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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시간 | 답심지 | 주소 |
07:00 | 어린이 대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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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 | 성서 홈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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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30~9:30 | 성서 홈플러스 -> 귀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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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10:00 | 귀래정 -신말주(신숙주 동생) 후손 세거지 | 전북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518-1 |
10:00~11:00 | 귀래정 -> 포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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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11:40 | 광주 포충사(제봉 고경명) 장흥고씨 재실, 압촌 고원희 가옥 | 광주시 남구 원산동 947-4 |
11:40~13:00 | 점심 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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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13:20 | 포충사 -> 경현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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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13:40 | 경현서원(동방5현+기대승,김성일) |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529-1 |
13:40~13:50 | 경현서원 -> 금안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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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14:30 | 금안마을(월정서원, 신숙주 생가) |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1길 21-6 |
14:30~14:50 | 금안마을 -> 금성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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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15:40 | 나주목 객사 금성관, 향교 | 전남 나주시 금계동 14-1 |
15:40~16:00 | 금성관 -> 미천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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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16:30 | 미천서원(허목, 채제공) | 전남 나주시 안창동 384 |
16:30~16:40 | 미천서원 -> 영모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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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0~17:10 | 영모정, 백호 임제 문학관 |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105 |
17:10~18:00 | 저녁 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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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20:00 | 백호임제문학관 -> 성서 용산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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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 어린이 대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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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0次 先賢遺跡踏尋資料集 目次
光州•羅州 地域 先賢遺跡 踏尋 日程 -------------------------- | 2 | ||
光州•羅州 踏尋 資料集 目次 -------------------------------- | 3 | ||
歸來亭 ------------------------------------------- | 4 | ||
| 1. | 유서 깊은 정자, 귀래정(歸來亭)------------------------- | 4 |
| 2 | 고령 신씨가 터 잡은 전북 순창의 남산대 ------------------- | 5 |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을 모신 포충사(褒忠祠)-------------- | 7 | ||
| 1. |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 ----------------------------- | 8 |
2. | 포충사(褒忠祠) ------------------------------------- | 9 | |
3. | 압촌(鴨村) 고원희가옥(高元熙家屋) ----------------------- | 10 | |
경현서원(景賢書院) ---------------------------------- | 10 | ||
금안마을(金安里)의 서원과 고택 ------------------------- | 11 | ||
| 1. | 금안마을(金安里) ----------------------------------- | 11 |
| 2. | 월정서원(月井書院) ---------------------------------- | 11 |
3. | 신숙주(申叔舟) ------------------------------------- | 12 | |
나주금성관(羅州錦城館) ------------------------------- | 14 | ||
나주향교(羅州鄕校) ---------------------------------- | 15 | ||
미천서원(眉泉書院) ---------------------------------- | 16 | ||
나주영모정(羅州永慕亭) ------------------------------- | 16 | ||
백호임제박물관 ------------------------------------- | 17 | ||
금사정(錦社亭) ------------------------------------- | 18 |
귀래정(歸來亭)
1. 유서 깊은 정자, 귀래정
①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정자.
② 위치
귀래정(歸來亭)은 순창읍에서 옥과 방향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마을 어귀에 있는 귀래신선생유허비(歸來申先生遺墟碑)는 1455년 단종(端宗)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신말주(申末舟)[1429~1503]가 벼슬을 사임하고 귀거래한 장소임을 밝히는 표석이다.
③ 변천
1455년에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 조선의 제7대 왕에 오르자 신숙주(申叔舟)의 아우 신말주는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하였다. 쇠락한 것을 1974년에 다시 고쳐 세웠다.
④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건물 중앙에 방이 가설되어 있고, 3점의 ‘귀래정’ 현판이 걸려 있다. 2점의 현판은 측면에, 1점은 정면에 걸려 있다. 정면의 현판 옆에는 1930년에 신말주의 18세 방손 신덕선(申德善)이 쓴 ‘한운야학(閒雲野鶴)’[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들에 노니는 학처럼 아무 속박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상황을 뜻함] 편액이 걸려 있다.
