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울창하던 숲을 총독부가 임야조사사업으로 강탈하면서 민둥산이 됐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고 하는데, 한국 근대사 연구자 최병택 공주교대 교수는 “일제가 멀쩡하던 조선의 산림을 황폐화시켰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최근 ‘한국 근대 입업사’(푸른 역사)를 출간한 최 교수는 “일제 지배 이전, 조선의 산림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했습니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임야분포도’에 따르면, 한반도 전체 임야의 68%는 나무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민둥산이었습니다. 한양 도성 인근에는 나무가 제대로 남아있는 산이 없었다고 하는데, 17세기 ‘승정원일기’에는 ‘관서(關西) 지방을 돌아보니 모든 산이 민둥산이다’ ‘평안도뿐 아니라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로 벌거벗었는데 화전(火田) 경작 때문’(숙종 4년·1678년·10월24일)이라고 쓸 만큼, 민둥산이 급증했습니다.
조선 후기 산림은 왜 급속하게 황폐화됐을까. 최 교수는 화전, 산전 개간의 급증, 온돌 보편화에 따른 땔감용 장작과 소금 생산용 연료 수요 증대,병선(兵船)·조운선(漕運船) 건조용 목재 수요를 들었습니다. 그는 “배 1척을 만드는 데 드는 목재를 추산한 연구에 따르면, 수령 60~80년 된 소나무 150그루가 필요하다. 조선 후기 매년 1000척 정도의 배를 새로 만들어야 했으니, 연 15만 그루의 소나무가 벌목됐다”말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산림 녹화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것은 1973년 제1차 치산녹화(治山綠化) 10개년 계획이 시행되면서부터입니다. 정부 예산을 조림 사업에 투자하면서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는데, 정부가 조림에 적합한 수종(樹種)과 기술을 제공하고, 연탄, 석탄 등 대체 연료 보급에 힘써 땔감용 나무 수요를 줄인 것도 기여했습니다.
1차 치산녹화 사업 목표는 6년 만인 1978년 조기 달성했고, 이듬해 시작한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이 끝날 무렵 전국 산림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5만 헥타르에 49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산림녹화 정책이 이후 정부에도 계속 이어진 덕분에 ‘한국은 2차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개도국’(유엔 식량농업기구·FAO·1982) ‘한국의 산림 녹화는 세계적 모델’(레스터 브라운·2008)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최 교수는 “산림녹화에 대한 정부의 확고하고도 일관성 있는 정책과 적절한 예산 투입이 국민의 지지와 참여를 이끌어냈다”면서 “담당 공무원들의 전문성, 헌신적 노력이 어우러지면서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산림녹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제가 식목일이었습니다. 어제 나무 심은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거기다가 며칠 전 산불로 인해 전국의 임야가 엄청 피해를 입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나무 심기에 힘을 쏟은 대통령은 없는 걸로 제가 기억합니다.
<1970년대 초 대한민국 안보는 백척간두에 서 있었다. 1.21 청와대 습격, 울진·삼척 침투, 국립묘지 현충문 폭파 사건...
북의 도발은 거칠 것이 없었다. 평양서는 “수령님 환갑 잔치를 서울에서 열자”는 충성 구호가 등장했다. 1972년 4월 15일 이전에 남침한다는 뜻이다. 미국은 “아시아 방위는 스스로 책임지라”는 닉슨 독트린에 이어 “주한 미군 7사단 2만 명 철수”를 일방 통보했다.
영국 전략연구소는 남한 군사력이 북한에 1대3 열세라고 분석했다. 한국군 탱크는 2차 대전 때 쓰던 76㎜포 장착 M-4, 북한군 탱크는 1950년대 말 배치된 100㎜포 장착 T-55, T-59였다. 한국군 전투기는 200기, 북은 최신예 미그 21을 포함해 580기였다. 12노트 속도 우리 해군 함정이 25노트 북한 함정에 나포되는 사태도 벌어졌다. 북은 화포, 탱크까지 생산하는데 우리는 소총 한 자루 만들 능력이 없었다.
1971년 1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상공부 차관보를 제2 경제수석에 임명했다. 그리고 “예비군 2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병기 개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연말까지 시제품을 만들라”는 시간표와 함께. 촉박한 시한 때문에 ‘번개 사업’이라고 불렸다.
미국은 한국산 화포 개발에 “No, Gun Never”라고 반대했다. 병기가 필요하면 미국에서 구입하라고 했다. 남북 군비 확충 경쟁을 경계했던 것이다. 자체 개발밖에 방법이 없었다. 육군 장비를 분해해서 치수를 잰 뒤 도면을 작성하는 역설계에 의존했다. 부품을 잃어버릴까 야전침대를 갖다 놓고 불침범을 섰다. 미국 무기 교범을 찾으러 청계천 헌 책방도 뒤졌다.
