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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정소성
사람 몸에 병이 왜 생기는지 그 이유를 사람들은 대략은 아는 것 같다.
그러나 아무래도 확실히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비슷한 여건의 사람이라도 병이 생기거나 생기지 않거나 하기 때문이다.
소백산 아래 한 양지바른 마을에 김 씨 성 가진 한 집안이 있었는데, 이 집안은 무슨 연유인지 집안 대대로 간 병으로 주인이 비교적 일찍 죽었다. 죽는 날짜도 비슷하게 쉰을 겨우 넘기자마자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집안의 증조 대까지, 그러니까 4대조까지를 기억하고 있는데, 증조가 간으로 죽었고, 조부가 또 간으로 죽었다.
그러나 이런 가계에 흐르는 이상한 병력은 3대인 태만 씨 대에 이르러서는 뿌리가 뽑히는 듯했다. 태만 씨는 체형도 컸고 힘이 장사였다.
군 내 씨름대회에 나가서 몇 차례나 우승하여 황소를 몰고 오기도 했다.
동네 원로들은 태만의 선대들이 간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태만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다들 한마디씩 했다.
“조상들이 그 꼬라지더니 자손 하나는 잘 뒀어. 집안이 크게 일어날 거야. 그거 다 묘를 잘 쓴 덕이야.”
“아 내가 어제 태만이 할아비 아비 묘소에 가보지 않았던가! 좌청룡 우백호에 후 산에 전 수라 좌우로는 아담한 산들이 버티고 있고 뒤로는 진산이요 앞으로 강물이 흐르더라 이거야. 딱이지 명당으로는!”
“태만이 뿐이야, 태만이 아들 놈을 좀 보더라구. 아비 뺨칠 정도야. 떡대가 장군감이야!”
“용구 또래 중에 당할 아이들이 없데… 사람 목숨은 4대를 보는데, 앞 두 대는 간병쟁이들이었고, 후 두 대는 장군 몰골이야. 그 집 간병 구덩이에서 벗어났어!”
그런가 하면 아주 유식한 노인도 있어서 제법 그럴듯하게 현대의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술 안 마시고 담배만 안 피워도 간병에는 안 걸린데. 간암인가 뭔가에 걸려도 일찍이만 알아서 수술을 받으면 백발백중 낫는다는구만. 간이란 놈은 신통하게 다시 살이 살아나는 놈이라, 절반을 잘라내도 금방 다시 살아나서 정상이 된다는구만.”
“의사들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있나. 술 안 마시고 담배만 안 피워도 간암에 안 걸린다고! 말도 안돼! 태만이 보라고 술이라면 말로 마시고 담배는 줄창 달고 있는데! 저 떡대에 간병이 생기겠나! 사람 목숨 다 제가 타고 나는 게여!”
이런 노인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요사이 노인들이란 옛날과는 달라서 견문이 넓어서 아는 것이 많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정확하다. 없는 집이 없는 텔레비전과 거의 대부분의 노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 등의 영향으로 그들은 세상과의 접촉이 빈번하다.
그래서일까, 태만의 좋은 떡대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떡대가 기막힌 것하고 이 사람들아 일찍 죽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어. 아랫마을 철중이네를 좀 보게나. 떡대야 철중이가 태만이를 앞서지. 태만이는 군내에서 무등을 탔지만, 철중이는 안동 가서 우승을 하지 않았나. 군내 몇 개 면 소재지에서 온 청년들과 겨루는 것하고, 영주, 봉화, 영덕, 의성, 예천 그리고 안동에서 몰려온 장사들 하고 겨루는 것은 말이 다르지. 거기서 걔가 그렇지 몇 번이나 소를 탔더라. 다섯 번인가 했지 아마. 그런 철중이 간병으로 말라 죽지 않았나!”
“맞아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하지만 태만이를 보게나. 덩치만 떡대가 아니라 온몸이 무쇠 같아. 병 같은 것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야!”
“병 걸려 일찍 죽어서 그렇지 떡대로야 지 할아비하고 아비도 남한테 빠지지 않았어… 지 아비 풍호는 일을 너무 잘해 상머슴 두 사람 몫을 한다고 소문이 나지 않았나. 일 잘 한다고 기만이 어른한테서 전지도 받았고…”
노인들은 풍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풍호는 태만의 아비였는데, 만기 어른 댁에서 머슴을 살았었다. 머슴도 계급이 있어서 그는 언제나 상머슴들이 하지 못하는 험한 일만을 도맡아 처리하는 하머슴 노릇만 했다.
세상이 바뀌어 머슴이란 것이 없어졌다. 태어나 개나 돼지처럼 들판에 나가 일만 하는 머슴이란 것이 없어졌으니 세상은 분명히 좋아진 것이다.
마을 사람들 중에 용구의 증조인 기덕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전해 내려오는 말로 기덕이가 역시 만기 어른 댁에서 하머슴 노릇을 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 산정 마을에서 머슴이란 것이 없어진 것은 용구의 조부되는 풍호 때부터였다. 풍호가 쉰을 갓 넘긴 나이에 간병으로 죽기는 했으나, 살아생전에 좋은 떡대에 힘이 장사라 천석군 만기 어른 댁에서 억척스레 일을 했다.