⑤ 현황
귀래정 건물 내부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귀래정기(歸來亭記)」와 강희맹(姜希孟)의 시문 등이 액판으로 걸려 보존되고 있다. 주변에는 커다란 갈참나무가 있어 한결 운치를 더한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고령 신씨(高靈申氏)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⑥ 의의와 평가
귀래정은 신말주가 세조 등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순창 십로(淳昌十老)와 더불어 한운야학(閒雲野鶴)의 심경으로 은둔 생활을 하던 신말주의 중심 무대이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한평생을 살고자 한 올곧은 조선 선비의 혼이 깃든 55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참고문헌>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1991)
최승범, 「전북의 누정-낙덕정」(『전북 일보』, 1996. 7. 26)
문화재청(http://www.cha.go.kr)
[네이버 지식백과] 귀래정 [歸來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고령신씨가 터 잡은 전북 순창의 남산대 - 조용헌의 주유천하(60)
<주역(周易)>의 64괘 가운데 ‘화산려(火山旅)’괘가 있다. 위에는 불이 있고 아래에는 산이 있는 형국인데, 이 괘의 이름에 ‘여행할 려(旅)’자를 썼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공자가 50대 초반에 자신의 인생이 어떨 것인지 점쳐봤을 때 나온 괘가 바로 화산려괘였다고 한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의미다.
여(旅)는 여인숙(旅人宿)이라는 단어에도 쓰인다. 인도에서 평생 빈민구제를 한 테레사 수녀가 죽기 전에 “인생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우리 모두 여인숙에서 하룻밤 머물다가 가는 것이니 인생에 대해 너무 큰 기대와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그러면 번뇌가 쌓인다.
이런 멋진 의미의 여(旅)자를 넣어 자신의 호로 삼은 인물이 조선시대에 2명 있었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과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년)이 그들이다. 두 인물의 호가 결국 ‘여인숙’이라는 뜻이다.
여암은 여행을 많이 다녔다. 북청부사·순천부사·제주목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니 조선팔도가 머릿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도와 관련된 저술들을 남겼는데, 그중에 명저가 <산경표(山經表)>다. 한반도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白頭大幹)으로 돼 있으며, 이 백두대간이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으로 구성됐다고 밝혀놓은 책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등산법이 ‘백두대간 종주’다. 이 백두대간 종주 마니아들이 한번쯤 탐독해야 하는 책이 여암이 남긴 <산경표>인 것이다. 조선시대 학자가 남긴 저술 가운데 21세기에도 여전히 실용적인 책이라는 말이다.
여암의 족보와 내력은 어떨까?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고 했다. 이만한 학자가 나오려면 지령을 받고 태어난 게 분명하다. 그 인물이 태어난 동네에 어떤 지령이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이 필자의 취미다. 여암을 다른 말로 보통 ‘남산대(南山臺) 신씨’라고 부른다. 공식적으로는 고령 신씨(高靈申氏)지만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지역이 전북 순창의 ‘남산대’라는 곳이기 때문이다.
순창은 전북의 내륙에 해당한다. 적성강(섬진강 상류)이 맑게 감아 돌고, 들판이 있고, 적당한 높이의 산들이 둘러싸서 고려시대말부터 살기 좋은 ‘가거지지(可居之地·머물러 살 만하거나 살기 좋은 땅)’로 꼽혀 왔다. 남산대는 순창 읍내에서 2㎞ 정도나 떨어져 있을까. 옛날 양반들은 시내 한복판에 살지 않았다. 약간 떨어진 곳,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위치를 적지로 꼽았다. 남산대는 100~200m 높이의 낮은 봉우리들이 소쿠리처럼 둘러싼 곳이다. 원래 대(臺)는 그리 높지는 않지만 주변 풍광을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정도의 지점을 가리킨다. 지금은 해발 500~600m의 산에도 도로를 내고 사람이 왕래하면서 거처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찰이나 심산유곡(深山幽谷)의 화전민 빼고는 높은 곳에 거주하지 않았다. 나지막한 언덕을 선호했던 것이다.
남산대도 바로 그러한 지형이다. 여암의 윗대 조상은 신숙주 동생인 신말주(申末舟, 1429~1503년)다. 신말주는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의 고향인 남산대로 돌아갔다. 형인 신숙주는 정권 실세로 잘나갔지만 동생은 그 재미를 보지 않고 낙향해버린 것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실천한 드문 사례다. 그 의미를 따서 남산대 언덕 위에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하늘에 한가히 떠도는 구름과 들에 노니는 학)처럼 살았다.
