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주일오전 설교문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예레미야 8:18~22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요시야 13년 ~ 시드기야 11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처참하게 파괴되는 그 때까지...
그 후로도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함.
요시야 13년? - Bc 627년으로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41년 전이다.
(41년 전부터 하나님은 예례미야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멸망을 에고..)
⇨ 결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이지 구원받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함
// 예수님의 말씀이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말한다...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듣지 않으니 그것이 심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41년 전부터 말씀을 주시지만
백성들은 말씀을 듣지 않고 타락에 타락으로 달려간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하박국, 스바냐 선지자를
더 보내셔서 말씀을 주시지만 듣지 않는다.
(거기에 부분적으로 훌다 선지자와 같은 여선지자도 붙이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경고가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산을 자산으로 만들어가고
/ 거기로 향하는 길이 그들이 어떤 걸음을 걷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명거리를 만들어간다.
○도벳 골짜기는 더 매장할 곳이 없을 정도로 인신제사가 드려지고 있다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는다.
/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강석같이 한다.
○가난한 자들은 신발 한 켤레 값으로 팔려가고
부자들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리고 꾸민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이 택하신 선민이라도,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지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 옹호, 인정, 덮어주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살은 사람들,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보내고 말씀을 주신다.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 8번
그래도 듣지를 않는다...!!!!!
이 백성들은 지금의 안일, 세상의 것에 담겨져서!
영적인 것은 아예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1.예레미야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못한다.
예레미야는 듣는데 사람들은 듣지를 못한다...
경고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경고를 하시고 바로서게 하신다.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이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4:19)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말씀을 주신다.
이것이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이고, 구원의 기회이다...
이것을 놓치면 심판이고, 이것을 가지면 구원이 된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먼저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은 가인의 마음을 가인 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가인 자신도 모르고 있는 살인의 충동을 알고 계신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 가인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들으나) 듣지 못한다.
/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죄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버린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 - 아모스, 호세아, 오뎃 선지자를.....
Vs 이때 남 유다에는 이사야, 미가, 선지자를...
차이가 무엇이냐? 북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
남 유다는 왕으로부터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다는 것.
듣지 않은 북이스라엘- 앗수르 산혜립에게 망했고,(721년)
들은 남유다에게는 예루살렘을 침범한
앗수르 군사 185,000명을 하룻 밤 사이에 점멸시켜 주셨다.
2.예레미야는 보는데 보지를 못한다.
오늘 선택된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딸 백성이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것을 본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지만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딸 백성이 상하여 슬퍼하고 놀라움에 잡혀 있는 것이 보인다」
「길르앗에 치료할 수 있는 유향이 있고 의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백성들이 보인다」
분명 아직 남 유다는 멸망당하지 않았다!!!!!!! - 그런데 예레미야는?
「먼 땅에서 부르짖는 자들을 본다」
「추수 때를 지나 창고에 들여져야 할 곡식들이 들판에 나뒹굴어져 있는 것을 본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다...(눅19:41~)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라」
예루살렘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중심으로, 앞으로 약 40년 뒤
Ad 70년에 다가올 멸망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주님은 미리 보게 하시고, 알게 하시고, 듣게 하신다.....
예수님 탄생 때의 안나와 시므온은 아기 예수에게서 구원을 본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는도다」
-그러나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구원을 보지 못한다.
-말씀을 듣고 구원의 소리로 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기적의 표적을 보고도 메시야의 표적인지를 알지 못한다...
오늘 예레미야는 외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다....
아무리 절망의 시간이라도! 아무리 위기의 시간이라도! 아무리 포기의 일이라도.
「여호와께서 여기 계심, 주님이 여기 계심이 우리에게는 최고의 소망이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신다.
(마 8장; 가버나움 ~ 거라사 행)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풍랑 - 물결에 덮이게...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주님의 책망?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주님이 그 배에 함께 타고 게신다!
주님이 우리의 배에, 가정의 배, 교회의 배, 사업의 배에...
그래도 아직까지 주님이 시온에 계시는 이것이 유다의 소망이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심이 나를 바로 서게 한다.
-여호와께서 함께 계심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런데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신데....
그 시온에 「조각한 신상들을」 「이방의 헛된 것들을」 세우고, 채운다.
결국 동시대 에스겔은 이 시온을, 예루살렘 성전을 나가시는 주님을 본다.
(10장 Vs 43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안타깝게 우리의 부모, 조부모들의 눈물의 신앙으로
얻어 놓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의 것들을
허물어뜨릴려고 하는 시대,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허물어뜨리면서도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가담하고 있으면서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주신 이 자유, 자유경제, 민주주의
마음껏 예수님 신앙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
경제적인 번성함과 선교할 수 있는 여유로움....
그런데 이것이 허물어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허물고, 교회를 허물과 신앙을 허물어 간다...
핍박자들이 아니라 교회, 성도들 스스로가 허물어간다....
왜 허물어 뜨리는가? 좀 더 육체의 자유와 좀 더 큰 쾌락을 위해서....
국가 사회적으로는?
현충일에 욱일기가 아파트/ 김정은 추종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고,
나라 빚이야 어떻게 되든지 막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하고...
(줘 봐야 생산적인데는 전혀 쓰지 않을 것이면서.... )
더 쾌락적인 것을 위하여 마약을 들이고. - 이미 마약청정국에서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