사람이 순박하기 짝이 없고, 일을 너무 잘 해, 소백산 아래서는 전지가 가장 많다는 만기 어른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하기야 이 지방에서 천석꾼이라 해봤자, 바다보다 더 넓은 호남평야지대에 가면 조족지혈이다. 거기는 천석꾼은 저리 가라다. 만석꾼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눈을 아무리 전후좌후로 굴려도 험한 산뿐인 여기 소백산맥 아래 지역에서는 천석꾼 나기가 예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천석꾼이라 해봤자 논이 그저 수백 마지기에 불과하다. 수백 마지기 논이 적은 것 같지만 이 지역에서는 논 열 마지기만 가져도 부자소리를 듣는다. 그만큼 논이 귀하다. 산 아래 지역과 산복 그리고 하물며 산등성이도 지세가 험해 겨우 밭으로 개간되어 있을 뿐이다. 상시로 물을 대야하는 논이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끝없이 너른 지역에 강물들이 우렁차게 흐르는 호남평야를 상상해서는 안되는 곳이 바로 여기 이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봄철에 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서나 가능하다. 시커먼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만기 어른은 마음이 넉넉하여 그렇게 큰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이 야박하지 않았다. 마음이 후해서 머슴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베풀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보릿고개라는 것이 있어서 농민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산악에 사는 농민들에게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경우다.
겨울을 나기 위해 장만해 놓았던 곡식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음력 3월쯤부터 햇보리가 알갱이를 익히기 시작하는 5월까지 사실상 여기 산악의 궁벽한 농촌에서는 이들 농민들의 배를 채워줄 것이라고는 지푸라기뿐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지푸라기를 먹고 살 수는 없다.
하다못해 나무뿌리를 캐어먹거나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먹는다. 누구네가 굶어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지고, 누구네가 사흘을 굶은 끝에 부황이 들어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다는 소문도 퍼진다.
이럴 때 만기 어른은 풍호의 등에 쌀포대를 가득히 지워가지고는 동네을 돈다. 두말없이 쌀포대를 하나씩 한 집에다 던져주는 것이다. 부황 든 집이라는 소문이 있는 가정에는 두 포대도 던져준다.
이런 만기 어른이고 보니 동네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몇 차례나 면사무소나 군청으로 불려가 면장과 군수로부터 상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일은 만기 어른이 슬하에 딸 하나만을 두었다는 사실이다. 고명딸 하나만을 두었을 뿐 더 이상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다. 딸 하나가 어디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한국의 농촌이 대부분 다 그렇듯이 소백산 아래 동네들에는 아들 선호사상이 농후하다. 이 지역이 험준한 산악지형 탓으로 비교적 덜 개발되었고, 그 결과로 개화한 세상과의 접촉이 비교적 적어 조선 시대 유교사상이 농후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등이 남아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삶의 습속이란 세월이 바뀌어도 쉽사리 바뀌지 않는 특성이 있다. 뭐니뭐니해도 아들이 있어야 그 척박한 밭농사를 지을 것이 아닌가.
조상의 기제삿날이나, 명절 제사 때 제주를 비롯한 남정네들이 장터에 나가 제숫거리를 장만하고, 집안에서는 며느리들을 비롯한 여자들이 제물을 장만하고, 묘소를 찾아 제배하고 술을 따루고 분향할 때는 여자들은 일절 따라가지 못하는 등 옛 조선 시대 풍습이 그래도 남아있다.
남들과 집안 사람들이 만기 어른에게 소실을 볼 것을 강하게 청했으나 그는 끝내 거절하였다. 남은 아내 가슴에 못을 박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끝내 딸자식 하나만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뜻밖에도 하머슴 풍호에게 논 열 마지기와 밭 서른 마지기를 넘겼다.
풍호는 세월이 바뀌어 갑자가 부자가 된 것이다.
황소처럼 일하는데다 여물기 짝이 없어서 풍호는 몇 년 만에 재산이 배로 늘어났다.
그는 대단한 구두쇠여서, 자기에게 땅을 떼준 만기 어른이 봄철 보릿고개에는 꼭 행하던 부황든 집 방문도 그만 두어버렸다.
그렇다고 그가 어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소 눈깔처럼 큰 두 눈을 껌뻑거리면서 남을 바라볼 때면 선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그는 남에게는 인색했지만, 자식이나 조카들에게는 후했다.
그는 맏아들인 태만이와 서울 사는 조카 태준이를 끔찍이 사랑했다.
그가 조카 태준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결국 동생 풍국이를 사랑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태준이는 풍국의 아들이다.
풍국이는 서울에 있는 무슨 재판소에서 서기 노릇을 하고 있는데, 그래도 대단한 출세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네 사람들은 풍국이가 판사나 검사가 되지 못하고 서기밖에 되지 못한 것은, 풍호가 세경을 다 팔아 댔으나 그것이 그의 뒷바라지를 하기에는 부족하여 과거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라고들 했다.
풍국이는 서기밖에 되지 못한 것이 미안했던지 아들 태준이를 데리고 2, 3년에 한 번씩 아비 기덕의 기제삿날 얼굴을 나타낼 뿐 동네 사람들과는 상종을 않고 살고 있었다.
기제사야 장남이 지내니 큰 형인 풍호가 여기 산정 마을에 살고 있는 한 제삿날 외지로 나간 동생은 고향 마을을 찾아오지 않을 수 없다. 기제삿날 고향을 찾아오지 않으면 아비 제삿날에도 오지 않는 호로자식으로 낙인 찍혀 버리는 것이다.
