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보면 눈물이 흐른다
古史不欲觀(고사부욕관)-옛 역사는 보고 싶지가 않아
觀之每병淚(관지매병루)-볼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걸.
君子必困厄(군자필곤액)-군자들은 반드시 곤액을 당하고
小人多得志(소인다득지)-소인들은 득세한 자들이 많으니.
垂成敗忽萌(수성패홀맹)-성공할 즈음이면 문득 패망 싹트고
欲安危已至(욕안위이지)-안정 될 듯 하면 이미 위태함 따르네.
從來三代下(종래삼대하)-삼국시대 이후로는 오늘날까지
不見一日治(부견일일치)-하루도 제대로 다스려진 적 없다오.
生民亦何罪(생민역하죄)-백성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랴
冥漠蒼天意(명막창천의)-저 푸른 하늘의 뜻 알 수가 없네.
旣往尙如此(기왕상여차)-지난 일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而況當時事(이황당시사)-하물며 오늘날의 일이겠는가.
김육(金堉)
임진왜란 영웅 권율장군 묘소위에 무심한 구름만 떠간다 !
경기도 기념물 제2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산168~1소재
조선 중기 문신(文臣)으로 조선역사에 명장(名將)소리는 듣는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1537~1599)장군의 묘소를 답사하였다.
필자는 역사유적지를 답사할 때마다 중고등 학생시절 기분으로 되돌아간다.
유적지를 답사하면 많은 공부를 배우기 때문이다.
몰랐던 역사는 물론 회화(繪畫)나 건축물, 소나무 한 거루 이끼 덮인 돌비석 하나에도 우리 조상이 살아온 흔적들을 찾으면서 옛과 지금을 이어보며 배우기 때문이다.
▲권율장군의 아버지는 중종(中宗1537)때 영의정(領議政)인 권철(權轍)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바다에서 전공을 세우고
권율(權慄) 장군은 육지에서 왜적을 물리친 영웅이다.
크게 이긴 전투로서는
*충청도 금산의 이치(배티고개)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1만여 왜군을 대파.
*수원 독산성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왜군을 대파.
*행주산성에서 관군민 2.800명의 군사로서 3만명 왜군을 물리친 행주산성대첩.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많은 장군들이 활약했지만 공적에 비해서는
조정과의 갈등으로 비명횡사하거나 끝이 좋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권율장군은 명예로운 퇴진 후에 당시로서는 63세의 천수(天壽)를 다한 것은
그 인품이 원만하고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권율장군의 사적(史蹟)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에는 선조(宣祖)가 권율장군을
얼마나 아끼었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기해(己亥1599년 선조 32)년 여름에 권율장군이 병환이 위독하여 벼슬을 사양하자 선조가 윤허했는데 7월 6일에 결국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선조가 매우 애통해 하여 조회(朝會)를 중지하고 관례(慣例)보다 부조(扶助)를
더 하는 한편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윗사람이 제물과 제문(祭文)을 내리어 죽은 아랫사람을 제사하는 일)하고 찬성(贊成)의 벼슬을 추증(追贈)하라고 명하였다.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다 장례를 치렀는데 선영(先塋)의 아래였다
그 뒤 7년 후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공로를 논하여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에 기록하고 영의정(領議政)과 부원군(府院君)을 추증하였다”
▲권율장군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홍복산(洪福山) 자락이다.
권율장군의 묘소가 있는 홍복산(弘福山/洪福山)은 460m로 명산(名山)으로 날려져 있다.
이 동네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전국을 순행하면서 감악산을 거쳐 홍복산(弘福山)을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복산(弘福山)에서 뒤를 돌아보며 “이것은 과인의 홍복(弘福)이로다.”라고
말한 데서 홍복산(弘福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 전의 이름은 홍복산(洪福山)이라고 했다.
▲양주(楊州)고을은 지금은 양주시와 남양주시로 나눠졌지만 조선시대까지는 도읍인 한양에 인접한 곳으로, 도봉산, 삼각산이 서울과 양주, 의정부를 나누고 있는
분지형(盆地形)의 넓은 고을이다.
이런 지형적인 특징으로 양주(楊州)는 조선시대에 왕릉(王陵)과 왕실의 사냥터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붕어(崩御사망)하면 도성(都城)으로 부터 사방 100리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강을 건너지 않는 곳에 왕릉(王陵)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양주를 비롯한 한양 북쪽의 몇몇 고을이었다.
한강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그 중에서도 양주(楊州)는 가장 우선적으로 왕릉이 조성되는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이 있는 동구릉을 비롯하여, 세조의 광릉 등이 양주 땅에 마련되었다.
