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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평생 수행과 포교로 살아온
전남 담양 영은사 혜종스님
글 전현자(본지 한국 취재기자)
기 자 스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 님 반갑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인터뷰 오신다하여, 출가 후 삭발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이제 나는 삭발을 하게 된다. 승복까지 입으면 겉모습은 스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를 스님으로 생각 할 것이다. 스님모습인 내게 “스님! 불교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도 생길 것인데 그럴 때 어떻게 답을 할 수 있을지를 많이 염려했었습니다. 행자생활을 할 때도 그 염려는 계속되어 절의 심부름으로 서울을 가게 되면 아직 행자이지만 스님으로 보이는 내게 “스님! 불교는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불교에 관심을 가져 주시어 고맙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한 행자이어 아는 것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설명 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할 것을 준비하고서야 길을 나섰습니다. 계를 받고 동학사 승가대학에서 불교공부를 할 때도 조심하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누군가 “스님! 불교를 배우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청을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입니다. 그 가르침을 따르면 지혜를 체득해 생사해탈(生死解脫)할 수 있는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저의 말은 마치 먼지와 같으니 저를 통해 불교를 배우려하지는 마십시오. 저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려하면 실망이 클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흠이 생길까 늘 조심하며 살아온 저인지라 오늘도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로써 가르침을 전해야하니, 부족한 저이지만 인터뷰 하겠습니다. 편하게 질문하십시오.
기 자 스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인터뷰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스님! 저를 기다리고 계시다, 법당으로 안내해 주시며 부처님에 대해 설명을 정성들여 해주셨습니다. 독자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 님 두 분의 석불(石佛)이 모셔진 영은사는 천년의 역사가 담긴 고찰(古刹)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부처님께서는 전라남도 문화재이신데 오랜 세월 대나무 숲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였는지 알 수 없이 오래전에 절이 사라져버렸고 부처님께서 대숲에 계신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세월만 흘러가던 어느 날 어느 노(老) 보살님의 꿈에 부처님께서 현몽하시었답니다. 꿈에서 깬, 노 보살님은 꿈이 하도 선명하고 묘하여 집을 나서 대나무 숲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피다 부처님을 발견하였고 노 보살님께서는 부처님 근처에 움막을 짓고 기도하며 지내셨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부처님은 허름한 건물에 방치된 듯 계셨고, 무속인(巫俗人)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다했고 그날도 무속인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계신 두 부처님을 뵈었을 때 너무 참담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기 자 스님! 어려움이 많으셨겠습니다.
스 님 사람들은 불상(佛像)을 문화재(文化財)나 예술품으로 보기도 합니다.
불상은, 눈으로 보이는 대상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진리를 증득하시어 가르쳐주신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의 표징입니다. 존경과 믿음을 다하여 예불(禮佛)로 모셔야하는 부처님께서 오랜 세월 방치되어 온 것에 너무 마음이 아파서 법당을 지어 부처님을 여법하게 모실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발원하였습니다.
기 자 법당의 여법함과 아름다움이 스님의 발원성취로 나타난 것임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스 님 도청의 행정가분과 문화재 위원들의 진심어린 도움으로 불사가 가능했습니다. 도움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절에 올라오는 길이 나 있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절 앞은 다 논이었습니다. 부처님 모셔진 건물도 엉망이었지만 그 주변도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머물 곳은 낡은 컨테이너 같은 곳이고 화장실도 재래식이었습니다. 오직 부처님을 여법하게 모시려는 마음 하나로 불사를 했습니다.
기 자 스님! 대단하십니다.
스 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만,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법당 지을 땅을 사는 것이었는데 심지어 부처님 모셔졌던 땅도 남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600평의 땅을 확보하고,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오늘의 법당이 완성 된 것입니다.
기 자 스님! 고려시대 부처님이시기에 탱화도 고려불화를 재현하셨다 들었습니다.
스 님 부처님 조성시기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자료는 없고, 고려전기 때의 부처님으로 추정 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책에는 ‘금현리 사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사를 시작하면서 발견된 기와조각들을 보면 황토로 구운 것에다 옻칠한 것이었습니다. 옻칠기와로 추정해보면 백제시대의 절이라는 것도 가능하다 합니다.
기 자 스님! 옛 절터는 다 사라진 상태에서 재건 된 것이네요.
스 님 네. 그렇습니다. 앞에는 논, 뒤에는 대숲이었으니까요. 두 분 부처님이 발견된 오래된 절터였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불사 중에 땅 속에서 옛 절의 흔적들이 나타났을 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기 자 스님! 돌부처님이시며 매우 크신데 어떻게 법당에 모실 수 있었습니까?
