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JV : John 11
Jesus wept.
TR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
예수께서 우시더라
영문 성경에서는 이 구절이 가장 짧은 구절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서 제가 과거에 썼던 글들에 비해서 좀더 포괄적으로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라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죽음과 부활도 미리 내다보셨다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라사로의 죽음은 병사였지만, 예수 자신의 죽음은 참혹한 채찍질과 참소와 십자가 형벌의 고통과
피흘리심을 통과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심과 이후에 승천하심으로 이 세상을
떠나심까지를 내다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많은 고통 당하시며 죽어야 했던 이유 자체도, 인간들이 믿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인간들이 예수를 믿었다면
그들의 구원자 창조주 예수를 그토록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가 예수를 믿었더라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지실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이것까지가 예수께서 느끼셨던 큰 슬픔이었지만, 또한 라사로에 대한 인간적 사랑도 전혀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라사로의 죽음 또한 믿음이 부족한 세상에서 일어난
병사이고,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사망이 오고( 롬 5:12) 그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인류의 비애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더 종합적이고 포괄적으로 예수께서 우신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
옳다고 느껴진 것입니다.
1) 라사로에 대한 인간적 사랑을 통해본 인류세계에 죄가 들어온 이후의 비애, 믿음없는 비애
2) 라사로 주변 인사들의 믿음없음
3)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내다보심에서 온 인류 세계의 믿음없는 비애
이 모든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뱀을 통한 사탄의 말을 믿은데서부터
시작된 불신의 결말이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되었습니다.
2022. 5. 5 하토브
예수께서 우시더라 Jesus Wept ( John 11:35) εδακρυσεν Ο Ιησους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구절에 대하여 좀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제가 성경 구절들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 몇 구절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당신도 그 의미를 아신다면 참으로 좋아하실 것입니다.
먼저 이 구절은 영어 번역상으로는 가장 짧은 구절로 알려졌습니다. 한글 번역에서는 데살로니카 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 가 가장 짧은 구절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어 원어문으로도 Παντοτε Χαιρετε 판토테카이레테-항상기뻐하라
-가 가장 짧은 구절 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라사로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무상함을 보고 우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36절은 유대인들이 보라, 얼마나 그가 저를 사랑하였는지!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오해하시는 분들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몹시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를 슬퍼하여 우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30분도 못되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미 4절에서부터,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을 얻게 함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한번도 의심없이 라사로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아셨으며 아마 잠시후면 곧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분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언제든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배고플 때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모든 병든 자는 살리셨습니다. 문둥병도, 열병도, 소경도, 벙어리도 고치셨습니다. 물고기 잡는데도 선수였습니다(룩 5:4-8, 요 21:6), 귀가 칼로 떨어져 나간 사람도 붙이셨습니다. 마귀와의 대결에서도 이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슬퍼해야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분이 왜 우셨을까요?
그분은 더구나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된 다음에 찾아가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부활을 입증하는 문제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곧 잠시후면 나사로를 일으키실 것이었으므로 그를 슬퍼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도 우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기를 믿기만 하면 예수님은 무엇이든 해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일하시지 못하신 것입니다.
라사로의 주변의 유대인들은 슬퍼하며, 여러가지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슬펐습니다. 사람들이 믿기만 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크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인간이 할일은 하나님이 능히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요6:29).
예수님은 곧 나사로가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며, 다만 땅에 있는 인간들은 그것을 안믿는다는 것이 슬펐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요청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기도 드렸습니다. 그분은 아직 라사로가 움직이기도 전에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말을 들어주심을 감사드렸습니다( 41.42).
그분은 하나님이 곧 일하신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믿음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였지 않느냐?”(요 11:40)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안갖는 것은 성령 훼방죄에 관련되어 집니다. 죽을 때까지 안믿는 것은 바로 성령을 훼방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아도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하심을 못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31, 32)
당신이 호주까지 가야 하는데 돈도, 아무런 방법도 없습니다. 그때 당신을 위해 하나님의 전용기를 인천공항까지 하나님이 보내주셨고 다음으로 당신의 집까지 리무진 차를 보내주셔서 당신 집에 운전자가 노크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안믿고 거절한다면서, 그 리무진 운전자에게 “ 이 사기꾼아! 그런게 어디있어? 나는 안가!” 하고 거절한다면 하나님도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도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믿게하시며, 물고문, 전기고문하여 믿음을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하나님의 다른 성품에 크게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거룩하심에 위배될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혼자서의 원맨쇼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세계는 확장되고 크게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하나님이 간섭해야 하는 원래의 하나님의 영역으로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강압(Coercion)을 주장한 어거스틴, 중세의 종교재판소, 칼빈이 통치하던 제네바, 등은 이 점에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만일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하나님의 뜻과 같은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하나님의 영역은 크게 팽창될 것이며 그분은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조상들에게 선악과에 관한 금령을 주신다음에, 그들이 범죄할 때에 즉각 천사를 보내어 막지 않으신 이유입니다
그분이 인간들의 범죄를 막았다면 그때까지 창조하셨던 모든 일들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인간들이 범죄할 때마다 매번 천사를 보내어 막았어야 했을 것이며 그리하면 인간들은 로봇, 인형에 불과하여,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신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요 10:35)
그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사, 작은 신들을 많이 키우시고 싶어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에도 가죽옷들을 입혀주시고(창 3:21) 그때 죄없는 동물들이 피흘리게 하심으로 대속의 진리로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영역을 확대하고 계십니다. 수많은 작은 신(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서 예수께서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거하심같이, 인류 모두가 하나님안에, 하나님이 그 거듭난 인생들 안에 거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요17:21-23)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를 호주까지, 안전하게 태우고 갈 하나님의 전용기이자 조종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그분을 믿을 때 그분은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반대로 저나 당신이나, 그분을 믿지 아니할 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영역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는 예수님은 우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 형제들아, 그러므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들의 진입로 안으로 나아갈 담대함을 갖고서 20 그것을 그분께서 휘장 즉 자기의 육체를 꿰뚫어 우리를 위한 새롭고 살아있는 길로 성별하여 놓으셨으니,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우시지 않을 것입니다.
2009. 12. 14 하토브, 2015. 4. 13 다시씀
첫댓글 주어와 목적어로만 된 '할렐루야'나 '호산나' 등도 그러할 것 같습니다.
참 귀한 울림이 있는 글 입니다.
믿음이 없음을 보시고 예수님 께서 우신다는 ...
한참을
머물다 갑니다.
오랫만입니다.
평안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