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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六 章. 벌거벗은 얼굴로
(一)
현 불교계(佛敎界)는 구원사가 불탄 일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사찰에 방화(放火)를 하다니.
승려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사찰이 있는 산에서 무인들을 추방
하자는 데 목소리를 하나로 모았다.
정토종뿐만이 아니었다.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승려들은 일제
히 무인들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림에 적(籍)을 두고
있으며, 선종(禪宗)의 중심지이자 임제종(臨濟宗)의 대가람(大
伽藍)인 소림사(少林寺)로 몰려들었다.
소림사 방장(方丈)인 녹명(綠明) 선사(禪師)는 곽가장에 책임
을 추궁함과 동시에 텁석부리 장한을 무림공적(武林公敵)으로
공포하였다.
관부에서도 사찰이 불탄 사건만은 간과할 수 없었다. 무림 불
간섭주의(不干涉主義)가 원칙이지만 사건이 종교계로 파급되다
보니 불가불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도지휘자사(都指揮使司)는 삼위(三衛:l위는 5,600명)의 군사들
에게 방화범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다. 그래서인지 강
서성에 주둔한 군졸들은 유난히 기치창검을 곤두세웠다.
이것은 흑백(黑白) 양도(兩道) 모두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
었다.
흑도의 주축세력인 사우맹은 이번 사건과 전혀 관계 없다고 공
언했다. 악한 일 뒤에는 항상 사우맹이 있다는 세간의 지탄(指
彈)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텁석부리 장
한을 꼭 잡아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곽가장도 어쩔 수 없었다.
구원사 화재의 중심에는 곽가장이 존재했다. 비록 방화를 저지
르지는 않았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감수할 수밖에... 구원사를
복원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이미 상당량의 은화가 불사(佛
事)를 위해 기탁되었다. 또한 이 년 후인 영락(永樂) 십오 년
까지 밀옥을 사찰이 없는 도원산(桃源山)으로 이전하겠다고 발
표했다.
화해 행동은 취했지만 무소불위(無所不爲)로 무력을 행사하던
무림세가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밀옥주 일비쌍검 문허를 비롯하여 부옥주인 뇌검 공회, 천라지
망을 펼쳤던 삼 개 분타주가 곽가장으로 소환되었다.
"그놈의 화상(畵像)을 그려라. 전 문도가 한 장씩 소지할 수
있도록. 정대주, 앞으로 기한을 보름 주겠다. 그때까지 놈들을
잡지 못하면 죽음을 각오해라."
쇄심파 소중분의 일갈은 매서웠다.
오 인은 자신들이 기억한 모든 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렇다고
땅에 떨어진 명예가 회복된 것도, 박탈된 권한이 되살아나지도
않았다.
일비쌍검이 그린 화상에는 문제가 많았다.
귀밑부터 얼굴 반쪽을 덮은 수염은 독특하지만 추풍이 분장을
했다고 가정한다면 결정적인 오판(誤判)일 수도 있었다. 그래
서 수염을 제거한 얼굴을 따로 그려 놓았지만 곽가장 문도들은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구원사의 지영 스님이 결정적인
증언을 해준 까닭이었다.
"그 사람은 수염이 무척 빨리 자랐어요. 아침마다 수염을 깎았
는데 저녁이 되면 다시 더부룩해졌거든요. 털도 거칠어서 마치
강철을 만지는 것 같았어요."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분장을 했다면 날마다 수염을 깎을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더군
다나 지영 스님은 수염 깎은 얼굴까지 세심하게 묘사(描寫)해
주었다.
은화 오십 냥.
반여량의 목에 걸린 포상금 액수였다.
"밀옥에는 왜 갇혔소?"
반여량은 묵묵부답으로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여인
을 바라보았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표범 같은 야성미(野性美)가 물씬 풍기고, 요와에게서조차 느
낄수 없는 관능미(官能美)까지 뿜어냈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
할 만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얼굴 윤곽은 봄바람처럼 부드럽
고 훈훈했다. 그러나 이목구비를 자세히 뜯어 보면 오밀조밀하
게 꽉 짜여 어느 한 군데 빠지는 곳이 없었다. 특히, 커다랗
게 빛나는 눈망울은 가히 압권이었다.
반여량은 여산을 빠져 나와 장강 나룻배에 몸을 실은 다음에야
처음으로 여인을 살필 수 있었다. 여인에게 신경 쓰기에는 밀
옥 무인들의 칼날이 너무 예리했다.
