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가 살던 시절에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나이 칠십까지 사는 게 드문 일이었겠지만, 백세 시대에 접어든 오늘날 칠순 잔치를 한다는 게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일흔이면 노인 축에 들지만, 그렇다고 노인정에 갔다가는 형님들 잔심부름이나 도맡아야 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다. 그런데 언니가 칠순 잔치를 한다고 초대장을 보내 왔다. 언니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형부가 고집하여 잔치를 벌이겠다는 것이다. 사실 칠순을 핑계로 가족이 함께 여름 휴가를 앞당겨 베트남 다낭에 다녀왔고, 고등학교 동창들하고는 미국으로 칠순 기념 단체여행을 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여한의사 후배들이 깜짝 이벤트로 모임에서 칠순 축하연을 해주었다고 한다. 서울에서도 경주에서도 직원 회의 때 간단하게 축하식을 가졌으니 도대체 몇 번을 우려먹는지 모르겠다며, 언니도 아주 난감해한다. 그래도 아내의 생일에 맞춰 칠순 잔치를 해주고 싶어 하는 남편의 갸륵한 마음을 마다할 수 없었는지 이것으로 마지막이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사실 우리 집안에서는 아버지나 엄마 쪽으로 칠순은커녕 환갑을 넘긴 조상도 드물었으니 언니의 칠순은 우리 형제에게는 의미가 남다르다. 나는 50대 초에 쓸개 수술을 하였는데, 이제 갈 나이가 된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언니의 칠순은 우리 형제도 장수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복음이 아닐 수 없다.
형부가 고희연의 사회를 직접 맡겠다고 나서니까 조카들도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뒤에서 구시렁댔지만, 누가 감히 팔불출을 불사하겠다는 형부의 불타는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가족 및 친지들과 조촐하게 자축하는 자리라는데 굳이 형식에 구애될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형부가 언니에게 노래를 한 곡 준비하라 하고, 내게도 어려서 언니랑 즐겨 부르던 '홍하의 골짜기'를 듀엣으로 부르면 어떻겠냐고 하신다. 노래시키면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앙탈을 부렸지만, 그날 정말 노래를 시키면 뺄 수도 없고 해서 50년 전처럼 언니와 화음을 넣어 노래를 맞춰 봤다. 놀랍게도 잊은 줄 알았던 영어 가사가 저절로 튀어나오며 내가 맡아 부르던 알토 파트도 기억이 난다. 우리 자매가 얼마나 자주 노래를 불렀으면 예전에 이웃에 하숙했던 남학생이 언젠가 언니에게 진료를 받으러 와서 그때 노래 잘 들었다고 인사를 하더라는 거다. 목소리가 꾀꼬리도 아니고 제 흥에 겨워 엄마에게 시끄럽다고 야단을 맞을 때까지 고래고래 불러제꼈으니 그 남학생이 무척이나 괴로웠을 텐데 그래도 참을성이 강한 무던한 사람이었나 보다.
언니가 한의대에 입학했을 때 나는 겨우 중1이었지만, 같이 방을 쓰다 보니 둘이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언니는 50명 남학생 가운데 홍일점이었는데, 공부를 열심히 해서 특대생으로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수석으로 졸업을 하였으니 남학생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얄미운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를 잡고 그날 학교에서 남학생들과 있었던 얘기를 미주알고주알 들려주어 나는 언니 동기 남학생들 이름을 거의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공부한 내용을 자기가 외워볼 테니 맞는지 보라며 내게 노트를 내밀곤 했다. 한자 투성이인 노트를 내가 알 턱이 없었지만, 대충 어디까지 외웠는지 어림짐작하며 언니가 시키는 대로 노트를 들고 있었다. 그렇게 언니 등 넘어 배운 한자 실력으로 고등학교 때는 한문 시간에 선생님의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 사서삼경을 혼자 공부하였는데, 그 덕분에 남편이 가끔 한시를 해석해 달라고 들이밀면 그런대로 체면 유지는 하는 편이다. 언니는 공부뿐 아니라 예쁜 옷에 대한 집착도 대단하여서 맹렬한 투쟁 끝에 새로 옷을 맞춰 입곤 했는데, 왜 그랬는지 그때마다 나를 의상실에 데려가 내 옷도 한 벌씩 맞춰주었다. 전업주부로 나이 들어 가고 있던 나를 십여 년 전에 불러주어 뜻하지 않게 경주 병원을 관리하게 된 것도 그저 형제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 그 시절에 쌓여진 특별한 우정과 의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조촐하다더니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언니를 축하해 주러 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고희연은 성황을 이루었다. 여고 동창들과 대학 남자 동기들 그리고 25년간 함께 한 부부 노래모임 회원들, 여한의사회에서 또 개인적으로 온 이름을 알만한 인사들까지 서로 다투어 축사를 해주었다. 언니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으로 보게 되니 내 일처럼 뿌듯하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조카들이 엄마에게 바치려고 직접 제작했다는 영상 속에 빛바랜 우리 형제들 사진도 들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우리 명자가 곧 마흔이 되는구나." 하시며 감개무량해 하시더니 언니가 아버지보다 더 살아 칠순 잔치를 한다는 걸 아셨다면 얼마나 감격하셨을까. 식사를 마치고 여흥 시간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언니 친구들이 무대로 나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한국인만 출 수 있는 막춤으로 웃음을 주었다. 특히 트위스트 김과 막상막하였다고 자랑하는 김홍신 씨의 애교 넘치는 트위스트는 단연 인기였다. 분위기를 띄워주려고 기꺼이 자신을 내려놓은 그분의 인격이 돋보여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끝까지 흥겹게 놀아준 언니 여고 동창들 덕분에 내가 노래를 부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언니가 약혼식 때 부르려다 못 불렀다는 이성애의 '사랑을 느낄 때'를 열심히 외워서 부른 건 형부에게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어서였다는 걸 알겠다. 티격태격해도 결국 부부 밖에 없다는 걸 언니가 이번에 다시금 깨닫게 되었던 모양이다. 언니의 칠순 잔치를 챙겨준 형부의 진심이 정말 고맙다. 언니 부부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형부가 팔순 잔치에도 구순 잔치에도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