스 님 부처님이 크시기 때문에 부처님을 먼저 모셔놓고 법당을 지어 나간 것입니다. 부처님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매우 무거워 여러 사람의 힘으로 겨우 모실 수 있었습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부처님이시라 좌대도 화강암으로 해야 어울릴 것 같아 돌을 찾아 전국 곳곳을 찾아다녀 어울릴 돌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과 어우러지는 화강암좌대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좌대를 옮길 때도 길이 없었던 때라 석공 10사람이 지렛대로 “영차영차” 하면서 힘들게 옮겼던 일이 떠오르네요.
기 자 스님! 부처님 발견을 비롯해 영험한 일들이 많았다고요?
스 님 그렇습니다. 영험(靈驗)을 경험한 분들이 많았는데 연세가 높아 대부분 돌아가셨습니다.이야기 중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영험하다는 소문은 동네 사람들이면 다 알고 있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보고 “돌부처인데 무슨? 이것 다 미신이야!”라며 손가락질을 했답니다. 그 말을 한 뒤, 그 사람의 입이 옆으로 돌아가 삐뚤어졌답니다. 그래서 이 병원 저 병원 다 다녀보아도 원인을 알 수 없었고 낫지 않아 삐뚤어진 입은 되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사람이 부처님께 참회를 하고서야 입이 제자리로 돌아왔답니다. 아이를 못 낳은 사람들은 부처님께 기도하여 모두 다,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저와 함께 기도하여 아기 낳은 엄마 이야기도 해드리면, 그 여성은 외국에서 성악을 공부하느라 결혼 초에는 임신을 서두르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임신을 매우 원했지만 47살이 될 때까지 임신이 되지 않았답니다. 남편이 병원장이어도 도움이 안 되었고,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아도 임신이 안 되어 절망감에 지쳐있었을 때, 소개를 받아 이곳 영은사에 와 불공을 드렸습니다. 불공을 드리고 7개월 만에 쌍둥이가 착상이 되어 아기를 낳았습니다.
기 자 스님! 놀라운 일들이 있었네요.
스 님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기도드리는 분들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이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라며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며,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기도드립니다.
기 자 스님! 스님의 자비심에 깊이 감동됩니다. 후불탱화가 아름다운데 어느 분의 작품인지요?
스 님 작가분의 아버님이 탱화장이였습니다. 동학사의 일초회주스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어 만나게 되었는데, 일초스님은 저의 은사스님이시고 작가님의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은사스님의 탱화에 대한 고견도 듣고 함께 의논해서 작가분이 탱화를 완성하셨습니다. 몇 달에 걸쳐 작업하여 탱화를 모시고 온 작가는 신선과 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스님! 오직 수행하는 마음으로, 혼신을 다하였습니다. 하루에 4시간의 잠을 자며 완성 한 탱화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탱화는 탱화를 모사하는 기능장들이 합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고려불화를 전승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더하여 작업을 합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영축산에서 설법하시는 것을 그릴 때도, 경전을 읽고, 경전에 나타난 모습을 그려낸다고 합니다. 탱화의 느낌이 아주 담담하면서 고즈넉하게 묘사 되었으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듯 생명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영은사 탱화를 그린 뒤, 광주무형문화재 21호가 되었답니다.
기 자 스님! 많은 곳에서 포교를 하셨다고요? 포교 방법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 님 여러 곳에서 포교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피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방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법회에 오시는 분들의 마음에 맞추려했습니다. 목포 경찰청에서의 일을 소개드리자면 일곱 분의 스님들과 함께 경찰청을 방문했는데 그 때 첫 총경으로 부임하셨던 총경님이 제게 다가와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스님! 스님의 가슴과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내어주세요. 경승이 되셔서 어려운 사람들을 다독여 주셔야합니다. 혜종스님께서는 큰일 하실 분이니, 스님들께서도 많이 도와주십시오.” 라고 함께 간 스님들께 부탁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총경의 말씀에 고맙고 감동되었지만 다른 스님들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날 이후 전라남도의 경승제도가 발족되었고 전남경찰청 경승이 되어 경찰청 포교를 14년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가전연존자 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혜롭게 전하고 싶어 경전을 읽고, 불교사전을 찾아가며 연구하고 숙고하였습니다. 기도하는 마음과 청중에게 공감하는 마음으로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 한다는 것은 제가 먼저 그 내용을 잘 알고, 이해하고, 수행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에서의 기도와 여러 절일들도 하며 법회를 해야 하기에 경전의 말씀들을 자주 볼 수 있는 벽에 써 붙여 놓고 볼 때마다 마음속에 새기며 통찰했습니다. 그렇게 통찰하다보면 어느 순간, 환하게 밝아지면서 이치를 깨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전공부를 아주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에 주지로 살던 절 앞쪽에 카페가 있었습니다. 그 카페는 늘 새벽 3~4시까지 음악을 크게 틀어 놓았습니다. 밤에는 잠을 자야하는데 음악 소리로 잠이 잘 오질 않았습니다. 그때 음악소리에 잠을 못자는 자신의 심리적인 것과, 외적인 상황을 성찰했습니다. 그래! 많이 졸리면 음악소리에도 잘 수 있을 것인데, 아직 덜 졸리은가 보다! 이참에 잠에 빠질 때까지 경전공부를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공부하다 보니 새벽 예불 때까지 밤을 꼬박 샌 날들이 허다했습니다. 밤새워가며 공부하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면에 축적되고 이해가 깊어져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기 자 시끄러운 상황을 탓하지 않으시고, 공부하신 스님은 대단하십니다.