'예쁘군.'
처음 느낌이었다.
"내가 대공녀라면 황제(皇帝)를 유혹했을 텐데."
요와는 가장 현실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일행은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곽사연은 넋을 잃은 듯 멍한 표정 외에 다른 표정은 전혀 짓지
못했다.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사용하여 의사표시를 하지
도 않았다. 그저 너는 말해라 나는 듣겠다 하는 식이었다. 그
런 행동은 동생인 곽소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혈도를 풀어 주겠다. 단..."
반여량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말고 순순히 마혈을 풀어 주었
다.
여인은 어지러운 듯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 동작 또한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그녀는 말없이 일행을 뒤쫓았다.
반여량이 이끄는 대로 험한 가시밭을 뚫고 나올 때도, 이틀 동
안 쉼 없이 치달릴 때도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도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는 듯했다. 아니,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했다. 그저 따라오라니 따라
오고, 쉬라니 쉬고, 먹으라니 먹는 것 같았다.
두세 사람이 간신히 발을 뻗을 정도로 비좁은 초막 안에 들어
와서도 그녀의 행동은 여전했다.
"무슨 사유로 밀옥에 갇혔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니 상당히 자유롭던데?"
"..."
'아프군. 마음이 아파. 그것도 무지하게...'
"이런 말을 고깝게 듣지는 마시오. 내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인생은 뜻대로 살 수가 없는 모양입디다. 관건은 얼마나 이겨
내느냐 하는 것..."
순간이었다.
"호호호호...!"
처절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모골이 송연해
지도록 귀기 어린 웃음이었다.
한바탕 웃음을 흘려낸 여인은 다시 고개를 처박았다.
"좋군. 증오를 웃음으로 풀어낼 길이 있으니..."
"나는 말이오. 그렇게 웃을 수조차 없는 사람이오."
여인이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는 그의 목소리
가 너무 낮았다. 하지만 여인은 소리를 들었는지 기이한 눈빛
으로 반여량을 바라보았다. 이미 두 눈을 감고 회상(回想)에
젖어 있는 사내를.
또 한 여인.
곽소연이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을 방긋거렸다. 그러나 곧 입
을 다물어 버렸다. 대신 뜨거운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쉬르릉...! 푸악!
반여량은 귓전을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향전...? 향전은 곽가장이 사람을 찾을 때 사용하는 신호다.
나를 쫓아 왔다면 천광탄을 터트려야 하거늘... 우연의 일치인
가? 아니면...'
문득 반여량은 낯선 눈초리를 느꼈다.
여인이 보내온 눈길이었다.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혜지(慧智) 깃든 눈망울로 자신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곽... 사연 내 이름이야."
"알고 있소. 곽가장주의 장녀라는 것도,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는 소문도... 새삼스럽게 이름을 말해 주는 이유가 뭡니까?"
곽사연이 지금 말하는 모습은 음성이 비록 가늘지만 또박또박
하고 목소리가 맑아 미친 여자라 볼 수 없었다. 그뿐인가. 명
문세가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자란 도도함이 물씬
풍겨나왔다.
놀랄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곽사연은 결코 자신의 하수(下手)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평수(平手)라고나 할까? 감응으로 느껴진 직감이었다. 그런 여
인이 순순히 마혈을 내맡겼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
다.
"인생은 뜻대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얼마나 이겨내느냐가 문
제라... 좋은 말이야."
"사부님이 남겨 주신 말씀이오."
"누가 말했든 상관없어. 나는 그와 같은 말을 많이 들었어. 내
주위에는 현자(賢者)니, 지자(智者)니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
거든."
"..."
"소리를 들었지? 향전이야. 목표는 이곳. 향전이 솟구쳤으니
앞으로 음...! 한 시진이면 대주급 이상되는 인물이 나타날 거
야. 내 말을 믿어? 호호호! 비록 미친년이지만 그래도 대명문
세가 곽가장에서 자란 몸 아냐?"
"표정을 보니 짐작하고 있는 모양인데... 좋아. 마음 든든해.
내가 제안 하나 할까?"
곽사연은 다시 백치 상태로 돌아갔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오
랫동안 길들여진 습관처럼 입만 벙긋거렸다.
"곽가장주 곽모천. 내 아버지야. 아버지를 죽여 줘. 대가는
나.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어떤 일이라
도... 몸도 마음도 다줄 수 있어."
"언니!"
곽소연이 깜짝놀란듯 자리에서 벌떡 얼어났다.