만기 어른이 풍호에게 준 논 열 마지기라면 호남에 가면 별것이 아니지만 논이라고는 정말 찾아보기 어려운 여기 소백산맥 지역에서는 아주 큰 땅이었다. 영주 봉화 읍내에 흩어져 있는 정미소들에서 논 열 마지기에서 나락이 온다면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정미를 하여야 한다.
그러면 읍내 장터에서는 풍호의 이름이 회자하는 것이다.
“읍내 정미소가 전부 풍호 나락으로 점령당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고 장터 국밥집에서는 풍호가 나타나면 주모가 버선 바람으로 주막을 뛰어내려온다. 풍호는 혼자 다니기도 하지만, 잘 생긴 아들 자랑하러 떡대 좋은 태만이를 대동하는 경우가 흔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서울 사는 조카 태준까지 대동하기도 한다.
“어험! 내가 오늘 정미소에 안 가봤나! 내 나락 외에는 들어와 있는 게 없더라카이!”
“아이고 풍호 어른 국밥을 특특으로 말아 드리겠습니더. 어서 오이소! 아드님과 조카까지!”
“야들이 어디 보통 청년들이가! 국회의원도 될 끼고 장관도 될 끼다! 풍국이가 판, 검사가 아이라고 날 우습게 알마 너거들 큰 코 다친데이! 판, 검사는 그깐 놈덜 다 허수아비고, 진짜배기는 서류 만드는 서기장이 일 다 한다 아이가! 풍국이가 이번에 서울재판소에서 서기장이 되었다 아이가!”
“우습게 알다이요! 우리 봉화가 내놓은 지일 출세한 사람 아인교! 아 내 여동생년이 서울재판소로 찾아가서 풍국 어른을 만나서 풍호 어른 이바구를 했다니 껌벅 죽으면서 서류를 척척 해주는데 그것도 공짜로… 그것 갖고 재판에 쉽게 이깃다 아이니꺼! 오늘은 국밥을 그냥 모시겠습니더!”
“그래 겨우 국밥 몇 그룻이가!”
“아입니더! 새벽에 영주 우시장에서 떠온 소머리를 몇 대접이라도 올리겠습니더!”
“어험!”
풍호는 기세 좋게 시장바닥을 누비곤 했다. 국밥집이나 주점에 들릴 때마다 그는 뒤따르는 태만이와 태준에게 귀엣말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나물국밥이나 소머리국밥이 나오마 고기를 묵지 말고 국물만 조금 마시고 치아라! 알았제!”
“…”
태만이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야야, 주모야, 너거 국밥 한 그릇으로 선심 쓸라카지 말거라. 우리 아아들은 포시라바서 고기를 맨날 머그니까네 그런 거 잘 안먹는데이. 국물만 담거래이!”
했다.
그렇게 기세 등등하던 풍호도 결국 간병으로 나무젓가락처럼 말라갔다.
태만이는 돈 든다고 극구 거절하는 아버지 풍호를 업고 영주와 안동으로 좋다는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영주 봉화 읍내의 병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산골 소읍에 무슨 그럴듯한 의사가 오겠으며 좋은 약이 있을 턱이 없다는 것이었다.
태만의 지극한 효성 탓이었을까, 죽는다던 풍호는 그럭저럭 생명을 부지해 가고 있었다.
집에서 봉창을 열면 시커먼 산들이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는 이런 산골에 산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되는 태만이었다.
그나마 풍호가 골골대면서도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은 아무래도 며느리의 음식 덕택인 듯했다. 동네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들 쑥덕거렸다.
며느리는 음식솜씨 하나만큼은 기가 막혀 그녀가 내오는 밥상을 한번 받아본 사람은 그 집을 영영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아비의 병세가 고만해지자, 태만은 더 늙기 전에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영주로 나가 삼겹살 장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아내는 병든 시아버지를 수발하느라 남편 따라 영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젊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고향을 떠나는데 용구가 그래도 마음을 땅에 붙이고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는 것을 사람들은 다들 신통하게 생각했다.
오히려 아비 태만이가 고향 인접 고을인 영주에 나가 삽겹살 장사를 시작하면서 아내는 시아버지 병치례용으로, 아들은 고향 전지의 농사꾼용으로 고향에 남겨 두었다.
“아부지요, 지가 마 산정 마을에 더 살 수가 없십니더. 아부지 병도 고만하이까네 지가 영주로 나가보겠십니더. 내하고 술자리에서 자주 어울리던 아랫마을 관호가 하던 장사 자린데, 녀석이 서울 청량리로 올라가는 통에 누구한테 넘가야 하는데 마침 내가 적격이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십니더.”
“안된다, 병든 아비 버리고 저기 바다 같은 전지 버리고 처자식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고! 지발 정신 차리거래이. 돈 더 벌라카다가 알거지 된다마!”
풍호는 누런 눈을 치뜨면서 아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아들놈의 말이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았던 것이다.
