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 리움에 왔습니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하는 말이다.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 쪽으로 오다가 유턴 고급 주택가로 들어서는가 했더니
리움에 다 온 모양이다.
마치 그리움에 도착한 것 같다.
누군가가 리움을 그림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했었다.
우리는 모두 유치원생 현장 학습 온 것처럼 얌전히 버스에서 내린다.
구두소리가 나지 않는 굽 낮은 신발, 가방은 크지 않아야 하고 핸드폰은 반드시 꺼야 하는 등등의 지시사항 그러나 불평할 수는 없다. 워낙 좋은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 정도의 주의사항은 제약이라기보다 좋은 관람을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곳곳에 잘 교육받은 매끈한 사람들이 미소로 맞아준다. 아름다움의 왕국 사람들이다.
하이야트 호텔이 높게 서 있기는 하지만 리움의 건축물들의 배치와 데크의 편안한 긴 선이 두드러져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오른쪽 뒤로는 이건희 회장의 저택이 중세 영주의 성과 같다. 물론 그 영향력과 부에 관해서라면 중세 영주에 비할 바 아니지만.
데크 위에 설치된 칼더의 조형물은 구멍이 뻥뻥 뚫린 스위스 치즈의 형상과 모빌 모양인데 삼성의료원에 갈 때마다 자주 칼더의 작품을 보아서인지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먼저 어린이를 위한 전시교육공간으로 들어간다. 램 쿨하스라는 건축가의 작품이다. 리움은 건축물부터 예술품이고 명품이다. 이름도 쿨하기도 하지. 쿨하스의 건축물 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들어간다. 빠르고 가벼운 걸음으로. 삼성계열의 여직원들은 모두들 예쁘다. 물론 친절하고. 79회 동문이라는 여직원은 세련된 매너로 우리를 안내한다.
수많은 선과 면의 분할, 시선에 따라 새롭게 달라지는 다양한 느낌 속으로 홀린 듯이 걸어들어간다. 직선과 면의 분할이 이렇게 자유롭고 다양할 수 있을까? 나는 감탄한다.
20분 동안 리움을 소개하는 영화 감상. 홍나희 관장의 인사말과 지금 방금 들어온 건물에 대한 소개도 있다. 새로움과 자유 도발적인 구상 공간 속의 공간이고 테크도 쿨하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쿨하스는 쿨한 직선을 긋는 대가인 것 같다.
인간을 위한 건축 근원의 기억이란 표제가 붙은 마리오 보타의 작품 뮤지움 1은 텔라코타의 따뜻한 색깔인데 도자기 미술관을 염두에 둔 공간이라고. 언덕 위의 원추형의 고대 성곽을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안에 들어와서는 바깥에서 보이는 형상을 상상할 수 없다.
로비에서 PDA(디지틀 전시 가이드)를 받는다. 삼성에서 개발한 세계 첨단의 도구이다. 조금 큰 핸드폰 같은 형상인데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미술품 앞에만 서면 영상과 함께 설명이 흘러나온다.
청자상감 진사채 모란봉문화분 앞에 선다. 가장 큰 화분이라는데 붉은 진사채의 장식 문양이 선명하고 화려하고 아름답다. 나로서는 처음 본다.
힘차고 기가 펄펄한 장승업의 영모도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림이다. 매와 꿩의 모습이 설명대로 거칠고 생동감이 넘친다. 전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백색의 대리석 계단은 현실의 공간 같지가 않다. 너무 매끈하여 나 자신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착각이 든다.
뮤지움 2로 이동한다. 검붉은 색의 큰 오목거울이 인도의 카푸어의 작품이라는데 완전과 공허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다. 완전하기에 공허한 것인가. 그 마술거울 속으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아 다시 이동한다. 하얗게 공중에 매달린 이 불의 작품도 충격적이다. 그리고 서도호의 작품<someone>은 수만개의 군인배지를 연결하여 하나의 갑옷의 형태를 만들었는데 집단과 개인의 형성 무수히 반복하는 지배하는 사회적인 힘을 보여준다고 한다. 전체주의의 무한하고도 공허한 모습을 보여준다. 미술이 이데올로기를 보여 주는 힘에 압도된다. 하나의 칩에 불과한 나 자신도 거대한 집단 권력에 빨려들어가 녹아버려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군번이 된 것 같다.
데미안 허스트의 <죽음의 춤>은 수천개가 넘는 알약으로 벽을 채운다. 색색가지의 캡슐과 알약들. 어쩌면 내 몸에 이미 녹아 들어가버렸는지 모를 수많은 알약들이 가지런히 거기 놓여 있다.
나는 이미 예술이라는 약물에 취해 마취되어 버린 상태가 되어 버렸다.
박서보의 묘법의 세계로도 빨려들어간다. 그의 자동기술적인 리듬 속으로 묘법을 몸으로 느낀다. 이우환의 작품은 리움에서 제 자리를 찾은 듯 잘 어울린다. 이종상의 <원형상>도 대형장판지 위에 튀어 오를 것 같은 그 생동성, 그 그림 하나만으로도 리움에 온 보람이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내 호흡이 가팔라질 것 같다. 유영국의 깊은 파란색과 노란색 권옥연의 문학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행복감에 가슴이 뛴다. 지금도 멋쟁이지만 약간 능글능글한 노신사가 된 권옥연이 이렇게 쿨한 그림을 그렸다니...
이대원의 금강산 온정리 풍경을 보니 조금 현실로 돌아온다.
마크 로스코의 색채 앞에선 다시 마취 상태에 들어간다. 화가가 자살로 마감했다는 멘트가 들리는데 그 어두운 색채 속으로 푹 빠져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조셉 앨버스의 <사각형에 대한 경의> 녹색의 사각형에서 푸른 색으로 사각형으로 빨려들어간다. 저 푸른 사각형 속으로 차라리 나도 색채가 되어 들어가고 싶다.
나오려는데 빈 홍합껍데기가 가득 담긴 트렁크가 있다. 마르셀 브로타스의 <Moules>라는 작품이다. 홍합이라는 뜻과 原子라는 뜻의 동음이의어라고 한다. 빈껍데기가 원래 본질이란 뜻인가. 가득차 있는 것은 빈 것과 통한다는 말인가.
미술관 밖으로 자작나무가 보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땅에 뿌리박은 미끈한 하얀 나무는 가끔 미술관 안을 들여다 본다. 사람들이 고민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창조한 예술품들의 열정을 그리움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