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친구 신두순 학형이 오늘 새벽 5시 우리곁을 떠나셨습니다. 가슴이 저려오도록 슬프네요. 반세기가 넘도록 우정을 돈독히 한 친구인데 최근에 투병을 하면서 나눈 대화가 귀에 생생합니다.
지난 10여년 친구와 오고간 편지(e-mail)를 모아 보내드립니다. 추억을 간직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0.06.14 신두순 친구가 천국에 가신 날에
유노상
2009.12.13 친구가 보내온 송년멧세지
From: lucas-shin@hanmail.net Subject: 송년 message ; Date: 09-12-13 15:42:34
送年
己丑이라 적힌 달력의 마지막장 중간을 바라보면서 한해를 뒤돌아본다.
지내놓고 보니 해를 바꾸면서 금년한해는 지난해의 악몽에서 벗어나 조금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겼음인지 마음의 평정을 찾고 명산대천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가족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지인들과 어울려 강원도의 영동, 영서 그리고 남북으로 설악에서 함백령까지 내려 지르는 백두대간의 준령을 따라 밀림 같이 우거진 숲과 계곡에서 인생을 반추하면서 허허실실한 빈 마음으로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단풍이 어우러진 심산유곡을 지나 초겨울의 ski slop을 내려 지르는 용평의 젊은이들의 혈기왕성한 겨울맞이 운동에 마음을 실어보면서 오늘에 와서 다소 정신 없이 지나온 어제를 뒤돌아보고 있다.
올해의 12월은 농가에서 풍년을 노래하듯 이곳 분당의 조그마한 bed town이 몇년전인가 성남Art Center가 들어서면서 서서히 문화중심의 도시로 변모하여 가고있어 이곳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눈과 귀를 즐겁게 하여주고있어 단조로운 생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는 역동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
금년의 하반기에는 창작 Musical '남한산성'을 비롯하여 조수미의 'Dream with Me' 더하여서 장사익의 소리판'꽃구경'으로 송년을 맞이하니 참으로 흥분된 문화의 풍요로움과 즐거움이 그 어느 것에 비교가 될 것인가 싶다.
국력이 쇠잔한 속에서 親明 事大하여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왕조가 새로이 발흥하는 오랑캐의 침략에 한양의 궁성을 내주고 남한산성에서 주전파와 친화파의 정략적 말씨름에 군왕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수모를 당하게 하였던 이 나라가 이제 겨우 어깨를 펴고 주변국과 나란히 겨눌 정도가 되니 또 다시 還鄕女들을 보듬었던 그 쓰라렸던 옛일을 잊고 오늘의 자만에 도취한 민족에게 다시 깨어나기를 기원하는 깊은 심연의 창작에서 시작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이 올려질 때마다 분당의 품격이 오르기만 하는 듯 한 가운데 내가, 내 가족이 그리고 지인들이 함께 호홉하면서 지낸다는 자부심에 오늘이 즐겁기만 한 추억들을 만들면서 자족하니 얼마나 즐거움이 나를 慰撫케 하는지 모르겠다.
어린시절 부모님의 훈육을 멀리하고 오직 Que Sera Sera로 젊음을 불태운 Popera가 청중을 장악할 즈음<조수미>, 우리가 태풍이 지나간 허허바다에 겨자씨 한 알 떠있듯이 아주 작은 모습으로<장사익 노래> 어리석은 아들은 어미를 업고 산 속으로 꽃 따러 나서니 그 어미 가는 길이 어디인지를 눈치채고 솔잎을 한옹큼씩 따서 뒤에 뿌리면서 그래도 불효한 아들의 돌아가는 길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모성을 눈물나게 마음이 저리면서 경청을 하다보니 우리의 어제가 이렇게도 무심하고 비정하게 지났음에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어제를 잘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쯤에서 Blue Danube Waltz의<조수미> 우아한 자태를 접고 하루의 일상으로 땀내가 물씬한 장돌뱅이<장사익>로 돌아가서 타박타박 걸어서 중천에 걸린 달을 보고 하얀 메밀꽃 밭을 지나쳐서 호롱불이 켜진 주막을 먼발치에서 발견하고 줄인 배를 채워줄 막걸리 한 대접과 따끈한 온돌을 머리에 그려본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삶이겠지. 이 맛을 모르고 사는 오늘의 젊은이들의 낭만은 무엇일까 궁금도하다.
지난 가을에는 판교의 농장에서 20년전에 결성한 고우들이 부부동반하여 다시 모여 B-B-Q를 하니 부모 손잡고 나섰던 아이들은 성장하여 대학생으로 군으로 사회로 이제 성인이 되어 사회의 성원이 되어 따라나설 아이들은 손주들이라고 하니 세월의 빠르고 무상함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또 다른 세월은 12.12 30주년을 멍청하게 보내면서 그 날의 악몽 같았던 긴 밤이 어제인양 생각되는 속에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leadership에 대한 역사의 증언을 녹취<국가기록원>하면서 역사는 살아서 움직이는 사료라는 것을 다시 실감한 한해였다.
다시한번 적어보거니와 역사란 연속의 불연속이요, 불연속의 연속이라고 하시면서 대한민국의 융성을 위하고 국가안보와 민생안정을 염려하는 우국충정으로 정권을 후임에게 승계 함에 추호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신 故 崔圭夏 대통령의 지고한 인격에 존경의 念이 더하여만 간 한해였다.
끝으로 남길 말씀이 있다면- 하는 질문에 - "이 나라에는 원로가 없다고 하는데 원로는 있는 것이 아니라 후학들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인간인 이상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장점을 살려 계승 발전함에 후학들이 이를 배우고 지키며 다음세대에 전할 것이다.
오늘 미국이 세계의 경찰권을 가지는 강대국이 된 것은 수백의 민족들이 대륙에서 그들 민족의 장점을 계발 발전시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우리도 용서하고 관용하면서 장점을 살려 원로를 만들어 존경하는 민족으로 거듭나기를 希願한다."
또 다시 봄이 오면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면서'<장사익>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 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로' 오가면서 오래 보지 못하였던 옛 고우들을 마음속에 그리면서 봄날을 보낼 내일이 있기에 오늘이 행복하다.
모두에게 庚寅 신년의 강왕을 축원드리면서 한해를 마감하려 합니다.
새해에도 좋은 모습으로 뵈옵기를 기대하면서 - 용곡 신두순 근서.
유노상이의 답신 제 목 : Re: 송년 message ;/노상 날 짜 : 2009/12/13 (18:46:55) 받는이 : lucas-shin@hanmail.net
두순이!
구구절절 내 마음을 울리는 글을 보내셨네.
건강한 몸으로 좋은 글을 쓰고 있는 용곡을 생각하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새해는 좀 자주 만나자고. 32회분당모임을 자주 주선 해 볼께.
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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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1 미국 휴스톤에 있는 고교동기
최성호 학형에게 보낸 편지
From: lucas-shin@hanmail.net Subject: Greetings ; Date: 09-12-11 21:18:02
親愛하는 벗 崔성호 尊兄께 ; 冠省하옵고,
잘계시는가! 나도 무심하였지 옆에있는 친구들만이 가까운 벗인줄 알고 까마득하게 잊었던 古友가 이렇게 반가운 소식을 줄줄이야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기가 가히 끝이없네 그려.
아니 30년이 넘게 천직으로 알고 하시던 사업을 접으신다고 하시는 것은 인생70을 넘어 자연은퇴인가 아니면 다른사정이 있는 것인가. 우리 나이가 연금을 탈 춘추도 오래전에 지났으니 세상을 유유자적하면서 그간 못다하였던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존형자신만의 일들을 남은 세월을 마음껏 활용하여 즐겁게 보내시고 가깝게는 처가와 지인들이 김치냄새 풍기면서 아옹다옹 살아가는 고향산천이 얼마나 변하였는지 어린시절의 향수를 따라 진달래, 풀향기, 버들피리 꺽어불던 어린시절의 고향의 냄새도 한번 긴 호홉으로 마셔보지 않으시겠는가.
이 촌놈, 웅장한 초원이 펼쳐진 미국의 남부를 언제부터인가 가보고 싶었는데 그리 못하고 이제 노쇠하여 기력이 다하니 꿈에서나 아니면 그림으로 앉아서 감상하는 서글픈 처지가 되었답니다.
가깝게는 막내 처남이 St. Antonio에 거주하여 일가를 이루고, 질녀들이 또한 U of Texas근교에서 지내고있어 Standing Invitation은 수년전에 받은바 있으나 불용의 휴지일 뿐이 라오.
두분 존형을 비롯하여 여러 동창들과 지인들이 걱정하여 주는 나의 병명은 "Waldenstrom's macroglobulinemia<마크로그로뷰린혈증>이란 아주 희귀한 혈액암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미국인 백인 성인남자 10만명에 하나 정도의 발병률이라니 지난날 이를 규명하기전에는<1943년전> 그저 노인병으로 치부되어 왔던 모양이더군요.
상대적으로 발병환자가 희소하다보니 치료약의 개발이 후순위로 밀려서 아직도 완치할 수 있는 치료제는 없고 항체를 억제하고 항체의 성장을 저지하는 정도의 치료가 최선이라 장기적인 투병과 인내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여서 3년반전에 이를 확인한 연후 미국의 지인들을 통하여 전문의들을 소개받아 여러가지 치료에 대한 질의를 하여본 결과 우선 나이가 너무많아 골수이식 같은 방법도 어렵고, 환자에 따라 처방되는 항암제는 미국이나 서울에서나 같은 종류의 약을 환자의 체질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어도 별 차이가 없어 특별히 미국까지 가서 치료를 받을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유노상 형의 나아져 보인다는 나에대한 관상은 '08년 7월 강력한 항암주사후 백혈구가 zero까지 파괴되어 항암이 문제가 아니라 항균을 하느라 1개월여간 지옥천당을 오가는 고생끝에 재활되어 오늘에 이르르니 더 이상 악화되지않고 현상유지를 하고 겨우 고재용 회장댁 식당 정도 나가서 가끔 지인들과 점심 정도 하고 다닐 수 있음이니 참으로 한심하고 초라한 중환자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언듯 보기엔 steroid덕분에 모습이 moon face가 되어 잘생긴 미남자로 보이는 덕이겠지요.