“아부지 병이라 카지만 며누리가 차려올리는 나물반찬이 아부지 병의 악화를 막고 있다고 의사선생이 말하지 않았습니꺼. 거기에 희망을 걸 수 있고예… 사실 아부지 병원값으로 논을 벌써 다섯 마지기나 팔아치웠다 아입니꺼. 우리 논이 전부 스무 마지긴데 4분의 1이 날아갔다 아입니꺼. 처자식 버린다고 하지만 여기서 영주가 백 리도 안됩니더. 엎어지마 코 닿을 데랴예. 아침에 왔다가 점심 묵고 가도 해가 한나절이라예. 사방천지에 사람들이 묵고 살라고 별별 짓을 다하는데, 그래 가족끼리 백 리도 떨어져 있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안되지예! 바다 같은 젠지라 하지만 우리가 주는 품값으로 살아가는 몇몇 없이 사는 집들을 잘 구실러서 일손을 확보하마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간다고 아주 가는 것이 아니니까, 일손이 부족할 때는 제가 장사를 잠시 접고 달려오겠습니더. 용구가 머리는 좋지 않지만 심지가 깊어서 농사를 그러치지는 않을 낍니더!”
“니 놈이 정 나가겠다고 하마 내가 무신 수로 잡겠노! 나가더라도 용구 장가나 보내놓고 가거라.”
“아부지 그럴 시간이 없십니더. 관호가 내가 금방 안 물려받으면 지가 돈을 제 때 마련할려고 다른 놈한테 넘긴다 아입니꺼. 내가 영주 나가 앉는다고 우리 용구 장가 못 보낼 이유가 어디 있습니꺼. 6·25때 아들 군대가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이소! 전선으로 나가더라도 며눌아이 배나 불라놓고 가거라 하던 식 말입니더!”
“요새 놈들은 허파에 한번 바람이 들어가면 막지를 못한다니까!”
풍호는 머리가 굵을 대로 굵어진 아들 태만이의 탈향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구가 아비 따라서 같이 가겠다고 나서지 않는 것만이 신통할 따름이었다. 아직 장가를 안간 용구가 심리적으로 아비보다 어미에게 매여 있기 때문이라고 풍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용구는 지금 당장 농사짓는 일에 바빠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라고 할아비 풍호는 생각했다.
“그래 용구는 안 가제?”
“그라믄요! 논밭 합쳐서 백 마지기나 되는 집에 누구 하나 굳세게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지예! 지 에미하고 용구는 절대 떠나지 않십니더!”
아버지 허락을 받고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냥 하는 소리였다. 병든 아비가 무슨 수로 처자식 두고 사는 아들이 생업으로 하는 일을 이래라저래라 하겠는가.
“장사 밑천은?”
“밭 열 마지기를 오천만 원에 계약을 했십니더! 작년에 손이 모자라서 결국 아무것도 못심었던 땅입니더! 무등골 넘어가다가 왼편에 있는 땅 말입니더!”
“버려진 땅이라 올해는 약초라도 심어볼라 캤는데… 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니 맘대로 팔고 하나?”
“아부지는 병이나 잘 다스리소! 그런 별 쓸데도 없는 일에 신경쓰지 마이소! 내가 한번 말씀드렸더니 응 그래라 해놓고서예!”
“내가 그랬덩가… 몸이 아프니 만사가 귀찮기는 하다만서도…”
태만이는 영주 신역 앞 네거리 근처에 삼겹살집을 냈다.
당장 최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이 삼겹살을 다지고 양념치고 하는 여자 주방장 한 사람과 홀에서 양념된 삼겹살을 화로에 올리고 하는 일을 하는 여자 직원 한 사람을 채용해야 했다.
삽겹살은 고깃간에서 무한정 배급해 주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인력을 다루는 시장에 나가보니 좋은 사람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특히 주방장의 음식솜씨는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에 누구를 데려오느냐는 대단히 중요했다.
태만이는 몇 십만 원 더 얹어주고 일류 주방장을 데려왔다.
과연 일류다웠다. 어떻게나 고기를 재빠르고 능숙한 솜씨로 잘 주무르는지 기가 다 막힐 지경이었다. 주방장의 양념치는 솜씨가 뛰어나 술안주로는 최고였다. 모줏군들이 밤새 삼겹살을 찾았다.
그런데 이런 류의 식당 혹은 술집 시장에서는 솜씨 좋은 주방장들의 이동이 대단히 심했다.
음식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고 손님들이 붙기 시작한다는 뒷소문이 붙으면 여기저기서 스카웃의 손길이 뻗어오고 그러면 몸값이 치솟기 시작한다.
넉 달 만에 주방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으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이들을 한 자리에 꾹 박아두는 방법은 오직 하나, 월급을 파격적으로 올려주는 도리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 벌자고 하는 장사, 돈 벌어서 주방장 잡기 위해 다 써버린다면 장사 하나마나다. 그래서 이 장사를 고기 술 장사가 아니라 주방장 장사라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손님은 끓는데 사업은 어려운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태만이가 해결해야 할 첫 관문이었다.
어떨 때는 주방장이 없어서 하루 이틀 문을 닫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용케 사람을 구해서 다시 문을 열고 장사를 잘 하다가 또 그런 사태가 벌어지곤 했다. 태만이는 장사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조금 장사를 해보니 분명히 되는 장사였다. 잘되는 날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왔다. 고향에서 백 마지기 땅을 일 년간 경작하여 버는 돈을 하룻밤에 벌 수도 있는 날이 있었다.
그러나 장사가 아무리 잘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사람을 구하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가게 문을 닿아놓고 시름하던 어느 날 웬 아주머니 한 사람이 찾아왔다. 얼굴이 못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약간 뚱뚱해서 믿음직스럽게는 보였다.