"언니 미쳤어?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그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곽사연을 붙잡아 갔다. 그러나 매몰
차게 뿌리치는 바람에 요란 한소리를 내며 초막 한 귀퉁이로
나뒹굴었다.
"...!"
반여량은 눈에 기광을 떠올렸다.
자식이 아버지를 청부(請負)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
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호호호! 왜 대답이 없지? 겁나?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대가 밀옥을 깼다고는 하지만 곽가장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는 없을 테니까. 더군다나 아버지는 무신(武神)이지. 내 고민
은 이거야. 그러니 앞으로는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건방진
소리는 입 밖에 내지마."
반여량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이 여인... 고통이 심한 줄은 감응으로 알았는데 아버지를 죽
여달라니 엄청난 말이다. 곽가장주를 죽여 달라. 남가 일족이
그랬던 것처럼 전 무림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곽가장주 곽모천... 당신의 아버지와 나는 언젠가 한 번 만날
운명이었소. 묻고 싶은 것이 많으니까. 내가 죽지 않는다면...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리다. 그런데 분명히 말해 줄 것이 있소.
나는 말이오.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을 보면 속이 뒤집혀. 자식
이 부모를 청부한다? 후후후! 부모는 아무리 잘못해도 역시 부
모인 것이오. 대역무도한 죄인이라 해도 자식만은 부모를 저버
려서는 안되지."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곽사연의 얼굴이 반짝
들려졌다.
"아버지에게... 원한이 있나?"
"없었소. 아무 관계도 아니었지. 하지만 지금은... 그는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소."
"스물두 번째군."
"...?"
"아버지를 죽여달라고 부탁하기 스물두 번째. 처음으로 응낙을
받았어."
곽사연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았다.
뚜벅! 뚜벅...!
반여량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했다.
'지겹군. 무섭기도 하고...'
이삼재는 천광탄을 쏘아 올릴 방도를 아직껏 마련하지 못한 상
태였다. 일행이 요와를 매섭게 감시했지만,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섣부른 행동이라도 하는 날에는...
'최후의 순간에야 그까짓 천광탄 하나 쏘아 올릴 수 없을까?'
이삼재의 손발에서는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나왔다.
삼혼검법 중 가장 빠른 초식은? 아니야. 텁석부리 장한의 무공
은 밀옥 고수들도 간단히 제거한 놀라운 솜씨. 독비날검조차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고 죽지 않았는가.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삼재이지만 웃음기
한 점 없는 얼굴로 걸어오는 장한을 상대할 절공(絶功)이 생각
나지 않았다.
텁석부리 장한은 서슴없이 요와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화호 요와,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소? 단둘이서만."
"뭐, 뭐! 왜...?"
"역시 그럼 저년이?"
제일 먼저 성질 급한 황백이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섰다.
"으잉? 요와, 저년이 곽가장의 개?"
이삼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황백과 마찬가지로 부아를
터트리며 벌떡 일어섰다. 이 순간, 그의 두 다리는 중풍 맞은
노인네처럼 후들거렸다. 천만다행이었다. 정체가 발각되지 않
았으니. 하기는 그토록 조심했고, 밀마 또한 전혀 사용하지 않
았는데 어찌 정체를 알 수 있으랴.
"나, 난 아냐. 난 억울해."
요와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말까지 더듬거렸다. 순간,
쉬익!
이삼재가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살인절기 삼혼검법을 전개했
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수염투성이 장한이 요와를 간자로 지목한
이상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제거하고 싶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고, 장한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으
니까. 그런데,
"잠깐!"
'헉! 움직일 수 없다!"
이삼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그리 큰 음성도 아니었다.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이 나지막한
일갈이었다. 그런데도 이삼재는 도를 뻗어내지 못하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우뚝 멈춰 섰다.
'이, 이럴 리가 없어. 빌어먹을! 저년을 죽여야 하는데...'
하지만 아무리 진기를 최대한으로 이끌어 봐도 한번 사라진 전
의(戰意)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이삼재를 힐끗 쳐다본 반여량은 요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
다.
"추태는 부리지 않으리라 믿었는데..."
"미친놈! 곽가장과 연통하는 놈이 있다기에 제법 눈썰미가 있
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나야? 호호! 동태 눈깔이었군. 동
태 눈깔. 호호호!"
"초막 뒤에 우물이 있소. 오래 전에 말라 버렸지만 몸 하나 눕
히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오."