요즈음 Washington,DC의 이덕선 형이 이곳 캐도릭 대학에 어르신 이름으로 대강당을 헌정하여 몇번의 event사 잇어서 동문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여 주었으며, New York의 정태운 형이 사업을 접고 요즈음 이곳에 와서 지난날 못다 나눈 옛 이야기 하느라 하루해가 짧게 지나간다고 합니다. 지난 여름에는 정명 형도 흰머리가 된 두 노친네가 손잡고 고향을 찾아 반가운 해우가 있었지요.
인간도 나이가 들어가니 연어떼와 마찬가지로 母川을 찾게 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가운 존형의 글에 답답한 하소연만 적어 보내어 송구하나 요즈음 내가 지내고있는 일상이 이렇습니다. 걱정하여 주신 존형의 뜻에 어그러지지않게 신년에는 더욱 분발하여 투병에 전념을 할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끝으로 모쪼록 가족의 성원 모두 강건하시고 새로운 경인 신년에도 다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서울에서 龍谷 申斗淳 謹書
위 편지 사본이 보내와 유노상이 신두순 친구에게 본낸 편지
제 목 : 새해 더욱 화이팅하세./노상 날 짜 : 2009/12/11 (22:39:52) 받는이 : lucas-shin@hanmail.net unifaith@hotmail.com
두순이!
편지가 한편의 수필이구먼.
잘도 썼소이다.
지금까지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으니 너무 장하오.
고맙소. 건강하여지니 고맙소.
나는 친구밖에 없잔아! 친구가 제일 소중해.
새해 더욱 화이팅하세.
나는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네.
지금까지 잘 지켜주셨는데 내년에는 더 잘 지켜주시리라 믿네.
믿고말고.
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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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0 신두순 친구가 보내온 세모 멧세지를 친구들에게 보낸 소개 편지
제 목 : 친구의 편지를 함께 나눔이 유익 할 듯 하여 보내드립니다/유노상 날 짜 : 2008/12/21 (22:57:08)
아래 글은 투병중인 저의 어릴적 부터의 친한 친구가 세모歲暮에 보내온 글입니다. 친구의 건강을 주님께서 강하게 지켜주시길 기도하면서 친구의 편지 내용을 함께 나눔이 유익 할 듯 하여 보내드립니다.
유노상 배
보내는 이註--본문의 한자어 주입니다.한자에 익숙치 않은 젊은이를 위하여 첨가합니다.
亢龍有悔 [ 항룡유회 ] 하늘에 오른 용은 뉘우침이 있다는 뜻으로,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이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듯이, 부귀(富貴)가 극에 이르면 몰락(沒落)할 위험(危險)이 있음을 뜻하는 말
2008.12.20 신두순 친구가 보내온 세모 멧세지
또 다시 한해를 마감하면서. - lucas.
미국 발 서브푸라임이 남긴 흔적은 광풍이 불고 지나간 폐허엔 남은 것이 없다. 온 세상 사람들을 공황으로 몰아 시장경제와 자유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처럼 처참하게 지구촌의 인류를 유린하였다.
가진 자는 더 큰 것을 헐벗고 없는 자는 기아와 아사의 현장으로 내몰리면서 잘난 인간들이 자연에 순응치 않고 저 잘난 멋에 겨워 한없는 욕망을 쫓아 끝없는 고공행진에 亢龍有悔라 이 심오한 뜻을 모르고 자만하였는가.
인간이 욕심껏 손아귀에 쥐고 간들 무엇을 얼마나 자기화 할 수 있단 말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자기 자신의 건강하나만이 온전한 자기 것일 수 있으리라.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지한 인간들은 건강을 버리면서까지 조그마한 두 주먹에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밤낮 없는 경쟁에서 결국은 자신을 버리는 우를 범하는 날
아 ~ 지난 세월 나는 무엇을 위해 나를 버리는 바보가 되었는지를 자성할 즈음 조물주는 또 다른 기회를 주려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다시 깨어나자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일에 동참하자
때로는 살아가면서 조상의 음덕을 자랑한다. 많은 사랑을 베풀고 가신 조상이 계셨기에 융성한 가족이 국가가 존재한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앞으로 따라오는 우리의 뒤를 이어나갈 후손들을 위해 더 많은 음덕을 쌓을 용기는 없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알 것 같다
우리의 건강을 챙기고 사랑을 베푸는
현자賢者가 되는 새해를 맞이할 것을 다짐하자
건강을 잃은 자의 절규를 귀담아 경청하면서 기축년 새해에 모두의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축원한다.
저무는 戊子年의 언덕에서 己丑의 새 날을 바라보면서. - 신두순.
--------------------------------------------------------------- 2008.08.19 에 보내온 신두순 친구의 투병기 존경하옵는 선후배 동지 여러분들께 ;
이제 그 무더웠던 더위도 절후가 변하여 감에 따라 한풀 꺽여 이제 말복도 지난 요즈음 처서를 바라보면서가을의 산뜻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우리들의 옷깃 속으로 감미롭게 스치고 지나가고잇군요.
그 동안 저의 투병에 글과 말씀으로 많은 성원을 주신데 대하여 깊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지난 7월초 최악의 상태에서 입원후 현대 의학의 힘을 빌어 회복의 기세를 잡아 퇴원 후 내자를 비롯한 가족친지들의 도움으로 이제 조금씩이나마 기력을 회복 중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더욱더 저 자신 여러 분들의 뜻에 보답하기 위하여서라도 섭생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고 정진하여 건강하였던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건강은 건강할적에 조심하라고 하였던 충고를 잊지 마시고 항상 조심하여 노년에 나 같은 불행한 일이 주변에서 다시는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촌절로서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용곡 신두순(lucas)
유노상의 답신
제 목 : 치료의 고통을 인내하는 인형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날 짜 : 2008/08/20 (14:49:37)
사랑하는 두순이!
회복의 기세를 잡아 기력을 회복하시고 계시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네. 주님께서 치유의 손으로 고쳐주시고 사랑의 손으로 인형의 손을 붇들고 걷게하신다고 믿고 있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치료의 고통을 인내하는 인형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더욱 잘 견딜 줄로 믿습니다.
간병을 하시는 미세스 신과 가족들 아울러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노상
---------------------------------------------------------------------------- 2008.08.08 신두순 친구의 투병기 內助의 힘 ;
母川으로 回歸 할 준비를 하면서 지난 한 달이 무척이나 견디기 어려웠던 세월이었나 보다. 물론 그간 날씨가 고온 다습하여 노인네들에게는 힘든 계절이기도 하지만, 특히 나 같은 중환자에게는 더욱 어렵다.
그 가운데에서도 2년여 투병을 하여 오면서 체중이 16kg.나 빠지고 심신이 허약한 상태에서 그간 약물로 된 항암치료를 하여오던 방법이 그 암세포도 살아있는 생체라 같은 내용의 치료약에 내성이 생겨서 세월이 가면 효과를 보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치료약을 좀더 강력한 주사제로 바꾸어 보자는 주치 의사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여 지난 7월 4일 서울대학병원 연건동 본원에서 장장 6시간에 걸쳐 항암제 주사를 하고 난 이후 처음 이틀 간은 그리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다만 평소보다 첫날만 몸이 약간 무거우며 좀 힘이 든 것 같은 기분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틀이 지나고 나니 전신이 무겁고 열이 나면서 식도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여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도 큰 불편을 느낄 정도로 통증이 오기 시작하면서 저녁 시간이 되니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러 도저히 그대로는 지내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어왔다.
처음 주사를 맡겠다고 동의를 한 이후에 항암주사만 전담한 대학병원의 낮 병동 주사실 담당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주사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빠질 수 있고, 열이 나는 경우(38'c)병원응급을 찾을 것이며 구토 등 신체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은 들었으나 열은 37'4"~5"이상은 넘어서지 않은 상태에서 괴로우니 병원을 찾을 수도 없고 하여(응급실이란 것이 도착 후 각종 검사와 불편한 대기로 입원이 되지 않고 귀가하는 경우를 가정한다면 생 고생을 하는 곳임) 좀 참아보기로 한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 결과가 되었다.
할 수 없어, 병원을 가지 않는 다면 아이들이라도 불러 평소 하고싶었던 이야기라도 남기려 장질 가족과 동현 내외를 늦은 시간이지만 다녀갈 것을 연락하여 22:00경 도착 평소 마음에 두었던 이야기를 전하였다.
다음날 아침부터 행여 하는 마음에서 오전과 오후를 보내다가가 정말 도저히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수정이가 운전을 하여 우선 급한 대로 분당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18:40) 당직의사에 그간의 과정을 설명하였다. 의자에 앉아 도착 대기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고흥길 의원과 최창근 박사에 연락이 되어 이동 침대도 배정이 되고 기본 검사가 조금은 빠르게 진행되었으나 기왕에 입원을 할 것이라면 주치의가 있는 본원 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하여야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당직의사의 권유였다.
이곳에서 우선 적으로 혈액을 채취 검사한 결과로는 백혈구가 Zero인 상태라 가장 급한 것이 격리 수용이라고 하면서 별실로 안내를 하면서 보호자의 결정을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흥길 의원이 도착하여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본원에도 입원실은 마땅하지 않으나 최 박사가 주선을 하면서 일단 본원으로 다시 후송하기로 결정을 하여 응급차를 이용 한강을 넘었다.
다시 이곳에서도 분당병원에서 이미 마친 검사를 다시 하고 병실이 12층 특실밖에 여유가 없어 이를 지정하고 입원수속을 하여 병실에 자리를 정하니 7월 8일(토)03:00였다.
이 밤에 고 의원의 청으로 본원 혈액종양내과 박선양 과장 이하 윤성수 교수가 수고를 하여 원만하게 수습된 것은 그나마 큰 다행이었다.
특실에 격리 수용되어 10일간에 걸쳐서 항균, 항생 주사와 영양제를 공급받아 겨우 내 발로 걸어서 퇴원 집에 도착은 하였으나 너무나 그간의 고초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몸인 데다가 하체운동을 하지 못한 관계로 몸이 흔들려 자리 보전하고 누워서 요양만을 하게 되니 날도 더운데다가 기력회복이 전 같지 않아 힘이 든다.