“삼겹살이라카마 내한테 한분 맡겨보소마.”
말투가 영 촌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얼굴이 영 밉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귀염성이 있는 얼굴이었다. 몸매에 볼륨이 있는 탓인지, 가슴이 상당히 크고 높아 보여 눈길을 끌었다.
“경험이 있능교?”
“경험이라카마 말 마소. 도계에서 그 많은 광부들 중에 내 고기 묵고 술에 취해 안 나가자빠진 사람 없었구마!”
“고기 묵고 술에 취하다이?”
“고기맛이 좋으이까네 자꾸 술을 마셨다 이말 아잉교! 그러다가 녹아 떨어졌다 이 말이구마!”
“정말인교?”
“우리는 거짓뿌렁은 하지 않십니더!”
“그런데 도계는 와 떠났는교? 거기서 얼마 전에 탄광 갱도 붕괴사고가 있었다 카던가…”
“잘 되는 장사 때리치우고 와 떠났나 하마… 참 이런 소리를 해야되나… 남편 죽은 땅에 더 있고 싶지 않아서 떠났구마… 바로 그 갱도 사고에…”
“아이고! 하필이면! 내가 입을 함부러 놀렸습니더. 용서하이소! 잘됐습니더. 내가 마침 솜씨 좋은 주방장을 찾던 중이라 우리 가게에서 일해 주이소.”
“고맙십니더. 그런데 양해를 구할 일은 딸린 아이들이 있어놔서”
“괘안십니더… 결혼했던 사람이 딸린 아이들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꺼! 내가 그걸 양해할 테니까 한 가지 청을 들어주소.”
“뭔데예?”
“장사가 잘 되마 적어도 육 개월은 있어주소.”
“들어드리지예. 장사만 잘 되마 나가라캐도 잘 안나갑니더.”
“다른 데서 두 배로 준다캐도?”
“나는 강원도 사람이라 한분 했다카마 변하지 않십니더. 바위가 어디 변합니꺼! 사장님이나 먼저 나가라 카지 마이소!”
그녀의 채용이 확정되고 나서 그녀는 짐을 챙겨 오겠다고 나갔는데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또 당하는 것이나 아닌지 하는 조바심이 들어 태만은 안절부절을 하다가 결국 가게 밖으로 나가 그녀를 기다렸다.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녀는 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났었던 때가 오후 세 시경이었으니까. 거의 다섯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녀가 어둠 속에 나타났는데, 태만은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고만고만한 꼬마둥이 계집아이들이 세 명이나 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이고! 이 아이들이!”
“야! 내 새끼들입니더! 사장님한테 첫눈에 잘 보일라고 머리감고 새옷으로 갈아입히느라고 늦었습니더. 야들아 인사드리거라이잉!”
“안녕하셨지예!”
“아아니 전부 딸이 아입니꺼!”
“야, 전부 공주들입니더!”
“햐 참!”
태만은 기가 찼다. 무엇보다도 될 일이 아니었다. 이 세 아이들을 가게에서 키울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 넓지 않는 가게에 어디에 이 아이들을 재울 것이며, 무엇을 먹인단 말인가. 아이들이 벌써 상당히 자라 있었다. 제일 큰 아이는 키가 솔깃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삼결살집은 결국 소주집이다. 소주를 마시지 않고 삼결살만 먹는 녀석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술꾼들 사이에서 이 아이들을 키운단 말인가. 술꾼들이란 것들이 얼마나 상스러운 말을 잘 하고 술이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못해 싸움질하기가 예사가 아니다.
“사장님요, 너무 걱정하시지 마이소. 야들요, 마이 묵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아예. 아아들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도 안될 정도라예. 홀에서 고기 나르는 사람 따로 쓸 필요 없어예.
월급이 얼마라예! 야들 월급 돌라고 안 합니더. 한분 시켜보라고 예. 아아들이 참 잘합니더. 술꾼들이 다들 귀엽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어떤 사람은 지 물팍에 앉혀놓고 고기를 찢어 묵입니더. 입술 연지 바르고 젖통 흔드는 색시만 손님 끄는 기 아입니더. 사장님도 정이 들마 아아들이 보고지퍼서 어디 멀리 나가지도 못할낍니더. 야들아― 사장님한테 인사하거래이―”
“안녕하셨지예! 지는 첫째 영란이라예, 야는 둘째 미란이고, 야는 세째 화란이라예― 자― 사장남헌태 인사하자아― 절 해라― 자―”
영란이가 절을 하자 다른 아이들도 고개를 숙였다.
태만이는 기가 찼지만 사실 아이들이 귀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용구란 놈 이외에는 자식이 없는 그가 언제나 딸자식을 하나 원했던 것도 요런 귀여운 아이를 갖고 싶어서였다. 언제나 생떼를 쓰면서 울어 제치는 아들놈보다도, 아비 간장을 다 녹이게 아양을 떠는 딸도 갖고 싶은 것이 아비 마음이다.
“주방장 마음대로 될랑가…”
“그라믄예, 걱정 놓으시라구예. 자 지금 당장 시작하입시더. 사다 놓은 고기가 있지예. 그라마 내일 당장 식당문을 여이소― 내일 점심때부터 당장 손님을 받으이십시더. 하룻밤에 백만 원은 간단히 오릅니더. 이런 목 좋고 건물도 좋은데 놀리다이! 말도 안됩니더!”