"호호호! 미쳤어. 다들 미쳤어.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내놈들은
다 똑같아. 호호호! 내가 얌전히 당할 줄 알아?"
요와는 도저히 반여량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앉아서
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녀는 황급히 품속에 곱게 접
어 놓았던 칠절편(七節鞭)을 꺼내 들었다. 역시 마을에서 구한
병기였다.
"화호 요와의 병기는 선표(線 ). 칠절편과 선표는 비슷한 듯
하지만 묘용상 상당한 차이가 있소."
"웃기지 말고 덤벼."
윙! 위잉! 윙...!
요와의 머리 위로 휘둘려지는 칠절편에서 위맹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재질이 한철(寒鐵)이었고, 마디가 일곱 가닥으로 꺾
여, 철커덩거리는 쇳소리가 몹시 날카로웠다.
"공격하라니 공격하겠소. 그럼..."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린 반여량은 느릿하게 칠절편 공격범위로
들어섰다.
"이 자식이 정말!"
요와는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칠절편을 맹렬하게 휘둘
렀다. 착각일까? 한순간 천지가 시커멓게 물들며 칠절편 앞에
매달린 표( )가 천수여래(千手如來)의 손바닥처럼 수십 개로
불어났다.
반여량은 떨어지는 우박덩이를 향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마주쳐 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요와의 편법.
생사기로(生死岐路)의 격전에서 편공은 급격하게 둔화되었다.
반면에 반여량의 신형은 그야말로 비조(飛鳥)를 능가할 만큼
빨랐다.
퍼억! 퍽!
가벼운 격타음(擊打音)이 터지고,
"이, 이건 아냐... 진기가... 아니, 싸움 준비가..."
횡설수설하는 요와의 입가에는 가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인간 같지도 않은 놈...'
이삼재는 초막 앞에 있는 고목 주변을 서성거렸다.
아무리 늑대를 부르고 호랑이의 기를 꺾어 놓는 귀신 같은 놈
이지만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 태연자약하는 것을 보면 풋내기
는 풋내기였다.
저녁이 되어 비적질을 마치고 돌아오는 산적들과 함께 곽가장
무인들을 상대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곽가장 편에 선 결
단은 옳았다.
조심스럽게 초막 안의 동정을 살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오던 놈이 반나절이나 한 곳에서 꼼짝하
지 않고 있다. 쉬는 것이리라. 그것으로 가장 신경 쓰이는 놈
은 해결되었다. 바보가 되어 버린 곽사연과 순둥이 같은 곽소
연은 더더욱 염려할 것 없었고, 조중과 학구만 신경 쓰면 만사
형통(萬事亨通)이었다.
'됐어. 바로 지금이야.'
이삼재는 재빨리 품속에서 천광탄을 꺼내 하늘로 쏘아올렸다.
쉬리릭...! 퍼억!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황혼과 어울려 멋진 조화를 이룬 검은 구름이 그의 손에서 탄
생되었다.
'멋진데...'
이삼재는 입가에 미소를 띠다 말고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
았다. 등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까닭이었다.
"너, 너희들이..."
이삼재는 할말을 잊어 버렸다.
동목 조중. 학구...
이놈들이 어떻게 일시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흘 굶은 늑대처럼 번들거리는 눈빛
에서 일어나는 적의(適意)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 나는..."
'도망가야 한다. 여기 있다가는 죽음밖에 돌아오지 않는다.'
죽음...! 어두컴컴한 공간. 세상과의 단절. 사랑하는 아내도
그토록 귀여운 자식놈도 보지 못한다. 술도 마실 수 없고, 향
기로운 음식도 먹지 못한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이 끝이다.
마음이 답답해졌다.
"밀마가 참 아름답군요. 이름이... 아! 환제갈 함상 맞죠? 저
밀마를 만들어 낸 사람이?"
"맞네."
조중이 털북숭이 사내의 말을 받았다.
"곽가장의 밀마라면 저도 조금 해독할 수 있습니다. 구름 쪼가
리가 위로 아홉 개니 남자가 아홉 명, 아래로 둘이니 여자가
두 명. 모두 열한 명이 있다는 밀마군요. 그 중 두 개는 유독
색채가 짙으니 고수가 둘이라는 뜻이고... 대단합니다. 어떻게
죽통(竹筒) 하나로 그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알고 보면 별게 아니라네. 천광탄을 쏘아 올리면서 줄을 길게
잡아당기든가 아니면 얕게 잡아당기든가... 조절하기 나름이
지. 그보다 고수가 둘이라... 자네와 나를 말하는 것 같은데,
영광이군."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아냐. 요와를 공격할 때 난 자네의 공격을 유심히 관찰했어.