항암주사의 부작용은 급격한 백혈구의 저하로 면역력이 떨어지니 혀에서부터 시작하여 식도, 위와 장까지 곰팡이 균에 감염되어 실기를 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의학은 이런 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좋은 명약들이 발명되어 그나마 이를 수습하고 원상은 아니지만 치료의 부작용으로 인한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인 것이다.
입원 기간 중 격리된 상태임에도 기 약속된 날자가 지나 연락을 하지 못함에 궁금한 나머지 소식을 알고자 연락들이 오고가는 사이에 입원 사실을 알고 이곳 강북 병원까지 많은 친족, 친지들이 방문 위로격려를 하여 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 힘들어하면서도 방문한 고흥길 의원을<방문중에 박선양 과장, 윤성수 교수 인사>비롯하여 최창근 박사, 이재원 교수, 임창순 고문, 최윤홍 고문 내외, 서대원 대사(박 과장 동기) 내외, 최경침 군<최 전 대통령 손자>, 신동간 장질 내외, 홍진원 질서, 강완구(박 교수와는 국교. 고교 동기며 친구라고 9층으로 방문인사). 흥구 생질 내외 그리고 손금해 둘째 이모, 최광수 장관, 권영민 대사, 이기창 변호사 박철원 회장 등이 나를 찾아 위로하여주었다.
7월 21일 격리가 해제되고 자가치료로서도 큰 문제가 없겠다는 주치의사의 판단에 따라 10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마음이 안정되고 항암주사의 부작용에서 1차적으로 자유로워졌지만 섭생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어 식탁에서의 전쟁이 연일 때마다 집사람과 연출하게 되니 충분한 영양이 섭취되지 않는 상태에서 운동하고 배고프면 식사하고 휴식하면서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의 괘도를 역행하게되니 이 또한 건강인과 병약자의 신경전이 오늘의 고민이다.
이웃하고있는 친지들이 내방 위로를 하면서 건네주는 주옥같은 격려 속에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일주일이 지난 다음 7월 28일 (월) 본원병원 외래에서 윤성수 주치의를 상견하였다.
** 윤성수 교수 소견
결과적으로 보면 혈액내 모든 수치가 일반적으로 자가적인 조혈기능으로 상향조정되고있어 다행임. 수혈이나 다른 방법이 필요 없다고 판단됨.
지난번 항암주사 후 긴급 입원 조치하여 적절한 치료를 받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으며 좀더 지체되었더라면 어려운 지경에 이를 수도 있을 번하였음.
M/g가 그리 빨리 성장하는 세포가 아닌 만큼 섭생을 잘하여 체력이 보강이 된 다음에 향후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음. 일단 이를 위해 1개월 정도 휴식을 취하면서 체력을 보강한 연후에 차후 계획을 정하는 것이 좋겠음.
주치의사의 위와 같은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일체 항암 제품약은 끊고 위장 관계 약으로 위와 장을 보호하면서 섭생을 강제로라도 때를 거르지 않고 섭취하니 젊은 시절의 회복 속도와는 다르지만 아주 조금씩 체내에 기력이 생겨 며칠 전부터는 Apt.단지내 회랑에 나가 저녁바람을 마시면서 300여m 걸음마 연습이라도 하면서 지내니 이는 내자의 한없는 인내심과 부부애 그리고 봉사의 일념으로 보양섭생에 나를 감동시킨 아름다운 천사의 손길을 통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날 공무에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을 등한시하고 밖으로만 돌았던 사내를 가족들이 큰마음으로 받아들여 투병에 허약하여진 힘없는 가장을 포용하여 돌보는 넓고 깊은 사랑 속에 한 가닥 생에 희망을 걸고 오늘의 낙조를 바라보면서 또 다른 내일을 기대하여본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내자, 자부 내외 손자손녀 그리고 재연과 수정) 그리고 장질 가족 등 한없는 투병에 격려를 보내주는 이웃 동지들 참으로 고맙다. 내 신양이 깊어 자리에 눕고 보니 이웃이 정겹고 이렇게 큰 울타리인줄을 알게 하니 철없이 헤매이던 지난 시절의 우매하였음을 슬퍼한다. 훌훌 털고 일어나 전 같지는 않겠지만 외출이 가능하면 이들을 찾아 나의 적은 마음이지만 함께 하면서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고마우이 모두여!. 2008/08/08
유노상의 답신
제 목 : 주님께서 인형을 지켜주시고 계신 줄 믿네. /노상 날 짜 : 2008/08/13 (20:47:24) 받는이 : lucas-shin@hanmail.net
두순이!
그동안 병문안 한번 못한 내가 부끄럽고 미안하네.
지난 초여름인가 우리 친구들이 함께 만났을때 그래도 화색이 좋아보이던 모습을 보고 내심 안심하였는데 그동안 너무 고생을 하였구먼. 잘 견디었네.
나는 주님께서 인형을 지켜주시고 계신 줄 믿네.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주님의 치유의 손으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두순이의 병을 고쳐 주실 줄 믿고 기도하네.
운동하는 다리에 힘도 날로 더 생기고 기운도 날로 좋아져 우리 친구들의 모임에서 반가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하네.
두순이! 좀더 참고 힘내. 힘내라고...
벗 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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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정초 고희를 맞은 죽마고우 신두순 학형이
쓴 글
제 목 : 정초에 고희를 맞은 저의 죽마고우 신두순 학형이 쓴 글 과 답 날 짜 : 2008/06/03 (22:54:37)
아래 글은 지난 정초에 고희를 맞은 저의 죽마고우 신두순 학형이 쓴 글과 그의 친구 후배 그리고 자녀들이 쓴 편지입니다.
이분이 저에게 보내온 것을 읽으시기 편하시게 좀 다시 정리 해보았습니다.
유노상
지난 1월 정초에 문득 생각이 나서 적어본 기록입니다. - lucas.
1월 2일 (수) 맑음. <-8'0"c> > 09:30 10일차 진료.
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그러고 보니 내 나이가 해를 바꾸면서 '人生 七十 古來 稀'라고 하는 칠순에 접어들었다. 참으로 먼길을 걸어온 셈이다. 그러나 지난 70년이 그렇게 먼길만도 아닌 것이 10년 주기로 7번을 자르면 일곱 토막이 70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마 기억에는 없지만 첫돌을 지낼 때까지는 생모에게서 젖을 먹고 작은댁에 가서 어머니 등에 업혀 하루 종일 배가 고파 칭얼댈 때까지 동리를 돌았을 것이고 이런 철없는 유년기를 보내면서 한문 서당도 다니고 광복의 환희 속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낮선 친구들과 손잡고 우리의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외우면서 봄날의 긴긴해를 운동장에서 보내고 돌아서 오는 길이 허기가 져서 지척이 천리인양 멀기만 하여 마을 친구와 바람이 비켜 가는 언덕의 양지바른 곳에서 잠을 청하다가 한기를 느껴 집에 도착하면 어머님이 타주시던 설탕물 한 대접에 눈이 환해지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10대의 초반에 들어 예기치 않은 동족상잔의 6.25 전화 속에서 생부를 잃고 피난길에 갈등을 느끼면서 낳은 정과 기른 정이 어떤 것인지 아픔이 새겨진 또 다른 이산 속에서 포성은 멈추고 서울 유학을 접고 시골 중학을 3년 거쳐서 고등학교에 그래도 조금은 정리된 서울로 유학의 가방을 쌓다.
신천지에서 냉면도 먹고 태권도도 배우고 새로운 8도의 사투리가 뒤섞인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이 지금도 나의 영원한 벗이 될 줄이야. 그들은 충청도 서산에서 서천에서 경상도 안동에서 강원도 강릉에서 경기도 장호원에서 그들 나름의 장점들을 가지고 죽마고우가 되어갔다.
이런 10대~20대를 보내면서 실제로는 4남매의 끝 누님과 11년차의 막내이기도 하지만 본가를 벗어난 작은댁에서의 외아들장남 행세를 하여 형제의 깊은 정을 그 시절에는 잘 알지를 못하는 조그마한 성장기의 외로움을 감내하기 어려운 슬픈 사연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친구를 보면 어쩌지를 못하고 조그마한 친목단체들을 만들어 못다 나눈 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파란만장이다. 대학 3년차에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5.16군사혁명이 우리민족에게 새나라를 건설하려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젊은 장교들에 의하여 일어섰다.
나는 '60년 자유당 정부의 3.15 정부통령 선거를 한국선거사상 가장 추악한 부정선거로 자유당이 승리함에 이를 규탄하는 전국규모의 학생시위에 대학교 단위의 집단 시위에 참석하고 4.19 의거라는 학생혁명을 이끌어 정권이 붕괴되고 민주당정부에서 새 나라 건설을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참정권이 강하게 작용하여 각 학교마다 단체를 만들어 나름대로의 주의 주장을 펴는 못난 송아지처럼 엉덩이에서 뿔이 난 시절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군사 혁명정부에서 못된 송아지들을 방치하겠는가. 응징을 하여 바른 사회 질서를 잡아야 혁명 공약을 지킬 것이 아니겠는가. 3개월의 도피생활 속에 질서는 잡히고 체포된 동료들은 유기징역을 선고받고 민주 투사가 되었고 나는 조용하게 패전지장으로 가을 학기에 복귀하여 순한 양처럼 학사 일정에 전념하였다.
다음해 학사고시 1기로 수료식도 하고 졸업식도 하면서 조국의 부름이 있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여 병역의 의무를 다하였다. 처음에는 최전방 GP가 있는 연대에서 시작하여 1군사령부를 거쳐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군의 병영생활을 하는 동안 인생의 새로운 많은 경험을 하였다.
