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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묵상글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지금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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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과거는 기억과 추억으로 남습니다. 미래는 기대와 희망으로 기다립니다. 저도 과거의 기억과 추억으로 웃음 짓곤 합니다. 실수도, 성공도 지나간 과거로 남으면 추억의 앨범에 남는 사진과 같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성지순례를 갔을 때, 동창 신부님들과 휴가를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나환자 마을에 봉사 갔을 때, 농촌으로 봉사 갔을 때도 생각납니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라는 기억과 추억에 의지하면서 현재를 살아갑니다. 미래는 지금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디딤돌이 됩니다. 이민 온 분들이 고생하면서 새벽잠을 설치던 것도 아이들에게 더 낳은 미래를 주기 위해서 입니다. 농부가 뜨거운 여름 땀을 흘리면서 밭을 가는 것은 가을의 풍성한 결실에 대한 희망 때문입니다. 저도 미국에 온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날이 남은 날보다 더 많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신앙의 발판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과거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때는’는 이라고 말하면서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나 때는’이라고 하면서 율법과 계명의 ‘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과거에 누렸던 부귀와 영화에 젖어 있으면서 현실의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는 ‘유령’이 되어서 현실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이민 온지 40년, 50년이 된 분들은 변화된 한국의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분들의 기억은 과거에 묶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 때문에 지금의 기쁨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 걱정, 근심의 90%는 벌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의 지나친 근심과 걱정이 지금의 기쁨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우울증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현실의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여기를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쟁기를 잡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들에 피는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생각해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는 어떠하겠느냐?” 이슬람의 신비주의자 루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보지 못하도록 장막을 친다. 과거와 미래 일랑 모두 불살라 버려라.” 13세기의 영적 스승인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시간은 빛이 우리에게 당도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신에게 이르는 데 있어서 시간보다 더 큰 장애물은 없다.” 예수님께서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즉시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지금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면 부처도 버려라.’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과거도, 미래도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부자청년은 물려받은 과거의 재산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오지 않았던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의 때문에 물려받았던 과거의 재물을 기꺼이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쓰러져 가는 교회의 기둥을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이야기입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그동안 보여 주셨던 주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빵을 많게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걱정합니다. 고작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어떻게 먹일 수 있을지 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물고기와 빵을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없었다는 관념에서 벗어난다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걱정을 떨쳐버린다면 지금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고, 희망의 발판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 부활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모든 근심, 걱정을 버릴 수 있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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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일 기도 < 2022.04.29. 05:23 >
제가 좋아하는 우리 단가 중의 하나가 사철가입니다.
이 단가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있나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이 가사는 사철을 노래하는 것중에 봄 대목이지만,
젊은이가 부르는 봄 노래가 아니라
황혼에 있는 사람의 봄 노래이기에 봄 대목인데도 쓸쓸합니다.
제가 이 노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 먹어서가 아니라
이 노래를 처음 들은 30대 때부터이고, 이 노래를 젊었을 때부터
좋아한 이유는 흥타령이나 '허무로다. 허무로다.'를 얘기하는
코헬렛을 젊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곧, 인생을 거시적으로 보게 하기에 좋아하고,
젊다고 또는 힘이 있다고 날뛰지 않게 하기에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할까요?
그것은 오늘 사도행전의 가물리엘의 말 때문입니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당대의 바리사이나 권력자들과 비교할 때 영적으로 참 지혜롭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렀냐 하면 힘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계획이나 결정이나 실행을
하느님 뜻대로 하기보다 자기 생각대로 하려는 경향이 큰 데 비해
가말리엘은 그렇지 않다는 면에서 그럽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자기 힘으로 일을 마치려고 하지
결코 하느님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일을 마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권력을 얘기할 때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무소불위無所不爲란 그대로 직역하면 못할 것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인데
사마천이 사기에서 여불위의 절대권력을 일컬어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하지요.
원래 장사꾼이었던 여불위는 돈의 힘으로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애첩을 왕에게 바치고 그 애첩에게서 난 아들이 진시황이 되게 하고는
절대권력까지 소유함으로써 못할 일이 하나도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일 힘 있는 사람 중에 하느님 뜻대로 일을 시작하고
하느님의 힘으로 일을 마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가말리엘처럼 하느님 아래 자기 힘을 두는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음의 성무일도 마침 기도를
자주 우리의 <일 기도> 또는 <실행 기도>로 바치며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마친다면 좋을 것입니다.
