌다. 그만한 육
체에 그만한 염기(艶氣)라면...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하초
(下焦)가 발기되지 않는 데 씨를 뿌릴 수 없지 않은가.
곽모천은 양기가 일어나지 않는 탓을 가심에게 돌렸다.
"잊지 마라. 다섯 아이를 죽일 때는 일시에 해야 한다. 피를
조금이라도 덜 흘리려면..."
"각골명심(刻骨銘心)하고 있습니다."
살랑이는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계절은 긴 여름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날, 모든 영화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역사를 열게 해줄 여름으로.
첫댓글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갈수록 어렵네요?
고운밤되시길요...
강사합니다
즐~~~감!
감사 합니다
매정한 애비로고! 즐독 합니다!
즐독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즐감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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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햇습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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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