이 무렵 복무를 필한 연후 2년간의 증권회사에서의 사회 경험을 쌓은 뒤에 젊은 날을 허송하는 것 같은 자괴감에 유학의 문을 두드렸고 촌놈이 아는 외국이란 국가의 수도가 제일 큰 줄로 알고 미국의 도시학교보다 Canada의 수도 Ottawa에 있는 학교를 찾았더니 인구 45만의 행정도시에 Ottawa강을 사이에 두고 French지역과 영국계 지역으로 나뉘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학생의 신분으로 결혼도 하고 득남도 하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행복한 30대의 초반생활을 가족이란 테두리 속에서 지켜가고 있었다. 1970년 겨울 나에게 걸려온 한 통의 장거리 전화,"변화 속에 기회는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많은 변화가 예상되니 귀국을 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매형의 권고였다.
긴 이국의 겨울밤을 지새며 며칠을 심사숙고한 끝에 귀국하는 결심을 하고 가족은 '71년 2월 서울에 안착하였다. 그 해의 대통령 선거는 한기를 느끼는 아슬아슬한 접전으로 박 대통령의 장충단 공원에서의 '이것이 나의 마지막 정치연설이다.'라고 하는 선언으로 승기를 잡아 DJ로부터 신승을 하는 어려운 선거를 현장에서 실무하면서 이어진 총선은 여촌야도란 민심의 이반 속에 서울에서 공화당이 1석을 얻는 참패의 선거를 맛보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에게는 행운이 따랐는지 '72년 1월 중앙청의 고급공무원이 되어 국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처음 원하던 보직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신명을 바쳐 산과 들을 헤매면서 국가건설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 큰 영광이었다. 이 시절에 우리의 사명은 민족중흥이었고 박 대통령의 영도 하에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탈바꿈하여 가는 농촌의 도시 이주가 급속히 진행되는 시기로 구로공단, 울산공단, 창원 중화학 기지, 여천공단, 구미 공단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 에 박 대통령의 배려는 농업이란 모든 산업의 기초인데 이를 저버릴 수가 없는 것이라면서 야산 개발을 하여 도시 영세민의 농촌 이주를 돕는 일도 한편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그 현장에 우리 공직자들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게 그들을 격려하면서 국가의 융성만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유신의 회오리 속에 한국의 정치는 동맥경화증에 걸리고 야당의 '민주화' 외마디에 국민들이 놀아나면서 한국의 비극인 '79년 10.26사건으로 국운이 막 뻗어나려고 중흥의 함성이 터지려는 우리 앞에 다가서니 이것도 복이련가 싶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주인이 바뀌고 한국실정에 걸 맡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성문화하여 진정한 민주국가 건설을 다짐하고자 청와대에 올라간 최규하 정부에 예기치 못하였던 12.12란 신군부의 하극상이 또 다른 12년의 군사독재정권을 창출하고 말았다.
그 현장에서 아무런 반전의 조치를 취할 수 없었던 나의 적은 모습이 초라하기 만한 때도 있었으며, '79~'80년의 격동의 세월 속에서 못다 피운 청운의 꿈을 접고 무심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목청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러보아도 성이 풀리지 않던 그 한 많은 40대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50대 공기업에서 10년을 허송하면서 그래도 나는 지난 수년의 격무가 보상된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관조하려하였으나 잘못된 지도자의 선택으로 전임 대통령을 응징하는 보복정치에 휘둘려서 국정 통치행위의 검찰 및 사법부 진술이란 기상천외의 발상에 휩싸여서 2년반의 세월을 밤잠 설치고 소모적인 논쟁에서 인내를 하면서 잘못된 판단을 바르게 잡아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 또한 한국적인 비극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주역이 바뀌면서 60대를 맞이하여 연금을 수령하고 유유자적하면서 자부도 보고 손자와 손녀도 나의 품에 주말이면 찾아와 앉기면서 재롱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희를 맞이한다는 것은 인생은 그리 길고 어두운 그림자만 덮여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자부하고 싶다. 그동안 이 철 안 들고 건강치도 못하면서 허업의 세월을 보낸 노인네를 40년 가까운 세월 반려하면서 묵묵하게 뒷바라지 하여준 내자에게 깊은 감사와 사랑을 늦었지만 적어본다. 하기사 오늘 같은 날 물적인 증표가 있으면 더욱 빛나겠지만 우선 글로서 위로와 깊고 큰마음의 정을 전하는 바이다
나의 3남매도 이제는 다 성장하여 나의 손이 더 이상 미칠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큰 아이는 저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며 딸아이들도 스스로가 책임질 수 있는 성인으로 성장하여 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못하였어도 속썩이는 일없이 사회의 성원으로 맡은바 책임을 다하고있으니 이것도 하나의 복이라 생각한다.
그 외에 나의 주변의 장질 가족을 필두로 한 친족들과 친지 모두에게 오늘 같은 고희를 기념할 수 있도록 성원하여준 후의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 나는 웅비하려던 날개도 접고 꿈도 접어 손가방 깊숙이 넣고 하늘이 주신 천명을 건강을 찾아 인생을 관조하려한다. 저무는 날의 낙조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붉은 노을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기원한다.
戊子年 古稀를 맞이하는 元旦에 - lucas. > Letter from :
아래 글은 신두순 학형의 글에 대한 촌평의 편지
[RE: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후 12시 23분 14초 +0900
용곡 인형 새해와 함께 고희를 맞으신 다니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파란만장의 칠십 고개를 탈 없이 넘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옛말이지만 인생 칠십을 넘는다는 것은 드믄 일이라니 말입니다. 새해에는 병원과는 인연 끊으시고 그저 건강하시기만 빕니다. 사모님과 따뜻한 남쪽나라 훈풍이나 쐬고 오시지요. - 가당- >
Letter from : [(Re)새해인사]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전 10시 36분 46초 +0900
두순 형! 무자년은 우리 다같이 맞는 고희의 해. 형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며 써 보내준 긴 글 잘 읽었소. 두순 형의 글을 읽으며, 문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 그리고 그 역사와 더불어 삶을 꾸려온 우리 세대의 몸부림, 그런 지난날을 떠올려보오. 늘 느끼는 일이지만, 험하고도 탁한 현실에 맞서, 맞는 것은 맞다, 틀린 것은 틀린다, 그렇게 스스로의 가치기준을 지키며 살아온 형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싶소. 지난 반세기, 충청도 예산이 됐던, 경상도 안동이 됐던, 서로의 마음을 트고 형과 나눠온 우정이 자랑스럽소. 이른 살, 이제는 살아온 세월을 정리하고, 희노애락의 감정을 삯이며, 담담하게 종착역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때가 아니겠소. 새해 초 한번 만납시다. 연락을 드리겠소. 항상 건강에 유념하시오. 2008년 1월 3일 - 권동섭 배상. >
Letter from :<[RE]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전 06시 23분 34초 +0900
용곡의 나이가 칠십이 되셨구려. 그러고 보니 용곡이 나 보다 한 살 더 자셨군요. 나도 내년 이맘때면 오늘의 용곡과 같은 심정으로 결코 짧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긴 인생을 되돌아보게될 것 같은데 과연 용곡 만큼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아 왔다고 회고가 가능할런지 모르겠군요. 용곡은 참으로 좋은 인생을 살아 오셨오. 어린 시절에는 가정적으로 순탄치 만은 않은 인생의 출발이었지만 20대 이후 용곡의 삶은 매우 훌륭하셨다는 생각이 드오. 한 시대의 역사가 바뀌는 중요한 순간에 그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에 기록이 남을 만한 큰 역할을 해 낸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의미가 크고 보람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드오. 용곡의 말대로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건강을 잘 지켜내면서 천수를 누리게 되기를 바라면서 금년 한 해를 새롭게 출발합시다. - 東齋 >
Letter from :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전 06시 33분 54초 +0900
존경하옵는 감사님께, 고희를 맞이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젊게 행동하시고 옳은 말씀을 해주셔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셨으며 삶의 청량제가 되었습니다. 무자년 새해에도 더욱 건안하시고 좋은 말씀 해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피지에서 전남진 드림.>
Letter from : [Re: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2일 수요일, 오후 22시 17분 48초 +0900
신 감사님, 같은 고희를 맞는 저도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이러한 글을 쓰신 것에 큰 박수를 칩니다. 저도 한번 이런 것을 써보려고 생각만 하고 아직 못하였는데 이 글에 용기를 내어 한번 써보려고 합니다. 새해 건강하고 즐거운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김호경 >
Letter from :[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2일 수요일, 오후 18시 59분 01초 +0900
두순이! 성경에 사람의 수명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였소. 70이 되도록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지요. 오늘 가슴 뭉클한 글을 쓰셨구려. 형의 인생 속에 서산 촌놈 유노상이도 나오고 있구먼. 우리 태권도도 함께 한 것 기억나나? 좋은 글 보내주신 형이 존경스럽고 고맙소이다. 며칠 후에 만나야지? 건강하시게. - 노상. >
Letter from :[고희축하] 2008년 1월 04일 금요일, 오전 01시 28분 51초 +0900
신 감사 님께, 벌써 고희가 되시다니요. 제게는 아직도 20년전 삼청동 사무실에서 처음 뵈었던 동안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아직도 감사 님이 고희가 되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동안 격동의 세월을 살아오시느라고 많은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러한 수고가 있으셨기에 저희들이 오늘처럼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더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시고 저희 같은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도 해주시면서 여생을 보내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자손들도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잘 장성을 하신 데 대해 경하를 드리오며 금년 한해 더욱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있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비엔나에서 김 성 환 배상. >
Letter from : [Re: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후 23시 44분 50초 +0900
축복 받은 고희라 감히 생각합니다........제 자신 고희 맞아 감사 님을 닮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무자년 새해에도 더욱 강왕하시어 우리의 밝은 등대 되어 주소서. 토론토에서 김성철 올림. >
Letter from :[Re. 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3일 목요일, 오후 21시 02분 07초 +0900
또 다른 한해를 맞으면서 한해가 오는 것도, 한해가 가는 것도 실감이 안 나는 것은 세월의 속도가 이제는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젊은 제가 이럴진대 아버님의 70평생은 돌이켜보면 한순간 같고 꿈만 같으시겠지요. 저는 미래의 청사진을 갖기보다는 하루하루 충실한 것만으로 족해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계획을 가져도 인생이라는 게 더 큰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많다는 걸 살면서 새록새록 느끼기 때문이라면 변명일까요. 아버님이 예전에 보내주신 메일 중에 신선하고 강한 충격을 줬던 얘기가 있습니다. 60평생 직장에서 헌신적으로 열정적으로 일하다 퇴직한사람이 퇴직하면서 이제는 남은 여생이 별로 없다 생각하여 세월을 헛되이 보냈는데 지금은 90이라고. 그때 90까지도 살 줄 알았다면 다르게 살았을 것이라고. 직장도 그렇고 때로는 뭔가를 하기에 적지 않은 나이인 것 같아 주저하게되기도 했지만, 위의 글을 새기면 정신이 번쩍 들고 인생이 끝나기 전에는 하루하루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님도 편찮으시긴 하지만, 지금의 아버님의 모습이 저희에게 너무 소중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십니다. 병 앞에 무릎 끓지 마시고 아버님의 깊은 존재 그대로 행복하게 지내셨으면 합니다. 지금처럼 요. 우섭이 지연이 재롱에 미소지으시는 지금처럼 요. 새해 셋째 날 아버님께, - 지연 에미. >
Letter from : [RE: 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2008년 1월 05일 토요일, 오후 18시 29분 44초 +0900
아버님께.. 어느덧 세월이 이렇게 빨리 흘러 아버님이 칠십이 되시고 제가 마흔이 되었네요... 정말 상상도 못했던 나이가 너무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 같아..마음에 준비도 못하고 맞이하여 참 많이 당황스럽습니다 아버님도 아버님이 70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30-40대의 당당했던 모습에서 이제는 손자손녀 재롱에 감동 받으시는 할아버지가 되셨네요..