"주여, 간구하오니, 우리가 할 일을 알려 주시고 그 일을 행할 힘을 주시어,
우리 모든 일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시작하고
시작한 것을 당신으로 말미암아 끝마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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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이야기를 “표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곧 오늘 이 이야기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모자람’과 ‘충만함’이라는 대조를 통해서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시험해보려고 필립보에게 물으셨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빵”을 사야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을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지만, 역시 양을 계산하고 ‘모자람’뿐만 아니라 그것이 ‘소용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는 그것을 “아이”가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가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무력한 ‘아이’는 예수님 자신을 표상합니다. 사실,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 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 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체성사의 “표징”을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충만함을,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얻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감사와 찬양을 노래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나누어 질 때 우리는 진정 충만해 질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가진 모든 것에 감사하게 하소서!
제 자신에 감사하고, 당신 사랑에 감사하고, 당신의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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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마련해 주셨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았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믿음 안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주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먹고도 남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먹고도 남았지만 결국은 때가 되면 또 배가 고플 것이고, 또 먹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기적을 베풀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 안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표징 너머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필립보나 안드레아는 인간적인 계산에 밝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군중의 배고픔에 대해 걱정을 하실 때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단순한 생각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계산이 밝으니 주님을 몰라봅니다. 결국,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을 믿을 것 같으면 ‘제가 가진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모두를 내놓으니 나머지는 당신이 채워주십시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베푸십니다. 베풀면 베풀수록 베풀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하찮게 보일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고 나누었습니다. 필립보와 안드레아가 '이백데나리온 이상'의 세상의 가치에 골몰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논리로는 이해하지 못할 또 다른 세상의 가치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습니다. 주님께서는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은총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분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결과물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을 만나야 합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은 곧 성체성사를 통해서 생명의 빵을 끊임없이 제공하시게 되리라는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체이십니다. 살아계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결과물에 매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며 억지로라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남긴 말과 연관 됩니다. 이때 모세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다"(신명18,15). 하였습니다.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한 모세와는 달리 백성을 죄악에서 구원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해방을 이룬 모세와는 다른 영적 해방자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군중들을 피해 외로이 하느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있다는 것은 곧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늘 한적한 곳을 찾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적인 것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인간적인 계산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그분의 권능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분명한 것은 모든 사람이 먹고도 남을 빵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해방, 탈출을 위해 내가 예수님께 내어놓아야 할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무엇인가?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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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은퇴 후 시골에 내려와 사는 어느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도 그처럼 은퇴한 후 내려와 사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이 둘은 아주 친한 이웃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옆집 이웃이 형제님에게 말합니다.
“이번에 이 동네에 이사 온 사람도 우리처럼 은퇴 후에 이곳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한 번 우연히 만났는데 우리와 아주 잘 맞을 것 같아.”
이 형제님은 물었습니다.
“은퇴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데?”
그러자 이웃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답에 형제님께서는 부끄러워졌다고 합니다. 과거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데, 은연중에 과거를 통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려고 했었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과거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현재를 사는 모습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거를 알면 이상한 선입관만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생님이었다고 하면 따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회계사라고 하면 깐깐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또 정치인은 겉과 속이 다른 것처럼, 사업가면 자기 이익만을 챙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 정확하지 않은 예측일 뿐입니다. 일 자체가 그 사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제일 중요합니다. 과거의 삶을 통해 현재를 산다고 말하지만, 완전히 다른 현재를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에 집중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장정만도 오천 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곳은 아주 외딴 넓은 공터만 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을 한가운데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싶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떤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던 이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습니다. 적어도 노동자의 이백 일치 품삯이 있어야만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필립보가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지금 함께 있다는 것을 잊었고, 과거의 경험에만 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굳이 과거의 경험을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그들 모두 배불리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총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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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앨리스 메이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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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 안에 숨 쉬는 생명 ♣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권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는 몇백명쯤의 목숨이나 빈자들의 외침은 무시해도 좋을 하찮은 것일지 모른다. 일상의 삶에서 나보다 못한 소시민들의 움직임이야 대수롭지 않게 넘겨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고, 어쩌면 관심을 둘 마음의 여유마저 없을지 모른다. 많은 이들이 힘에 따라 이리저리 쏠리고, 가시적인 실적이나 눈에 띄는 그럴싸한 외양을 좇고 있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이들에게 주신 빵의 표징은(6,10) “새로운 파스카”를 상징한다. 예수님께서는 옛것의 종합이실 뿐 아니라, 비록 옛것에서 나왔으나 그것을 무한히 초월하는 ‘새로움’ 자체이시다. 군중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아서가 아니라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까지 그분을 따라갔다(6,2).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6,5) 하고 물으셨다. 이에 필립보는 인간적인 계산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그분이 모든 것을 주시는 ‘생명의 빵’이심을 믿지 못하였다(6,7). 안드레아도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밖에서 곧, 한 소년이 가지고 있는 보잘것없는 빵과 물고기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6,9).
