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를 찾아서 ③ - 산신각, 그 밖의 전각과 이모저모 -
3월 24일, 적멸보궁에서 2시간 정도의 사시예불과 적멸보궁 밖의 사리탑과 자장율사의 토굴을 살피는 동안 시간이 많이 흐르니 영하의 날씨에서 영상으로 오르니 눈이 녹아내려 그 아름답던 설경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네요.
이제 발걸음을 돌려 산신각으로 향합니다. 산신각은 적멸보궁 밑 약사전 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제가 산신각에 주목한 것은 산신각이 특별한 것이 그런 것은 아니고 산신각에 걸려 있는 주련이 아직 우리 향불방에 소개되지 않은 것이라 소개하고픈 마음 때문입니다.
산신각 모습
법흥사 산신각
산신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87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2000년에 다시 중건된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주련이 있는데 탄허 스님의 글씨체라 멋지게 보였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巍巍落落淨裸裸 외외낙락정나라 높고 크고 우뚝한 청정(淸淨)한 본모습 獨步乾坤誰伴我 독보건곤수반아 천지(天地)에 홀로 걷는 나와 누가 짝하리오. 若也山中逢子期 약야산중봉자기 만약에 산중에서 종자기(鍾子期)를 만났던들 豈將黃葉下山下 기장황엽하산하 어찌 누른 잎 가지고 산을 내려왔으랴.
이 게송을 출산게(出山偈)라고 하는데, 불교상용의식집인 《석문의범(釋門儀範)》『괘불이운(掛佛移運』ㆍ『설주이운(說主移運)』의식 등에 출처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출산게는 그에 앞서 태고보우국사(太古普愚國師)의 『석가출산상(釋迦出山相)』이라는 찬(讚)에 출처를 두고 있습니다.
여기서 '봉자기(逢子期)'와 '황엽(黃葉)'의 의미를 파악해야 그 뜻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해설은 <주련의 향기>방에 올렸으니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법흥사에 가고 싶었던 것은 이 주련 때문이었습니다. 이 주련을 꼭 <주련의 향기> 방에 소개하고픈 마음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마음을 내니 유구필응(有求必應)입니다. 구함이 있으면 반드시 응답이 있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산신각 주련을 보는 순간 "아뿔사!" 했습니다. 게송이 걸려 있는 주련이 순서가 뒤바껴 있었습니다. 산신각을 중심으로 하면 좌에서 우로, 산신각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우에서 좌로 걸려야 할 주련이 ②①④③으로 걸려 있더군요. ②①④③이 아니라 ④③②① 맞는 것이죠. 나중에 종무소에 들러 이 사실을 전하며 바로잡아 달라고 건의 드리고 왔는데 지금쯤이면 아마 바로 걸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멋진 게송이 산신각에 걸려 있다니 의아합니다. 산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게송입니다. ^^ 게송 중 '산중(山中)'이란 용어가 나오나 산신과 연관 지을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 천지간에 홀로 걸으며 눈밝은 상근기[鍾子期]가 없음을 애석히 여기시며 어린 중생을 어찌하나 골몰하시다가 누른 잎[黃葉. 방편]을 가지고 중생 곁으로 내려오셔서 대자비심으로 중생교화에 나서신 것을 표현한 게송인 만큼 산신각에는 걸맞지 않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_(())_
산신각(山神閣) 편액 -탄허(呑虛) 스님 글씨-
구봉대산 산신(九峰臺山 山神) 사자산 산신(獅子山 山神) 백덕산 산신(白德山 山神)
산신각 안에는 세 분의 산신이 모셔져 있는데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왜 세 분의 산신이 모셔져 있을까요?
