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당시 우리나라는 신흥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노골적으로 한국의 주권을 제약하는 음모가 진행되었다. 당시 일본과 내통했던 이완용(李完用), 박제순(朴齊純)등 5적이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당시 외부(외무부) 교섭국장을 담당했던 성재 이시영(省齋 李始榮)은 조약체결의 실무자로서 당연히 이를 알았어야 했으나, 당시 외상인 박제순은 철저히 그를 따돌렸고 조약이 체결되던 날 왕궁이 일본군에 의하여 포위되었음을 알고 성재는 이를 뚫고 들어가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그리하여 동조약이 불법,부당하게 체결된후 성재는 즉각 이를 항의,외부를 사임하였다.
1906년 국운이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당시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양기탁(梁起鐸), 그리고 상동교회에서 선교활동과 애국운동을 주도하는 전덕기(全德基)목사등이 모여 전국적 비밀조직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07년 우당, 성재 두형제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있음을 알고 은밀히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아내어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에게 전달 출발토록 배후지원 하였으나, 후에 헤이그밀사사건이 국제적으로 여론화하자 일본제국주의 세력은 고종을 물러나게 하고 관련자를 일제히 검거토록 수배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이상설은 귀국치 못하고 러시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우당과 성재는 해외로 망명할 것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병탐하는 이른바 경술국치를 당하여 대대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해온 가문의 영석 이석영(潁石 李石榮),우당,성제,등 3형제가 중심이 되고 건영(健榮), 철영(哲榮), 호영(頀榮)등과 함께 6형제분은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의 한계를 느껴, 새로이 만주지역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하고 무장병력을 키워서 전변하는 동북아를 둘러싼 국제정세에 맞추어 권토중래할 것을 계획했다.
이러한 원대한 구상을 위하여 마침 이석영이 한말의 영상인 가오실대신 이유원(李裕元)의 양자로 입적되어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되자 만여석이상의 토지와 재산을 전부 매각하여 그 자금으로 가솔60여명을 모두 이끌고 북만으로 옮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 겨울 압록강을 무사히 건넌 일행은 제일 먼저 자리잡은 곳이 바로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堡 현 吉林省)였다. 그곳에서 주경야독을 위한 독립운동 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최초에는 부설로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세워서 처음으로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인재양성을 기했다.
당초 <新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된 경위는 신민회(新民會)의 <新>자와 신민회가 이곳에 기지를 두어 장차 나라를 발흥케한다는 뜻, 즉 흥국(興國)한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興>자를 합쳐서 지은 것이다.
신흥학교가 터를 잡은 삼원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국인들도 이곳에 집단으로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학교가 설립된 이후 계속하여 한국인들이 몰려드므로 중국인들도 위협을 느꼈고 또한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교묘한 모략에 의하여 분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토지의 매매는 물론 일체의 협조를 거부하여 부득이 우당은 직접 북경으로 가서 웨엔스카이(袁世凱)와 담판하기로 하였다.
마침 웨안스카이는 청나라군대를 이끌고 한국에 진주했던 때 당시 외교관계 실무를 맡았던 성재와는 안면이 있어서 교섭이 쉽게 해결되어,드디어 1911년 인적이 드문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인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로 옮겨 교지를 확장하고 정식으로 교명을 신흥학교(新興學校)로 바꾸어 본격적인 독립운동기지를 세웠던 것이다.
당시 교주는 이석영,교장은 이철영,후에 이상룡(李相龍)이 맡았고 학제는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다. 본과는 중학교육을 실시하고,특별과는 속성과로서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본과 교사로는 장도순(張道淳),윤기섭(尹琦燮 2대 서울 서대문구 국회의원,납북),이규봉(李圭鳳 해방후 李圭昶으로 개명,초대 신흥대학교 학장)등이 담당하였고 특별과는 한말 군장교출신의 이관직(李觀稙),이장녕(李章寧)등이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가을 제1회 졸업생으로 변영태(卞榮泰 전 총리),겅주식(成周寔),강한연(姜翰演)등 11명을 배출했다.
