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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편 / 시편 139편 1-18절
찬송 / 404장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성서 / 이사야 40장 12-24절, 사도행전 17장 22-31절
말씀 /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7장 28절)
남미의 해방신학자 보프 신부는, 우리가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기차여행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란 기차에 타고 여행을 합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은 참 다양하지요. 앞을 보고 가는 사람도 있고, 뒤를 보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느긋하게 잠자는 사람도 있고 뭔가에 쫓기듯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아예 핸드폰에 코를 박은 사람도 있습니다.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사람도 있고, 뒤쪽으로 뛰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냥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어딘지 어두운 그늘이 슬픈 사람도 있고, 낯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사람도 있고, 버럭버럭 화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사는 모양새가 참 다양하듯 여행하는 풍경도 정말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객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들은 모두 기차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누워 가든 뛰어가든, 모두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 이 기차가 무엇일까요? 보프는 하나님이라고 보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라는 기차 안에 있으니, 어디로 가는지 불안해하지 말고, 너무 절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차여행을 편안하고 신나게, 맘껏 누려야 한다는 말이지요.
물론 보프는 우리에게, 그저 세상만사 괘념치 말고 케세라세라 인생을 즐기자고 부추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기차여행이 얼마나 험하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을 이끄는 것은 인간의 돈과 기술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가 탄 기차가 맘몬의 호화 열차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기에, 우리는 기뻐 찬미하며 이 여행을 맘껏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이 그렇게 가슴 설레는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된 설교 한편을 함께 들었습니다. 2천 년이나 묵은 설교니까, 정말 골동품처럼 오래된 설교지요. 이른바 바울의 ‘아레오파고스 설교’입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한 설교입니다. 아레오파고스는 그리스의 수도인 아테네 북서쪽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입니다. 이 언덕에 올라서면 아테네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요. 사도행전은 이곳을 아레오파고스 법정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법정은 오늘날의 법원의 법정과는 좀 다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재판도 했던 곳이지요.
바울은 아테네에 갔다가 그 도시에 우상들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아테네는 그리스의 중심 도시로서 신전들이 많았고, 신전들에는 신상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우상 문제로 토론을 벌이고, 아테네의 광장에서도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테네의 철학자들과도 논전을 벌이게 되었지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과도 논쟁했습니다. 이 논쟁이 도화선이 되어서,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파고스로 데리고 갔습니다. 길거리 시장바닥 구석구석 쑤시고 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장난하지 말고, 아테네의 중심에서 한번 제대로 토론해보자는 얘기지요. 법정에서 판가름해보자, 그런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아레오파고스 언덕에, 법정 가운데 섰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설교/변증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요? 아테네 사람들입니다. 완전한 이방 사람들이지요. 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증언하려면 무슨 얘기를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 이전에 유대 사람들에게 회당에서 많은 설교를 했습니다. 회당에서 설교할 때, 바울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와 예언자들을 소환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도 모르고 모세도 생면부지인 아테네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교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의 아레오파고스 설교는 그 이전의 설교들과는 아주 다릅니다. 우선 이 설교에는 구약성서의 인물들이 한 사람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의 ‘예’ 자도 꺼내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테네 사람들, 여러분은 참 종교심이 많다고, 신앙심이 깊다고 추어주는 듯 말을 시작하지요. 그런데 그 신전들을 살펴보니, 그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제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리스-로마의 종교에는 수많은 신이 있습니다. 이전에 이집트의 종교에도 그랬지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신이 필요한 까닭은, 그 신들이 각각 담당한 전문분야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종교에서는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마다 각각의 신이 있었습니다. 개구리에게는 개구리 신이 있고, 파리에게는 파리의 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 모든 신을 백화점처럼 한데 모은 신전이 이른바 이집트의 만신전(萬神殿)입니다. 그리스-로마에서는 이게 판테온 신전이지요. ‘판테온’이라는 말이 ‘모든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각각 만물을 담당하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혹시 잘 몰라서 빠뜨린 신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신이 제삿밥 먹으러 내려왔다가 자기에게는 제단이 없다는 걸 알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 신이 삐쳐서 심술이라도 부리면, 이건 큰일이겠지요. 그래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이 드시라고,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까지 차린 것입니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참 기발하고 절묘한 발상이지요. 본래 하나님은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분 아닙니까? 아테네의 ‘알지 못하는 신’을 접점으로 하나님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물론, 하나님은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친 제물을 받아먹는 그런 신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인간이 어떻게 알겠느냐, 하나님은 인간이 파악하여 알고 조정할 수 있는 그런 허망한 우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애초에 그런 인간이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참 매서운 말입니다. 그리스의 신전은 얼마나 크고 웅장하고 화려합니까? 가히 신이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기적이라 할 만큼 압도적이고, 인간의 기를 꺾을 만큼 위압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과연 신들이 거할 만한 거룩한 장소라고, 사제와 철학자들은 앞다투어 침을 튀기며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그 신전을 세계 최대 성전이라며 제왕과 귀족과 만백성 앞에서 신들에게 봉헌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신전이 아무것도 아닌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은 신전/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바울의 이 말은 오늘 대성전을 자랑하는 한국 교회에도 정말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말입니다.