만약 내가 요와라면 어떻게 싸울까 하고 말이지. 공격은 막아
내겠더군. 평소대로 손발이 움직여 준다면."
조중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물론 죽이겠지?"
"그래야겠죠."
'이놈들이 나를 가지고...'
쉬익!
도주할 틈을 살피던 이삼재는 번개처럼 신형을 날렸다.
일심각의 절정신법 도수표(渡水飄)였다. 혈영일검이 삼혼검법
에서 깨닫는 바가 있어 빠르기에 역점을 두고 창안한 신법. 일
심각 무인들 모두가 익힌 신법이었다.
같은 검공을 가진 사람이 대결할 경우 승자는 누구일까? 초식
상에서 우열을 논할 수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내력과 신법에서
차이가 난다. 내력이 강하면 초식이 웅휘하고, 신법이 빠르면
초식은 유유하다.
일심각 무인들은 대부분 내력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삼재
는 달랐다. 내력이란 하루 아침에 급성장 할 수 없는 것, 차라
리 같은 시간에 신법을 수련하느니만 못하다는 판단이었다.
지금 그가 전개한 도수표는 제비가 부드럽게 물을 차고 건너듯
우아하면서도 극히 빨랐다.
"이럴 줄 알았지!"
황백이 냅다 소리를 지르며 따라붙었다.
범도도 움직였다. 신법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역시 인간이 움
직이는 것. 던지는 병기에는 당할 리 없으리라. 그는 유엽도
두 자루를 힘껏 날려 보냈다.
"어딜!"
한소리를 내지른 이삼재는 방향을 홱 틀어 황백에게 일검을 내
질렀다. 삼혼검법 중 쾌일식. 떨어지는 속도가 하늘에서 치는
번개와 같다 하여 낙전일식(落電一式)이라고도 불리는 검공이
었다.
"허억!"
"앗!"
놀란 외침이 다급히 터져나왔다.
범도가 던져낸 유엽도는 허공을 스치고 말았다. 유엽도가 날아
가는 속도와 이삼재가 전개하는 신법의 속도를 셈한 후 던져낸
암기다. 이삼재가 방향을 돌려 버리자 유엽도는 그의 등을 스
치고 지나가 버렸다.
그들보다 급한 것은 황백이었다. 황백은 이삼재가 돌연히 방향
을 바꿀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빠른 검공에
전력을 다해 육신을 부딪쳐가는 형상이 되고 맡았다.
사실 일심각 무인들은 서로 간에 무공의 고하를 가리지 못했
다. 비무에서는 본신비기(本身秘技)를 숨기는 경우가 왕왕 있
어 더욱 그랬다. 이삼재가 신법연마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황백은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되면 동귀어진(同歸於盡)이다.
자신이 먼저 검을 맞겠지만 이삼재 역시 피하지 못한다. 다행
이다. 줏대가 없는 놈을 자신이 베게 되어서.
"이런!"
방심했다는 표현이 옳을 만치 유유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조중
과 학구가 경악성을 터트리며 성급히 날아올랐다. 그러나 황백
이 죽는 것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그들이 설혹 이삼재를 죽
이더라도. 역시 일심각 무인들의 검공은 얕볼 게 아니었는데.
'허억! 이게 아닌데...?'
이삼재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검을 잡은 손목에서 힘이 풀
리고, 사색이 다된 얼굴로 다가서는 황백이 절대고수처럼 보였
다. 환상이었다. 찰나간에 뇌리를 휘저은 환상. 순간, 그의 검
은 쏘아지던 방향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푸욱!
몸뚱이를 찌르는 감각이 아니다. 살갗을 스쳐지나는 감촉이다.
이럴 경우에는 반격에 대비해야 한다. 반격에...
"훗!"
이삼재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다. 심장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황백 이놈의 자식이...'
생각은 무섭게 이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뜸과 동시에 자상 열 개를 새겨 놓는다는 능공십자 학
구의 검이 눈을 아리게 했다. 그보다 더욱 강한 상대, 조중이
쳐낸 목봉도 미심(眉心)을 노리고 다가섰다.
"커억! 안 돼! 아악!"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삼재는 머리가 으스러져 버렸다.
