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탈입망한 명문 스님 2
아직 봄이 왔다고 하기에는 이른 때였다. 화창한 날씨에 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부드러운 어머니 손길 같았다. 따사로운 햇살을 등에 받으며 마당 가운데 서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지는 그런 날씨였지만 아직 봄이라기에는 일렀다.
화단 가에 가장 먼저 돋아나는 원추리도 아직 고개를 내밀지 않았고 제주도의 유채꽃이 피었다는 소식도 아직 없었다.
지난 2월 6일은 명문 스님의 49재였다. 새로 재건한 금산사 대적광전에는 그 동안 명문 스님과 친분이 있었던 도반들이 그 넓은 법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느 스님은 원로 스님의 49재보다 더 많은 수좌들이 모였다고 했다. 사실이 그랬다. 사십대의 스님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모이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재는 성대하고도 엄숙하게 치러졌다.
명문 스님은 금산사가 본사다. 그래서일까? 외로운 남자의 49재 같지 않게 사중의 각별한 마음씀과 배려가 있었다. 몇 백 명은 됨직한 스님들께 일일이 여비까지 지급하기도 했다. 금산문중의 어른이신 월주 스님께선 생전 명문의 사람됨에 대해 그가 금산사를 대표하는 수좌였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명문이 금산사 대적광전 복원불사에도 각별한 신심을 보였음을 칭찬하기도 하셨다.
누군가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던가? 명문은 그야말로 살아 있을 때는 한낱 무명납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덕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밥이나 축내는 수좌가 아니라 실제로 공부에 애쓴 선객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1980년대 초였던가? 그는 여전히 지리산 골짜기에서 예의 그 천막 토굴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다. 때는 여름이라 장마가 계속되어 토굴 안은 온통 누기가 차고 곳곳에 곰팡이가 피고 있었다. 마침내 성냥까지 습기를 먹어 불이 일어나지 않았다. 산은 온통 안개로 차있고 개울물은 불어나서 굉음을 내면서 흘렀다. 명문은 꼼짝없이 그 비 내리는 산 속에 갇히고 말았다.
밥을 해먹을 수 없어서 생쌀을 씹었다. 그것도 나중에는 곰팡이가 나서 굶었다고 했다. 방안이 습기로 축축해져서 잠을 잘 수 없게 되자 아예 잠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몇날 며칠이 흘러갔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오고도 개울을 건널 수가 없어서 며칠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 때 그는 이제 빗속에서 명문의 인생이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공포가 엄습해 오더니 나중에는 그것도 이내 잊어버리게 되더라고 했다. 그리고 밤낮없이 내리는 빗속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죽더라도 생사를 결판내는 공부나 하자’하는 마음으로 좌복에 앉아 그야말로 용맹정진을 했다고 한다.
방안은 비좁고 문 밖엔 비가 내리니 다리를 펴고 운동을 할 수도 없어 줄기차게 앉아만 있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낸 것이다. 뒷날 그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는, 그 때 공부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홀연히 산하 대지의 본래 면목과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가 그 동안 물욕을 끊고 임운자재하는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나 매사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탈속하여 살 수 있었던 것이 이미 이때 공부의 성취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의외로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도도 많았다. 예절을 잘 지킨다거나 공손한 말로 남에게 친절을 베풀 줄 모르는 그에게 존경하고 따르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가서 그를 만나고 대화해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깊고 천진 순박한 사람인가를 금방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도시인이란 얼마나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인가.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친절한 말을 하지만 그것이 자기 마음을 위장하고 있으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따라서 그의 거칠고 분방한 말과 행동을 통해서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리라.
무엇보다 야인기질의 그의 행동을 보고 있으면 우리들의 세련된 인사와 행동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진주에 있는 모 병원 원장이 바람을 몹시 피우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당시 칠십이 넘었는데도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예쁜 간호원이 있으면 손을 댄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 원장과 살림을 차려 산다는 젊은 여자 하나가 절에 다녔다. 그 젊은 여자가 절에 와서도 행동이 방자하고 돈 자랑을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하루는 그 젊은 여자와 늙은 원장이 팔짱을 끼고 길을 가다가 명문 스님을 만났다. 명문 스님은 늙은 원장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여보시게! 늙은 사람이 백주 대로에서 너무 염치가 없지를 않는가. 좁은 진주 바닥에서 이 무슨 추태인가? 당신의 손자 손녀들이 볼까봐 얼굴이 화끈거리는군.”라고 했다.
그렇게 망신을 당한 이후 그 원장은 다시는 그와 같은 추태를 부리지도 않았고 그 젊은 여자도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고 한다.
역시 쌍계사에 있을 때다. 탑전선원에 우리 수좌들 몇 명이 살고 있었다. 한번은 차를 마시다가 선견 스님과 명문 스님 사이에 공부에 대하여 언쟁이 있었다. 갑자기 명문 스님이 일어나 수각으로 가더니 물을 한 통 들고 방으로 들어와 선견의 머리 위에다 붓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당에 서 있다가 웬일인가 하고 멍하니 보고 있고, 명문은 계속 선견의 머리 위에 물을 붓고, 선견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방안은 온통 물바다가 되고 한참 후에 명문이 선견에게 “아직도 그대의 경계는 여여한가?“ 하자 선견은 ”어, 시원하다!”라고 말했다.
아! 사람은 떠나고 추억만 남았구나.
그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어찌 말과 붓으로 다 그릴 수 있을 것인가?
평소에 서로 만나지 못해도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했는데 홀연히 떠나고 나니 그의 자취는 찾을 길 없고 애꿎은 추억만 남았다.
지난 해 여름 그가 실상사로 그의 사제 명오 스님과 함께 찾아 왔을 때 그의 토굴이 있는 하동으로 한번 찾아오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다. 그 때 한 집에 살고 있던 도법 스님과 법성 스님, 나는 셋이서 꼭 한번 같이 찾아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 뒤 가끔 전화로 왜 안 오느냐는 독촉도 몇 번인가 받았다. 하동 장날 오라고도 했다. 그래야 맛있는 장거리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찾아가지를 못했다. 교통이 편리하고 같은 지리산권이라 한나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곳을 못 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이런 저런 사정으로 실상사를 떠나오게 되니 더욱 거리는 멀어졌다.
나는 평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기를 싫어했다. 그래서 장례식이나 제사에 인사 다니는 것을 게을리 했다.
이런 평소의 허물 때문인가? 나는 소식조차도 아예 못 듣고 지나간 것이다.
앞으로는 도반을 찾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다.
여기 한 게송으로 그의 열반에 답한다.
그대 어찌 그리 급하게 왔다가 가셨는가? 예전 우리 한번 만나 뜻이 통한 뒤엔 때로는 산을 오르고 팔을 저으며 다녔었지. 오늘 그대는 떠나고 나는 남아 영전에 향불을 사르고 있네. 옛 스님들 오고 감이 없는 도리 말씀하셨지만 지금 그대 가는 듯이 오고 나 또한 오는 듯이 가고 있네.
출처 ; 효림 스님 / 그 산에 스님이 있었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