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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김천(金泉)
1876년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김기수는 <수신사 일기>를 썼다.

김기수가 쓴 수신사일기(출처 : 민족문화대백과)
“일본에는 기차라는 것이 있는데 번개처럼 번쩍할 사이에 바람처럼 날아간다. 말을 타고도 하루가 걸려 도달할 거리를 한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기차라는 괴물은 시뻘건 불을 붙여 펄펄 끊는 물로 달린다.”
이런 일이 있고서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철도가 최초로 완성되었다. 집채보다 큰 철마가 논밭의 가운데를 지나 쏜살같이 달려갔다. 기차만큼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위압적인 존재는 없었다. 조선 백성은 주눅이 들었다. 조선의 양반들은 과거의 관습대로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양반이 도착하기도 전에 출발시간이 된 기차는 사정을 두지 않고 떠났다. ‘양반이 왔다.’며 아무리 멈추라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당시 조선의 시계는 하루를 12시간으로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의 시계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었다. 눈 깜짝할 사이를 1초로 나누어 쓰고 있었다. 조선의 시간은 느릿느릿 갔다. 서양의 시계는 참으로 정밀하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며 조선의 근대화를 요구했다.
1899년 죽산(=안성) 향교.
하지를 앞두고 장맛비라도 오려는지 하늘에는 먹구름이 바닥 가까이 내려오고 있었다. 좌중을 둘러본 전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는데 우리 안성을 지나가도록 한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말씀들 해보세요.”
“절대 안 될 말입니다. 우리 고장은 일찍부터 양반고을로 조상님들 묘가 곳곳에 있습니다. 조상님 묘를 이장할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설사 묘를 이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적소리가 울리게 되면 조상님들의 혼령이 얼마나 혼란하겠어요.”
“철도를 만들게 되면 일본 놈들이나 타고 다닐 것 아닙니까? 꼴 보기 싫은 놈들을 왜 봐야 합니까,”
좌중의 뜻이 파악되자 전교는 주제를 바꾸었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뜻을 어떻게 관철할 것인지 말씀들 해보세요.”
“황제폐하께 상소를 올립시다.”
“옳소! 그렇게 합시다.”
“우리 고을만 반대해서는 안 됩니다. 경부선이 지나가는 다른 고을에도 우리의 뜻을 전하고 동참하도록 합시다,”
“맞아요. 사발통문을 돌리고 우리의 상소 사실을 알려주도록 합시다.”
안성지역은 경부선 철도 건설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 고을로 지나가는 일에는 반대 결의를 했다. 그렇게 하고 상주, 청주, 용인의 향교에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자는 문서도 보냈다. 상주와 청주에서도 안성과 같은 생각이었다. 황제 앞에는 상소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모두 그 소리가 그 소리였다. 당초는 서울∼용인∼죽산∼청주∼문의∼상주∼대구∼밀양∼부산 노선이었다. 상소에 지친 조정도 일본에 철도 노선을 다시 검토하도록 했다.
조석으로 찬바람이 불면서 가을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날도 최상궁은 조반을 먹자말자 엄귀비께 문안 인사차 들렸다. 엄귀비는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마님, 그게 무엇입니까?”
“가까이 와보세요. 이게 경부선철도 노선이랍니다.”
“결국은 철도 노선이 확정되었나 보지요?”
“다섯 번이나 고친 결과 이제 확정되었다네. 어디보자. 서울∼수원∼천안∼대전∼영동∼김천∼대구∼청도∼삼량진∼부산으로 결정되었네.”
“잘 되었네요.”
“그러고 보니 최상궁의 고향이 김천이라 하지 않았던가요.”
“예, 그러하옵니다.”
“아마도 김천은 크게 발전할 겁니다.”