조중이 전력을 다해 전개한 조가봉법은 확실히 무서운 위력을
담았다. 피를 흩뿌리며 뒤로 날아가는 몸뚱이에 능공십자가 자
상 열개를 새겨 놓았다.
"휴우!"
황백이 긴 한숨을 불어 내기까지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후후! 역시 당주님입니다. 발검과 동시에 적을 벤다는 저보다
확실히 한 수는 빠르군요."
"초식의 차이가 아니라 내력의 차이겠지."
"그럴까요?"
"그럼."
"하하핫!"
"하하하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했던 이삼재가 곽가장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슬프기도
했다. 일행은 모든 감정을 한 곳에 담아 웃음으로 토해 냈다.
곽사연은 분장(扮裝)에 한참 열중하고 있는 반여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당신처럼 말하는 사람을 보면 속이 뒤집혀. 자식이 부모를 청
부한다? 부모는 아무리 잘못해도 역시 부모인 것이오. 대역무
도한 죄인이라 해도 자식만은 부모를 저버려서는 안 되지.'
아직도 귓전에서 윙윙거리는 소리.
이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버지를 청부하면 대다수의 사내들은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채 뒷걸음질하기에 급급했다. 그렇지 않은 사내들도 좋은 소리
로 달래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곽사연은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중이
었다.
그는 온갖 재주로 똘똘 뭉쳐진 사내 같았다.
요와의 얼굴에 덧씌운 인피면구(人皮面具)만 해도 워낙 정교해
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인데, 여인보다 더욱 섬세한 분장술
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다.
요와의 용모는 선이 뚜렷하고 굵은 편이어서 쉽게 변모시킬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눈썹도 진했으며, 도톰한 입술은 도발
적인 마력을 뿜어냈다. 그런 얼굴이 가녀리고 청순한 용모로
변하는 중이었다.
"나 어쩌면 당신을 사랑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될까?"
"말하지 마시오. 분장이 완성될 때까지는."
"그 어색한 존대말 좀 집어치울 수 없어요? 부담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사랑을 원할 만한 자격은 없고... 청루(靑樓)
에 가느니 나를 택해 달란 말이지."
"당신은 그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하오."
까르르 웃는 요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진심으로 말했으리라.
저 사내는 알고 있을까? 가볍게 흘린 단순한 말 한마디가 여인
의 방심을 흔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반여량은 여인을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하룻밤 풋사랑
이라도 나누고 싶을 만큼. 하물며 요와같이 절개를 가볍게 생
각하는 여인이라면 서슴없이 진심을 말할 수 있으리라.
"정열이야.'
곽사연은 그 무엇의 정체를 잘 알았다.
한 점 목표를 정하고 굽힘 없이 나아가는 정열. 강이 나오면
건너고, 산이 나오면 뛰어넘고... 어떠한 난관이 닥치더라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 그것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반여량은 정열과 용기를 충분히 보여 주었다.
여산에서 탈출할 때도 그랬고, 길을 오는 도중에도 그랬다. 반
여량이라고 다른 사람들처럼 조급함이 없을까. 하지만 그런 내
색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여인은 누구나 그런 담대함을 읽었다.
곽사연은 더욱 자세히 읽었다.
반여량은 그녀가 아는 사람과 너무 흡사했다. 용모는 천양지차
이지만 하는 행동과 굽힐 줄 모르는 정열이 비슷했다. 저주하
는 아버지 곽모천과.
"아직 멀었나"
곽사연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호호호! 저 계집은 벙어리도 아닌데 벙어리 흉내를 내더니 이
제는 아예 신경질이네. 야, 대공녀면 다야. 어디서 큰소리야,
큰소리가!"
요와는 유독 곽사연과 곽소연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그저 낯선 길동무에 지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날수
록 적개심이 뚜렷해졌다.
"다 됐소."
반여량은 분합을 정리했다.
요와는 전혀 다른 여인으로 변신했다. 청순하게... 그러나 그
녀의 기질만은 감출 수 없었는지 활달해 보이는 표정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범도는 후덕한 인산을 가진 상인(商人)으로 분장했다.
옆구리에 찬 철검 대신 주판만 들었다면 영락없이 셈에 밝은
상인 모습이었다.
황백과 동목은 하인으로, 조중은 농민으로, 산귀는 유생, 학구
는 마부, 움직이기 불편한 석수는 돈 많은 토호(土豪)로 분장
했다.
이들이 한데 뭉쳐서 움직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
다. 워낙에 비적이 많이 출몰하는 금산이다 보니 여러 사람이
뭉쳐서 움직인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만약을 위해 흑서채 산적들이 뒤를 받쳤다.