시간이란 게 참 우습기도 하고 정말 무섭기도 하네요.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버님의 병환으로 온 가족이 걱정할 때, 정작 아버님 스스로가 더 놀라시고 또한 많이 아버님 스스로에게 실망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버님께서 기운 차리시고 스스로 운동하시며 건강 챙기셔서 점점 기력이 좋아지시고 혈색도 좋아지시고 하는 모습에 저희들도 맘이 많이 안정이 됩니다...
저 어릴 적 저를 데리고 포천, 천마산등 스키장을 다니면서 리프트에서 이런저런 좋은 얘기도 해주시고 부자간에 함께 보냈던 그 좋은 시간들을 이제 지연이와 우섭이에게도 할아버지가 스키도 가르쳐 주시고 함께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2008년에는 정말 아버님이 기력을 회복하셔서 하와이에서 결판내지 못한 승부도 다시 한번 대결하고 싶고, 온가족이 그때처럼 함께 좋은 시간을 좋은 곳에서 여유롭게 보내고 싶네요...
아버님 2008년에 건강하시고, 항상 부족한 아들이지만 맘속으로는 아버님을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들인 거 알아주세요... 사랑합니다....조만 간에 병원에 다시는 다니는 일이 없어질 때 아버지랑 한번도 해 본적 없는 포옹이라도 한번하고 싶네요....^^...그러기 위해서 우리 다 같이 노력해야겠지요... 아들 동현 드림. >
card mail from Jaeyeon : Jan.15, 2008 - by hand from Pittsburgh. **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빠 ; 먼저 아빠가 새해를 맞이하시면서 쓰신 이메일에 이제야 답장 아닌 답장을 보내드리는 못난 큰딸을 용서해 주세요. 아빠가 일흔이 되시는 해에 쓰신 아빠의 요약된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빠가 일흔이 되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저에게 항상 당당하신 모습으로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바른길로 인도해 주시는 멋진 분이 신데 "날개도 접고 꿈도 같이 손가방 깊숙이 넣고"하는 구절을 읽으면서 너무 슬펐어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계실 것 같은 아빠였는데 이렇게 세월이 무심하게 지나가 버린게 너무 원망스럽기도 하고 아빠가 이제까지 살아오신 인생에 비하면 저는 삼십대 후반을 맞이하면서 번 듯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부끄럽기만 합니다.
해마다 아빠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식이 되고자 다짐하면서도 늘 이루는 것이 없지만 그래도 올해 더 노력해서 조금이라도 아빠가 저에게 주신 사랑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할께요.
아빠, 재작년과 작년, 아빠의 병환과 서교동 할아버지, 정 고문 아저씨의 별세로 여러모로 많이 힘드셨지요? 올해는 병을 훌훌 털어 내시고 아빠의 힘차고 당당한 모습 다시 보여주세요. 요즘은 인생이 70부터라고 하잖아요. 아빠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이 항상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있으니까요.
제가 좀 무심하고 잔정머리 없지만 아빠를 늘 생각하고 있는거 아시죠? 2008년은 쥐띠의 해니까 저도 분발할께요. 아빠도 힘내세요. ~~~ 재연 드림. >
from : - khkim dongsung32 :[ Re: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 08.01.07 20:12 신두순 인형. 글 잘 읽었소. 50년도 고졸 후 대학입학 그리고 군대 그리고 취직 그리고 결혼. 역사의 한 증인이지요. 386이 있고 우리는 753인가 ? 가난과 혼돈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런대로 자기 몫을 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았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추억 속에 있는 한 토막의 그림이지요. 단지 우리만이 이해하고 알아주고 대화할 수 있는 그런 과거를 가진 세대인가 ? 그러나 더 어려운 세대도 있으니 ! 625에 친구 다수를 잃고 그런 대로 대화를 할만한 친구도 없이 그저 쓸쓸히 지내며 광주사건만 떠들면서 소리치는 소용두리에서 참전했다고 던져주는 몇 푼을 거머쥐고 혼자 소주잔에 넋두리나 하는 그들을 볼 때 우리는 전쟁에 부모를 잃고 형들을 잃었지만 친구는 잃지 않았으니 그들보다는 낫다고 자위를 할 수 있을지 ? 할말은 많으나 들어줄 사람이 없어 서글피 몇 자 적었소, - 계암 김기현. >
lucasshin - 의 답신 무자년 초이틀에 집안의 아이들을 돌려보내고 computer앞에 앉아 자료 정리중 문득 우리가 70이란 숫자가 머리를 때렸다오. 쓸데없는 인생 무상의 감상에 젖어 여러 친구들 마음만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소. 오늘 유 노상 형과 오찬 중에도 나의 70단상이 화제가 되어 부끄럽기만 하였다고. 지난번 서산과 추사 자료 보내 주신 것 감사히 받아보고 인사 늦었습니다. 감사. 용곡 글. 01.08 16:35 >
letter from : [용 서] 2008년 1월 08일 화요일, 오전 08시 47분 46초 +0900 또 해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저도 사람이 이 나이가 되도록 살기가 어렵다는 70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사는 인생 보너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인 듯 싶습니다. 이제 주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새해에 제가 존경하는 분이 좋은 글을<칠십의 고개 마루에서>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혼자 읽기가 아까워 첨부합니다 한번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남을 용서치 못하면 주님도 나를 용서치 않으려니와 내가 남을 용서하면 주님도 나를 용서하시리라"는 고백을 잠자기 전에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다음 날은 또 남을 용서하기가 어렵네요. 새해 주안에서 늘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 유노상 배. >
Letter from : [새해 인사] 2008년 1월 09일 수요일, 오후 18시 47분 00초 +0900 존경하는 Lucas님 아직은 돌아보실 때가 아닙니다. 비단 '정든 님'들은 떠나셨으나 그리고 그리도 절절하시겠지만 다가올 내일을 예비하시면서 언제까지고 그렇게 높이 사시옵소서 누가 있어 그렇게 살아왔음을 증언하리까. 'Schwartz'에 의하면 이제 절반정도 사신 건데... 금년 님과 온가족께서 더욱 더욱 건강하십시오. 손일조 라파엘 올림.
두순이! 성경에 사람의 수명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였소. 70이 되도록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게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해야지요. 오늘 가슴 뭉클한 글을 쓰셨구려. 형의 인생속에 서산 촌놈 유노상이도 나오고 있구먼. 우리 태권도도 함께한거 기억나나? 좋은글 보내주신 형이 존경스럽고 고맙소이다. 며칠후에 만나야지? 건강하시게. 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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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고교동기 조영철학형에게 보낸
신두순 학형의 편지
제 목 : 感 謝 ; |
날 짜 : 2008/06/03 (21:47:27) |
보낸이: lucas-shin@hanmail.net(신두순) |
받는이: joyoungchul@hanmail.net(조영철) |
존경하는 조영철 동문에게 ;
지척이 천리라는 말이있습니다마는 원래 이 뜻은 이웃사촌이라도 가깝게 다니지 아니하면 소원하여져서 먼곳에 있는 지인만도 못하다는 뜻인 줄만 알았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기초체력이 고갈되고 나니 정말로 한발을 옮기는 것이 그렇게 힘이드는 줄을 건강할 적에는 정말로 알지를 못하였고 그냥하는 소리로만 생각하였던 때도 있었습니다만 건강 잃고보니 한 걸음을 마음 속으로 재어 보아도 힘들 때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오늘 수도권 근교에 제법 정원을 갖추고 울창한 숲에 쌓여 초록빛 자연 속에 노후를 정착하는 쉼터를 장만하여 고교 동기를 초청 Open House함에 나 같은 환자도 용기를 내어 자연의 신선한 찌들지 않은 산소를 마음껏 마시게 하여준 존형의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행사를 위해 수고를 하여주신 고재용 회장, 오시우 학형 등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더하여서 조 회장의 사모님과 따님 또한 남편의 허물없는 불쌍한 벗들을 위해 봉사하여 마음을 흐뭇하게 적셔주는 일에 기꺼히 참여하여 주셔서 참석한 동기들을 파안대소하게 하여 주신데 대혀여서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한때는 소인도 고향에 낙향하여 묘막을 짓고 선고의 무덤을 관리하고 싶은 생각에 많은 시간 고향을 오가며 생각만 하였지 결단을 내지 못하였습니다만 인생을 정리하는 마당에 큰 용기를 내어 낮선 산하에 새로운 둥지를 틀고 또 다른 고향을 만든 존형의 용기에 감복하였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둘만의 공간이 아니고 따님의 가족이 넓은 공간에 빈자리를 메워서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계신것입니다. 가까운 이웃 사촌도 게시겠지만 그래도 저녁 후에 오손도손 정원에 앉아 옛 추억의 과일을 따면서 지내는 시간이야 말로 인생의 삶의 보람이며 행복 그 자체이겠지요.