남산대는 전체적으로는 U자 모양의 회룡고조(回龍顧祖) 형국이다. 앞에 보이는 안산은 둥그런 금체(金體) 형태로 생겼다. 봉우리가 3개다. 마치 어미 거북이가 새끼 거북이 두마리를 차례로 이끌고 올라오는 형국이다. 이 모습이 볼 만하다. 이 터는 옛날부터 명당으로 소문났던 모양이다. 당대의 학자였던 서거정(徐居正)도 귀래정에 놀러왔다가 이 터를 보고 ‘전해지는 바로는 범이 웅크리고 있고, 용이 꿈틀대는 터’라고 기록해놨다.(농민신문 2018-04-02자)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을 모신 포충사(褒忠祠)
1. 제봉(霽峰) 고경명(髙敬命)
조선 전기 순창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순창의 화산 서원에 배향된 문관이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증조할아버지는 고자검(高自儉)이며, 할아버지는 고운(高雲)이고, 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高孟英)이다. 어머니는 남평 서씨 서걸(徐傑)의 딸이고, 처는 울산 김씨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아들은 고인후(高因厚)이다.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1533년(중종28) 광주 압보천에서 출생하였고, 1552년(명종 7) 진사시와 생원시에 동시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558년에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 좌랑이 되었다.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1년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명종18) 인순 왕후의 외숙인 이조 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 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여 이량을 공격하였지만, 아버지 고맹영과 장인 김백균이 이량의 수족인 탓에 울산 군수로 좌천된 후 그해 11월 사헌부가 그를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1571년(선조 4) 선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용서하려 하였으나 사림파 언관들의 맹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1581년 영암 군수로 재등용되었고 이어서 종계변무(宗系辨誣)[조선 건국부터 선조 때까지 200여 년간 중국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세계(世系)를 고쳐 달라고 주청하던 일]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2년 서산 군수로 전임되었는데, 명사 원접사(明使遠接使)에 임명된 이이(李珥)의 천거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 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 서윤, 한산 군수를 거쳐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사복시 첨정이 된 뒤 성균관 사예를 거쳐 1586년 순창 군수로 재직하였고,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 판교로 다시 등용되고, 동래 부사로 있다가 서인이 제거될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의주로 피난을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전라도 광주와 장흥 등에서 모집한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임금을 지키러 의주로 가던 중 금산에 집결하고 있던 왜군과 싸우다가 아들 고인후와 같이 전사하였다.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1601년(선조 34) 광주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고, 그밖에 금산의 성곡 서원(星谷書院)과 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 서원(花山書院)에도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경명 [高敬命]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포충사(褒忠祠)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관이며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과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 5위를 배향한 사우로,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이더.
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했고, 1603년(선조 36)에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해 ‘포충(褒忠)’이란 액호를 받았다.
고경명을 주벽으로 제향하고 동배위에 고종후와 유팽로, 서배위에 고인후와 안영을 배향했다. 포충사는 사액 사당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때에도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지 않았던 사우이다.
1623년, 1810년, 1879년, 1919년, 1927년, 1933년에 각각 중수했고, 1978∼1980년에 현재의 사우(신사우)를 정화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으로, 1고주 5량가의 맞배집이고,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집이다. 내삼문과 외삼문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다.
소장 자료로는 〈포충사우가 褒忠祠宇歌〉(1614) 등 현판문 3매, 복호입안문서(復戶立案文書, 1592)와 고경명의 문과급제교지(1558) 등 고문서 6매, 고경명친필 마상격문(馬上檄文), 《제봉집 霽峯集》(252매), 《정기록 精氣錄》(71매) 등의 목판 493매 등의 유물이 있다. 1974년 5월 22일에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포충사 [褒忠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압촌(鴨村) 고원희가옥(高元熙家屋)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옛 집터를 그 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지은 집이다. 이 집은 후손들이 여러 차례 고쳐 지은 집으로 현존 가옥은 1917년 건축한 것이다. 예전에는 더 많은 건물이 있었는데 현재는 사랑채, 안채, 곳간채, 사당, 대문등이 남아있다. 대문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이다. 사랑채는 정면 네칸 측면 한 칸으로 앞뒤로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두벌대 기단위에 덤병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의 방 3개와 한 칸의 대청을 1단 높혀 누(樓)마루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여섯 칸, 측면 한 칸에 전후좌우에 마루가 있는 팔작 기와집이다.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외벌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앞열은 원형 그 외는 사각기둥을 세웠다. 원형 기둥위에는 우미량과 굴도리, 장혀를 보아지와 함께 결합하였다. 내부가구는 고주위에 대량을 걸치고 판대공을 놓았으며 구 위에 종도리를 놓았다. 평면은 좌로부터 한칸반의 부엌, 두칸의 대청, 한칸의 방으로 되어 있다. 창호는 전체가 양쪽으로 열어지는 문이며, 방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넉살창이 있다. 숭정기원후오갑정사윤이월초구일(崇禎紀元後五甲丁巳閏二月初九日)이라는 상량문에 글씨가 쓰여 있는데 이것으로 건립연대가 1917년임을 알수 있다. 사당은 고경명장군과 그 아들 종후, 인후 형제의 부조묘이다. 이 사당은 정면 세칸 측면 한 칸으로 앞에만 마루가 있으며 맞배지붕이다. 외별대의 낮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현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첨자형의 포로 결합하였고, 초익공 위에는 용두를 빼내고 장혀와 굴도리를 얹었다. 내부가구는 대량위에 동자주를 얹고 종보를 걸친 뒤 그 위에 다시 판대공을 놓았으며, 겹처마에 조잡한 모조 단청을 하고 있다. 