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깨어 일어나 앉았습니다. 며칠 동안 내가 주장했던 말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번 기회에 좀 확실하게 알자는 마음이 일어나서 그 대목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해당 경전의 해설 부분과 인터넷의 모(某)카페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주로 연기( 및 연기의 정형구)와 육내입처 부분을 찾아보았습니다.
◉ 연기와 관련하여
* 연기라는 말이 직접 쓰이는 곳 : S12:1, S12:2, S12:20, S12:37, S12:41, S12:60, S12:61, S12:62
* 연기의 정형구가 나타나는 곳 : S12:21, S12:22, S12:37, S12:41, S12:49, S12:61, S12:62 + (S55:28, A10:92, M38, S12:49)
* ①연기, ②연기의 정형구, ③십이연기의 생성-소멸의 세 가지를 모두 갖춘 경전 : S12:37, S12:41, S12:61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 견해를 유지 또는 수정 또는 페기합니다. (제 공부가 더 진행되면 또 바뀔 수도 있습니다.)
1. 연기의 범위
* 이전 견해 : 저는 연기를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는 것만을 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지금의 이해 : 연기는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일어나는 것과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하는 것을 다 말씀하셨구나!’로 바뀌었습니다.
2. 연기의 정형구에서 말하는 ‘이것’과 ‘저것’의 범위
* 이전 견해 :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수비고우뇌
* 지금의 이해 : 이전 견해 + (경전에서 배우다가 다른 항목이 나오면 추가하겠습니다.)
3. 연기의 정형구의 해석 방법
* 이전 견해 : ‘있다-일어난다’, ‘없다-소멸한다’에서 있다와 일어난다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지금의 이해 : 제게는 지금도 이 두 개가 여기서 특별한 뜻이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전처럼 (도닦음 경(S12:3) 등의 가르침을 사유하면서)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 육내입처와 관련하여
4. <‘안과 색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난다.’ 는 연기이다>에 대하여
* 이전 견해 : 연기가 아니다.
* 며칠 전에 바뀐 견해 : 연기이다.
* 지금의 이해 : 앞의 두 가지 경우의 견해를 버리고 지금부터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이 부분는 분수를 넘어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5. <안과 색은 서로 연기된 것이다.>에 대하여
* 이전 견해 : 아니다.
* 지금의 이해 : 저는 이전 견해를 버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부분에서 제 분수를 넘어 말하지 않겠습니다.
참고 1. 연기의 정형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
참고 2 – 도닦음 경(S12:3)
10.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있을 때 촉(觸)이 있으며 무엇을 조건으로 하여 촉이 있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통해서(여리작의(如理作意)하여) 마침내 ‘육입(六入)이 있을 때 촉이 있으며 육입을 조건으로 하여 촉이 있다’라고 지혜로써 관통하였다.”
23.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없을 때 촉(觸)이 없으며 무엇이 소멸할 때 촉이 소멸하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러자 위빳시 보살은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을 통해서(여리작의(如理作意)하여) 마침내 ‘육입(六入)이 없을 때 촉이 없으며 육입이 소멸하기 때문에 촉이 소멸한다’라고 지혜로써 관통하였다.”
참고 3 - 유심히 들음 경(S35:113)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3.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있다. 이 셋의 화합이 촉(觸)이다. 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가, 취를 조건으로 유가, 유를 조건으로 생이, 생을 조건으로 노사우비고우뇌가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 이하 생략)”
첫댓글 고요2님과 같이, '글자'를 절대적 기준으로 모든 것을 구별하면서 어떤 주장을 하려면요. 그것도, 타인에게 "경전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합니다" 혹은 "경전에는 그렇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못된 겁니다"는 말을 하려면 말입니다. 최소한 다음의 두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최소한의 "양심"을 갖췄다면 그래요.
1. 고요2님이, '빨리어 경전 글자주의'이므로 당연히 삼장법사일 필요는 없구요, 경전은 완벽하게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경전이 빨리어죠? 따라서 문자적으로 가능한 여러 번역을 모두 외우고 있어야 됩니다. 즉 빨리어에도 정통해야 합니다. 단어만 알면, '번역'이 그냥 가능합니까?