조선시대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가 대표도시어서 경상도가 되었고,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가 대표도시어서 충청도가 되었다. 그만큼 이들 도시는 당시로서는 큰 고을이었다. 경부선 철도가 상주 대신 김천으로 청주 대신 대전으로 정해짐에 따라 훗날 도시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상주에 비하면 조그만 고을에 불과하였던 김천은 먼저 시 승격을 했다. 큰 들판이라고 하여 ‘한밭’이라고 불렸던 대전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도시가 되었다. 평야지대에 거주한다고 하여 ‘들녘 것들’이라고 내려 보았던 평택은 안성보다 먼저 시가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중요한 줄은 알았지만 미래에 닥쳐올 문명의 변화는 몰랐던 것이다. 일본이 경부철도노선을 선정하는 데는 조선의 정치, 군사, 사회, 경제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또 이 노선이 부산∼서울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로서 공사비도 줄일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운행시간도 짧아지면서 한반도 동·서쪽으로 뻗는 지선 철도의 중추가 되는 데 적합했다. 경부선 철도 부설로 도시발전에 가장 혜택을 본 곳이 대전과 김천이었다.

김천의 고지도(출처 : 김천 향토사)
“김천이란 지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김천은 금(金)지(之)천(泉)’에서 유래했답니다. 겨울에는 얼지 않고 여름에는 차고 물맛이 좋습니다.”
“물맛이 좋아 샘을 연유로 해서 붙여진 이름이군요.”
“네,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물을 먹게 되었는데 중국 금릉의 과하천 물맛과 같다고 하였답니다. 그때부터 김천 사람들은 김천과 금릉을 함께 부르고 있나이다.”
“물맛이 좋으면 술맛도 좋겠네요.”
“김천 과하천의 물로 술을 빚으면 천하일미의 과하주가 되나이다.”
“다른 지명은 없나요?”
“신라시대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김산(金山)’이라고 했나이다.”
김천은 고려시대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우관(郵官) 또는 찰방(察訪)이 있던 도시였다. 찰방역은 종6품 관리가 관장하여 비교적 규모가 컸다. 김천은 찰방역이 설치됨으로써 동서남북으로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관로가 형성되어 있었다. 관로는 ‘구름도 쉬어가고 바람도 자고 간다.’는 추풍령을 넘어서면 김천이다. 김천을 중심으로 현재 경북선 철도가 놓인 상주로 가는 길이 있다. 감천을 따라 개령을 지나 선산으로 가는 길, 감천교를 지나 성주로 가는 길, 남산동을 지나 지례를 거쳐 거창과 진주로 가는 길이 있다. 그야말로 사통팔달이다. 자연히 길을 따라 장사꾼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김천이 역으로서 커질 수 있는 데에는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을 동시에 운영했기 때문이다. 주로 소금과 남해안의 어물들이 낙동강을 따라 왜관까지 큰 배를 타고 올라왔다. 왜관에서 중간크기의 배로 옮겨 실은 뒤 선산까지 왔다. 선산에서 나룻배로 김천의 감천변 용두동까지 왔다. 이 어물들은 소금 간을 한 뒤 상주, 문경을 비롯해 영동, 무주로 갔다.
역은 국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병조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520여개의 역이 있었다. 20여개씩 묶어서 찰방이 관장하도록 했다. 역은 군사시설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지방수령의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산군수와 김천역 찰방은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었다. 김천역은 한 때는 역졸이 6백 명에 다다를 정도로 많았다. 6백 명 중에는 봉수대에서 근무하는 사람, 역둔토에서 농사짓는 사람, 60여 필의 말을 기르는 마부, 한양으로 세곡을 운반하는 역졸, 실제 파발에 종사하는 사람, 관리와 식솔들이 있었다. 심지어 암행어사가 출두할 때 따라 나오는 군사가 역졸이다. 김천역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 살고 상권이 형성되다보니 옛 지명 김산군이 김천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은 역노들로 평생 그 일을 업으로 생각하고 일 해왔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변했다.

역대 찰방의 송덕비(출처 : 영남일보)
김천역의 위치는 김천초등하교 인근으로 추정된다.
