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다 쓰지 못한 통도사 산내 암자가 눈에 밟혀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심정으로 영축산문을 나왔다. 소나무가 우거진 무풍한송길은 여전히 아름다운 모래밭으로 통도사를 찾아오는 내방객들을 말없이 맞이하고 있었다.
통도사를 나와 35번 국도를 따라 10리쯤 발걸음을 옮기면 보물 제74호 통도사 국장생석표(通度寺國長生石標)가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입구에 서있다. 통도사를 중심으로 사방 12곳에 세워놓은 장생표(長生標)는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의 구실을 하고있어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고려 선종 2년(1085)에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을 당시에는 통도사를 지키는 수문장으로서 당당했을 터이지만 지금은 도로변 건물 사이에서 흐르는 세월을 굽어보고 있다.
시골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양산 하북면 삼감리에서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용연교를 건너, 산모롱이를 지나면 천성산 내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용연천을 만난다. 용연천 주변에는 여관들과 유럽풍의 카페들이 즐비해 스님들의 수도처가 있는 산사로 가는 길목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식당촌을 지나 5리쯤 오르면 입장료를 받는 매표소와 주차장이 나온다. 승용차는 10리쯤 되는 내원사까지 통행이 가능 하지만 기왕 답사길의 정취를 맛보려면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전돌 모양의 보도 블럭이 깔린 길을 걷는게 좋다.
계곡 중간 중간에 있는 화장실도 출입구를 가려 수줍음을 감출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여느 절집과 다른 작은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절집 500m 앞에서 작은 콘크리트 교량을 건너면 굵직한 참나무 사이로 작은 자갈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산새와 청설모, 다람쥐가 경계심도 없이 오가며 먹이를 찾고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 속에 빠져든다.
천성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내원사는 지금부터 1,300 여년전 신라 선덕여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선찰로서 한국 선종사의 선맥을 이어오다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다.
1955년 9월 비구니 정수옥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 비구니를 위한 선원으로 불사를 거듭하여 13동의 건물을 재건하였다.
내원사 초입의 여의교를 건너면 오른쪽에 울창한 대나무숲이 있고 대나무 사립문이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어 절집보다는 고향집 같은 느낌이다. 안쪽으로 보이는 집에서 아들을 반겨 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 나올 것같은 마음이 인다.
선원이라 대부분의 건물앞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고 스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 우물가에서 김치를 담그고 있는 스님에게 청하여 교무 도경 스님을 만났다.
아침 일찍 찾아간 필자에게 따뜻한 커피와 정갈한 다과상이 차려져 나왔다. 절집에서는 녹차만 마시는 줄 알다가, 산사에서 마시는 커피가 새로운 맛이라고 했더니 에디오피아 커피가 향이 가장 좋다고 예찬을 하였다.
여의교에서 오르는 길옆에 늘씬한 대나무가 우거져 청신한 기분이 든다고 커피 값이라도 하려고 칭찬을 했더니, 대나무는 자생력이 왕성하여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퍼져 산림을 황폐화시킨다고 일침을 놓는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아 창호지가 발린 문 사이로 바깥을 보니 오밀조밀한 작은 텃밭에 파란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내원사는 수행을 근본으로하는 선원으로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내원사를 안고있는 천성산은 해발 811m로 봄과 가을에 휴일 산행지로는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하지만 고산 늪지대 보호구역인 천성산에 임도가 뚫려 희귀동식물700 여종이 위협 받고있어 임도 원상 복구를 위한 천성산 살리기 환경 운동이 내원사 스님들 사이에서 잔잔하게 일어나고 있다.
내원사에는 대웅전 대신에 선나원(禪那院: 참선을 하는곳)이 사찰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 제작되어 6엽의 보상화문(寶相華紋:상고시대에 유행한 식물모 양의 장식무늬)을 가는 선으로 도드라지게 새긴 내원사 대안칠년명금고[內院寺 大安七年銘 金鼓]와 조선시대 숙종10년 (1684년)에 제작된 안적암 동종[安寂庵銅鐘] 은 도난이 우려되어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