법흥사는 사자산(獅子山. 1167m)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백덕산(白德山. 1350m)을 좌청룡(左靑龍), 구봉대산(九峰臺山. 870m)을 우백호(右白虎) 삼아 창건되었기에 세 산의 산신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신은 '산의 신'이라고 하여 명산에는 그 산을 지키는 산신님들이 계신다. 보통 호랑이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본래 산신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믿던 민속신앙으로 생명을 악귀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그 산 주변을 삿된 기운으로부터 보호해 주시는 수호신으로 전해지고 있다. 법흥사는 타 사찰과 다르게 사자산, 구봉대산, 백덕산의 세 분의 산신님을 모시고 있는데, 특히 백덕산 산신님은 여 산신님으로서 아주 영험하시다.」 -법흥사 홈피에서 옮김-
백덕산 산신(白德山 山神)
사자산 산신(獅子山 山神)
구봉대산 산신(九峰臺山 山神)
산신각 밑의 수각
여기서 감로수 한 바가지 시원하게 마시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아차차... 비니초님이 내려갔는 줄 알고 급히 내려가느라 약사전을 지나쳤네요. ㅎㅎㅎ
만다라전
만다라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아담한 전각인데 적멸보궁 초입에 위치해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눈이 덮여 있더니 내려오니 눈이 다 사라졌네요.
만다라전 내부 모습
만다라의 뜻은 무엇일까? 《가산불교대사림》에서 옮겨 봅니다.
「만다라(maṇdala. 曼茶羅)는 만다라(曼陀羅ㆍ曼荼羅ㆍ蔓陀羅ㆍ滿荼邏)ㆍ만타라(曼咤羅)ㆍ만나라(曼拏攞ㆍ滿拏囉ㆍ曼拏羅) 등이라고도 한다. 도량(道場)ㆍ단(壇)ㆍ단장(壇場)ㆍ윤원구족(輪圓具足)ㆍ무과상미(無過上味)ㆍ취집(聚集)ㆍ발생(發生) 등으로 한역한다.
[자의(字意)] 범어에 근거해서 풀이하면, 만다(maṇda)는 진수(眞髓)ㆍ본질ㆍ제호(醍醐) 등을 뜻하고, 라(la)는 성취ㆍ소유(所有)라는 뜻이기 때문에 만다라는 본질을 얻은 것, 곧 부처님의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는 최고의 깨달음의 본질을 얻은 것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둥근 수레바퀴처럼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충실한 경지이기 때문에,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 하고, 제호(醍醐)와 같이 더할 나위 없이 미묘한 맛을 지닌 것이라는 뜻에서 무과상미(無過上味)라고 하며, 만다라를 체(體)로 하여 무량무변의 불신(佛身), 음성, 의의와 삼밀(三密)을 시현하기 때문에 발생(發生)이라고 하고, 불과(佛果)의 진실한 만덕(萬德)을 한 곳에 모은다는 뜻에서 취집(聚集)이라고 한다.」
오불도(五佛圖)
오불(五佛)은 금강계만다라(金剛界曼茶羅)에서는 중앙에는 대일여래(大日如來), 동방에는 아촉여래(阿閦如來), 남방에는 보생여래(寶生如來), 서방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북방에는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 등 다섯 분의 부처님을 듭니다.
또 태장계만다라(胎藏界曼茶羅)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 동방에는 보당여래(寶幢如來), 남방에는 개부화왕여래(開敷華王如來), 서방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 북방에는 천고뢰음여래(天鼓雷音如來) 등 다섯 분의 부처님을 들고 있습니다.
만다라(曼茶羅)
「만다라는 티베트 불교인 밀교에서 발달한 우주 진리의 법신세계를 나타낸다. 가는 모래로 색깔을 입혀서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라 할 수 있다. 신성한 단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하여 우주의 진리를 표현한다. 원래는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였으나, 밀교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것'을 일컫는다. 2003년 티베트 스님들이 법흥사 법회 때 만다라를 조성하였다.」 -법흥사 홈피의 설명을 옮김-
사자산법흥사중건비(獅子山法興寺重建碑)
사자산법흥사중건비(獅子山法興寺重建碑)
소화팔년 중추(昭和八年仲秋) 강원도지사 이범익 찬(江原道知事李範益譔)이라 했으니, 소화 8년은 일제 강점기인 단기 4266년 불기로는 2477년인 1933년 음력 8월에 강원도지사 이범익 선생이 비문을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안내문
「이 비석은 징효대사(澄曉大師)의 탑비(塔碑)로 고려 혜종(惠宗) 1년인 944년에 세운 것이다. 징효대사(澄曉大師)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자산문파(獅子山門派)를 연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의 제자로, 흥녕사(興寧寺. 법흥사의 옛이름)에서 선종(禪宗)의 법문(法門)을 크게 일으켰던 승려이다.
비석의 글은 최언위(崔彦撝)가 짓고, 최윤(崔潤)이 썼으며, 최환규(崔奐規)가 새겼다.