존형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음을 볼때 같은 환자의 입장에서 가슴아팠습니다만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훌륭한 자연의 치료가 건강을 옛과 같이 회복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제 우리 나이 인생 70에 건강한 친우들이 많은것을 볼때 그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참으로 다행이며 우리 또한 건강을 회복하여 그 건강한 동기의 대열에 끼어서 채희문 학형이 추천한 백두산이던 곤명이던 해외여행도 다니는 아름다운 노년이 되어지기를 희망하여 봅니다.
2년여 투병 끝에 깨달은 것은 병을 얻는것도 본인이 자초한 것이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도 자신만이 할수있는 일이지 주치의나 성원하는 주변의 가족이나 친지 모두는 조언자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조언자의 조언을 경청하고 열심히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관리할 때 병마가 서서히 자신의 몸을 떠나는 것임을 터득한 것이 큰 득이라 생각하여 존형께 감히 조언을 드리는 바입니다.
모쪼록 강건하시고 가족에 사랑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하면서 오늘 베풀어주신 후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더하여서 우리 32회 동성 학형 모두도<특히 양명덕 형> 강건하실것도 축원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여불비례. 용곡 신 두순 拜.. - 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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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월 신두순 친구와 점심 모임장소 변경에
대한 편지
수 신 : lucas-shin@hanmail.net 참 조 : 숨은참조 : 제 목 : 롯데백화점 지하2층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4층 라운지에서 커피
두순 성님!
물론 장소를 바꾸기로 합니다. 롯데백화점 지하2층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4층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합니다. 쾌차하시길 기도합니다.
노상
삼가 유 노상 존형께 ;
대단히 죄송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요즈음 수내역 근처에서 물리치료를 받고있는데 운동량이 내가 감내할수있는 체력의 한계를 좀 넘어서는듯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전에 치료를 받고나면 탈진 상태라 다리에 힘이 빠져서 15거리의 우리가 생각한 음식점에 가기가 대단히 어렵겠습니다.
그러하오니 대단히 송구하오나 Lotte 백화점 근처로 장소를 변경하여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소식 주시기 바랍니다.
소인의 부끄러운 글 보시고 과찬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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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8 신두순 친구가 보내온 동성 중.고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 참석기
제 목 : Fw: 동성 중.고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 날 짜 : 2007/12/09 (22:14:13)
저 유노상의 32회 동보록에는 20인이 계십니다. 몇분은 이 편지가 중복으로 전달되어 번거롭게 해드림을 알면서 양해해주실 줄 알고 다시 전합니다. 글을 보내준 신두순 학형! 고맙습니다. 이날 다른 불가피한 일이 있어 함께자리를 하지 못하여 미안하고 아쉽네요 유노상
----- Original Message -----
From : lucas-shin@hanmail.net
12월 8일 (토) 맑음.
## 14:00 ~ 20:00 모교인 동성 중.고교 개교 100주년 기념식 참석.
I. 동성 100주년 기념관 준공식 및 축복 예식 - 준공테이프 절단 - 내부 관람. ** 전시실에 김수환 추기경 님의 작품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캐릭터가 프린트 된 골프 공 �트가 전시 판매되고 있었음.
II. * 100주년 기념 미사 <대강당> 주례 : 정진석 추기경 및 사제단 공동 집전. * 개교 100주년 기념식 # 자랑스런 동성인 상에 동화회 회원인 고흥길 의원이 수상. # 샛별상에도 김덕상 동지가 수상. # 32회의 희망인 이덕선 동지가 기념관 건립기금 $100.000을 내어 감사패를 받음. # 동화회원 중 참석한 회원이 권오룡 중앙인사위원장, 조정식 열린당 국회의원이 참석 인사를 나누다. 32회 동문들 가운데 김철환, 김대환, 하재호, 어명하, 오상배, 오시우, 이중섭, 이천훈, 한상관, 고재용, 류시황, 황용균 이덕선 등 20여명이 참석 자리를 빛내다
# 기념식 후에 우리 일행은 이덕성 동지의 초청으로 회화동 로타리 고교시절 즐겨 찾던 ‘金門’ 중국집에 동기만 따로 모여 모교 발전에 일조한 이덕선 동지의 결단을 축하하고 지난 50년 전 동선 교문 안에서 있었던 자기들만의 비화를 공개하면서 시간이 늦는 줄도 모르고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 동심의 세계에 잠시 젖어 보았다. # 金門은 우리만의 추억이 있는 곳이 아니어서 각기마다 떼를 지어 초만원을 이루는 대 성황을 몇 10년 만에 이룬 것 같다. 우리는 자리를 예약 못하고 찾아서 3층으로 2층으로 �겨 다니다가 결국 1층의 좁은 공간에 자리를 얻어 추억의 실타래를 화끈한 고농도의 중국 고량주로 풍어 나가다.
# 나는 金門을 잊지 못하는 것이 시골 촌놈이 경성 유학하여 안암동에 하숙을 정하고 다니는데 시골게신 어르신께서 예산 읍내의 양복점에서 교복을 진곤색으로 단정하게 맞추어 주시고 신발도 구두방에서 가죽 구두를 새로 지어 주셔서 누가 눈에 뜨이는 학생이었는데 중학교에서 수련한 연식 정구를 학교 코트가 있어 일과 후에 연습을 하느라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니 이 모양이 불량학생의 표적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1차로 나에게 시비를 걸고 나의 주머니를 털어 괴로움을 준 동기가 이종만 형이었다. 그 후로는 나를 이곳 금문에 불러 놓고 돈을 요구하고 그곳에서 요리를 먹고는 나에게 지불을 할 것을 강요하고는 유유자적 휘파람을 불면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머니에 현찰이 그리 없던 나로서는 테니스 라�을 맡기기도 하고 신분증을 담보하고 나오기도 한 것 이 얼마이던가. 유서 깊은 중국집에서 옛 생각이 절로 나면서 그 후로 나도 ga을 길러 불량학생과 대적 그들을 제압하여야겠다고 생각하고 힘을 기르는 곳을 은밀히 찾아보니 당시 한창 유행하던 태권도장이었고 친구 몇몇과 비밀리에 안국동소재 청도관에 등록을하고 태권도를 수련하게 된 것이 나의 서울에서의 생활에 큰 변화였다.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 1970년대 중반 내가 중앙청에 공직자로 근무할 적에 가까운 고교 동기로부터 연락이 있었다. 이종만 동문이 중동에 근로자로 나가고 싶어하는데 전과 경력이 있어 여권발급이 되지 않으나 3급이상의 공직자가 보증을 서면 여권발급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우리 주변에 공직자가 그것도 3급 이상의 공직자는 나 밖에 없어 부탁을 하여 달라고 하니 옛일은 잊고 인간 구제를 하여 주는 것이 어떠하냐는 것이다.
나는 고교 졸업후 한번도 이종만 형을 본적도 없지만 오늘에 이르러 본인의 사정이 얼마나 다급하면 그렇게 괴로움을 주던 나를 기억하고 본인의 신원 보증인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덜 걱정하게 하여 달라는 청을 본인이 직접도 아닌 제3자를 통하여 부탁할 것인가 생각하니 옛 일보다 오늘의 이종만 형이 더 측은하여 신원 보증을 하여주어 열사의 땅 사우디 아라비아에 근로자로 파견되어 수년간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소식 만 전언하여 들었다.
* 오시우 형의 숨겨진 이야기 - 학년말에 황(Yellow- 애칭)선생으로부터 영어를 배우는데 시험성적을 받아 보니 57점 딱 낙제 점수였다. 이래가지고는 과락으로 졸업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삼선교에서 하숙을 하는 선생댁을 양담배를 한 보루 사들고 방문하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선생의 영어 점수를 4점 올려 과락을 면제하여줄 것을 간청을 하니 처음에 선물로 가져간 답배를 다시 내어놓으면서 단호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서 말을 하더란 것이다. 오시형이 이 지경에 물러서면 과락이 문제가 아니라 유급을 하게되고 유급을 하게 되면 부모님께도 그렇고 동료들을 볼 면목도 없게 되어 내친 김에 선생의 가느다란 팔뚝을 잡고 애걸에 복통을 다하여 선생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급기야 61점을 받아 무사하게 졸업을 하였다고 한다. 물론 선생을 찾지 않은 한 친구는 33회 졸업생이 된 것은 말할 여지가 없다.
그후 세월이 지나 수년전 우리 동기 모임에 Yellow를 초청하여 저녁을 함께 하고 돌아가는 길에 선생이 마침 오시우 형과 같은 방향이어서 오 형의 승용차에 모시고 가는 차 중에서 옛일을 회고하고 선생께 드린 말씀이 ‘제가 한평생 그 잘못하는 영어를 가지고 주한 외국공관에서 먹고살았습니다. 참으로 세상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선생님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하니 Yellow 선생께서 파안대소하시면서 , ‘그래 그런 일이 있었나.’하면서 먼 기억을 더듬으셨다.
* 하재호 형의 영어 - 열다섯의 나이로 미군부대에 근무를 할 적에 저녁이 되면 미군 장교들이 외출을 하지 않으면 영내에서 영화를 보곤 하는데 그 영화를 상영하려면 기사가 필요한데 이 일을 본인들이 하기가 번거러우니까 이 잡일을 하 동지에게 가르쳐 주고 매일 영화 상영 당번을 시켰다. 이일을 3년간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세상에 영화란 영화를 다 보게 되니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리면서 본토 영어를 미국을 가지 않고도 잘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오상배 형, 이천훈 형, 이덕선 형 고재용 형 등의 경천동지할 숨겨진 공소시효가 지난 옛 이야기는 모교의 교훈이 참되자, 부지런하자, 책임을 다하자 또한 교육이념이 진리와 사랑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그 속에서 배운 학생이란 녀석들은 참되지도 못하고 사랑도 결핍된 악동들만 배출하였으니 이상과 현실이 참으로 다르구나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래도 여러 선생님들이 열심히 훈육한 결과가 오늘날 동성인이 사회에서 큰일들을 하는 것을 볼 때 우리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지도가 얼마나 훌륭하였는지를 다시 느끼는 시간이다. 삼가 이 자리를 빌어 전창기 교장 선생님이하 황금찬 선생, 김경한 선생 양찬종 선생 등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lucas 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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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7 유노상의 딸 신문기사에 대한 촌평
제 목 : [RE] 따님 interview |
날 짜 : 2007/06/07 (22:30:22) |
보낸이: lucas-shin@hanmail.net(신두순) |
받는이: keblc@unitel.co.kr (유노상 | |
유노상 존형!