건립연대는 안채보다 빠른 시기로 추측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원희가옥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경현서원(景賢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에 있는 서원. 1583년(선조 16) 지방유림이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금성산 아래(현재 금성시 경현동)에 사당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589년(선조 22) 나덕준(羅德峻)·나덕윤(羅德潤) 등의 발의로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4위를 함께 배향하여 오현서원(五賢書院)이 되었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당시 목사로 와 있던 목장흠(睦長欽)과 지방유림들이 합력하여 중건하였으며, 이듬해인 1609년(광해군 1)에 김선(金璇) 등의 상소로 ‘경현(景賢)’이라고 사액(賜額)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에는 기대승(奇大升)과 김성일(金誠一)을 추가배향하여 모두 7위를 모시게 되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7년 전라남도 유림이 이 곳에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동·서 협문(挾門), 4칸의 강당,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사(庫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기대승·김성일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에 마루가 있고 양쪽에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15일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 재산으로는 전답 2,334평과 임야 1,100평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현서원 [景賢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금안마을(金安里)의 서원과 고택
1. 금안마을(金安里)
금안리는 금안동이라 불리었으나 중국에서 한림학사를 지낸 정가신이 금안정에 백마를 타고 금의환향을 한데서 동명의 유래가 생겼으며, 각 성씨가 많이 들어와 인천, 천변, 반송, 광곡, 수각, 원당, 송대, 영안, 구축, 월송, 송정, 금곡 등 12 동내를 형성 하였다. 나주는 예로부터 위대한 인물 문장가가 학자를 많이 배출 한 고장이다. 이러한 나주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 노안면 금안동 이다. 금안동은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호남의 3대 명촌 으로 꼽힌다. 12개의 자연마을에는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가 있고 효자비 등 비석이 100여개, 고인돌이 56기가 널려 있다. 고려 때의 첨의중찬 정가신과 조선시대의 대 학자인 신숙주도 이곳 태생이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일 금안 이 회진'이라 하면서 자부 심이 대단하다.
금안동은 비단 정가신이나 신숙주를 배출해서 명촌이 아니라 4백 여년간 마을 사람들이 화목하고 마음을 합쳐서 동내를 가꾸자는 취지의 대동계를 이어 내려온 점에서 더욱 명촌으로 꼽힐만하다. 그 대동계는 임란 직후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는 뜻에서 이어져 내려오던 계를 발전시키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러한 대동계는 오늘날 지방자치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문화제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상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양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사암(思庵) 박순(朴淳)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이 있다.
(나주시청홈페이지http://www.naju.go.kr)
2. 월정서원(月井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광곡(光谷)에 있는 서원. 1659년(효종 1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9년에 ‘월정(月井)’이라 사액되었으며, 1789년에 김계휘(金繼輝)·심의겸(沈義謙)·정철(鄭澈)·홍천경(洪千璟)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4칸의 강당, 외삼문(外三門), 3칸의 고직사(雇直舍), 행랑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박순·김계휘·심의겸·정철·홍천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또는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6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논 2,000평, 밭 400평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월정서원 [月井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3. 신숙주(申叔舟)
신숙주(申叔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이다. 그러나 ‘숙주 나물’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를 저버리고 영달을 선택한 변절자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신숙주의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범옹(泛翁), 호는 보한재(保閑齋) 또는 희현당(希賢堂),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申檣,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知成州事) 정유(鄭有)의 딸이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 응교(정4품), 직제학(정3품)과 사헌부 장령(정4품), 집의(종3품) 등의 주요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장면은 우선 26세 때인 1443년(세종 25)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이었다. 서장관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상당한 정도의 신병을 무릅쓰고 출발했지만, 신숙주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屈原)과 송옥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62년, 세조 8).
예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구치관(具致寬)과 함께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예종이 급서하고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 가까이 재직했다(성종 2년 10월 23일~성종 6년 7월 1일, 45개월). 어린 국왕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 시행된 이때의 정황은, 마치 단종 때의 국면처럼 왕위 계승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재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숙주는 한명회를 비롯한 여러 훈구대신 들과 함께 혼란에 빠질 수도 있는 국정을 안정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경력에서 주목할 또 다른 사항은 폭넓은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을 가졌다는 측면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그는 젊은 시절 서장관으로 일본과 중국에 다녀왔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불편한 교통과 통신 수단이 작동하던 그때, 그런 여행은 전 세계를 체험한 것과 동일한 의미였을 것이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신숙주는 다시 중국에 주문사(奏聞使)로 파견되어 임명 교서를 받아왔으며, 관직 생활 전체에 걸쳐 중요한 외교문서를 대부분 작성하고 검토했다.