이제는 일본인 철도 기술자가 김천읍내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니 봉수대는 할 일이 없었다. 파발도 마찬 가지였다. 한양에서 내려오는 관리나 문서 전달이 있을 때는 파발을 이용했었다. 이제는 체신제도가 생겨 집배원이 가정집에까지 편지를 배달해 주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 간에는 ‘모르스’부호로 전달하는 전신기가 설치되었다. 몇 초 만에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파발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영덕과 상호 부자는 김천의 파발 역에서 일하는 역졸이었다. 영덕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고성산 봉수대 일을 해왔다. 상호는 20세 청년으로 아버지와 함께 관노비로 일했다. 지난여름 태풍으로 고성산 봉수대가 많이 망가졌다. 종전 같으면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보수작업을 했었다. 사용할 일이 없어진 봉수대 수리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무엇보다 정부에서도 관심이 없으니 허물어진 봉수대는 방치하고 있었다. 이제는 노비제도가 없어졌으므로 어디론가 가버려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뾰족이 갈 곳도 없어 눌러있었다. 그날도 열심히 말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버지, 봉수대 보수를 하셔야지요?”
“보수하면 뭐하냐. 이제는 일본 사람이 김천에 눌러앉아 있는데. 왜놈들이 쳐들어온다고 봉화 올릴 일이 있겠냐.”
“그건 그렇고, 상호야, 좀 알아봤냐?”
“예, 알아봤는데요. 하루에 일당 20전을 준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옮겨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야 될 꺼라 예.”
“그래 일본 사람은 몇 명이나 와 있데?”
“감천 제방 옆에 일본인 회사 아라이조(荒井組)가 사무실을 차렸답니다. 일본인 기술자만도 3백여 명은 된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들어왔데?”
“왜관까지는 낙동강을 따라 배로 왔고, 왜관서 김천까지는 걸어서 왔답니다.”
“그랬겠지.”
“아버지, 기술자뿐만 아니랍니다.”
“누가 더 왔다니?”
“기술자들한테 생활용품을 파는 모리모토(森本音次郞)라는 상인도 들어왔답니다. 여기다 공사판에 술을 파는 복정루라는 요정도 생겼답니다.”
“이제는 일본 놈 세상이 되겠구나.”
“경부선 철도가 완성되면 사람 똥 치우는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아무도 찾지도 않는 역참에서 말똥이나 치우다가는 굶어죽겠다.”
김천 철도역이 들어설 자리에는 전국에서 날품팔이꾼, 영세농민, 반상농민(半商農民) 등 벌이꾼들이 몰려들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철도건설 공사에 빨리 익숙해졌다. 일본인 감독자들이 놀랄 정도로 능숙하게 일을 했다. 그러나 과격한 노동에 비해 일당 20전은 너무 쌌다. 터무니없이 싼 임금인데도 일본토건회사들의 관리들에게 2~5전씩 착취당했다. 경부선 철도 공사가 시작되기 전의 김천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공사와 동시에 김천은 장정들이 북적대는 고을로 바뀌었다. 장정들에게 술과 밥을 파는 아낙들도 몰려들었다. 노반공사 노무자로 취업된 영덕과 상호 부자는 매일 목도를 하고 침목을 날랐다. 침목을 운반할 때는 좌우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발을 맞추고 흥을 돋우는 노동요가 자연적으로 생겨났다.
“여엉차, 여엉차……”
“힘쓰는 장정은……”
“여엉차, 여엉차……”
“철도 역부로 끌려가고……”
“여엉차, 여엉차……”
“얼굴 반반한 계집은……”
“여엉차, 여엉차……”
“갈보로 끌려간다.……”
“여엉차, 여엉차……”
 철도 건설 공사 장면(출처 : 이수광 저 경부선)
철로 주변에는 목도하는 장정들의 힘쓰는 소리가 항상 넘쳐났다. 영덕과 상호 부자는 일과가 끝나고 국밥집에 마주 앉았다.
“상호야, 뭐 들은 소식 좀 없냐?”
“예 아버지, 군수가 장정 1천명을 경부선 공사에 동원하도록 명령했답니다.”
“우리 고을에 장정 천명이 있기나 하냐?”