영어 철학서적은, 영문학자보다는, 철학자의 번역이 보다 정확합니다. 전문적 번역은, 이미 '체계에 입각한 의미 파악'작업입니다. 단순한 글자 번역이 아닙니다. 구글 번역이 일상적 대화는 어느 정도 수준이상 번역이 되어도, 전문서적은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체계에 입각한 의미 파악'은 이미 번역자등의 머리속에 체계를 갖춘 사고가 투영되는 겁니다. '글자 그대로' 일수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문제가 있으므로, '글자주의'의 극단적 형태는요. 이슬람의 경우를 예로 들면요, 아랍어등으로 된 코란등을 번역조차 하지 않습니다.
2. 그러면 고요2님이, 위의 첫번째 문제를 (실제 불가능하지만)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래도 다른 문제가 나와요. 과거 여러 차례 지적한 사항 중 일부만 거론해 봅시다. '우다나(자설경)'에서는 맨 처음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로 열거하며 연기의 정형구와 12연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님들이 중요시하는 '초전법륜경'에서는 사성제만 나오고 12연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님들과 같은 글자주의에 따라가자면요, 둘 중 하나는 배제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어느 것을 배제할 겁니까? 결국 님들의 기호나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님들의 기호나 판단이 경전 위에 군림하는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님들이 내세운 글자주의와 모순입니다. 결국 이 두번째 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이해가 아직 불충분했음을 긍정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고요2님 경전 내려놓고 다른 사람 말에 귀한번 기울여봐요. 그리고 다시 경전을 읽으면 그간 보이지 않던 것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보일 거예요.
잠에서 깨니 어떤 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 이렇게 이해하면 되겠구나.’ 하고 그것을 말해보려고 글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참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개 하려고 합니다.
혹시 제 글을 참고하시려는 분이 한두 분이라도 계신다면 그분(들)께
* 아시다시피 저는 호흡 보기 연습을 제대로 못해냅니다. 그런데 시간을 1분, 2분, 이렇게 나누어서 해보니까 효과가 있었습니다.
* 예를 들어 제가 한 시간 동안 앉아있었는데, 호흡 보는 것은 1분도 못하고 59분 동안 망상에 휘둘렸다면 참 한심한 일입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을 나누어 1분하고 다시 타이머를 맞추고 2분 하고, 또 타이머를 맞추어서 3분 하고, ... 이렇게 하면
비록 중간 중간에 끊어지지만 1시간 동안 더 많이 호흡 보기 연습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저와 같이 혹시라도 호흡 보기 연습이 잘 안 되시는 분이 계시다면 이렇게라도 연습하는 것은 어떨까 하여 올려보았습니다.
*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해태와 혼침’만 오지 않는다면 굳이 이런 방법은 필요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논의하다가 궁지에 몰린다고 생각하시어, 약자를 동정하는 인지상정으로 저에게 연민을 내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연민은, ‘이제는 세속에서의 연민 말고 범천의 연민을 배우면 어떨까요?’라고. 자비희사의 두 번째인 그 연민
(悲)은 거룩한 마음에 속한다고 합니다. 거룩한 마음이기 때문에 남의 괴로움에 나 자신이 빠지지 않고 거룩한 마음에서 연민의 마음을 낸다고 합니다.
* 그러니까 내가 연민하는 그 사람처럼 같이 나도 괴로움을 겪고 슬픔을 겪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초선에 들어 법을 관찰한다고 할 때, 그는 초선의 행복한 느낌에 머물러 법을 관찰하듯이, 그렇게 범천의 거룩한 경지를 생각하며 연민을 내 보시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 그리고 앞으로 제 때문에 걱정이나 근심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몸과 말과 마노(意)의 행위를 제어하도록 계속 배워나가겠습니다.
* 그리고 제가 이 본글을 올린 이유는, 저는 이전의
견해를 수정, 폐기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무쪼록 혹시라도 저에게 연민을 내신 분이 계시다면 깊이 감사드립니다.