신흥학교는 1913년 5월 교사가 완공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고 학제도 4년제의 본과와 6개월의 장교반,3개월의 하사관반을 두고 여기를 거쳐간 졸업생은 적어도 2년간은 학교의 명령에 따라 복무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학과는 보병,기병,포병,공병,치중(輜重)등 5개병과훈련,그외에 내무령,측량학,축성학,육군형법,징발령,위술복무,구급의료,편제학,훈련교범,전술,전략학 등이 있다.
술과(術科)로는 연병장에서 각개교련과 기초훈련을 했고, 야외에서는 이 고지에서 저 고지로 가상적에게 공격전과 방어전등 전쟁연습을 실시.
체육으로는 엄동설한에 야간도강,통화현 70리 강행군,빙상운동,춘추대운동,격검,유도,축구,철봉등.
군사교육외에 일반교과목으로 고등산술,국어문법,대한지리,대한국사,교육학,윤리학,경제학,물리학,화학,박물학,생리학등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육은 매우 엄격하여 야간에 비상훈련도 실시하고 취침중 비상나팔로 완전무장을 해야하는 임전태세도 가르쳤다.
1914년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경학사 운영이 어려워지고 동포들의 성금도불가능하게 되자 생도들과 졸업한 학우들이 직접 경작도하고 각자의 기능대로 날품팔이도 하는 등 그 수입을 모아서 학교 유지비로 충당했다.그들은 “조국을 위해서는 항일투쟁, 모교를 위해서는 경제투쟁“이라는 표어도 내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어려운 가운데도 계속 발전하여 1917년 봄에는 통화현 제8구 팔리초 소북대(八里哨 小北岱)란 곳에 분교를 설치했다. 이곳은 백두산 기슭에 있는 밀림지대로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白西農莊) 분교(分校)라고 하였다.분교교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다.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별도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교장 여준(呂準)과 교감 윤기섭 및 제1회 졸업생의 발기로 조직되었고 일종의 동창회 모임같으나 명칭을 다물단(多勿團 다물이란 복구강토라는 뜻임)이라고 했듯이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투쟁단체였다. 후에 다물단,신흥학우단을 섞어 부르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애국청년이 계속 몰려듦에 따라 이때 학생수가 무려 600명에 이르러 도저히 수용이 어려웠다. 그리하여 학교를 다시 유하현 고산자 하동대장자(柳河縣 孤山子 河東大壯子)로 옮겼다. 그리고 哈泥河교사는 분교로 두고 金昌煥 교관이 이를 총감독하도록 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직원으로는 당시 여러분이 계셨다. 우선 교장으로는 이상룡,여준,그리고 후기에는 이시영이 직접 담당했고 교사및 교직원으로는 이흡(李洽), 양규열(梁圭烈), 윤기섭,이관직등 교육과 군사 분야 경험 있는 청년외에 김창환(金昌煥), 이청천(李靑天, 본명 池大亨,후에 광복군총사령관),이범석(李範奭), 신팔균(申八均), 김경천(金警天), 김승균(金昇均), 손무영(孫武榮), 박두희(朴斗熙),등 일본이나 중국에서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대거 참여했고 그외에 변영태),이광 (李光 전 체신장관),김훈 (金勳 전 상공장관), 김법린(金法麟 전 문교장관), 오광선(吳光鮮 육군소장 예편), 김학규(金學奎 광복군 제3지대장), 이규봉 등등 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투쟁을 위하여 설립된 독립군 양성기관으로 그 역할을 다했다. 1920년8월 이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약 3천 5백명의 독립군의 간부를 양성했다.여기서 배출된 독립군들은 후에 봉오동(鳳梧洞 전투 1920년),청산리(靑山里 전투 1921년)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며 대한독립군단(총재 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曺成煥),총사령 김규식(金奎植),여단장 이청천, 병력 3천여명의 주축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압력을 받아 소만국경지대로 이동하던중 일본과 소련의 밀약에 의하여 1921년6월 이만市에서 소련군에게 강제로 무장해제되고 이에 항거하는 약270명의 독립군이 피살되었으며 9백여명이 포로가 된 쓰라린 참사도 겪었다.