이렇게 신전/성전의 허위를 벗겨낸 바울은 곧바로 그 신전 안으로 치고 들어갑니다. 그 신전 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성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그렇지요. 신전 안에는 매혹적인 신상이 있고, 장엄하고 신성한 예배가 거행됩니다. 거기서 신들에게 성대한 제물을 드리지요. 그 거대한 신전에서 드리는 제물은 정말 엄청났습니다. 그 제물을 드리는 날에는 바치고 남은 고기가 넘쳐나서 온 아테네 사람들이 고기를 맘껏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는 문제로 다툼이 생겼었지요. 고기를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신전 제사 때는 공짜로 맘껏 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제사가, 그 예배가 아무것도 아닌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지 않았다고 토라져서 기어이 몽니를 부리는 심술쟁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아테네 종교의 신전과 제사, 성전과 예배를 근원적으로 부정한 바울은 마침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에게 분명하게 증언합니다. 바울은 여기서도 먼저 아테네 사람들의 말로 시작하지요. 아테네의 시인이 쓴 시 한 구절을 그들에게 읊어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 구절입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어떤 이들도,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존재는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고, 지금도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영원까지 하나님 안에 있을 것이다, 그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오늘 다시 들어도 설레는 말씀 아닙니까? 바울은 이렇게 우리를 우상 종교의 좀비로부터 해방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는 자유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대신전의 도시 아테네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신전에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운 섭리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산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는 이 믿음은 바로 창조신앙의 알짬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신앙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바빌론 유배지에서 우리 곁에 가까이 와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이사야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며 희망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낯선 땅에서 노예로 살아야 하는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작은 신전 하나 없고 신상도 없는데 어디서 어떻게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저 하늘을 뚫고 솟아오른 바빌론의 지구라트들과 어마어마한 신상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하여 주눅 들고 의기소침했습니다. 자신들이 마치 지렁이 같다며 지독한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면, 세상의 뭇 나라가 고작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같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저 위압적인 신상들도 인간이 붓고 두드리고 만들어서 입히고 걸쳐준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이지요. 이사야는 서슬 퍼렇게 군림하는 세상의 통치자들도 검불처럼 말라버리는 풀 포기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바빌론 땅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에서도 여전히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조절의 말씀으로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함께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의 설교가, 인쇄해 놓고 녹음해놓은 것도 아닌데, 이천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설교의 내용입니다. 지금도 교회 부흥 하면 귀신을 쫓는다, 병을 고친다, 기적의 성수를 판다며 온갖 사기와 패륜이 판을 치는데, 부흥의 정점은 세계 최고의 성전 건축이라고 선전하는데, 바울은 아테네의 성전 종교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은 인간이 손으로 건축한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강남의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설교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와 로마까지 전도하면서 왜 변변한 성전 하나 자기 이름으로 남기지 않았을까요? 선교하는 여정이 너무 바빠서였을까요? 아니지요. 바울은 성전과 신상에 집착하는 종교를 무지한 시대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무지한 우상 숭배를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처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 생명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불안하면 사이비 종파들이 말세라며 극성을 부렸지요. 그런데 지금은 과학자들이 앞다투어 종말을 예언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홍수와 태풍과 지진으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올해는 북극 빙하에 펑크가 나서 무척 추운 겨울이 될 거라는 소식도 들립니다. 외부 환경만 흉흉한 게 아니지요. 느닷없는 묻지 마 폭행과 미친 테러로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피조물의 신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찍이 바울은 고난의 시대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습니다.(롬 8:19) 그렇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무슨 반신반인의 영웅들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믿고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통하는 피조물의 신음을 듣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세상은 온갖 폭력과 돈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