곽가장도 흑서채만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장강수로십팔채
(長江水路十八寨)와 녹림삼십육채(綠林三十六寨)를 의식한 탓
이다. 흑서채는 녹림삽십육채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녹림이라고 감히 곽가장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약
곽가장이 녹림을 건드린다면... 신출귀몰하는 녹림무리들은 목
숨을 걸고 모든 교통을 차단하리라. 지루하고 귀찮은 싸움이었
다. 더군다나 녹림 무리들은 결속하는 힘이 강했다.
곽가장 무인들이 일행을 의심한다면? 그때는 흑서채가 나서서
일행들로부터 약탈을 자행한다는 계획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해주겠소. 여기서 오 리만 가면 관제묘(關帝廟)
가 나올 것이오. 사우맹도가 나와 있을 터..."
"호호호!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하도 들어서 귀가 닳겠어요,
호호호! 이제 보니 잔소리가 여간 아니군요."
요와가 깔깔거리며 일어섰다.
"알아 두세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그때는 당신을 가질 거
예요. 그리고 당신의 진면목도 반드시 볼 거예요."
"잘 가시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무인들과 마주쳐서는 안 된
다는 점을 명심하고..."
반여량은 곽사연에게 눈길을 돌렸다.
'내가 왜 밀옥에 갇혔는지 알아? 아버지를 암습했기 때문이야.
호호호! 아버지는 나를 밀옥에 가두더군. 그런데 네가 나를 빼
내 준거야. 일단 사의를 표시해야겠지? 그때, 난 생각했어. 감
히 밀옥을 건드리는 집단이 어딜까? 생각나는 곳이 없더군. 혼
자서 밀옥을 깨트릴 정도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지. 그래
서 아버지를 죽여 달라고 부탁한거야.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전에 네가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어.'
침묵으로 말을 던진 곽사연은 반여량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일
행을 따라 걸음을 떼어놓았다.
"저는 당신을 알아요. 추풍 반여량 맞죠?"
"아니오."
"맞아요. 제 눈은 속이지 못해요. 왠지 아세요? 당신을 사랑하
니까. 당신은 계속 제 눈을 피하더군요. 그게 반여량이라는 증
거예요. 당신은 저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 부담스러웠겠죠.
알아요. 당신에게 한한이란 여자가 있다는 걸. 난 기다릴 거에
요. 그럴 자신이 있어요. 평생이 걸리더라도..."
"난...반여량이 아니오."
"그래요. 아니라고 하죠. 휴우! 언니가 한 말 신경쓰지 말았으
면 좋겠어요. 그래서도 안 되고요. 아버님보다 당신을 염려해
서 하는 말이에요. 곽가장을 젖혀놓고라도 아버님과 결전을 벌
여서 이길 사람은 없어요."
"..."
"바로 따라오세요."
곽소연은 잔뜩 풀죽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에게는 모든 게 충격이었다. 곽가장 무인들에게 잡혀 밀옥
에 끌려온 것도, 혈단이 바로 곽가장의 다른 세력이라는 사실
도, 큰언니가 밀옥에 갇혀 있다는 것도, 언니가 아버지를 청부
했다는 것도...
철없는 아이가 아무 방패도 들지 않고 세파에 휩쓸린 격이었
다.
그녀는 한꺼번에 십 년 세월을 산 듯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성격도 침울해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그런 그녀가 사랑을 고백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였다.
반여량은 그녀에게 한마디 언질도 주지 않았다. 한한에 대한
사랑... 그것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었다.
"대단한 고수가 되어서 나타났군. 겨우 열 달인데... 무공은
누구에게 배웠나? 얼핏 보니 무녕 분타주의 투월채법 같기도
하고... 아니지, 그녀가 자네에게 무공을 전수할 까닭이 없
지."
"..."
반여량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떠나가는 일행을 바라보았다.
"광창조가를 멸문시킨 집단이 혈단이라고 했지? 후훗! 이제 아
내 얼굴을 어떻게 볼지 모르겠군. 장인에게 검을 들이대야 하
는 팔자라니, 후후후!"
"내가 이상한 것은 곽가장주의 태도입니다. 곽사연과 곽소연을
가둬놓은 것도 그렇지만, 비수당 비화당을 몰살시키면서 몇 사
람을 살려 놓은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립니다. 그것을 생각해 봐
야 합니다."
"역시 자네는 추풍이군."