비석의 내용은 징효대사가 평생동안 한 일과 신라 효공왕(孝恭王)이 징효대사라는 시호(諡號)와 보인(寶印)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린 것으로 적고 있다.
이 비석은 신라 말 고려 초에 나타나는 탑비(塔碑)로, 비 받침은 거북모양이며, 비몸 받침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었다.
비 받침의 거북머리는 용머리를 본떴는데 부릅 뜬 눈에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다. 비 머릿돌에는 네 마리 용과 "징효대사(澄曉大師)"라는 전서체(篆書體)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비 머릿돌 위에는 장식물인 보륜(寶輪. 탑비의 꼭대기에 있는 장식), 보주(寶珠. 탑비의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을 얹어 놓았다.
이 비석은 전체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웅건한 느낌을 준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보물 제612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옆모습
징효국사 부도(澄曉國師 浮屠)가 모셔져 있는 곳.
징효국사 부도(澄曉國師 浮屠) 안내판
「부도란 스님의 유골이나 사리를 모신 일종의 묘탑(墓塔)이다. 이 부도는 네 개의 네모난 돌을 바닥에 깔고 팔각의 아래 받침돌을 놓았는데 , 각 면에는 안상(眼象. 靈氣窓. 부도 면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받침돌이 놓여 있다.
가운데 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팔각으로 된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 받침돌의 윗면은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팔각의 괴엄이 있고 그 위로 옆면에는 위로 향한 연꽃무늬[仰蓮]를 두 겹으로 돋을 새김하였다.
몸돌은 팔각형의 북 모양인데, 앞, 뒤 양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틀에 감실(龕室)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팔각으로 지붕 끝 내림 마루에 귀꽃[부도 지붕돌의 추녀마루 끝에 꽃무늬를 새긴 장식]이 장식되어 있고, 물매는 완만한 편이다. 지붕돌의 정상 부분은 팔각의 받침돌을 놓고 보개(寶蓋. 부도 상륜의 보륜(寶輪)과 수연(水煙) 사이의 지붕 모양의 장식)를 받게 하였으며, 보개는 지붕돌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보개의 정상은 하나의 돌로 된 연꽃 봉우리의 보주(寶珠. 부도 상륜부에 놓인 둥근 모양의 구슬)를 얹어 놓았다.
부도의 위치로 보아 탑비(塔碑)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징효국사 부도(澄曉國師 浮屠)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2호-
징효대사 보인탑((澄曉大師寶印塔)이라고도 합니다.
이름 모를 석종형(石鐘形) 부도 한 기(基)
아기를 안은 지장보살상
거대한 복련(覆蓮) 받침돌 위에 모셔 놓은 지장보살상인데 원래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법흥사 보호수인 밤나무 -강원도-영월 보호수 제27호-
이 나무는 수령이 약 200년이고, 나무 높이는 16m이며, 나무둘레는 470cm이라고 합니다. 강원도 영월 보호수 제27호인데 보호수로 지정된 일자는 2001년 10월 20일입니다.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상태라 적나라하네요. 징효대사 부도 옆에서 부도 수호자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아직 편액이 걸려 있지 않지만 극락전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이 전각은 징효대사 부도 앞에 건립되었는데, 최근에 중건하여 단청까지 마친 듯 산뜻해 보입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협시보살로 좌보처 관세음보살, 우보처 지장보살을 봉안하였습니다.
우보처 대원본존 지장보살 극락도사 아미타불 좌보처 대자대비 관세음보살
신중탱화(神衆幀畵)
조사전(祖師殿)
조사전은 극락전 우측에 건립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조사전은 조사스님, 사찰의 창건주 그리고 고승대덕의 영정을 모시는 전각입니다. 사찰에 따라 국사전(國師殿), 국사당(國師堂), 영각(影閣), 조사각(祖師閣) 등으로 부릅니다.
특히 선종사찰(禪宗寺刹)에서는 한 종파(宗派)를 개창한 조사스님과 그 사법(嗣法) 제자들은 그 사찰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영정을 봉안합니다. 교종(敎宗)은 경전에 의거한 문헌적 해석을 중시하지만, 선종(禪宗)은 직관을 통한 실천수행을 강조하기에 스승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안에는 자장율사(慈藏律師)와 징효대사(澄曉大師)의 영정을 모셨는데 그 중간에 징효대사의 스승 철감국사(澈鍳國師)의 각령 위패를 모셔 놓았습니다.
