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탐방] [36] 국보 제 36호 상원사 동종
공식명칭 : 상원사 동종 (上院寺 銅鍾)
지 정 일 : 1962.12.20
분류 : 유물 / 불교공예/ 의식법구/ 의식법구
수량/면적 : 1기
시대 : 통일신라
주소 : 강원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로 1211-50, 상원사 (동산리)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으로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졌다.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지름 91cm이다.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며 종 몸체의 아래와 위의 끝부분이 안으로 좁혀지는 고풍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으로 한국 종의 고유한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문수신앙의 성지(聖地)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백두대간의 중간쯤인 오대산은 그 자락이 깊고 넓을뿐 아니라 산세가 크고 육중하지만 부드러운 흙산으로 일명 육산(肉山)이라고 하며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중대의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대산이라고 한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상주한다고 알려진 불교의 성지이며, 자장 스님이 당나라에 건너가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 후 신라로 건너와 이곳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 했으나 뵙지는 못한 곳이다. 신라 효소왕때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과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에 들어가 참배하다가 동대에서 1만 관음보살, 남대에서 1만 지장보살, 서대에서 1만 대세지보살, 북대에서 1만 미륵보살, 중대에서 1만 문수보살이 나타나 일일이 참례를 하였다고 하며, 그후 왕위에 오른 효명태자(성덕왕)가 재위 4년인 서기 705년에 절을 짓고 진여원(眞如院)이라 하니 상원사의 시작이다.
그 뒤로 상원사 이야기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다가 조선시대 이르러 세조가 겪은 이적(異蹟) 두 가지가 전설처럼 전해지면서 유명해지는데 그중에서도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이야기는 지금도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중창권선문(국보 제292호)로 남아 그저 전설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실화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니 우리나라 적멸보궁 신화의 주인공 자장율사도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뵙지 못했는데 수양대군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다.
국내 최고(最古), 최상(最上)의 상원사 동종
상원사 동종은 현존(現存)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제일 아름다운 종으로 신라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조성되어 조선 예종(睿宗) 원년(元年, 1469)에 상원사로 옮겨졌다. 원래는 안동의 어느 절에 있다가 무슨 연유인지 나중에는 안동도호부의 남문 누각으로 옮겨져 시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상원사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피부병을 고친 세조의 전폭적인 지지로 대규모 중창불사를 벌여 1466년에 낙성했지만 걸맞는 종(鐘)을 만들지 못하여 전국을 수배하여 가장 아름답고 소리가 좋은 종을 찾아 보내라는 세조의 어명에 의거하여 안동에 있던 이 종을 상원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3천근이 넘는 동종(銅鐘)을 한양으로 옮기려니 아무리 힘을 써도 꼼짝 하지 않아서 고향을 떠나기 싫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종에 붙어있는 종유(鐘乳)를 하나 떼내어 그 자리에 묻어주었더니 그제야 움직여서 이곳까지 옮겼다는 것인데 사실은 옮기던중 험난한 고갯길에서 취급부주의로 넘어져 하나가 부러졌다는것이며 이를 숨기기위하여 관계자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반박(?)하는 說도 있으니 어차피 기록으로 남아있지도 않은 그 과정을 굳이 부정적인 소견으로 아름다운 스토리 텔링을 험담할 것 까지는 없어 보인다.
▲상원사 종각, 통상의 범종각이라 하지 않고 동정각(動靜閣)이라고 초서로 흘려 썼는데 탄허(呑虛)스님 글씨이다. 넓직한 종각의 중앙에 유리벽으로 둘러쌓인 진품 국보 동종, 오른쪽은 평상시 타종하며 사용하는 복제품이다.
이렇게 안동에서 강원도 오대산까지 올라 온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은 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그리고 임진왜란때 일본이 훔쳐간 진주의 연지사 종과 함께 신라시대 3대 범종으로 꼽히는데 하나는 일본에 보관중이며 성덕대왕 신종과 상원사 동종은 모두 더 이상 종(鐘)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박제된 모습으로 영구 보존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상원사 동종은 진품과 복제품이 함께 종루에 걸려있기는 하나 사방을 투명유리로 둘러막아 보호하고 있으니 그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야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꼼짝없이 갇혀있는 국보급 동종의 처지가 못내 불쌍하고 가련하다.
상원사 동종(銅鐘)의 구조와 명칭
상원사 동종은 높이가 167㎝이며 입지름은 91㎝로 높이 3. 75m, 입지름 2.27m로 20톤 가까운 성덕대왕 신종보다 크기는 절반이하지만 제작연도가 45년이나 앞서는 한국산 종의 모범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중앙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 조각이 첫 눈에 띄는데 공후와 생으로 보이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하늘로 오르는듯 옷자락이 하늘거리는 모습이며, 앞 뒤 2개의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자리인 2개의 둥근 당좌(撞座)가 역시 화려한 무늬에 둘러쌓인채 차분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8장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뿐만아니라 상대와 하대의 화려한 당초문과 정교한 새김은 탄성을 자아내며 다시 눈길을 맨 위로 올리면 한국 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음통과 용뉴가 살아있는 듯 생동감있게 보인다.
국보를 만난 반가움에 한달음에 달려들어 구석구석 살펴보았으나 조금 뒤로 물러서보면 전체적인 유선형의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 몸체는 아랫부분에 이르러는 다시 약간 오무라든 모습이며, 비천상과 당좌 조각 사이 윗쪽으로 자리잡은 네모의 유곽(乳廓) 안에 각각 9개씩의 종유(鐘乳)가 뚜렷한데 과연 그중 하나는 부러진듯 없으니 안동에 묻어놓고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라는 증거이다.