이 참사를 독립운동사에서는 흑하사변(黑河事變,또는 자유시 참변이라 기록하고 있고, 이때 희생된 독립군의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자유시 참변이후 만주일대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은 지극히 저조할 수 밖에없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도 더 이상 독립군 양성이 어려워져서 지하운동으로방향이 전환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꾸준히 양성된 인재들이 후에 임정수립에 따라 광복군에 편입 하였고,또 어떤 이들은 만주에 기지를 둔 무장독립군의 간부로서 밑거름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학우들이 이 나라 독립투쟁에 바친 정열은 그 학교의 교가를 들으면 쉽게 짐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피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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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 성재 이시영옹은 30여년간의 험난한 독립운동을 통하여 6형제분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서, 임시정부의 재무총장과 법무총장을 맡아 중국 중경에서 간고한 투쟁을 전개타가 해방을 맞아 임정요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1947년 2월 22일 : 이시영옹은 독립투쟁 과정에서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독립투쟁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던 역사적 의의를 깊이 인식하고, 새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유능한 애국적인 청년들을 양성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처음으로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에 제1교사를 확보하고 신흥무관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을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1949년 2월 15일 : 당시 초대부통령으로 당선된 李始榮은 본격적으로 대학을 설치하고져 신흥무관하교 출신은 물론,조야의 독지가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자산총액 7천2백57만60원으로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였다.
1949년(단기 4282년) 성재학원은 문교부 고시 제472호로 공시된 등록사항은 다음과 같다
재단법인 성재학원 설립자 이시영 최초의 임원및 리사들은 : 이사장 : 이규현 (李圭鉉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37-1) 상무이사 : 조성집 (趙成集 서울시 중구 도동1가 60) 이사 : 이규창 (李圭昶 서울시 중구 무교동 10) 이사 : 이규왕 (李圭旺 서울시 종로구 화동 23-18) 이사 : 이용술 (李龍術 충청북도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397) 등 5명이었다.
감사 : 주간흠 (朱幹欽 서울시 중구 저동 2가 64) 감사 : 이규열 (李圭悅 서울시 중구 무교동 10)
1949년(단기4282년) 3월30일 : 재단법인 성재학원 등기완료 동 재단법인 성재학원이 성립됨과 아울러 신흥대학이 설립되었다.
설 립 내 역 1. 명 칭 : 신흥대학(新興大學) 2.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2 3. 개교년월일 : 단기 4282년 2월 15일 4. 설립자 : 이시영(李始榮) 5. 설립연혁 : 단기 4282년 2월 15일 재단법인 성재학원성립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한 고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신흥대학을 유지 경영함. 6. 설립당시학과개요 : (1) 법과, (2) 정경과, (3) 영어과, (4) 중어과, (5) 독어과, (6) 불어과, (7) 서반아어과, (8).노어과, (9) 체육과 7. 참고사항 :
부산피난 당시 문교부에 제출된 학교 현황에 의하면 위의 사실외에 아래사항이 기재되어 있음. 학장 : 이융영(李允榮) 현항개요 : 시설학과및 학생정원 (1) 법률학과 240명, (2) 정치학과 240명, (3) 문학과 160명, (4) 체육과 160명, 교원수 71명
1949년 7월 18일 : 전문부에서 제1회 졸업생 205명 배출 (법과 134명,정경과 71명 )
1950년 5월 6일 : 전문부에서 제2회 졸업생 189명 배출 (법과 97명,정경과 92명 )
1950년 : 6.25사변으로 동 대학은 수업을 일시 중단.
그 후 신흥대학교는 조영식(趙永植) 손에 넘어갔고 그는 신흥대학교를 경희대학교로 개칭과 동시에 숭고한 신흥대학교의 역사를 삭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