스 님 수행자로써의 당연한 일인데,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어느 해, 인도에 가게 되어 갠지스강을 바라보는데 간절한 발원이 떠오르더군요. “부처님! 가전연 존자처럼 누구라도 제 말을 들으면, 부처님께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할 수 있는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출가할 때부터 부처님 말씀을 잘 포교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던 것 같습니다.
기 자 스님의 간절함이 제게도 느껴집니다.
스 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 백양사의 포교인연도 소개드리고 싶네요.
인도를 다녀와 2달쯤 후 백양사의 포교국장과 신도국장을 겸임해 달라하셔서 참으로 고맙고 기뻤습니다. 한국의 큰 절들은 모두 아름다운데 백양사도 무척 아름다운 절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는 곳입니다. 저는 백양사 말사인 정혜원에 살면서 1주일에 한 번씩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새벽에 깨어나면 ‘어떤 주제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드리면 감동을 받을까?’ 생각하고 준비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법회를 준비하다보니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기 자 스님의 말씀에 그 간절함이 묻어납니다. 다른 곳에서의 포교활동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스 님 영암의 불교대학과 해군 삼함대, 국군병원, 담양의 공수여단, 교도소 등 여러 곳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제가 진행하는 법회에 늘 200명 정도 참석하셨습니다. 간식을 준비 할 때는 불자(佛子)라고 신청한 분들이면 모두에게, 사정상 법회에 못 나오시는 분들까지도 드실 수 있게 넉넉히 가져가 나누어 드렸습니다. 교도소 법회에는 좀 더 마음을 써 준비했습니다. 참회하는 시간을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 해주면 모두들 반성하며 숙연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상(無常)의 가르침을 말하며, 과거는 지나 간 것이고 이 순간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이치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상의 깨달음으로 용기를 얻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습니다. 법문 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연결하며 예를 들어 쉬운 말로 설명하니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는 분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기 자 스님! 훌륭하십니다. 스님의 ‘비구니 스님’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스 님 먼저 시대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수행하기 전에는 비구, 비구니가 따로 있습니다. 자신과 외적 대상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의 경계인 것이지요. 즉 ‘비구니’라는 생각은 자신이 비구니이고 ‘비구’라는 대상에 대한 상대적 개념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상대적 대상이 존재하는 심리에는 여러 사회적 상황에서의 불편함이 생길 수 도 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에서 비구니, 여성 성직자, 여성들이 비구, 남성 성직자, 남성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는 것도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에는 비구, 비구니가 없습니다. 분별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로 체득된 마음으로 비구스님을 대하니 비구스님들도 달리 대해주시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께서도 깨달음을 이루고자 출가하셨으니, 우리 모두 수행하여 해탈하기를 바래봅니다.
기 자 스님의 수행에 존경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스님의 수행과정을 말씀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스 님 행자 때부터 어린이 법회를 했는데 찬불가는 어린이들이 저보다 더 잘했지요. 그러다 강원(講院)을 가게 되었고 선요(禪要)를 배웠습니다. 어느 날 유마경을 읽게 되었는데 그 뜻이 불현듯 이해되며 환희심에 벅차올랐습니다. 그리고 능엄(楞嚴)반일 때 제주도에서 법회를 보며 지내는데 어느 스님께서 ‘수미산’ 공안(公案)을 주셨습니다. 수미산 공안으로 정진하던 어느 날 “아! 내가 수미산을 짊어지고 있구나!” 라는 깨침이 왔습니다. 간화선(看話禪) 수행할 때, 화두(話頭)를 알음알이로 접근하면 화두에 함몰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음알이가 아닌 의심과 의정으로 뜻을 간파해야합니다. 알음알이로도 화두의 글자 의미는 짐작할 수 있으나 화두의 진정한 뜻은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체득되어 법이 여실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음알이는 생각에서 벗어 난 것이 아니므로 공성을 체득 할 수는 없습니다. 화두를 받아 공부지어 가다보면 나름의 체득이 나타 날 수 있는데 스승께서 그 나름의 체득을 인정 해줘버리면 화두는 더 이상 공부방편이 아니라 공부방해가 되는 것에도 알고 주의해야합니다. “말을 해도, 말을 안 해도 어긋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공부가 될 때까지는 이 뜻을 잘 알아 둬야합니다.