그래서 조선왕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곳(양주)에 안긴다”는 말이 있다.
양주(楊州)지역은 조선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권율 장군 묘역은 3단계로 조성되어 있다.
제일 위에는 권율장군 아버지 권철(權轍)과 어머니 창녕조씨(昌寧曺氏)의 묘가 있다.
그 밑에는 권율장군의 형 권순(權恂)의 묘가 있다.
제일 밑에는 3기의 묘가 있는데 가운데 권율장군 묘가 있고
정면에서 좌측에 권율장군의 전(前) 부인 창령조씨(昌寧曹氏)의 묘가 있다.
우측에는 후(後) 부인 죽산박씨(竹山朴氏)의 묘가 있다.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느끼는 생각이지만 이번 권율장군 묘도 마찬가지다.
묘앞에 서있는 비석(碑石)이 오래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으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
고인의 공적(功績)을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도 마찬가지다.
글자가 보여도 어려운 전서체(篆書體)로 쓰여 있어 웬만한 한문 실력자 아니면 내용을 알수 없다.
아래 사진에서 설명하겠지만 예를 들어 권율장군 묘앞 비(碑)의 전면 글자다.
【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永嘉府院君行正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
諸道都元帥權公慄之墓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 행정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제도도원수 권공율지묘】
왕이 내려준 벼슬 이름이다.
문화재청은 간단히 한자를 해석한 설명문을 세워두면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큰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국민에게 역사를 소개하는 성의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역사를 가르치는 현장 공부다.
▲1978년 11월 15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11월 13일밤중에 권율정군의 묘와 부모의 합장묘가 도굴당해 부장품이 없어졌다는 기사가 있었다.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3대 현대미술가의 한사람인 “장욱진시립미술관”이
권율장군 묘소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
그런데 권율장군 묘가 장욱진시립미술관 안에 있어 미술관을 통하지 않으면 묘에
갈수가 없다.
권율장군의 묘가 분명히 지방문화재이기 때문에 국민 누구나 정해진 관람시간에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런데 권율장군 묘역 정문은 닫혀있다.
내가 항의를 하였다.
“미술관 입장료”받으려고 권율장군 묘를 미술관 안에 넣은 것 아닌가?
근무자는 자기는 모른다고 만 말한다.
인왕산 밑에 있는 대원군의 석파정(石坡亭)도 서울미술관 입장료 9000원을 내어야
볼 수 있다.
문화재가 특정의 이익역활에 이용되고 있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더욱 마음이 허전한 것은 오늘이 토요일이라 “장욱진시립미술관” 넓은 야외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깔고 봄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50m 떨어져 있는 권율장군 묘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필자 혼자 있었다.
약 1시간 30분을 있었는데 한사람도 오지 않았다.
지금 나라 사정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울 때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의 나라를 구한 권율장군의 묘지를 찾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선조들의 애국으로 나라를 구한
역사를 교훈 받아야 할 때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친인과 국민들의 잘못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를 당하고 있다.
이제 제2의 임진왜란
제2의 남한산성 삼전도 치욕
제2의 을사늑약이 있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미국이나 다른 나라가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보호해야 한다.
나라 없이 국민이 어떻게 존재 할 수 있으며?
역사 없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임을 내 세울 수 있는가?
옆에 있는 권율장군 묘지보다 스마트폰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
지금 어른들의 잘못으로 역사교과서가 국정교과서 검.인정 교과서, 자유발행 교과서 싸움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역사를 알지 못하고 있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나중에 부모형제 자기 조상도 모르게 되고
자기 자신과 인간 자체를 상실하게 된다.
중앙은 권율장군묘 좌측은 전(前)부인묘 우측은 후(後) 부인묘다
朝鮮國八道都元帥贈領議政永嘉府院君諡忠莊權公神道碑銘
조선국팔도도원수증령의정영가부원군시충장권공신도비명
위의 사진은 신도비(神道碑) 제목글이다.
필자가 비석의 앞면 옆면 뒷면을 사진 찍어 편집을 한 것이다.
신도비 제목 글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어야 한다.
贈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永嘉府院君行正憲大夫
議政府右參贊兼諸道都元帥權公慄之墓
증 효충 장의 적의 협력 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 행정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제도도원수 권공율지묘
권율장군 묘비의 앞면 글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끼가 끼고 잘 보이지 않은 것을 확대경으로
보고 손가락으로 더듬어 글자를 알아보았다.
문화재 청에서 이런 글을 간단하게 설명문을 세워 놓아야
국민이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비는 새로 세운 신도비다
최초의 신도비다. 오래되어 마모되어 글자를 읽을 수 없어 위의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