예수님께서는 군중들과 제자들의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약한 믿음을 탓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이들이 먹는 보리빵과 생선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6,11) 친히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이렇게 그분은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요(6,27),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있는 빵’이요 ‘살’(51ㄷ절)이며, 모든 생명에 힘과 생기,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예시되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다 나누어주신 다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6,12)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렇게 군중들과 제자들의 눈에 남은 빵조각처럼 보잘것없고 힘없어 보일지 모르나, 하느님의 생명을 지닌 메시아이며 모두를 살리고도 남는 ‘생명의 빵’이시다.
빵의 표징을 보고 체험한 군중들은 몰이해에 빠져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모시려 한다(6,15). 그들은 하느님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정치적 메시아를 찾고 있었고, 메시아를 찾아 떠났으나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필요와 자신들이 만든 틀에 맞추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있기 위해’, 곧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그들을 피해 가신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군중의 어리석음을 경고하시며 깨우칠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 주시고, 당신의 메시아로서의 길이 군중의 생각과는 다름을 보여주신다.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그리고 ‘생명의 양식’이신 그분을 알아보기 위해 떠나자. 현실을 살아가면서 박해와 고통과 심한 소외, 고독을 느낄 때 홀로 하느님께로 물러가 ‘생명의 빵’을 먹고 다시 시작하도록 하자. 홀로 있음은 하느님의 숨길 아래 자신을 두고, 맡기는 것이다. ‘홀로 있음’은 그분의 생명의 기운, 그분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얼과 기운을 받는 기본자세이다. 우리 자신도 보잘것없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도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생명이신 하느님을 품고,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나 자신만 좇는 일상의 번잡함에서 ‘홀로’ 머물며,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들과 힘없는 이들, 저 변두리의 소리를 소중히 여기며 그 안에서 들려오는 주님을 찾아가 만나보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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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 나타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포석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의 기적에서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었다는 행적에 깔려 있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가 선교의 성과가 풍요로울 것임을 암시하는 마법의 숫자라면, 이 마법을 가능하게 해 줄 필수 조건은 12라는 숫자에 그 의미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2는 하느님의 역사적 선택이 나타난 숫자입니다. 일찍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늘리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실제로 후손 증가의 계기로 삼으신 일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열두 아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450여 년 동안 열두 지파로 늘어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는 각 지파별로 토지를 분배받아 더 큰 집단으로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쌓았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임금들과 대신들, 사제들과 학자들 등 이스라엘 민족의 엘리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겼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끝내 또 다시 바빌론으로 종살이를 하더니, 한번 쇠약해진 국력이 회복될 틈도 없이 그리스계 헬레니즘 세력, 로마 세력에 연이어 지배를 당하는 동안 이 열두 지파의 혈통은 레위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남기고서는 거의 다 끊어지고 섞여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정신도 쇠약해지고 혈통도 보잘 것 없어진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새로이 열둘이라는 역사적 선택을 제자들로 감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제자들 자신은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로 불리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공생활 3년 내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스승께서 수 차례나 발현하셔서 과거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주시기도 했고, 성령까지 보내주셔서 믿음도 담대해 질 수 있었고, 기억도 생생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심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담대한 믿음으로 생생해진 기억을 되살려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니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했고,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저명한 율법학자마저 이를 거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최고의회의 대세가 이렇게 기울어지자 대사제도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사도들을 박해하지는 못했지만 풀어주기 전에 매질한 다음 놓아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얼마든지 죽이고 싶도록 박해하려던 흔적이지요. 그런데 그 억울한 매질을 당한 사도들의 마음가짐이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기준으로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일인데, 사도들이 기뻐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과거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었는가? 그것은 과거 스승으로만 모시던 예수님을 이제는 자신들의 주님으로 모실 정도로 새로운 인간입니다. 과거에 스승에게 빚진 마음을 이런 매질 당함의 모욕으로 털어내고 싶을 정도로 도덕적 부채 의식이 생겨난 새 인간으로 거듭 났음을 뜻합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한 몸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빵의 기적에서 남은 빵 조각으로 채워진 열두 광주리의 숨겨진 의미였습니다.
물고기든 빵이든 기적은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일으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수효가 153마리든 5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기적의 필요조건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실 만한 파트너가 열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열둘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기적의 충분조건인 은총은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필요조건인 사도들의 믿음과 일치가 변수라면 충분조건인 하느님의 은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의 사기지은입니다. 변수의 비중은 겨우 1%요, 상수의 비중은 무려 99%나 되지만, 이 둘을 합해야 100%가 되기 때문에 99%의 상수를 믿는 믿음과 1%의 변수를 채우려는 노력이 다 필요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예수님 말씀이 있어서 들려드립니다. 하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19-20) 이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요한 14,12) 이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열두 광주리를 채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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