태만이는 도계 아줌마에게 이끌려 그녀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룻밤에 매상고 백만 원을 자신하다니. 도대체 고향에서 나락 몇 섬을 팔아야 백만 원이 된단 말인가. 자신이 왜 고향을 버리고 여기 영주 역전 바닥으로 나왔단 말인가.
“그래 보입시더―”
태만이는 도계댁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식당 문을 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도계댁과 딸아이들이 잘 데가 없으니, 식당 한 귀퉁이에 들여놔져 있는 구들방에서 같이자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까지 주방장들은 다들 이 지역 사람들이라 그들의 잠자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집으로 가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잘 데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태만이는 고단하여 녹아떨어졌고, 딸아이 셋도 방바닥에 쓰러져 잤다. 다만 도계댁만이 새벽 세 시까지 내일 재개업 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움직였다.
깍두기와 배추김치를 담그고, 파절이를 준비하고, 고기 굽는 적쇠를 씻고, 불 지피는 화로들을 닦고, 식탁들을 닦고 하느라고 그녀는 정신없이 움직였다. 말이 좋아 주방장이지, 보조 인력이 없으니 자기 혼자 주방장이고 시다였다.
새벽 세 시 경에 태만이 잠이 깨어서 보니 부엌에서는 불이 밝혀져 있었고, 도계댁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지를 않는가. 아이들도 정신없이 자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귀여웠다. 어떤 아이는 머리를 태만 자신의 겨드랑이 속으로 디밀어놓고는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여자아이라 그런지 젖내 나는 그들의 몸에서는 기분 좋은 아이냄새가 났다. 으음, 딸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이로구나. 태만이는 어린 것을 자신의 품으로 안아 주기도 했다.
“도계댁― 어서 눈을 붙이시오. 오늘 온 종일 손님을 받아야 하는데…”
“걱정 마이소. 한밤 꼬박 세워도 끄떡 없십니더― 사장님이나 푹 자이소―”
태만이 자신도 더 이상 잘 시간이 없었다. 가스집에 연락을 해야 하고, 고깃집에 전화를 걸어놔야 한다. 그리고 홀을 대청소해야 했다.
변소를 다녀온 태만은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주탁 하나에 밥보재기가 덮여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보재기를 열어 보았더니, 아이고 이게 웬 일인가. 흰 쌀밥 한 그릇과, 김치 깍두기, 열무김치, 오이김치를 소복이 담은 종지들이 놓여있었고, 두부찌개와 된장찌개가 아직도 열기를 간직한 채 투박한 뚝배기 속에 담겨져 있지를 않는가! 도계댁이 사장님 아침상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도계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태만은 아무리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보살펴준 대가라고 하지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 이쁜 마누라는 삼 년을 가고, 음식 잘하는 마누라는 삼십 년을 간다는 옛말이 생각났다.
“도계댁―”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를 불러 보았으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서 불을 켜 보았더니, 부엌 귀퉁이에 문짝으로 쓰던 판자를 펴놓고 그녀는 그 위에 잠들어 있었다. 전깃불을 켜고 그녀를 불러 보아도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녹아떨어진 것이다.
그녀를 억지로 깨워 온돌로 가서 자게 했다. 아직도 밤 기온이 싸늘했기 때문이었다. 네 모녀가 머리채를 풀어헤치고 정신없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태만은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자신을 향해 달려온 무슨 파도처럼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낮이 밝아오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장사준비를 챙기는데 태만은 그냥 보고만 있어도 될 지경이었다. 꼬마 셋이 편을 짜서 누구는 점심때, 누구는 저녁때, 그리고 밤에 본격적으로 소주손님들이 닥칠 때는 전원하는 식으로 일을 분담하여 고기를 나르고 파절이를 날랐다. 도계댁은 부지런히 고기를 썰고, 간혹 찾는 손님들을 위해 돼지머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파국도 만들어 제공했다.
정말로 도계댁이 예상한 대로 첫날 매상이 백만 원을 넘었다.
태만이는 온종일 쏘다닌 탓으로 밤이면 파김치가 되어 뻗었다. 그러다가 밤중에 오줌이 마려 잠을 깨면 언제나 자기 주변에 꼬마들이 달라붙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설프고 놀랍기도 했으나 그것이 하루 이틀 계속되니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되었다.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교에 진학할 정도의 나이는 아니기 때문에 학교갈 걱정은 하지 않았다.
도계댁은 고집을 부려 부엌안 구석지에 나무판자를 깔고 잤으나 태만이 간곡하게 청하여 아이들이 자는 온돌에 와서 자기로 했다.
한밤중에 잠이 깨면 태만은 깜짝 놀라곤 했다. 검은 머리채를 풀어헤친 여자들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는 장면을 보면 태만은 기가 다 막혔다. 그런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고향의 아내는 파마를 해서 그런 머리채를 가지고 있지도 않고, 고향에 딸도 없으니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태만이가 여느 날처럼 화장실로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차에 자기가 누운 자리와 정반대편에 누워자던 도계댁의 가슴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었다. 희고 탐스럽고 풍요로운 두 개의 젖무덤이 봉긋이 솟아올라 있는 것이었다. 일찍이 아내와 이십 년 넘게 결혼생활을 해봤고, 그리고 드물지 않게 안동, 영주, 봉화 역전거리에 흩어져 있는 해방촌에서 여자를 사보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젖가슴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태만은 욕심을 꾹 참았다. 자기가 돈을 주고 일을 시키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연을 맺어놓으면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거의 매일 그런 일이 벌어지니 사내가 계속 참는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고지식한 태만은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역시 잠에서 깬 태만은 자기 겨드랑이에 머리를 박고 자는 꼬마가 그날만큼은 덩치가 훨씬 크다는 사실을 알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더듬어 보다가 그는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다. 도계댁의 큰 젖무덤이 고무 같은 탄력을 가지고 자신의 손아귀에 잡히는 것이 아닌가.