이런 폭넓은 국제적 안목이 산출한 중요한 업적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의 저술이다. 그 책은 앞서 1443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을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지형과 국내 사정, 외교 절차 등을 지어 세종에게 올린 것으로, 1471년(성종 2)에 간행되었다. ‘해동의 여러 나라’는 일본 본토와 큐슈, 쓰시마(대마도), 이키도(壹岐島), 류큐국(琉球國)이다. 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인 그 책은 조선 전기와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의 한일 관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기초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밖에도 신숙주는 1460년(세조 6) 강원ㆍ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야인 정벌에 뛰어난 전과를 올렸으며, [세조실록]과 [예종실록],[동국통감],[국조오례의] 등의 편찬을 주도하는 학문적 업적도 남겼다.
세조는 신숙주를, 당 태종의 명신인 위징(魏徵)에 견주었고, 실록의 졸기(卒記)에서도 “신숙주는 인품이 고매하고 너그러우면서도 활달했다. 경사(經史)를 두루 알아 의논할 때 항상 대체를 파악했고, 대의를 결단할 때는 강물을 터놓은 듯 막힘이 없었다”고 격찬했다(성종 6년 6월 21일).
신숙주와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단종을 저버리고 세조를 선택한 결정일 것이다. 세조의 정난은 도덕적 명분이 희박한 정치적 야심의 소산이 분명했다. 복잡한 이해 관계가 상충하는 현실과 정연한 논리가 지배하는 이상은 거의 언제나 대립한다. 인간의 선택은 그러므로 대부분 그 사이에서 이뤄진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은 신숙주가 그 모의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의 재능이 그런 무력적 거사에는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장 주도적으로 모의하고 성공시킨 사람은 다 알 듯이 한명회였다.
신숙주에게 세조의 집권은 자신의 의지와는 비교적 멀리 떨어졌던, 그러니까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진 운명에 가까웠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공식적 삶의 포기와 같은 의미였다. 탁월한 재능을 가진 30대 후반의 인재에게 그런 선택은 참으로 어렵고, 어쩌면 무의미한 결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앞서 간단히 살펴본 그의 경력은 아부나 언변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탁월한 학식과 실무적 능력과 국제적 감각이 조화되어야만 가능한 업적일 것이다. 그의 선택은 일차적으로는 그의 삶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된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숙주 [申叔舟] - 국제적 안목과 실무적 능력을 겸비한 조선 전기의 명신 (인물한국사)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나주 금성관은 전남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객사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것으로 관사 또는 객관이라고도 한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 조선시대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조선 성종 6∼10년(1475∼1479) 사이에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일제시대에는 내부를 고쳐 청사로 사용했던 것을 1976년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칸의 넓이와 높이가 커서 위엄이 느껴진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성관의 정문인 2층짜리 망화루도 함께 만들었으나 지금은 망화루의 현판과 내삼문만을 남산시민공원으로 옮겼다.
임진왜란(1592) 때의 의병장 김천일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 중 하나로서 그 규모가 웅장하고 나주인의 정의로운 기상을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나주시청홈페이지http://www.naju.go.kr)
나주향교(羅州鄕校)
전라남도 나주시 교동에 있으며, 전남유형문화재 제128호이다.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나주목은 전주부에 이어 호남에서 두 번째의 고을이었으므로 향교의 규모도 컸다.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단지 동재·사마재의 상량문과 문묘 중수 상량문이 있다. 1597년(선조 31) 당시 대성전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임진왜란으로 향교가 없어질 위험에 처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위패를 금성산으로 옮겼다가 왜병이 물러간 뒤 다시 안전하게 봉안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나라에서 듣고 그를 위해 사우를 건립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의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가 있다. 현종·숙종 때에도 중수, 중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성전은 이때 중수된 듯하다.
그러나 1900년대에 사마재·수복청·양사재 등이, 1920년대에 서재·충복사가, 1952년에는 동무·서무·동재 등이 헐리게 되었다. 이후 1959년 동재·서재를 중건, 1980년 명륜당과 동·서익당 보수, 1981년 담장 개축, 대성전과 동재·서재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건물 배치는 전묘후학(前墓後學)으로, 앞에 제향을 두는 대성전을 두고 강학을 하는 명륜당을 뒤에 두는 방법이다. 이는 서울의 성균관과 같은 배치법으로 평탄한 대지에 건물을 배치할 때는 이와 같은 법칙을 따랐다. 즉, 강학은 명륜당이라 명명하여 경전학업의 중심으로, 문묘는 대성전을 중심으로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선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성전으로 두 부분을 기본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현존하는 향교의 시설물들은 한국의 전통적 공립학교 건축으로 의미가 크다.