조사전(祖師殿) 편액 -김영기(金榮基) 선생 글씨-
조사전 내부 모습
제사신라국사자장율사지진(帝師新羅國師慈藏律師之眞)
자장율사(慈藏律師 ?~?)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속성은 김(金)씨이고, 속명은 선종(善宗)입니다. 신라의 진골(眞骨) 소판무림(蘇判茂林)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산에 들어가 고골관(枯骨觀, 白骨觀)을 닦으며 수행한 뒤, 선덕여왕(善德女王) 5년(636)에 왕명을 받고, 승실(僧實) 등 제자 10명과 당(唐)나라에 가서 법을 구했습니다.
중국의 3대 기도처로 유명한 문수도량인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가사(袈裟)와 불사리(佛舍利)를 받은 후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3년 동안 머물며 불법을 닦았습니다. 화엄종(華嚴宗)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선덕여왕 12년(643)에 당 태종에게 청하여 장경(藏經)1부와 불구(佛具)를 가지고 귀국하였습니다.
분황사(芬皇寺)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황룡사(皇龍寺)에서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론하였습니다.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승려들의 규범과 승통(僧統)일체를 주관했으며 황룡사 9층탑을 건의하여 선덕여왕 14년(645)완성하였고, 선덕여왕 16년(646)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여 계율종(戒律宗)을 펴는 한편 그곳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가사와 사리를 모시어 대중을 교화하고, 전국 각처에 십여개의 사탑(寺塔)을 세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덕여왕 3년(649)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신라에서 처음으로 관복(官服)을 입게 하였으며, 진덕여왕 4년(650)년 당나라 연호(年號)를 쓰도록 하여 국위를 세우는 등, 불교 뿐만 아니라 문화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한편 원녕사(元寧寺)를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론하여 화엄교법을 천명하였습니다. 만년에는 강릉에 수다사(水多寺)를 짓고, 태백산에 석남원(石南院;지금의 淨巖寺)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우리나라 개조(開祖)가 되었습니다.
저서로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ㆍ《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ㆍ《관행법(觀行法)》ㆍ《제경계소(諸經戒疏)》등이 있습니다.
부종수교 조계사조 철감도윤국사각령 扶宗樹敎 曹溪嗣祖 澈鍳道允國師覺靈
철감도윤국사(澈鍳道允國師. 798~868)
신라 스님으로 성은 박씨(朴氏)이며 휘(諱)는 도윤(道允), 호(號)는 쌍봉(雙峯), 시호(諡號)는 철감(澈鑑. 哲鑑), 탑호(塔號)는 징소(澄昭)입니다. 어머니는 고씨(高氏)입니다. 어머니는 이광(異光)이 만공(滿空)한 태몽을 꾸고 16개월만에 원성왕(元聖王) 14년(798)에 출생하였습니다.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18세에 출가하여 귀신사(鬼神寺)에서 화엄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28세인 헌덕왕(憲德王) 17년(825)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법을 받고, 문성왕(文聖王) 9년(847)년 4월에 귀국하여 금강산(金剛山)을 거쳐 풍악산(楓嶽山. 江原道 淮陽)에 주석하였는데 사방에서 학도(學徒)가 모여 들었습니다. 동시에 경문왕(景文王)의 숭앙을 받았으며 다시 쌍봉(雙峰)으로 이주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다가 경문왕 8년(868) 4월에 세수 71세, 법랍 44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니 오색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와 공중에 산만(散漫)한 서상(瑞相)이 있었다고 하여 서기만천철감국사(瑞氣漫天澈鑑國師)라고도 합니다.
상수제자(上首弟子)인 징효절중(澄曉折中. 826~900)이 헌강왕(憲康王) 때 사자산(獅子山)의 흥녕사(興寧寺)를 확장하고 도윤(道允)의 선풍(禪風)을 받들고 그 문하(門下)에 종홍(宗弘), 단지(端智) 등 수백인의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하여 종풍(宗風)을 선양함으로부터 비로소 사자산파(獅子山派)의 명성이 세상에 떠들썩하게 자자하여 사자산파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위패를 보니 '부종수교(扶宗樹敎)'를 '부종수교(附宗樹敎)'라 했네요. '부(附)'는 부(扶)의 오자(誤字)입니다. 위패에 잘못된 글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새로 조성해서 모셨으면 합니다.