한걸음쯤 물러서보니 종이 참으로 아담하고 우아하며 거대하지는 않으나 장중하고 단정한것이 과연 국보급이다.
다만 반사광이 어른거리는 유리로 사방을 둘러놓으니 시야가 맑지 않고 카메라에 담기도 불편하니 보호대책으로는 하책(下策)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鐘紐), 움켜쥔 발톱과 크게 벌린 입모양이 마치 살아 있는 듯 하다. 고래가 무서워 크게 운다는 용의 3男 포뢰(蒲牢)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종을 치는 당목(撞木)을 고래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용 모양 고리 뒤로 세마디 대나무 모양으로 솟아있는 것이 한국 종에만 있다는 음통(音筒)인데 각종 꽃 장식이 화려하다.
종의 머리, 또는 뚜껑등 윗부분에 해당하는 곳을 천판이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용뉴가 매달려 있으며 그 옆면의 여백에는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이 종의 이름과 조성 연대등 제작 연유(緣由)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開元十三年乙牙正月 八日鐘成記文部合鍮 三千三白餘兩重普衆 都唯乃孝□歲道直
衆僧忠七沖安貞應 旦越有休大舍宅夫人 休道里德香舍上安舍 照南毛匠舍□大舍
개원 13년 을축 3월8일에 종이 완성되어서 이를 기록한다(開元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鐘成記之)
여기서 開元十三年(개원십삼년)은 신라 성덕왕 25년(725)에 해당하니 명확히 언제 주조 되었는지 알 수 있으 며, 대부분 이러한 종명(鐘銘)이 종신(鍾身)에 새겨지는 것과는 달리 상판 용뉴 좌우에 새긴 것도 이례적이다. 또한 그 내용에 시주자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일반적인 민간의 시주가 아니라 국책사업으로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며, 종을 제조하는 데 들어간 놋쇠가 모두 3,300 정(鋌)이었음을 밝히고, 제작에 참여한 승려와 감독자, 관직 등을 열거하고 있다.
▲천판이라 불리우는 동종의 상판, 용뉴 좌우에 음각으로 새긴 명문(銘文)이 보인다.
▲종의 윗부분을 상대라고 하는데 아랫부분 하대와 대칭되며 화려한 당초문을 새긴 넓은 띠 모양이다. 또한 그 아래 사각형의 띠모양이 종유(鐘乳) 9개씩을 담고 있는 유곽(乳廓)인데 과연 종유(鐘乳) 하나가 떨어지고 없다. 이와 같은 4개의 유곽에 각각 9개의 종유를 붙인 모습은 이후 한국 종의 전형(典型)이 되어 후대에 계승된다.
▲종신(鐘身) 중앙에 새겨진 2쌍의 비천상(飛天像) 무릎은 접히고 천의(天衣) 옷자락은 바람에 날리는 모습으로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였으며, 우리나라 고유악기가 아닌 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것은 서역이나 중국을 거쳐와 자리잡은 표현양식으로 보이는데 상원사 동종처럼 실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奏樂飛天)의 모습은 흔치 않은 것이다.
▲비천상 사이에는 2개의 당좌, 즉 당목이 종을 치는 자리가 있는데 8엽의 연꽃판이 가운데에 있고 당초문으로 주위를 둘렀다.
▲붕긋하게 불러지며 내려오던 종신(鐘身)은 당좌나 비천상을 지나면서 다시 좁게 오그라지믄 모습을 띠면서 하대로 마무리하는데 하대 역시 상대처럼 넓은 띠모양에 화려한 당초문을 새겨 아름답게 조각한 모습이다. 그런데 하대를 찬찬히 살펴보면 이곳에도 드문 드문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이 보여 흥미롭다. 이 주악상은 상대에도 비슷하게 새겨져 있지만 관찰이 쉽지 않다.
귀중한 국보 동종이라고 방탄(?) 유리로 감싸 놓으니 번들거려 육안으로 관찰하기도 어렵고 카메라에 사진을 담기도 불편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아래쪽 허공으로 허리를 굽혀 숙인채 다시 올려다보거나 까치발을 딛고 카메라만 유리 너머로 들어올려 사진을 찍는등 난관을 극복하려 애를 쓴다. 주간에만 개방한다던지 융통성이 가능 할 텐데 참 아쉬운 일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이곳 상원사와 월정사 등은 철수하는 아군이 적군의 사용을 방지하려 불태우게 되었으며 일차로 월정사를 불태운 국군들이 상원사에 이르니 방한암 스님이 '나와 함께 불사르라'고 법당에서 버티는 바람에 문짝 몇개만 불태우고 내려갔다는데 그 바람에 이 동종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에 불타버린 월정사에서는 804년에 제작된 영양의 선림원터 범종이 완전히 불타 녹아버려 상원사 동종급 문화재가 사라져버렸다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이후 한국 종은 대부분이 음통과 종뉴를 위에 매달고 아랫부분이 가장 불룩한 형태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좁혀지는 붕긋하며 아담한 형태의 종신(鐘身)을 갖게 되었으며, 상대와 하대, 4개의 유곽을 갖추고 비천상과 당좌를 새기는 전형(典型)을 갖추게 된다.
자료제공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