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1498년 (연산군4)년 일어난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조의 제문"은 김종직이 단종을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희왕을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 때문이다.
이 글을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놓았다.
연산군 즉위한 뒤<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는데,그 때의 책임자가 이극돈으로 그는 훈구파였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자신의 비행을 사초에 적은일로 앙심이 있었고, 또다른 훈구파의 한사람 유자광은 이미 고인이 된 김종직과는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다.
일찍이 함양에 놀러갔다가 시를 지어 함양관청 벽에 현판을 걸게 한적이 있는데 그 후 함양군수로 오게된 김종직이"유자광이 무엇이기에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하고 철거하여 불사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공신세력인 훈구파들은 김종직과 제자들이 주류인 사림파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이 세조에 대한 불충이라 하여 옥사를 일으켰다.
그 결과 김종직은 부관참시되고,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등은 참수되었다.
그 외에 정여창 강겸 이수공 정승조 홍한 정희랑 김굉필 이종준 이주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등은 귀양보냈다. 성종조 이 후 사림이 삼사의 언론과 사관직을 차지하고 훈구파들의 비행을 비난하면서 결렬하게 대립하였고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까지 더해져 "조의제문"을 명목삼아 훈구파들이 정적을 숙청한 결과인것이다.
기묘사화
1519(중종14)년 이미 두차례의 사화로 많은 화를 당했던 사림의 선비들이 다시 한번 사화로 인해 참화를 입는다.
중종에 의해 등용되었던 조광조와 신진사대부들은 급진적인 개혁을 하고자 했으며 훈구파들과 대립했다.
결국 사화의 발단이 된 "위훈삭제"가 촉발되어 그 대결이 한계에 달했다.
"위훈삭제"란 103명의 공신들중 78명의 공훈을 삭제한것이다.
그러나 이미 급진적 개혁에 부담감을 느끼던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져 무시하는것이라고 여겨 불쾌하게 여겼고 남곤 심정 홍경주등 훈구파들의 "주초위왕"계략까지 더해져서 결국 반역으로 몰리어 다시 한번 화를 입은것이다.
그 결과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었다.
그외 많은 사림들이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했던 김안국 안당등도 파직 되었다.
성급하고 서툴렀던 개혁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하나 거기에는 비전도 없이 왕권만을 위해 그들을 등용했던 중종의 무능도 한 몫 한것은 아닐까?
율곡 이이는 조광조를 "사림의 영수이고 도학의 태두이다."라고 평가하였다. 퇴계와 율곡 모두 정암 조광조를 존경하며 흠모하였다고 한다.
현량과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지만 사림의 인재를 등용한것은 족벌귀족이 아닌 능력과 가치관 자질 등으로 관료를 뽑고자 한 그의 노력이였다.
조광조는 김종직과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사림의 정맥이였다.
그들은 당대에는 정쟁에 희생되었으나 신원되어 조선조의 최고의 유학자로 추앙 받았다.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추구 했던 개혁사상에 많은 유학자들이 높이 받들고 존중했던 것이다.
※ 4대사화: 무오사화(1498-연산군4년) 갑자사화(1504-연산군10년) 기묘사화(1519-중종14년) 을사사화(1545-명종원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