사자산개산조 징효절중국사지진영(獅子山開山祖 澄曉折中國師之眞影)
징효절중국사(澄曉折中國師. 826~900)
《전통사찰총서》『법흥사』편의 징효대사(澄曉大師)에 대한 설명을 옮겨 봅니다.
「징효대사(澄曉大師)의 법명은 절중(折中)으로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이다. 아버지는 선당(先幢, 光幢)이며, 어머니는 박씨(朴氏)이며, 아버지 선당은 지방토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7세에 출가하여 오관산사(五冠山寺) 진전(眞傳) 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15세 때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열 가지 차원에서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의 깊은 뜻을 탐구하였으며, 19세 때 청양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때 중국에서 남종선 계통인 마조(馬祖)의 수재자 남전(南泉) 선사에게서 법을 받고 돌아온 도윤(道允) 스님이 금강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수도하였고, 그 뒤 자인(慈仁. 慈忍) 스님의 문하에서 16년 동안 선리(禪理)를 탐구하였다.
헌강왕(憲康王) 8년(882) 전국통(前國統) 위공(威公)이 서울에 가까운 곡산사(谷山寺) 주지로 천거하였으나 도시의 번거로움을 꺼려 사양하고 석운(釋雲) 스님의 청을 받아 사자산(獅子山)에 머물렀다. 헌강왕은 사자산의 흥녕선원(興寧禪院)을 중사성(中使省)에 예속시켜 주었고, 정강왕(定康王)과 진성여왕(眞聖女王)도 그의 도행(道行)을 흠모하여 도화(道化)를 크게 도와 선양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정계와 사회의 혼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스님은 전란을 피하여 남행(南行)하여 동림사(桐林寺)와 은강선원(銀江禪院) 등 여러 곳에 머물렀다. 스님이 은강선원에 머물렀을 때 진성여왕은 장연열(張連說)을 보내어 국사(國師)의 예우를 표하고 보좌를 청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음을 이유로 들어 거절하였다.
효공왕(孝恭王) 4년(900) 3월 19일 문인들을 불러 "삼계(三界)가 다 공(空)하고 모든 인연이 전부 고요하다. 내 장차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힘써 정진하라. 부디 선문(禪門)을 수호하고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말아서 불조(佛祖)의 은혜를 갚도록 하라"고 당부한 뒤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74세, 법랍 56세였다.
스님은 선문구산(禪門九山) 중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제2조(第二祖)로서, 화엄학의 무애법계연기(無碍法界緣起)에 입각한 선지(禪旨)를 터득하였다. 스님이 화엄학에서 발하여 선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신라의 선이 후대의 화엄학과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스님의 법통을 전수받은 여종(如宗)ㆍ홍가(弘可)ㆍ이정(理靖)ㆍ지공(智空) 등 1,000여 명이 있다고 한다. 시호(諡號)는 징효(澄曉), 탑호(塔號)는 보인(寶印)이다.」
부종수교 조계사조 징효절중국사각령 扶宗樹敎 曹溪嗣祖 澄曉折中國師覺靈
여기도 부종수교(扶宗樹敎)를 부종수교(附宗樹敎)라 했으니 안타깝네요. 처음 잘못 알면 실수는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부종수교(扶宗樹敎)란 종지(宗旨)를 떠받치고 가르침의 방편(方便)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즉 종지가 드러나도록 돕고 교설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이 네 글자를 받는 분들은 종풍을 드날린 덕 높으신 스님들에게 붙이는 칭호이기도 합니다.
조사전 맞은편에 있는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 편액 -무곡(茂谷) 선생 글씨-
다음의 행선지는 삼성각입니다. 범종각을 지나 북쪽으로 나아가면 삼성각이 나옵니다. 법흥사의 전각은 종무소를 중심으로 보면 멀리 멀리 떨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적멸보궁, 산신각, 약사전은 중대에 자리하고 있고, 삼성각은 건물기준으로 극락전, 조사전 우측으로 좀더 나아가야 나옵니다.