향교 앞에는 이 향교를 지킨 김애남을 기리는 충복사유허비가 남아 있고, 박성건의 금성별곡시비가 세워져 있다. 해마다 여름에는 서당이 개설되고 시민들의 전통혼례식장으로도 이용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주향교 [羅州鄕校] (두산백과)
미천서원(眉泉書院)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에 있는 서원으로 1977년 10월 20일 전라남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미천서원은 영산포에서 다시면으로 가는 길목인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의 철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서원은 17세기 조선시대 명현인 문정공(文正公) 미수 허목의 도학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690년(숙종 16)에 나주 금강 미천상에 사우로 건립되었다가 1693년 미천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이후 1799년(정조 23)에는 13대 미천서원 원장을 지낸 번암 채제공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채제공은 허목보다 훨씬 후대 인물이지만 허목의 학문을 따르고 미천서원에 많은 공을 세웠기 때문에 추배하게 된 것이다.
1711년 홍명한이 중수하고 1715년에는 강당과 재실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1724년에 사우를 훼철당하였다. 이후 서원이 다시 복설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1771년(영조 47) 이전에 사우가 중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794년(정조 18)에는 왕명에 따라 허목의 영정이 3매 완성되어 이 영정이 1804년 미천서원에도 봉안되었다. 그뒤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으로 2차 훼철을 당하였다. 서원이 훼철되자 영당과 장판각은 허목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나주시 삼영동 선산 아래의 영당마을로 옮겨졌다. 1893년에 다시 미천서원의 옛 터인 지금의 자리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이 복설되어 현재의 자리로 영정을 이안하였으며 정면 6칸, 측면 3칸의 강당도 함께 중건되었다. 1930년 조기중이 강당 일부를 중수하였고 1937년 허영규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건물 구성은 사당, 강당, 구장판각 2동, 신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교직사 등으로 되어 있다. 허목의 문집인 《기언(記言)》을 찍었던 목판이 서원의 신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사당에는 정조대왕이 선풍도골(仙風道骨) 이라 휘호한 허목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도난된 뒤 지금은 모사된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강당 뒤편에는 허목의 일화가 담긴 ‘미천’이라는 샘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주 미천서원 [羅州眉泉書院] (두산백과)
나주 영모정(羅州永慕亭)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多侍面) 회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樓亭). 1987년 6월 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영모정은 나주임씨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인 1520년(중종 15) 귀래정(歸來亭) 임붕(林鵬)이 창건하였고, 이 지방 출신의 명문장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글을 배우고 시작(詩作)을 즐기던 유서 깊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고 불렀으나, 1555년(명종 10)에 임붕의 두 아들 임복과 임진이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82년과 1991년에 다시 중건·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무고주 5량가(樑架)이다. 다듬돌로 바른층쌓기로 된 2단 기단 위에 덤벙주춧돌을 놓고 2m 가량 되는 원형 장대석을 세운 다음 두리기둥을 이었다. 그 위에 보를 걸치고 동자기둥을 세워 종보 위에 판대공과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올린 견실한 구조를 갖추었다.
왼쪽 1칸은 온돌방, 오른쪽 2칸은 마루방인데 4면 창호 아래 머름을 대었고, 정면 3칸의 각 띠살문 좌우에 벽널을 대어 건물 외관(外觀)을 다듬었다.
비교적 건립 연대가 오래되고, 주위에 400여 년 된 팽나무가 많이 있어 주변 환경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목조건축의 규범을 잘 갖추고 있는 정자이다. 영모정 바로 아래 언덕에는 ‘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와 ‘백호임제선생기념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주 영모정 [羅州永慕亭] (두산백과)
백호임제문학관
(http://baekhomoonhak.or.kr/bbs/sub01_01.php)
백호 임제(1549-1587)는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호방하고 쾌할한 시풍을 지닌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꼽히는 문인이다.
나주는 백호 임제의 고향이다. 나주시는 백호문학관을 세우고 기획전시실과 영상관, 상설 전시실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공간에는 임제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계를 홍보하고 출생과 가문, 고향 회진, 교육관계, 축소 조형물을 활용한 연보와 문학, 선생의 문학 세계 소개와 평가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특히 백호문학관 2층 상설전시실에 들어서면 백호 임제가 남긴 유언 '물곡사'가 큰 글씨로 씌어있다. 백호의 유물인 거문고와 보검, 옥퉁소도 전시되어 있다. 나주시는 앞으로 백호 임제 선생의 탄생일(11월 20일)에 기념해 삶과 문학이라는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전국 백호 임제 백일장 대회와 시 낭송대회, 백호 창작교실운영, 백호 탐방로 투어(종가, 영모정, 묘소 등) 등을 운영할 계획이다. 또한 관련 작품과 연구자료, 홍보자료 등을 통합해 백호 임제의 연구메카를 조성하고 관련 학술총서 발간 등을 할 예정이다.