개발팀은 집에 갈 엄두도 못 냈다. 머리와 수염을 못 깎고, 땀과 기름 범벅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거지 행색 때문에 ‘거동 수상자’로 몰리는 일도 벌어졌다. 인천 바닷가에 여관을 잡아 놓고 밤마다 지뢰 성능 시험을 했을 때였다. 며칠 후 소총으로 무장한 군경이 여관을 에워쌌다. 가죽점퍼 입고 고무장화 신은 괴한 10여 명이 인적 드문 바닷가에 밤늦게 나갔다 돌아오면서 “폭발물” 얘기를 한다는 신고 때문이었다.
1971년 12월 16일, 청와대에서 시제품이 전시됐다. 샹들리에 불빛을 받은 빨간 카펫 위에 60㎜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이 놓였다. 처음 보는 국산 병기의 그럴듯한 겉모습에 사람들은 감격했다. 박 대통령은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다. 뒤풀이 만찬에서 박 대통령은 오 수석에게 “오늘은 임자가 내 앞에 앉아”라고 했다. 그리고 맞담배를 권했다. 청와대 신관 30평 반지하실에 병기 진열장이 마련됐다. 박 대통령은 아침 산책길마다 들러 병기 개발 상태를 점검했다.
1972년 4월 3일, 보병 26사단에서 시사회(試射會)가 열렸다. 5개월 날림 작업으로 생산된 병기가 과연 작동할 것인가. 진실의 순간이었다. 3부 요인과 각 군 총장이 참관했다.
카빈총과 기관총 사격이 첫 번째였다. 사고가 날까 내빈석은 300m 멀리 설치됐다. 놀랄 만큼 명중률이 높았다. 표적에 달아둔 타일과 접시가 산산조각 날 때마다 함성이 터졌다. 정작 인솔 장교는 떨떠름했다. 사격 병사들의 철모를 두드리며 핀잔을 줬다. “자식들아, 미국 총 대신 국산 총 주면 어쩌려고 그래.” 국산 병기가 그만큼 못 미더웠던 것이다.
대전차지뢰 폭발 때 10m가 넘는 불기둥이 치솟았다. 내빈석으로 시커먼 캐터필러 조각들이 날아왔다. ‘악’ 하는 비명과 함께 대피 소동이 벌어졌다. 국방장관이 벌떡 일어나 “중지”라고 외쳤다. 박 대통령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쌍안경으로 폭발 지점을 관찰하더니 “순서대로 진행해”라고 지시했다. 시사회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박 대통령은 병기 진열대로 향했다. 81㎜ 박격포 포신을 쓰다듬었다. 귀여운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방위 산업이 지난해 사상 최대 규모 판매 계약을 체결하며 수주 잔액이 100조원을 넘어섰다. 뛰어난 가성비와 철저한 납기 준수로 경쟁력을 인정받은 결과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작년 4월 대한민국 국회 화상연설에서 “러시아의 탱크, 배, 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군사 장비가 한국에 있다”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작년 12월 폴란드 대통령은 계약 넉 달 만에 배달된 K2 전차와 K9 자주포를 해군 기지까지 나와 마중했다.
방산 강국 코리아가 자유 민주주의의 무기고 역할을 하고 있다. 5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황무지에 뿌렸던 씨앗이 맺은 열매다.>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주간
출처 : 조선일보. [김창균 칼럼] 50년전 박정희가 씨앗 뿌린 100조 수주 ‘방산 코리아’
제가 1979년 4월 3일에 입대해, 훈련소에서 지급 받고 전역할 때까지 쓴 소총은 M16K1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미국의 M16A1을 그대로 복제한 총이었습니다.
제가 8주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아서 백암산 부근 휴전선에서 근무했는데 너무 놀란 것이 휴전선 철책 능선에 나무로 만들어 국방색으로 칠한 가짜 대포가 여러 개 있던 거였습니다. 나무로 만든 대포를 거치해서 북한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제가 놀란 것은 우리 군에게 대포도 없다는 거였습니다.
10월 26일 사태가 발생한 날 제가 받은 것은 수류탄 2발과 실탄 105발이 전부였고, 초소 군데군데 M16소총 실탄 박스만 가져다 놓아 지금 전쟁이 발발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은 소총과 수류탄이 전부라는 것을 알고는 무척 허탈했습니다. 저들이 내려온다면 탱크와 포를 앞세울 것인데 우리가 가진 소총과 수류탄은 별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 전쟁 때 쓰던 무기가 전부였고, 월남전에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가져 온 무기가 당시 우리 군이 가진 최신 무기였는데 그 당시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참담했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황무지에 뿌린 씨앗’이라는 말이 정말 와 닿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세계 각국에 첨단 무기를 판매할 수 있을 만큼 무기 생산능력을 갖추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의 대통령들이 어리버리하는 동안에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만들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의 상황입니다. 그동안 말로만 국가안보를 외치면서 북한의 눈치만 보던 대통령들을 회상하면서 대한민국의 근심이 어디서 온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