삼성각이 보입니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건물로 10년 내 최근에 건립된 듯합니다. 보통 삼성각이라면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한 칠원성군(七元星君)과 독성 나반존자(那畔尊者) 그리고 산신(山神)을 모시고 있는데, 법흥사는 산신각이 적멸보궁 앞에 별도로 건립되었기에 여기서는 산신 대신 용왕대신(龍王大神)을 모시고 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송은(松隱) 글씨-
칠성탱화(七星幀畵)
독성(獨聖) 나반존자(那畔尊者)
용왕대신(龍王大神)
불교에서의 용왕(龍王)은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함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협시(脇侍)하는 물의 신입니다. 용왕(龍王)은 산신(山神)과 더불어 인간과 가장 가까이 계시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고 건강과 질병을 고쳐주며 비를 내려 오곡을 성취시키는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용의 몸에는 눈부신 오색채운의 광채를 두르고 있으며 오색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용은 나가( Nāga 那伽)라 하여 팔부신장(八部神將)의 하나로 큰 바다에 살면서 구름을 불러 비를 내리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경전에는 용에 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삼성각을 찾아 예를 올리고 다시 돌아나와 수각으로 돌아와 물 두 병을 담아왔습니다.
수각 옆에 자태를 뽐내는 미인송(美人松)입니다.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으니 여기는 스님들의 수행처로 보입니다.
여기는 흥녕원(興寧院)입니다.
흥녕원(興寧院)
불기 2552년(2008년) 10월 낙성한 흥녕원(興寧院)은 신라시대 흥녕사(興寧寺)로 창건되었기에 법흥사의 개산정신을 잇기 위해 개원 되었다고 합니다.
이 흥녕원은, 참 나를 깨닫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련시설로, 1층는 공양간, 2층은 템플스테이와 불교공부를 위한 강당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종무사 앞에 있는 다향원입니다.
아침 뜻하지 않은 설경으로 환희의 세계에 들어왔다가 보적멸보궁에서 예불하고 다시 내려와 산신각 주련을 담고 다시 각 전각을 돌아다니며 예를 올리고 사진에 담는다 했지만 미처 빼놓고 온 곳도 있고 무심코 지나온 곳도 있어서 잠깐 동안 머물다 오면서 다 보았다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천년의 향기를 어찌 잠시 다 맡을 수 있으리오. 불가한 일입니다.
법흥사를 떠날 무렵에 산신각 주련이 순서가 바뀌어 걸렸다고 종무소에 들어가 종무소 직원분께 말씀드리니 아주 넉넉하게 맞아 주시고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지금쯤이면 바로 걸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예배하고 사진 찍고 하면서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을 돌아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몇 가지 시정해야 할 것이 있는데 앞서 지적한 사항이지만 다시 정리하면 원음루에 걸린 종성게 주련은 범종각에 걸면 좋겠고, 조사전의 위패의 오자는 속히 교정하여 새로 조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다향원에 들어 연꿀빵을 한 상자 사고는 12시 45분 법흥사를 물러나왔습니다.
사자산문 옛 명성 오늘에도 향기롭네. 자비 지혜 바른 수행 청정 가풍 일어나서 산사의 맑은 바람이 세간으로 불었으면…
법흥사 적멸보궁 천년을 이어오며 흥망성쇠 무상한 중생의 맘 어르었네. 사자산 적멸보궁이여 안심처로 영원하길…
끝으로 덧붙입니다. 이른 아침 강원도는 영하 6도를 오르내리고 들판은 눈으로 덮여 있어서 쑥이나 냉이는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일주문 밖 공터에서 도시락을 먹고 오후 1시 20분경 귀경 길에 오르다 바로 비니초님이 여기 좀 봅시다 하고 차를 세우고 밭으로 들어가니 냉이가 눈에 띄어 냉이와 쑥을 맛볼 만큼 채취하고 돌아왔네요. 이리 해서 목표한 바를 모두 이루었으니 적멸보궁에서 기도한 덕분이 아닌가 합니다.
길고 긴 순례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늘 은은하시길 합장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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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상하고 세세한 순례기에 감사드리옵고
항상 즐거움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_()_
자세히 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도도량에서 잘못된 글이 걸리거나 _()_ _(())_
오자가 발견되면 즉시 시정해서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런 시도가 없다는 것이 공통된 것 같다는 것이
순례 때 마다 느끼는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