반여량은 웃어 주었다.
조중에게까지 신분을 속일 필요는 없었다. 일행에게도 마찬가
지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감응이 느껴져 정체를 드러내
지 않았다.
"하하하! 이삼재가 간자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다른 사람은 전부 초췌한 몰골인데 그만은 초췌한 가운데도
여유가 있더군요. 밀옥을 빠져 나온 후 다른 사람들은 기쁨에
들떴는데 그는 오히려 쫓기는 듯했습니다."
"그렇군."
생각해 보니 너무 간단했다. 약간만 주의를 기울이면 누구나
파악할 수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과 못하
는 사람. 그것이 능력 차이였다.
"철천지한(徹天之恨)은 잠시 삭여 두십시오. 지금은 목숨을 부
지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사우맹에서 힘을 길러야 합니
다."
"하하하! 곽가장 비수당주가 사우맹에 몸을 의탁하는 처지로
전락하다니. 하하하! 이보게, 흑서채와 사우맹을 어떻게 알았
나?"
"저는 감여가이니까요."
"감여가?"
"감여가는 천지자연을 벗삼아 떠돕니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
죠. 이들도 감여가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후후! 건드려 봤자
나오는 게 있어야죠. 이번에 도움을 청했는데 뜻밖에도 쉽게
응해 주었습니다."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흑서채주인 불광노조(佛光老祖)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 그리고
진정을 다해 간곡히 요청했다. 도와 달라고. 사우맹과 연결시
켜 준 사람은 불광노조였다. 그는 사정을 듣고, 몸을 위탁하는
상대가 곽가장 비수당주라는 말에 놀라 다급히 전서를 띄웠다.
사우맹으로서는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다음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춰 놓은 후 반여량은 여산으로 향한 것이
다. 그러나 그가 설마 구원사를 불사르리라고는... 이제 상황
은 바뀌었다. 사우맹에서는 반여량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
았다. 흑서채도 마찬가지다. 도와주고는 있지만 만인의 공적으
로 낙인찍힌 사람을 언제까지 감싸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도인이 무섭지는 않았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숨죽이고 숨
어살 일이다. 그러나 굳이 사서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
도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지만 자네도 사우맹으로 갈 것 같으면
빨리 따라오게. 곽가장 무인들과 단신으로 부딪쳐서 이로울 건
아무것도 없어."
'후후! 저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조중은 보면 볼수록 신비한 반여량을 쳐다보고는 힘없이 말머
리를 돌렸다.
"동기감응 감여는 염력이야. 그렇지 않은가?"
산귀가 말했다.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만 감여를 모르면 무용지물입니다."
"...?"
산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밀옥에 갇혀서도 오직 동기감응만을 연구했다. 반여량이
보여준 행동과 방향, 산세 등을 종합해 보면서. 남들에게는 밀
옥 생활이 지겨웠을지 모르지만 산귀에게는 차분히 연구할 시
간을 주어서 오히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처지였다.
"원방파에 연락을 취할 생각입니까"
"허허! 나도 그리 미련하지는 않다네. 사우맹이라... 좋지. 사
우맹에 간 다음 접촉을 시도할 생각이네. 원방파가 사우맹을
밀어준다면 강서무림계는 크게 흔들릴 거야. 그런데 하필이면
왜 흑도를 택했나?"
"그들밖에 곽가장과 싸울 세력이 없으니까요."
"신창윤가는?"
"약합니다. 광창조가가 멸문당한 것이 좋은 예이죠. 광창조가
와 신창윤가는 세력이 비슷했습니다."
"으음...! 고민이야. 흑도를 밀어 줄 수도 없고..."
"도와 주시겠습니까?"
"자네가 나선다면 도와주지. 그런데 왜 갑자기 곽가장을 치려
고 하지? 자네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지 않았나?"
"동기감응은 비보감여입니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게 도움
을 주는 감여죠. 염력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불자(佛者)와 같은
마음으로 사람을 봐야 합니다. 곽가장주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
로 몰아넣었습니다. 무림은 잘 모르지만 그런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허허! 그럼 자네는 잘못 선택했어. 사우맹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인물들은 아냐."
"압니다. 적으로 적을 치는 거죠."
"허허허! 불당을 불사른 사람이 비보감여라... 허허허!"
"속죄할 생각입니다. 일이 끝난 후에."
반여량과 산귀는 흐뭇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무
인들 보다는 감여가끼리 어울리는 것이 속 편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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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즐독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감.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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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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