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부마였던 풍원위(豊原尉) 임숭재의 모표로 봉분 앞에 있다. 양기는 "崇德大夫豊原尉任公之墓 徽淑翁主之墓" 이고, 음기는 正德六年四月 日"로 제작년대는 1511년(중종6년)으로 보인다. 임숭재 묘역 내의 모든 석물들은
크고 성대한데, 이 묘표도 규모가 크고 조각이 깊다. 화관 방부형이며 머릿돌과 비신은 하나의 대리석으로 조성하였고, 대석은 화강암이다. 머릿돌은 앞뒤 양 옆면 모두 큼지막한 구름문은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여 규칙적이고 리듬감이 있다. 대석의 상면부는 곡면으로만 처리하고 무늬는 마모되어 보이지 않는다. 하단부는 거의 매몰되었고, 머릿돌이 약간 큰 규모여서 다소 균형이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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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60권, 11년(1505 을축 / 명 홍치(弘治) 18년) 11월 1일(임오) 2번째기사 풍원위 임숭재의 졸기
숭재 는 임사홍(任士洪) 의 아들로서 성종(成宗) 의 딸 혜신 옹주(惠愼翁主) 에게 장가들었는데, 간흉하고 교활하기가 그 아비보다 심하여, 곡진히 위를 섬기어 사랑을 받으려고 왕의 행동을 엿보아 살펴서 상(上)이 마음 먹고 있는 것을 다 알았다. 그리하여 여러번 미녀(美女)를 바치니, 왕이 이로부터 매우 총애(寵愛)하고 신임하여, 숭재 의 집 사면에 있는 인가 40여 채를 헐어내고 담을 쌓아 창덕궁(昌德宮) 과 맞닿게 하였다. 그리고 매양 거기에 가서 마시고 노래하면서 밤을 세웠는데, 숭재 는 그 누이동생인 문성정(文城正) 이상(李湘) 의 처를 시침(侍寢)하게 하였으며, 왕은 옹주까지 아울러 간통하였다. 하루는 왕이 숭재 의 집 작은 정자에 앉아 이르기를, |
하니, 숭재 가 꿇어앉아서 아뢰기를, ‘신이 이 정자를 열어 놓고 을 기다린 지 오래이옵니다.’ |
하였다. 숭재 는 노래와 춤이 능하여 춤출 때에 혹 몸을 움츠리면 아이들처럼 온 몸의 지절(肢節)이 재롱을 떨어 기변(機變)의 교(巧)와 같았으며, 더욱 처용무(處容舞)에 능하고 또 활쏘기에 말타기도 약간 알았으므로, 왕이 기뻐하여 혹 노래도 하고 혹 춤도 추고 혹 활도 쏘고 혹 말도 달리는데, 날마다 숭재 와 짝이 되었다. 숭재 도 스스로 은총만을 믿고 그 아비와 더불어 날마다 흉모를 꾸며, 평일에 혐의 있는 자는 보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비록 비천한 무리라도 반드시 천거하여 쓰게 하였으므로, 조정을 흐리게 하고 왕의 악을 점점 더 자라게 하는 데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가 병들어 괴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를 보내서 할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 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몹시 슬퍼하여, 승지 윤순(尹珣) 을 보내 조문하게 하고 부의를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빈소를 차린 후에 왕은 그 처를 간통한 일이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관(棺)을 열고 무쇠 조각으로 시체의 입에 물려 진압(鎭壓)시켰다. |
【분류】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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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보현당 선생님 여주의 능묘와 석물이라는 책자를 1권 구했습니다. 비매품이라 살수는 없어 죄송합니다.
찾으셨는 줄 알고 기대했습니다. ^^ 아무튼 계속 추적하겠습니다. 임광재의 묘역은 찾을 수가 없네요~~
여주문화원에 문의했더니 임숭재의 묘가 아래성늪마을 정동일씨 집뒤에 있다고 하네요. 풍천위 임광재의묘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픙천위가 귀양가서 죽었다는 자료 까지는 찾았습니다.
어제 일요일에 보현당님과 함께 임사홍 묘소와 바로 옆에 있는 임원준 묘소를 답사하였는 데 바로 뒷마을에 임숭재, 숙휘옹주 묘가 있는 줄 몰랐네요. 사실 다음지도 스카이뷰에서는 이 부분에서 그저 '숭덕대부묘'라고만 나와 있어서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무시하였는 데 바로 임숭재 묘였군요.^.^
지난해 보현당님과 함께 갔었습니다.
아! 네~ 보현당님과 같이 가면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 가다보면 호기심도 생기고, 매우 유익한 시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