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관리와 선비들은 누정을 건립하고, 직접 누정을 유람하며 글을 남기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했다. 누정문화 활동의 주역은 현직 관리보다는 퇴임한 선비나 처사로 지내던 지식인들이었다. 누정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자에 남긴 자취로 보면 자연 속에 소요자적하거나 은둔하던 지식인들의 공이 절대적이다. 지식인들은 각박한 현실을 피해 누정에서 아름다운 산수를 즐기며, 거기서 정신적 즐거움을 찾고 자연을 배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했다. 우리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선비문화나 산수문화는 누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누정문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산김씨 600년 세거지인 오천군자리 전경
조선의 사대부들은 집안에 정원을 만드는 데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간단한 나무 몇 그루 심는 정도였다. 아기자기한 정원 단장에 온 힘을 기울인 일본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한반도는 국토의 70%가 산이다. 집 밖을 조금만 나가면 경치 좋은 산세와 계곡이 널려 있다. 이 풍광 좋은 계곡에다가 간단하게 정자만 하나 얽어 놓으면 주변 10리 자연이 모두 내 것이 된다. 굳이 돈 들여가면서 집안에다가 정원을 가꿀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사무라이의 나라였던 일본의 경우에는 집 밖의 야외에다가 쉽게 정자를 지을 수 없었다. 방비가 허술한 야외의 정자에서 놀다가는 언제든지 반대파의 자객으로부터 기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안전한 곳, 물로 둘러싼 연못 가운데에다가 다실(茶室)을 만들었다. 닌자의 습격에 대비한 결과이다. 그 결과로 한국적인 풍류는 바위 계곡에 있는 '정자'라면 일본적인 풍류는 집안 정원의 '다실'에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할 탁청정은 ‘오천군자리(烏川君子里)’에 있다. 오천은 ‘물이 맑을 때 물밑에 깔린 돌을 멀리서 보면 검게 보인다고 하여 오천이라 했다. ‘까마귀 오’자를 이두식으로 읽으면 ‘외’자와 통해 ‘외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천군자리는 광산김씨 예안파 문중의 다양한 유적들이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 위기에 놓이자 집단으로 이건하여 조성한 곳이다.
탁청정은 영남지방의 개인이 지은 누정 중에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는다.
탁청정은 광산김씨 예안파 안동 입향조인 김효로의 둘째 아들 탁청정 김유(金綏, 1491~1552)가 1541년(중종 36)에 세운 종가에 딸린 정자이다. 당호의 의미는 공자가 말하기를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굴원의 어부사에서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는다”라는 말에서 맑고 깨끗한 선비의 정신을 의미한다. 원래 낙동강에 인접한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인하여 197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으로 전체 6칸 건물로 위풍이 당당하여 영남을 대표할 만한 정자이다. 정자 앞에는 연못을 조성했다. 사각 연못을 집 가까이 두는 것은 퇴계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도산서당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퇴계는 한서암에서도 이런 사각 연못을 집 가까이에 두었다. 또 풍산의 체화정과 병산서원의 만대루 앞, 임청각 군자정에서도 연못을 볼 수 있다. 못을 판 이유는 당연히 연못을 가지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화기(火氣)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한 풍수적 이유이기도 하다.
탁청정 편액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다. 해서체로 힘이 느껴진다.
정자의 주인 김유 선생의 자는 유지(綏之)이고 호는 탁청정(濯淸亭)이다. 김유는 광산김씨 오천리 입향조인 효로의 아들로 1525년(중종 20)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형님인 관찰사 김연을 대신하여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성품이 호협하고 무예에 뛰어났으며 빈객을 좋아했다. 그는 집 가까이 탁청정을 짓고 예안고을을 지나는 나그네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이러한 성품을 지닌 선생이었기에 집 안에 머물러 부친을 봉양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으며 안동 3대 조리서의 하나인 수운잡방(需雲雜方)을 남긴 것은 어쩌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수운잡방』 ‘수운(需雲)’은 격조 높은 음식문화를 뜻하는 것이고, ‘잡방(雜方)’은 여러 가지 방법이라는 뜻이다.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서 “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운상우천수군자이음식연락)”, 즉 ‘구름 위 하늘나라에서는 먹고 마시게 하며 잔치와 풍류로 군자를 대접한다.’는 데서 연유된 것으로 풍류를 아는 사람들에게 걸맞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뜻한다.