“머슴이란 머슴을 다 동원해야겠지요. 상주, 선산 성주에서도 장정을 모은 다는데요.”
“그건 그렇고, 오늘은 몇 명이 죽었데?”
“추풍령 터널공사 발파 작업하다가 세 명이 죽었다는 데요.”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아버지, 우리 동네 박서방네 소가 없어졌다는 소식 들었어요?”
“나도 들었다. 장정들은 수백 명 모였는데 먹을 것은 없고 하니 누군가 훔쳐갔겠지.”
“맞아요.”
“그나저나 농사지을 소도 없고, 머슴도 없고 하면 누가 농사를 짓나.”
“그래서 도망가는 농가가 많데요.”
“그건 그렇고, 작업반장 하야시 놈 맛 좀 보여야 되지 않을까?”
“우리 반 돌식이가 벼르고 있어요. 걸핏하면 총으로 위협하고, 곤봉으로 때리니 죽을 맛이에요.”
철도 공사판에 젊은 장정이 모여 들게 되자, 술파는 아낙네도 따라서 몰려들었다. 장정들 중에는 일당으로 받은 군표를 가지고 돈 대신에 하룻밤을 자는 장정도 있었다. 그런데 피해는 재산 손실만이 아니었다. 일본인 철도 노동자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그것도 모자라 반항하는 양민을 살해하기도 했다. 비협조적인 군수를 구타하는 만행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일본인들의 만행을 막아달라고 관청에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한국 관리들 역시 일본인들의 협박과 폭력에 눌려 수수방관할 따름이었다. 결국 일본인들의 만행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당시 미국 대통령이 경고할 정도였다.
최상궁은 김천의 부곡동에 3천 평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중 5백 평이 경부선 철도공사 부지로 편입되었다. 당시 시세로는 평당 18원 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가 제시한 보상비는 평당 7원으로 책정되었다. 터무니없는 보상비가 책정되어도 저항하지 못하는 조선의 민중이었다. 최상궁도 보상비 내역 통보를 받았다.
“아니 보상비가 평당 7원이면 3,500원이어야 하는데?”
“예, 수수료로 20%를 공제해서 줄어든 것입니다.”
“누가 수수료를 챙긴단 말이요?”
“공사 진행비로 군청에서 수수료로 받는 것이랍니다.”
“그리고, 또 500냥 군표 6매는 무엇이요?”
“예, 현금은 일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공사가 완료되고 나면 토지보상비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00원 뿐이란 말이요.”
“예, 그렇습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이렇게 하여 최상궁은 자신의 토지 5백 평을 단돈 500원에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경부철도합동조합은 현금 대신 어음에 해당하는 500냥짜리 군표를 발행했다. 군표로 조선 사람들의 땅을 사고 완공 후 현금으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개통 후에도 지주들은 땅을 판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땅을 강제로 수탈당한 것이다. 이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는 경부선 철도를 비꼬는 타령조 가락이 한동안 유행하기도 했다.
‘경부선의 철도 역사는 굉장하다.
산 뚫고 1천여 리에 지반가(地盤價) 뉘 받았노
군표 제조비는 500냥 들었다네,
500냥 자본으로 경부철도 놓았다네.’

5백냥 군표(출처 : 이수광 저 경부선)
일본은 침략전쟁을 수행하려는 목적으로 철도를 부설했다. 따라서 조선 백성들의 저항과 반대가 심했다. 용지매수분쟁도 끊이지 않았다. 그 밖에도 결빙과 홍수, 화폐의 차이 등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1902년 말까지 서울 쪽에서는 51.5km, 부산 쪽에서는 53.1km만 완성되었다. 공사가 지연되자 일본은 크게 당혹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을 앞두고 ‘경부철도 속성명령’을 내렸다. 곧바로 경부철도회사 기사들과 공사에 가담한 일본 토목건설업자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폭력배를 앞세워 토지를 마구잡이로 빼앗았다. 경부철도를 완공할 때까지 강탈한 토지는 485만 평에 이르렀다. 부설공사는 급속히 진전되어 1903년 12월에는 서울∼수원간, 1904년 11월에는 서울∼대전간이 개통되었다. 난공사 구간이었던 대구∼대전간이 가장 늦게 개통되었다. 그 공사구간의 중심에 김천이 있다. 김천∼대전간이 가장 늦게 개통된 것은 추풍령이라는 험준한 산맥을 통과해야 했다. 이 공사 마무리를 위해서는 조선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했다. 경부선 철도건설 기간 중 노선상의 모든 주민들이 고통을 받아왔지만 특히 김천지역의 주민들의 고통은 심했다.