태만은 더 참지를 못했다. 이런 경우라면 고향 동네 절간을 지키는 도사님도 파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인부를 불러 부엌 안쪽에 방을 하나 달아냈다. 그리고 아이들을 그리로 보내 버리고 태만은 홀 안의 온돌에서 도계댁과 단둘이서만 잠자리를 같이 했다. 태만은 온밤을 도계댁을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달아오른 몸을 불태웠다.
그런 세월이 흐르다보니 불과 백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산정 마을이 까마득했다. 그 사이 여러 번 용구가 다녀갔고, 하물며 마누라쟁이도 아들을 앞세우고 다녀갔다. 아비 풍호는 몸이 나빠서 오지는 못했다. 삼촌 풍국이와 4촌 동생 태준이도 두 차례나 다녀갔다. 삼촌 부자들은 제사지내러 가는 길에 여기 영주역이 중앙선에서 태백선으로 갈아타는 환승역이니까 당연히 들러서 요기를 하고 태만이와 같이 고향엘 가곤 했다.
오히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내일 장사를 해야 하는 태만은 금방 고향을 떠나지만 풍국이와 태준이 부자는 묘자리도 더 살피고 벌초도 하느라 하루 이틀 더 고향에 머무는 수도 있었다.
그런 명절 어느 날, 풍호의 건강이 급작스레 위기에 봉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의식이 가물거렸다. 벌써 제사를 지낸 태만은 고향을 떠나고 없었다.
환자의 동생이자 제일 어른인 풍국의 지시대로 유언을 받으려 했다. 그가 재판소 서기장이니 그의 행동은 너무나 법률적이었고, 정확했을 것이다.
“형님요, 형님요, 논하고 밭은 우짤까예?”
“…”
“내 하고 태만이가 반반 가를까예?”
“아이다, 아이다… 출가한 동생한테는 젠지를 줄 수 없다아… 태만이한테 전부 조라.”
“…”
풍국이는 정말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형의 뜻이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 기분이 나빴다. 우째 우리 고향 사람들은 장남만 받드는가, 이런 풍습은 정말 나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배요, 젠지를 전부 큰아부지한테만 주마 안됩니더! 큰아부지가 영주 역전에서 젖통 큰 첩상이를 둬서 신나게 삽겹살 팔아갖고 돈 잘 벌고 잘 사는데예! 그라마 첩이 젠지 팔아갖고 도망칠 게 분명합니더. 그 첩상이 족보가 어딘지 뼈가 누구 뼌지 알게 뭡니꺼! 한밤중에 둘둘 싸 말아지고 토기마 어디 가서 잡습니꺼! 둘째는 자식이 아이라카마 차라리 장손자 용구한테 주이소!”
뜻밖으로 태준이가 튀어나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빌빌 싸고 있는데, 사촌 형인 태만이가 척박한 고향을 박차고 나와서 삼겹살 장사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샘이 나 속을 끓이고 있던 차였다.
“그래에… 그래에… 그라마 용구하고 큰아기를 불러 오너라…”
장손자 용구와 맏며느리가 죽어가는 풍호 침상 앞에 대령했다.
“그래… 태만이가 정말로 첩상이를 뒀나?”
“야, 틀림이 없습니더! 언제부터 아부지도 아입니더! 차마 말은 못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칵 쥑있부리고 싶습니더!”
“남자가 객지를 돌마… 첩상이도 둘 수 있능기라. 큰아기도 말하거라…”
“내사마 칵 죽든지 칵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더!”
“으음, 그라마… 그라마… 내 전 젠지를 용구한테 넘가라…”
풍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풍국이는 재빨리 죽어가는 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적고는 두 번 낭독하고서 유언자의 손도장을 받았다. 갈퀴처럼 여윈 풍호의 손가락이 둘째 아들의 손에 이끌려 유언을 옮겨적은 종이 위에 날인을 남겼다. 그리고 참석한 사람들의 손도장을 다 돌아가면서 받았다. 혹시 태만이가 소송을 할 것에 대비하는 듯했다.
“너거들 내가 죽더라도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그라고 간병에 조심…”
풍호는 집안 병인 간병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이렇게 쉰 살 고비를 겨우 넘긴 나이에 운명하였다.
풍호의 장사를 지내면서 태만이는 온 집안 식구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했다. 죽은 자와의 사이에 유산에 대해 그런 합의가 있은 지를 모르는 태만이는 몰려드는 문상객들을 맞느라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풍국이는 자신이 받은 형의 유언장을 근거로 하여 전 전지를 장조카인 용구에게로 넘겼다. 일은 일단 끝이 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아버지에게서가 아니라 장조카로부터 논 세 마지기와 밭 열 마지기를 받았다.
