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으면 늘 느끼는 바이지만, 내 마음과 성경에 나타난 자의 심령이 어떻게 이렇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점이다. 시인은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절)라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런 갈급함이 없다.
만약 내가 갈급해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를 찾기에 갈급함’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에 갈급해 있다. 그러니 이런 심정으로 성경을 읽으니 어찌 성경이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다. 아니 성도라고 하는 자들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없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따라 살아가면서 가끔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그 하나님을 찾을 뿐이다.
이처럼 자기 몸뚱이 하나 위해 살아가는 자들의 눈에 주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3, 10절)는 비아냥거림이다. ‘당신이 그렇게 간절히 찾고 구하는 하나님을 한 번이라도 보기는 보았느냐’는 것이고, ‘그분이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는 것이다.
만약 모든 이들의 마음이 이러하다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바라는 그런 것을 사모한 것이 아니라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2절)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시편에 등장하는 이런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는지 이것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과 평안을 누리면서 이런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내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답답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염려와 걱정은 다 쓸데없는 것이다.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7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다가오시는 분이다. 이 엄청난 은총의 물결이 출렁일 때 우리는 그 속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에 사로잡힐 때 시인과 같은 고백과 감사는 자동적으로 터져 나온다.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만나실 때 십자가에서만 만나주신다. 십자가를 벗어나서는 만남이 불가능하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성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채 주님을 만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성도가 자기 잘남을 자랑한다거나 자신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주께 요청하는 식의 관계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주님이 찾아오실 때 자신이 흘린 피를 우리에게 보이신다. 그 피를 보는 성도는 어떤 식의 반응이 나타날까? 그저 자신이 죽도록 밉고, 예수님을 보면 한 없이 죄스러운 마음뿐이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고맙고 감사한 그런 마음일 것이다. 주님과 이런 관계 속에 놓인 자는 시인의 마음처럼 주님만을 사모하며 갈급해 한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런 환경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풍토 속에서 주를 찾고,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으니 어찌 조롱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으랴! 이것 때문에 성도가 때때로 낙망하고 불안해하기도 한다(5절).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자칫하면 이런 방법이 너무도 실효성이 없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아무 실효성 없이 보이는 그 주를 바라봄이 유일한 소망이며 해답이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절). 도무지 세상이 알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이제 시인이 주를 갈망하는 이유를 알겠는가? 주님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 은혜 외에는 달리 살 길이 없음을 깨달은 자이기에 늘 그분만을 갈망하게 되어 있다. 이들 역시 육을 가진 인간이기에 세상 물질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지만 그것만으로 살 수 없음을 아는 자들이기에 그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 신령한 것은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그 주님께만 있다. 그러니 성도는 당연히 그 십자가 피만을 믿고 바랄 뿐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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