* 한편, 화엄의 대부분의 회원님들께서는 ‘고요2는 원래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니 특별한 것은 없을 거야.’하시면서 시간이 나시면 이 글을 한번 읽어주실 것이고, 시간이 안 나시면 안 읽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래서 이 글은 혼자 가지고 있지 말고, 혹시라도 계실지 모르는, 제 견해를 참고하시는 한두 분께 보시라고 올리게 되었는데,
* 그것은 제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가벼움인 것 같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1. 방문객님의 ‘글자주의’와 관련한 지적을 읽고
* 저는 우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글이, 화엄의 회원분들에게 고요2의 잘못 배운 법(法)이나 잘못된 견해를 퍼뜨릴 수도 있겠구나.’하고.
* 또 제 글이 ‘화엄의 화합을 깨뜨릴 수도 있겠구나.’ 하고.
* 한편, 그렇다면 저는 ‘글자주의’의 폐해에 빠지거나 극단으로는 흐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 방문객님이 두 경을 언급하시면서 제기한 주장에 대하여
* 처음에는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 그러다가 자꾸 생각해보니까 그 뜻이 좀 이해되었습니다.
* 그래서 제가 배운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깨달음을 정의(定義)하거나 깨달음의 내용을 밝힐 때, ‘그래서 나는 부처이다’는 용례에서부터 ‘여래는 이것을 깨달았고 실현하였다’는 용례뿐만 아니라, ‘여래가 스스로 수승하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선언한 법들’이라는 용례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 어제는 잘 모른 채로 지나갔는데 오늘 잠이 깨어 궁리해보니까 방문객님의 주장이 무슨 뜻인지 더 이해되고 거기에 대해 어떤 한 가지 풀이가 떠올랐습니다.
그 대답을 이야기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어디 어디에 무명산이 있었고, 그 무명산을 넘어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간 사람에게 무명산을 넘어가는 일에 대해서 물었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혼자 계실 때에는 구덩이를 지나가면 무명산을 넘어간 것이라고 하시고, 학생1에게는 사과나무를 보면 무명산을 넘어간 것이라고 하시고, 학생2에게는 동굴을 보게 되면 무명산을 넘어간 것이라고 하시고, 학생3에게는 사슴을 보게 되면 무명산을 넘어간 것이라고 하시고, ... 이렇게 다르게 말씀을 하시니 저희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하고.
그러자 넘어간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는
무명산을 넘어가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 산의 전체 흙 무더기 중에서 내가 지금 먼지 한 덩이를 손톱 끝에 두는 것 만큼의 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동쪽에서도 올라오고 서쪽에서도 올라오고 남쪽에서도 올라오고 북쪽에서도 올라옵니다. 그러면 나는 동쪽에서 올라온 사람에게는 동쪽에 있는 것을 말해주고, 서쪽에서 올라온 사람에게는 서쪽에 있는 것을 말해주고,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에게는 남쪽에 있는 것을 말해주고, 북쪽에서 올라온 사람에게는 북쪽에 있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봄에 올라온 사람에게는 봄에 거기에 있는 것으로, 여름에
올라온 사람에게는 여름에 거기 있는 것으로, 가을에 올라온 사람에게는 가을에 거기에 있는 것으로, 겨울에 올라온 사람에게는 겨울에 거기에 있는 것으로 말해줍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내가 알려준 것을 보게 되면 무명산을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바로 넘어가는(넘어간) 그 자리에서 자기가 오지 않은 다른 방향에 있는 것들을 둘러 볼 수도 있고, 자기가 오지 않은 다른 계절에 있는 것들을 둘러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명산을 넘어가는(넘어간) 자리에 있는 것을 방항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각 말해주었던 겁니다. 물론 나는 모든 방향에 있는 것, 모든 계절에 있는 것을 다 알고 보았습니다. ..."
(참고 : 어떤 나무를 계절에 따라 다르게 보았다는 비유는 경전에 나오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제가 찾지 못했습니다.
동서남북 방향의 비유가, 이 의미로 쓰인 경우가 있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고요2님, 타인(의 감정등)에 대한 너무 지나친 배려는 타인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일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하는 겁니다. 자기 앞가림은 다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지나친 소개 역시 '수다'에 지나지 않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든, 수다를 떨든, 보통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편인데요. 읽게 되면, 너무 가독성이 떨어져 불편합니다. 쓸데 없이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요.
