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은 2015년에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의 제1호를 ‘빈곤퇴치’로 정했다. 인류의 10%는 하루에 미화 1불 40센트 이하로 생활하는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선진국에도 상대적 빈곤이 대부분의 차별과 고통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도 절대빈곤은 극복했지만 상대적 빈곤율은 OECD 평균 11.1%보다 높은 16.7%로서 37개국 중 4번째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빈곤이 모든 고통의 뿌리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빈곤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사회적 약자’는 곧 ‘가난한 자’다. 그리고 사람의 삶이 대부분 인공적이고 조직화 된 오늘날에는 빈곤 문제를 개인의 의지와 능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것이든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선진국들은 복지제도로 이를 해결하려 한다.
모든 고등종교는 약자 보호를 가르치고 성경은 구제를 선교와 함께 교회의 기본임무로 취급한다. 예수님 사역의 절반은 구제였는데 교회도 마땅히 그 머리이신 주님의 사역을 이어가야 한다. 실제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는 구제로 가난한 자가 없게 되었고(행 4:34), 안디옥 교회, 아가야와 마게도니아 교회들도 구제했으며(행 11:29-30, 고후 8:2),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사였지만 구제도 힘썼을 뿐 아니라(갈 2:10, 행 20:35, 행 4:36-37), 바울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제활동을 감행했다(행 21:10-14, 행 24:17, 롬 15:25-27).
구약성경에도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명령이 무수하고, 신약성경에 언급되는 연보는 모두 구제를 위한 것이었다. 서구에서는 국가복지제도가 도입되기 전, 교회가 빈자들의 복지를 책임졌다. 칼뱅은 하나님이 누구를 부자로 만든 것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루터는 우리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약자들을 돕기 위함이라고 가르쳤다. 한국의 초대교회도 구제에 모범적이었고, 그것도 교회 성장에 어느 정도 공헌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 교회는 성장에 몰두하므로 구제를 무시해서 직분을 맡은 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성경적 임무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다만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대표적 구호단체 23개 가운데 17개가 개신교에 뿌리를 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앞으로 경제 수준이 높아져서 사회복지가 확대되면 교회의 구제는 필요 없게 되므로 사랑 실천의 기회가 없어질 것이다.
가난에 대한 교회의 접근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만 있으면 족한 줄로 안” (딤전 6:8)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교회도 가난해져야 한다.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데도 자발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 서울 강동구에 있는 ‘빛소금교회’는 성탄헌금 전액(1600만 원)을 샘물호스피스에 헌금했고, 부활절 헌금 전액(2000여만 원)을 가난한 환자를 위해서 복음병원에 헌금했다. 정책적으로 예배당 건물을 갖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 베버(Max Weber)는 종교개혁자들이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했다고 지적했다. 검소와 절약이 개신교의 중요한 전통이다. 넉넉하고 사치스러운 자리에서 굶고 헐벗은 사람에게 한 푼 던져주는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모독이며 예수님에 대한 불경이다. 약한 자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다. 절약을 포함한 절제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데, 특히 말세에 불신자들과 같이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이다. 베드로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 해야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질 수 있고, 그래야 이방인들이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다 했다(벧전 2:11-12). 독일 신학자 그룬드만(W. Grundmann)은 헬레니즘이 장려하는 절제는 자신의 도덕적 수월성을 위한 것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절제는 이웃을 위한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특히 환경오염으로 파키스탄이나 몽골처럼 가난한 나라들이 그 피해자가 되고 있는 오늘에는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소비를 줄임으로써 온난화를 막아야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정의의 실현이므로 시혜가 아니라 의무다.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시 146:7).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고후 8:13). 어떤 사람은 굶고 헐벗는데 그들을 먹일 수 있는 돈을 사치에 허비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개들에게 던져주는 잘못이다. 예수님은 과연 굶고 아픈 사람은 버려두고 예배당을 화려하게 짓는데 돈 쓰는 것을 기뻐하실까?
곳곳에 교회가 있는데도 송파 세 모녀, 수원 세 모녀 동반 자살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에 대해서 자성 운동조차 일어나지 않은 것은 한국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율법을 빈틈없이 잘 지킨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눅 18:22) 하신 예수님은 한국 교회를 향하여 “네게 있는 예배당은 팔지 못하더라도 헌금의 십일조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하시지 않을까 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는 땅에 떨어진 한국 교회 위상이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첫댓글 가난에 대한 교회의 접근은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약한 자에게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화려하고 크게 짓는데 돈을 쓰고 있는 교회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