無語別 수줍어서 말 못하고
十五越溪女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人無語別 수줍어서 말 못하고 이별이러니
歸來掩重門 돌아와 겹문을 꼭꼭 닫고선
泣向梨花月 배꽃 사이 달을 보며 눈물 흘리네
황진이를 애도한 詩調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금사정(錦社亭)
금사정(錦社亭)은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130번지 외구마을에 있다. 금사정은 나주시 향토문화유산 제20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백나무가 천연기념물(식물-노거수) 제515호(2009. 12.30)로 지정되어 있다
금사정은 1519년(중종14)의 기묘사화 때 나주출신 태학관 유생 11인이 조광조를 구명하는 상소를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시 정치상황에 실망해 낙향하여, 금강11인현계(錦江十一人賢禊)를 조직하여 좋은 때의 날을 받아 금강을 선유(船遊)하며 시주(詩酒)와 강론(講論)으로 수계(修禊)를 하였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금강11인현계의 후손이 숙종조 때에 수계(修禊)를 복원하여 활동하였던 장소이다.
기묘사화가 일어날 때에 나주 출신으로 태학관에서 공부를 하던 임붕 등 11인이 조광조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특히 1510년 진사시에 조광조가 장원하였을 때, 임붕은 생원시에 합격한 인연으로 11인의 소두(疏頭)가 되었던 것 같다. 11인의 유생들이 대궐 밖에서 자리를 깔고 상소를 할 때, 몽둥이로 쫓아버려 당시의 정치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서울에서 나주까지 맨발로 걸어 내려와 낙향한 후에 금강(錦江/영산강의 영산나루부터 회진나루까지의 강)을 좋은 날에 선유(船遊)하며 시주(詩酒)하고 강론(講論)하였다.
이러한 수계는 정유재란 전까지 이어오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영산강을 통해 침략한 왜적들에 의해 분탕질 당해 최초 건립한 정자와 관련 기록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남은 것은 시 몇 수와 회원들의 이름뿐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금사정에는 3개의 편액만 걸려있기도 하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의 침략으로 소실되어 버리고, 아울러 금강계(錦江禊)의 수계(修禊) 자체가 중단됨으로 그 맥(脈)이 잠시 단절 되어 버렸다. 전쟁 피해 때문에 단절된 이유도 있겠으나, 11인 현계회원들이 그 당시 낙향할 때 벼슬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낙향 하였으나 훗날 다시 벼슬에 나아갔기 때문이다.
임붕(林鵬)은 1521년 중종 16년에 문과 급제하여 1533년 중종 28년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된 기록이 중종실록에 나온다. 나일손(羅逸孫)은 벼슬이 직장(直長), 정호(鄭虎)는 벼슬이 음첨사(蔭僉使), 김구(金臼)는 벼슬이 우후(虞侯)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평생 낙향하여 은자(隱者)로 살지 않았으므로, 금강11인현계의 모임이 끊어지지 않았다 하여도 전체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는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후손들이 난정고사처럼 선대인들의 도의(道義)로 사귀는 그 뜻을 높이 받들어 금강11인현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에도 그 모임의 형체가 금사정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박약회 대구지회 청장년위원회 답심(2012 ~ 2018년 6월 현재)
차수 | 지역 | 장 소 | 일 시 |
1 | 청송․안동 | 방호정 - 후송당 - 일송정 - 송소고택 - 사양서원 - 묵계서원, 만휴정 | 2012.03.17(토) |
2 | 영양 | 사빈서원 - 백하구려 -봉감모전석탑- 서석지- 주실마을 호은종택 -석계종택 | 2012.05.19(토) |
3 | 충청도 일대 | 동춘당 고택 - 우암사적공원 - 돈암서원 - 명재고택 - 파평윤씨종학당 | 2012.06.06(수) |