고요2님처럼, 타이머로 1분씩 늘려가며 호흡 연습을 하면 더 능률적인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그렇게 하면 될 겁니다.
상대방 지적에 그냥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 좋겠습니다. 사성제와 연기는 다르지만, 모두 깨달으셨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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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문제로 삼은 거는요. '사성제는 연기를 풀어 놓은 것' 내지 '연기가 중도'등의 견해에, 글자주의에 빠진 분들이 "경전에는 그렇게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잘못된 겁니다"라고 반박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글자주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죠. 경전에 따르면...연기는 8정도 중 정견의 내용인 '중'일 뿐이며, 8정도만 중도입니다. 심지어 [ 삼법인의 소위 '무상-고-무아'가 연기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러니 '무상-고-무아'와 연기를 연결시켜 말하는 것은 그르다 : 삼법인과 사성제 그리고 연기는 서로 다르게 적용되는 원리다 ]는 취지까지 밝힙니다. 이미 지적했듯, 그러한 반박에 다른 근거는 없습니다. '글자'가 기준이죠.
실천적으로요. 글자주의에서 그러한 괴상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알아요. '수행도 괴로움이면, 수행할 까닭이 뭔가'와 같은 의문이 생기는 건데요. 그래서 수행과 그 성취는, 조건지어졌더라도(형성된 거라도), 괴로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실천적으로 차이가 나지도 않아요. '모든 조건지어진 것 즉 연기에 따르는 것이 괴로움'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수행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여러 경전에서는 오히려, 글자주의에서 핵심으로 강조하는 색계4선조차 형성된 것이며 떠나야 함을 천명합니다. 열반만 행복은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괴로움일 뿐이지만, 열반이 아니면서 오래도록 유익한 행복도 참 많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 번째 지적하신 것
* 앞으로는 때와 장소를 잘 가리겠습니다.
- 예. 사성제와 연기는 다르지만 모두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라고 봅니다.
2. 두 번째 지적하신 것
* 저는 지금까지 방문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그렇게 행동해왔습니다
* 그 이유는 경전에서 가르쳐 주시는 표현 그대로 사용해도 뜻을 이해하고 수행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왜 경전에서 가르쳐주시는 것과는 다르게 표현하여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가? 였습니다.
* 저는, 사람들이 경전에 없는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 법들이 서로 섞여서 가르침이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쇠퇴할 것이라고생각했습니다이상입니다
'사성제는 연기를 풀어 놓은 것' 내지 '연기가 중도'는 맞는 말입니다. 오히려 글자주의처럼 하면, 가르침이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쇠퇴합니다. 아함부의 아리타경(빨리어 경전의 알라가뚜빠마경)에서 "법을 그릇되게 잡으면 오히려 해롭다"는 취지가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고요2님과 같은 글자주의'의 주장대로라면, 부처님께서' 연기의 정형구와 12연기'만 말한 이에게는, 오직 정견만 이야기한게 됩니다. 그러한 주장은, 결국 부처님께서 그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가르쳐 준 게 됩니다. 하지만 12연기등 연기를 알면, 인과의 준엄함과 무서움도 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과를 아는 이는, 8정도도 압니다.
===
'괴로움의 원인은 끌어모음(행위 즉 업)'이지만, 끌어모음을 조건으로 괴로움이 있지만...그러한 측면은 연기와 무관하다? 있음의 측면을 제시하는 연기의 정형구와 그 예시로 등장한 12연기에서, "이처럼 모든 괴로움이 있다 내지는 발생한다"고 서술되어 있는데도? 그런데 '괴로움의 원인은 끌어모음(행위 즉 업)'이라는 말을 연기로 이해하면, 그르다? 부처님 말씀이 아니다? 연기와 사성제는 따로다?
도대체 누가 이해를 그르치고, 누가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해 쇠퇴시키는 겁니까? 우기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보전하는 겁니까? 그렇게 조각조각 내면, 법의 이해를 그르칩니다. 분란만 만들 뿐더러, 큰 장애가 될 겁니다.
* 저는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 오늘부터 저는 지금까지 해왔던 저의 이 행위 – 이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던 일 – 를 그만 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