훌륭하신 따님을 두셨습니다.
좋은 기사 잘보았으며 두통환자 나타나면 소개하렵니다.
아직 나에게는 두통이 없어 다행입니다만 언제 어던 경우가 나에게 닦칠지는 모르는 일이니간요.
나의 신체적 이상은 조금씩 좋아진다고는 하나 내과적 치료라는 것이 외과와는 달라서 많은 시간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항상 좋은 자료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 이참에 함께보냅니다 - 용곡 신두순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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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7 신두순 친구가 고인이 된 고교동기
고우영 화과과오고간 편지를 정리하여
보내온 것에 대한 왕복편지
수 신 : lucas-shin@hanmail.net 제 목 : 보내주신 편지모음 끝까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어보았소.
두순 학형!
보내주신 편지모음 끝까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어보았소. 글을 읽으면서 고화백이 살아 있는 착각을 하기까지 하였소. 우리네 인생 잠깐이오. 소제보다 네살이나 젊은 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가는 걸 보면서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육신은 그런대로 괜찬은 듯 하나 마음은 한없이 아프다오. 아픈 마음 달래는라 하루도 집에 있지 못하고 산으로 들로 또 다른나라로 떠돌아 다니는 인생이 되었소. 다음달 분당32회 모임에는 꼭 존형의 얼굴을 볼 수 있길 바라오.
몸 잘 간수하시길 ...
주님!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주님의 치유의 손으로 우리 친구 두순 학형을 붇들어 주시옵소서.
07.05.27 노상
노생이 존형께 ;
여기에도 그 화백의 냄새나는 글이 있다오.
지난 4월 25일이 고 화백의 2주기였지.
다음날 그 자제분과 점심을 하면서 향후 고 화백의 유작관리 문제 등을 위해 우리 동배한분과 밀도있는 협의를 한 일이있지. <File>로 그와 나눈 글 아들에게 copy만들어 전한 기록여기있어 참고로 전하니 보시게나. - lu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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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 동성32회 분당 모임과 관련하여 오간 편지
수 신 : lucas-shin@hanmail.net 참 조 : 숨은참조 : 제 목 : 김동배/어명하/이헌구/최순걸/한상관 /소생 여섯 친구가 |
두순이!
어제는 김동배/어명하/이헌구/최순걸/한상관 /그리고 소생 여섯 친구가 모였습니다.
다들 씽씽하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주굴 주굴한 노인들의 얼굴을 서로 바라보면서
세상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학형의 소식을 묻드라구요.
어명하로부터 두순이가 투병중이라는 말을 듣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십니다.
참고 견디면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집으로 문병을 하는 게 번거로우실 듯 하여 메일로 몇자적고있습니다.
6/22(금) 1시에 서현역 기와집순두부에서 만나지요.
몸 잘 살피시길...
유노상배 -----------------------------------
2005.03.26 고우영화백의
제 목 : [RE]동성 32회 동문여러분께! |
날 짜 : 2005/03/26 (10:58:57) |
보낸이: lucas-shin@hanmail.net(신두순) |
받는이: keblc@unitel.co.kr (유노상) |
친애하는 유노상 학형께 ;
오늘 모임에 사전 통보도 없이 참석치 못하여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message를 받고도 형의 cell phone이 입력되지 않아서 답신을못하게 되었습느다.
요즈음 아는 분은 알고 게시겠지만 나의 건강이 전과 같지 않아 장기 치료중이라 불편한것이 한둘이 아나군요.
6월 모임에 <점심> 참석하도록 노력할것을 약속하여 보면서 오늘의 결레를 사고합니다. - 신두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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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6 고교동기 고우영 화백 의 입원소식을
전한 것 에대한 왕복 편지
제 목 : [RE]동성 32회 동문여러분께! |
날 짜 : 2005/03/26 (10:58:57) |
보낸이: lucas-shin@hanmail.net(신두순) |
받는이: keblc@unitel.co.kr (유노상) |
그러지 않아도 며칠전 고재용 회장으로부터 一枝 高羽榮 동지가 투병중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가슴의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느꼈다오.
우리는 2달전 1월 15일 Washington의 이덕선 동지의 귀국으로 곰바위에서 19명이 모여 신년인사회를 가지며 즐겁게 인생을 노래하면서 회화동 검은 교복시절을 반추하였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자랑 高 화백은 몸속의 악마와 싸우면서도 내색하나 하지않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우리에게 하는 말이 "그 놈도 살려고 나를 괴롭히는데 나도 즐겨야지 그 놈과 대적해서 기죽을 수야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제 부터 공존의 전략으로 나도 먹고 싶은것 먹고 즐겁게 적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어" 하면서 포도주도 한잔하고 게장이며 된장찌게 양곱창에 밑반찬이 맛있다고 아들을 옆에 후원자로 앉히고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네 그려.
우리는 지난 겨울 송년의 밤에 모여 동성의 총동창회가 뽑은 자랑스런 동성인에 우리의 동기 고 화백이 지명 되고 김수한 추기경께서 격려와 축하를 하여주실 때 내 자신이 상을 받는 기쁨이상으로 마음이 흐뭇하였다네,
1950년대 말 겨우 전선에 총성이 멋고 아직도 탄흔의 자죽이 남아 엉만인 수도 서울의 한복판이기는 하지만 누구는 강당의 도구실에서 자취를 하면서 신문배달로 학비를 모으고, 누구는 가정교사로 어려운 환경에서 그래도 내일의 희망을 꿈꾸면서 자신의 재능을 키워가던 시절 우리의 일지 동지는 대수시간에 교지의 삽화를 그리다가 출석부로 머리에 번쩍하는 섬광을 느끼면서도 잉크를 찍은 펜촉은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예술로 태어나지 않았던가.
그 후 우리는 서로가 가는 길이 달라 오랜동안 한 다라 건너 만나는 친구들을 통하여 안부나 묻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지만 우리의 일지 동지는 한국만화계의 대부가 되어 사계의 명사로서 우리 앞에 다가왔지. 일지매, 수호지 등은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우상이고 편편히 엮어낸 작품들은 어느 하나 선풍적 인기를 끌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의 한 세상이 그 펜촉 끝에서 일희일비하지 않았겠나?
우리는 여유있는 시간을 즐긴다고 야외로 나가 골프채를 휘드르면서 호를 하나식 지어부르기로하여 烏石, 白石, 雜石, 巨石이라 하였지. 4石이 한데 뭉치니 썩어 악취가 진동하는 천하가 보이더군.
그 날 우리는 영양탕으로 몸보신하고 돌아오면서 세상이 옆전 짝만하여 콧 노래 부르고 풍진세상을 잠시나마 잊어본 것이 적은 행복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아가운 시절이었지.
아마 일지 동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라도 이기고 돌아설거야. 그까짓 것 가지고 놀랠 대장부가 아니지. 적은 고추가 힘쓴다고 우리 일지 동지는 대한의 남아이고 강한 의지의 불굴의 동성인이니까. 나는 고우형의 강건한 투지를 믿으면서 우선 촌절로 줄이는 바이네. 노생이 형 수고.
부활절 주일에 은총이 충만하기fmf 모두에게 기원하는 바이오. - lucas.
---------[ 받은 메일 내용 ]---------- 제목 : 동성 32회 동문여러분께! 날짜 : Sat, 26 Mar 2005 09:42:26 +0900 (KST) 보낸이 : " 유노상" <keblc@unitel.co.kr> 받는이 : , lucas-shin@hanmail.net
동성 32회 동문여러분께!
변함없이 봄이오고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은 흐르는 물과 같군요.
우리 32회의 꿈이요 자랑스런 동문 요셉 고우영 화백이 지금 암으로 투병중에 있는데 상태가 위중합니다. 현재 일산소재 <일산병원> 1003호실에 입원중입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유노상 배 --------------------------------------------------------------------------------------------
2002.12.30 신두순 학형의 송년 멧세지
제 목 : 송년 날 짜 : 2002/12/30 (00:03:08) 보낸이 : lucas-shin@hanmail.net(신두순)
2002년 감상 ! 2002년 12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21c를 열어갈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하는 날이었다. 하늘은 맑고 그 어느날 보다도 푸른 빛이 돋보여 미국에서는 이런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의 맑은 날을 Republican Blue라고 한다고 하며. 역대 통계적으로 보면 이런날에 선택된 대통령이 공화당 출신이 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 이 화창한 날씨에는 한국에서 어느분이 국민적 지지를 받고 이 나라 진운을 걸머지고 국내외적으로 험난한 세파를 헤치고 나갈 지도자가 탄생할것인지 자못 흥분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오늘의 결과를 보기위해서 한해동안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달려왔던가. 부정과 부패정권을 청산해야한다. 정치개혁을 해야하며 정치인의 구태를 청산해야한다 하는 등의 구호는 구호로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잘못된 정치관행이 우리국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에 반하여 전 근대적 사고로하여 정치인의 구두선은 불신만 조장하였고, 만연한 부패는 그 위험지수를 넘어선지 오래이니 나라를 걱정하는 선량한 시민이나 젊은이들에게는 기성세대의 구시대적 관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기에 선거를 앞둔 모든 여론 조사에서 보면 세대간의 지지도가 다르게 나오는 것을 보고 변한 시민의식을 누가 더 많이 인지하였는지가 천심을 제대로 읽은 지도자라고 생각된다.