기 자 깨달음을 이룬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스 님 3천배 해 보셨나요? 3천배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3천배를 하려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3천배는 숫자를 기억하기가 어려우니 염주를 써서 숫자를 세 나가려 염주도 준비하고 건강상태가 어느 정도는 따라주어야 한다는 등 지식적으로 다 안다 해도, 3천배를 해보기 전에는 3천배 했을 때의 경험을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달음도 깨달아봐야 아는 것입니다.
글을 읽거나, 법문을 듣고 앎이 생겨 설령 그 뜻이 이해된다 해도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법을 깨친 사람마다 경험에서 오는 느낌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법의 경지를 체득하게 되면 법은 법입니다. 일념 정진하여 법이 체득 될 때는 체득 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다 익은 콩이 콩 껍질에서 터져 나오듯이, 깨달음은 저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량분별(思量分別)을 내려놓고 정진해야 합니다.
기 자 스님!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분을 알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라도 있을까요?
스 님 (스님께서는 잠시 미소 지으시더니) 깨달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언행을 보고 판단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착과 아만심(我慢心)을 여읜 마음으로 자비행을 행하는가? 아닌가를 보면 됩니다. 깨달은 사람의 자비심을, 집착과 욕심의 마음으로 잘 못 알아 깨달은 사람을 바보로 생각하여 이용하는 잘못을 저지르지는 일은 하지 마시길 바라는 당부도 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저 또한 깨달음을 아직 완성한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정진하며 살면 밥값은 하겠구나!” 정도의 체득이 있을 뿐입니다.
기 자 스님의 겸손함에 수행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집니다.
스 님 관심 가져주니 고맙습니다. 화엄경(華嚴經)을 배울 때 강주(講主)스님의 시자(侍子)를 살았습니다. 겨울날 강의를 듣고 강주스님과 같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절 마당을 걸어가는데 어느 순간 앞에 보이는 계룡산이 제게 달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 그 때 강주 스님께서 “눈이 많이 오네!” 하셨는데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그러냐?” “말의 도(道)가 끊어졌습니다!” 강주스님과 저는, 눈 내리는 길을 가야 할 곳을 향해 한마디 말없이 걸어갔습니다. 삭발염의(削髮拈衣) 한 뜻을 마치게 된 경험을 말씀드릴까요?
기 자 네. 스님!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스 님 강원을 졸업하고 선방에 가 두 번째 철에서의 경험입니다. 선방에서는 결제 들어가기 하루 전 날 도량을 청소하느라 풀을 뽑는데 도반스님이 옆에서 호미로 풀을 뽑다가 “이 조그만 것에도 있을 것은 다 있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풀 한 포기에 우주가 있다!”는 깨침이 확연히 나타나 그 스님의 손을 부여잡고 법의 환희심으로 말했습니다. “스님! 고마워요. 이 풀 한포기에 우주가 있네! 우주가 여기 있네!” 제 내면에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랐던 그 스님은 “스님! 죄송해요”하며 오히려 자신의 투덜거림을 미안해하며 당황해 했습니다. 저는 풀 한 포기에도 우주가 있음을 본 순간!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 열심히 정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안거(安倨) 중 월산 큰스님께서 오시어 법문을 하셨습니다. “불조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시니 임제 선사께서 불조를 죽이고 천하를 태평케 하리라 하셨는데, 한마디 일러보시오!“ 그 때에 불현 듯 머리에 환한 빛이 켜지고 있었는데 입승스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고 앉으니 월산스님께서 “그래! 입승자격 있네!”하셨습니다. 그 뒤, 제가 말씀 드렸습니다. “불조(佛祖)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신 것은 중생을 가르치시는 방편이었는데 중생들은 방편에 빠져 헤매니 임제선사가 방편에 떨어진 중생을 번뇌망상(煩惱網想)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불조를 죽이고 천하를 태평케 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 또한 해도, 하지 않아도 옳지 않습니다.”
“그래!” 라시며 고개를 끄덕이셨고 이어 법문을 하시다 “아까 말한 수좌(首座) 말대로, 그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점검 뒤로 공부 지어가는 방법의 기본이 안착되었고 공부길이 처처(處處)에 열려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부 길을 보는 것에는 정진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진과 복덕을 닦는 것이 새의 양날개처럼 함께 닦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 자 말을 해도 어긋나고 말을 안 해도 어긋난다는 경지를 설하시는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 님 (스님은 말없이 앞에 놓였던 차를 마셨습니다! )
인터뷰한 날: 5월 12일
인터뷰한 곳: 담양 영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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