수운잡방은 상·하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편은 행서체로 쓰여있으며 탁청정 김유가 저술한 것으로 86가지의 요리법이 기술되어 있다. 초서체로 쓰여있는 하편은 계암(溪巖) 김령(金坽, 1577~1641)에 의해 저술된 것으로 모두 35가지의 조리법이 기술되어 있다. 수운잡방은 조선시대 전기의 우리나라 음식의 술 담는 법을 비롯하여 모두 121가지의 음식 조리법과 가공법이 기록되어 있는 요리서로서 술빚기와 관련한 항목이 59가지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수운잡방은 궁중의 요리 전문가에 의해서 저술된 조리서가 아닌 민간의 저명한 유학자가 직접 경험하고 연구한 조리 방법을 저술한 저서라는데 그 가치가 크다. 당시 유학자라는 신분은 상층계급을 선도하는 계급으로서 부녀자들의 영역인 요리라는 영역에 관심을 갖고 이렇게 저서까지 저술한 것은 분명 획기적인 작업일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또 100여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을 거치고 한 세대가 아닌 선조의 작업을 후대가 이어 편찬한 것은 단순한 요리서가 아닌 시대적 상황이나 요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충분히 반영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먹는 것에 대한 요리가 아니고 사대부가 생활의 기준과 가치를 반영한 요리로써의 역할을 생각하여 저술한 것임이 틀림없으니, 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수운잡방에 기록된 ‘오정주’를 재현했다. 만병을 다스리고, 허한 것을 보호하며 무병장수하고, 백발도 검게 되며, 빠진 이도 난다고 한다.
(사진 출처 수운잡방 홈페이지 http://www.soowoonjapbang.com)
선생의 성품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글은 퇴계 이황이 지은 「탁청정묘지명」에도 드러난다. “공은 성품이 호협하여 빈객을 좋아했는데, 현감공이 우암 위에 정자를 세워 낙동강을 굽어보기 때문에 침류정이라 이름하였다. 또 집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공이 모두 수리하여 확장하고 손님을 맞아 즐기며 혹은 밤을 새우되 피로한 빛이 없으니 선비들이 이 고을을 지날 때면 반드시 찾아와 즐겼다. 비록 옷이 낡고 갓이 찌그러진 사람이라도 친절히 대접하고 만일 옳지 못한 사람을 보면 준엄하게 꾸짖어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퇴계가 선생을 평한 것처럼 탁청정은 주인의 호방한 기질과 잘 어울려 그 기품이 당당하다. 농암 이현보 선생도 탁청정에 대한 시를 남기고 있다.
계단 아래 사각 연못이 있고, 연못 위에 정자가 있네 난간을 타 넘어 바람이 불어드니 서늘한 기운이 감도누나 시내와 계곡이 휘도는 곳 앞산이 둘러싸고 처마 끝으로 나뉜 하늘 아랜 북두칠성 비껴있네 대청 모퉁이에 술 단지는 차 있어 취객을 더욱 눌러 앉히는데 집 한쪽을 포장으로 막아도 이웃 사람 모여드는 것 막을 수 없네 우리 같이 늙어 물러나 앉아 하릴없는 이 많아라 곁으로 슬쩍 다가와 맑은 술맛을 서로 나눠가네 |
이 시에는 탁청정의 자연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골짜기와 시내를 끼고 산으로 둘러 막혀 있는 곳에 사각 연못을 파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대청 한쪽에는 손님을 맞을 술항아리에 술이 익어가고 있으니 취객을 자꾸만 눌러앉게 만드는 선생의 정이 잘 드러나 있다.
탁청정에 올라 밖을 바라보면 오천군자리의 전경이 소담스럽게 다가온다.
누정의 참 기능과 역할은 누정을 바라보는 데 있지 않고 그곳에서 밖을 바라보는 경관에 있다.
누각과 정자는 거기에 올라 천천히 생각하고 보고 느낄 때만이 그 참 맛과 멋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