지난 5년여에 걸쳐 국민의 정부라고 말한 DJ정권은 국민의 의사에 반한 집단 이기주의적인 국민을 볼모로한 비국민적인 정치행태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2년전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국회가 탄생되다보니 국리민복의 대승적 정치활동은 접어두고 사사건건 폭로와 모략 그리고 자당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에게는 정치자체를 불신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심을 감지한 정가는 여야가 모두 이대로 나가다가는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속에 방향타를 잃고 난파한 배와 같은 정치 공동화 현상을 우려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도입한 것이 새천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 제도였다.
민주당의 시.도청소재지를 순회하면서 벌인 후보 경선은 언 듯 보기에는 미국의 primary와 같은 제도로 보였으나 실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어떻던 초반에는 이 인제 후보가 앞서는 듯 하였으나 울산, 광주에서 역전의 기회를 잡은노 무현 후보가 완승을 하고나니 한 편에서는 음모론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자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자질이 모자라니 국민후보를 따로 내자는 등의 의견이 백출하는속에서 한 나라당도 경선을 주창한 박 근혜 부총재가 뜻이 받아 드려지지않자 탈당을 하여 ‘미래연합’이란 신당을 창당하고 평양을 방문 김 정일 위원장과 역사적인 회담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결국 한나라당도 대표가 지도부의 여론에 밀려 우수꽝 스런 경선이란 이름으로 몇몇의 후보가 나와서 순회공연을 하였으나 예정된 수순에 따른 후보로 결정이 나면서, 이 나라는 사상 유례없는 World Cup경기로 전 국민의 energy가 녹아들었으며, 그와중에 16강을 넘어 4강으로의 진출이란 경이적인 승전보 속에서 ‘붉은 악마’라는 젊은 층의 거리 응원단은 inter-net을 통한 통신망으로 연결하여 자연 발생적으로 새로운 집회문화를 만들어 내는 경이로움을 연출하였다.
이는 관제동원이 아니고 스스로의 참여의식으로 나타난 순수한 질서있는 대중응원단은 실제로 우리 역사상 3.1독립만세 사건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민족적 응집체였으며 이 조직체가 향후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칠지에 대하여 각계의 전문가들은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이 와중에 6.13일 지방자치단체 선거가 치루어 졌고, 대통령의 두 아들들이 연이어서 부정사건과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건속에서 지자체 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년말의 대선까지 시간은 남았으나 정권 교체는 당연한것처럼 보여졌다. 이어서 7월의 장마 또한 엄청나게 동해안을 휩쓸어 영동지방을 초토화하였고 수해복구를 할 겨를도 없이 8월의 태양아래 우리는 또 다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하게되었다. 한나라당의 압승, 압승의 연속.
대사를 앞두고 연전 연승은 과연 그 민심이 끝까지 이어질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이 들게끔하는 시점에서 한나라당은 변하여 가는 민심을 읽기는커녕 자만에 빠져서 민주당의 선거전략에 대응은커녕 과반수를 넘는 현역의원을 가진 지구당의 활동이 정체속에서 국가 경영비젼은 없이 폭로와 비방으로 정권을 창출하려는 안이한 생각에 민심의 이반을 외면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민주당은 국민후보를 내지 못하고 정 몽준의원이 대선 출마 의사를 천명하고 신당을 창당하여 ‘후보 단일화’를 교섭하여 만들어 낸 것이 여론조사 방법이었고 그 방법대로 한결과 오차범위내이기는 하지만 노무현 후보의승리로 지루하게 겨루어 오던 집권당의 후보는 노 무현으로 결정 지워졌다.
후보를 등록하던날, 정확하게 선거20일전에 각 언론기관이 발표한 여론조사는 오차 범위이기는 하지만 민주당 후보가 앞서있었다. 한나라당의 후보가 국민적정서나 인격적으로 다른 후보들보다도 월등하게 차별을 보이면서도 여론조사에서 밀리는 것은 생각하건데 두 아들의 병역문제에 더하여 며느리의 원정출산, Villa 문제등의 개인적인 handicap이 서민층과 젊은층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 것은 소위 기성정치인들은 집권당의 실력자이건 과거 집권을하였던 정당의 인사들이던간에 부패하고 특권층으로 군림하는것에 대한 반발의식이 젊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후보로의 정권교체를 희원하는데서 오는 서민적 대중정치인을 세대교체차원에서 지지도가 올라간 것이 큰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위의 많은 관심있는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한나라당은 이 회창 후보는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신데 그분을 보좌하는 주변의 인물들이 하나같이 과거 정권에서 누릴만큼 누린 사람들로서 당선이 되드라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국사를 논한다면 무슨 개혁의지가 나오겠는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이고, 민주당은 ‘노사모’니 하는 젊은 자원 봉사자들의 발로 뛰는 운동원들과 3040의 Thinktank에 포진된 개혁세력은 후보보다 값진 인재들이라고 평을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것인지를 알았어야 했던것이다.
12월 19일 18;00 대선 마감과 함께 발표한 출구여론조사는 방송3사가 노무현 48.1%~49.1%, 이회창 46.7%~46.9%였다 전국 투표률 70.8% 역대 대통령선거에서의 평균 투표률보다 10%정도 낮은 투표률이면서 젊은층의 투표률이 높다는 경이적인 투표행태와 분위기상으로 정몽준의 사퇴는 이회창후보의 당연한 당선으로 예측했던 기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나는 생각을 하였다. 이는 21c 한국형 Bolshevik Revolution이다. 정말로 부르조아특권층을 무대의 중심에서 서민과 젊은세대가 떠나보낸 혁명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수 없는 선거 결과이다. 중국에서 홍위병이 지도층을 몰아낼 때처럼 저층 젊은이들이 얼마나 광분하였나 그러나 이를 잠재운 또 다른 등소평 같은 지도자가 중국에는 있어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어 갔지만 한국에는 아무리 생각을 하여도 그런 지도자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보수 야당인 이회창후보와 한나라당을 지지한 것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튼튼한 안보를 기대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마음에서 성원하였던 것인데 그 반대로 투표의 결과가 나온다면 이 나라의 향후 진운을 어떻게 정리하여야 할지 대책이 떠오르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도둑맞은 기분으로 마음이 허전하고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어 나른하게 기력이 쇄잔하여 진다.
세계가 젊어져 가는데 이제는 한국도 지도자가 젊게 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변화가 같은 체제내에서의 역동적인 변화여야하지 이념과 체제를 변화시키는 그야말로 혁명적 변화라고 한다면 이는 보수를 지지한 나머지 반수의 유권자를 되외시한 처사로 또 다른 혁명을 불러오는 비극을 이 땅에서 만나게 되는 슬픈 역사의 기록을 남기게 될것이기에 경계를 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젊은 대통령과 3040세대의 역동적 power가 이 나라를 보다 Up-Grade하는 계기가 될것이며, 우려하는 측의 시각은 좌향적 개혁이 지나치다 보면 한국의 경제가 어려워 지게 될것이고 경제의 어려움이란 산업생산의 위축으로 실업인구가 늘어나고 거리로 내 몰린 배고픈 세대는 더 많은 요구를 정부에 하게 되다보면 투자가 위축되어 점진적으로 동북아의 필립핀이 새로히 지구상에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속에 북의 또 다른 손짓이 한반도를 안보적으로 불안하게 만드는 길을 우리 손으로 시작한 것 같아 밤잠이 오지 않는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와 같은 동종의 사람들을 ‘70년대 박정희 신드럼에 빠진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매도하지만 아직은 아무리 전향적인 생각을 한다하여도 쉽게 젊은이들의 경험없는 이상주의에 쉽게 동의 할 수 없는 것은 지난날 우리가 겪었던 경험은 너무나 기억하고 싶지 않는 상처가 아직도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전쟁에서 배고픔을 배웠고, 부모형제를 잃고 이산이 되었으며 아직도 분단된 아픔이 어데서 부터시작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더 아프게 저려오는것이며 이 나라가 지금 어떻게 유지되고 발전되어가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더 없는 걱정이 앞서는 것이니라.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은 반수의 보수가 건재하니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라고 그리 쉽게 반의 의사를 반하는 결정을 내릴수는 없을것이라는 확신은 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되는 마음으로 이 나라를 민주주의 보루위에 세워야 하며 평등하여야 하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평등은 또 다른 불평등임을 간과해서는 아니되며, 국제 사회에서 단일 민족주주의만을 주창하다가 고립되는 우를 범하여서는 않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할것이다.
참으로 힘든 한해를 보내면서 글로서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은 것이 이것도 나이 탓이고 푸념이라면 옛 선비들의 낙향하여 서당에서 훈도하는 정겨운 풍경이 아름답게 보여지는 한해이기도 하다.
우리는 희망을 갖자. 내일도 태양은 우리를 위해 미소하며 또 다시 떠오를것이기 때문이다.
-------삼가 우리의 영원한 친구 신두순 학형의 별세를 애도하면서 편지 정리를 마칩니다 . 유노상
----------------------------------------------------------------- 2010.06.15 조선일보 기사
최규하 前 대통령 비서관 신두순씨 별세
고(故) 최규하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을 지낸 신두순(申斗淳·71) 전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가 14일 오전 5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193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 동성고, 성균관대 법대를 졸업한 뒤 1972년 국무총리실 비서관으로 공직을 시작했으며, 1979년 최 전 대통령의 의전비서관을 지냈다. 최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에도 비서관으로 일하다가 한국가스공사 감사, 에너지관리공단 감사를 거쳐 한국가스안전공사 감사를 지냈다. 최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사망한 뒤에는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기념사업회'에서 최 전 대통령 추모작업에 적극 참여했다.
2007년 국립 대전현충원에 최 전 대통령 추모비를 세울 때는 정동열·이재원 전 비서관과 함께 "국가변란으로 나라가 어려울 때 국가원수로 사명의 짐을 지고 국권수호에 진력했으며 세속의 세찬 바람에 태산같이 의연함을 보였다"는 추모글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 유족은 부인 손금진 여사와 아들 동현씨, 딸 재연·수정씨가 있다. 빈소는 분당서울대병원, 발인은 16일 오전 9시. (031)787-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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