4 | 상주 | 존애원 - 체화당 - 창석사당 - 옥동서원 - 소재종가 - 우복종가 | 2012.08.05(일) |
5 | 구미 | 여헌,야은 묘소 - 창랑고택 - 지주중류비 - 왕산허위선생기념관 | 2012.08.26(일) |
6 | 영천 | 지산종택 - 도잠서원 - 임고서원 - 용계서원 - 은해사 거조암 - 청제비 | 2012.11.11(일) |
7 | 청도 | 남강서원 - 용강서원 - 자계서원 - 탁영묘소 - 청도향교 - 삼족대 | 2013.01.20(일) |
8 | 현풍․의령 | 한훤고택 - 12정려각 - 망우당묘소 -이노정 - 점필재 종택 - 죽유종택 | 2013.03.17(일) |
9 | 달성 | 녹동서원 - 남지장사 - 한천서원 | 2013.04.28(일) |
10 | 안동 하회 | 화천서원 - 옥연정,부용대 - 겸암정 - 양진당 - 충효당 - 겸암묘소 | 2013.05.26(일) |
11 | 전남 강진 | 다산초당 - 백련사 - 해남 녹우당 - 옥천서원 - 김영랑 생가 - 낙안읍성 | 2013.06.06(목) |
12 | 영주․봉화 | 무섬 마을 - 금광리 인동장씨 집성촌 - 영천이씨 집성촌 - 오계서원 - 野翁亭 - 괴헌고택 -덕산고택 만취당 - 두암고택 - 천운정 | 2013.10.06(일) |
13 | 의성 일직 | 오봉종택 - 탑리 5층탑 - 氷溪서원 - 빙산사지 5층 摸塼石塔 - 晩翠堂 - 대산종택 - 정평공 손홍량 유허비 | 2014.03.23(일) |
14 | 칠곡․선산 | 사양정사 - 박곡(이원록)종택 신도비 - 여헌종택 - 쌍암고택 | 2014.05.18(일) |
15 | 여주․용인 | 명성왕후 생가 - 세종대왕 英陵 - 효종 寧陵 - 기천서원 - 구정승골 - 화서 이항로생가 - 정약용 생가 - 정몽주 묘소 -심곡서원 - 조광조 묘소 | 2014.06.06(금) |
16 | 안동 도산 | 퇴계선생 산소 - 수졸당 - 예던길 - 농암종택 - 고산정 - 만산고택 | 2014.09.28.(일) |
17 | 성주 | 한 개마을 - 세종대왕 子 胎室 - 동방사지 7층탑 - 심산기념관 | 2014.11.24.(일) |
18 | 영주․봉화 | 충효당(화산 이장발) - 띠띠물 남양홍씨 집성촌 - 충재 종택 - 바래미 開巖 종택 - 龜l鶴亭 - 유연당 - 三判書故宅 | 2015.03.29.(일) |
19 | 영덕 | 해월종택 - 예주문화회관 - 충효당 - 갈암종택 - 만괴헌 - 갈암고택 - 난고종택 - 경수당 - 무의공 종택 | 2015.05.16(토) |
20 | 경주 | 독락당․계정 -> 옥산서원 - 관가정 - 무첨당 - 서백당 - 용계정 - 입암서원 | 2015.07.26(일) |
21 | 충청 일대 | 맹씨행단 - 외암민속마을․수당 고택 - 추사고택 - 추사묘소 - 화암사 | 2015.11.22(일) |
22 | 밀양 | 혜산서원 - 오연정 - 월연정 - 금시당 - 영남루 - 밀양향교 - 예림서원 | 2016.03.27(일) |
23 | 영주 | 연복군 장말손 종택 - 성오당 이개립 고택 -귀암 황효공 종택, 귀암정 - 금계 황준량 유적(욱양서원, 금양정사, 금선정) | 2016.05.22.(일) |
24 | 문경 | 지취헌 - 고병숙 가옥 - 근암서원 - 칠봉 황시간 종택 - 내화리 3층 석탑 - 약포의 연주패옥혈 - 경송정 - 문경새재 | 2016.07.24(일) |
25 | 김천 | 율수재 - 하로서원 - 방초정 - 섬계서원 - 청암사 - 수도암 | 2016.11.27(일) |
26 | 고령․합천․산청 | 점필재 - 죽유 종택 - 대야성 함벽루 - 미연서원 - 단속사지 동서 3층 석탑, 정당매 - 남명기념관 - 덕천서원 | 2017.03.26(일) |
27 | 동해안 일대 | 해월헌 - 척주동해비 - 죽서루 - 경포대 - 선교장 | 2017.06.06(화) |
28 | 성주 | 육신사 - 가실성당 - 동방사지 7층 석탑 - 한강묘소 - 동강묘소 - 회연서원 | 2017.11.18(토) |
29 | 거창․함안 | 김숙자사당 - 일원정 - 승안사지 - 오담고택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상림 | 2018.03.24(토) |
30 | 전남 | 귀래정-포충사-경현서원-금안마을-금성관-백호문학관 | 2018.06.06(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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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용량 초과로 사진은 삭제하고 올렸습니다.
필요하다면 한글파일을 첨부하였으니 다운받아 보시면 되겠습니다.
배 선생님...
수고 하셨읍니다
6월 6일날 뵙겠습니다.
@배종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