추풍령 부근 철도공사 장면(출처 : 이수광 저 경부선)
1905년 5월, 이토와 조선의 대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의 남대문 역에서 경부선 개통식이 열렸다. 사회자의 경과보고가 있었다.
“지금부터 경부선 철도 건설 경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본 철도는 1901년 8월 20일 기공식을 가진 이래 3년 9개월 만인 오늘 개통하게 되었습니다. 연간 70여만 명의 노무자가 투입되어 총 공사비 3,000만 원으로 완공되었습니다. 서울과 부산까지는 441.7㎞입니다. 철도가 없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가는 데 15일이 걸렸습니다. 이제 기차의 등장으로 13시간 만에 주파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축사가 있은 후 개통식은 종료되었다.

1905년 경부선 개통당시 남대문역(출처 : 우등생 전과)
경부선 철도에 이어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서양귀신은 화륜선을 타고 오고, 일본귀신은 철차를 타고 온다,”는 동요가 생겨났다. 조선의 백성은 쇠로 만든 육중한 바퀴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사실에 호기심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제국의 상품과 군대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다는 현실에 두려움을 가졌다. 이렇게 악랄한 수법으로 자금을 축적하면서 일본은 최저 공사비로 경부철도를 완공할 수 있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차관을 주고 그것에 대한 이자까지 받아내 야욕을 채웠다. 반면, 생활 기반을 빼앗긴 노선 주위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반일 투쟁의 선봉인 의병으로 변해갔다.
도시가 형성되는 데에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공단이 들어서면 산업도시가 되고, 행정관청이 이전하면 행정도시가 된다. 무역항이 되면 항구도시가 형성된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김천에도 변화가 왔다. 철도기술자들은 공사장을 따라 김천을 떠났지만 ‘모리모토’ 나 ‘쓰지다’ 등 조선 사람을 상대로 하는 상인들은 남았다. 일본인들은 김천시장이 농산물을 비롯한 상거래의 규모가 크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고꾸라는 이곳에 소금을 들여오고 콩을 사모아 일본에 수출하여 큰돈을 모았다. 당시 일본인이 개발한 ‘다이찡 고약’과 ‘정로환’은 즉효 약으로 통하였다. 철도공사에 동원되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특별히 갈 곳도 없었다. 그들이 김천에 눌러앉게 되자 김천의 인구는 급격히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경부선 철도는 김천을 교통의 요충지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었을 당시에는 김천 사람들은 찰방이 있던 역을 김천역이라고 불렀다. 철도가 있는 김천역은 철도역이라고 불렀다. 생활권이 철도역 쪽으로 옮겨 오면서 철도역이 김천역이 되었다.
경부선 철도와 경의선 철도의 개통은 일본군이 신속하게 만주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 덕에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승리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완용은 어전회의에서 대신들 쪽으로 몸을 돌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은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 사용된다.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은 존엄하다. 단지 외교에 대한 한 가지만 잠깐 이웃나라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을사5적(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무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조약체결에 반대하였다.
중명전 앞에 볏단처럼 도열한 일본 헌병들의 위세에 어전회의는 짓눌려 있었다. 이완용의 논리는 그대로 조약문에 반영되었다.
제1조, 일본국 정부는 재 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할 임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기로 상약한다.
제3조, ․․․․․․
외부대신 박재순은 조약문에 도장을 눌렀다. 이것이 을사년의 한일 간 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