용구가 알아서 작은 할아버지에게 그 땅을 떼어준 것이 아니었다.
5촌 아제인 태준이가 이런 말을 했다.
“니도 현장에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할배 유언장을 받지 않았으면 전재산 저절로 큰아부지 것이 되는 거 니 알고 있제? 사람이 하늘을 알고 땅을 알아야제… 눈치코치가 와 그리도 없나… 이런 유산문제에는 서류가 제일 중요하다… 알고 있제… 아부지가 니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계신다. 무신 서류를 또 꾸밀지 모른다!”
“아제요, 마이는 안됩니더…”
“알아서 도고! 너거 아부지 알기 전에! 우리도 고향에 전지 조금 있어야 조상 제사지내러 올 거 아이가…”
이렇게 해서 논, 밭 열세 마지기가 태준에게로 직접 등기이전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을 태만이는 석 달쯤 지난 후에야 알았다. 죽은 아버지의 전지를 넘겨받으려고 문서를 떼어보니 아니 전 전지가 아들놈인 용구와 조카인 태준이 앞으로 넘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막힐 일이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모든 것이 서류의 힘이었다.
고향으로 달려가 아들을 만났다.
“이기이 우째 이렇게 됐노, 이놈의 새끼야!”
“새끼 새끼 하지 마이소! 아부지하고는 의를 끊을 작정입니더! 지가 왜 이러는지 아부지 자신이 제일 잘 알낀데예!”
“알기는 뭘 알아! 너거 가만히 안둔다! 사기죄로 전부 쳐넣을끼다! 아부지가 그런 유언을 했을 턱도 없고시리!”
“정신 똑바로 차리소! 재판소 서기장 삼촌이 했으니까 재판 걸어서 한번 이기보소! 아들과 마누라를 먼저 내삐린 사람이 누군데 그래 입에 거품을 뭅니꺼!”
“내삐리기는! 나는 니놈하고 니 에미를 내삐린 적 없다! 남자라카는 놈들은 간혹 그런 외도를 하는기다. 니놈도 일생 살아 보거라!”
“헛소리 하지 말고 그 젖통 아줌마 있는 곳으로 가소! 어무이가 뒷방에서 쥑일라고 칼을 갈고 있습니더. 더 지체하마 뒷방에서 튀어나올 낍니더! 칼 들고!”
“풍국 삼촌이 했구나. 지 한테도 조금 안떼주니까 형이 미워 장조카 손자한테 몰아준 거구나.”
“오해하지 마소! 할배가 숨이 넘어가민시로 증말로 니 아비가 첩상이를 뒀나 물었습니더. 내가 그렇다카이 그라마 니한테 넘긴다 하셨습니더. 요사이 남자 붙어먹고 사는 뜨내기 여편네들 한 년인들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전 전지 줬다가 그년이 치마에 말아 토기마 어디가서 잡겠느냐 이 말입니더! 꼴도 보기 싫으니 어서 꺼져 주소!”
“저 저 저 놈이 돼질라고 환장을 했나!”
“씨발, 이거 사람 죽는 꼴 보고 싶나… 씨팔! 아무리 아비지만 인간 구실을 해야 아비제! 씨팔 쥑익뿌릴끼다!”
용구가 마당 가운데로 뛰어내리더니 헛간에서 쇠스랑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불이 흘렀다. 이 자리에서는 아비와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러운 인간의 욕망만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태만이는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것들의 혈기에 걸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태만이를 데리고 마을 삼거리로 나갔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근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태만은 아주 드물게 고향을 찾았다. 아비 풍호의 제삿날에도 고향에 가지 않았다. 한두 번 안가니 점점 더 멀어졌다. 이제는 아비의 제삿날짜조차도 가물가물했다. 생각이 나서 혹시나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정말 아들인 용구 손에 사지가 찢어질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곤 했다.
그러나 태만은 고향과 죽은 아비, 그리고 단 하나뿐인 아들 용구, 그리고 아내를 잊은 적이 없었다.
특히 명절이 되면 고향에 가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가 정말 처량하였다.
그 사이 태만이는 아내인 도계댁의 주장으로 사업체를 대구로 옮겼다. 사실 아내도 아니었다. 사실혼 관계에 있을 뿐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인 아내도 아니었다.
사업은 잘 되는 편이었으나 워낙 없이 시작한 사업이라, 집세 내느라 사업이 크게 확장되지는 못했다. 그냥 그날 그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도계댁과의 사랑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그녀가 없으면 잠시도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사이 딸들이 자라 첫째와 둘째가 시집을 가고 막내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여보, 명절날 고향 안가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입니꺼! 너무 상심하지 마시요. 내가 있고 시집간 딸년들이 사위하고 손자를 데리고 오마 됐지 뭘 그리 못된 인간들 사는 곳을 그리워합니꺼!”
“하기야 그렇지! 월남한 사람들은 일생 단 한 번도 못가는데… 나는 그래도 그 인간들을 만날 생각을 안하마 혼자서라도 갔다오마 된다. 우째 니하고 단둘이 고향가서 아부지 묘에 성묘나 하고 오자. 정서방이 차를 운전하겠다고 카드라.”
“그리도 아부지 묘에 성묘하고 싶으마 가입시더. 아무도 모르게 살짝 다녀오마 되지예. 못할 기 뭐가 있습니꺼!”
맏사위 정서방의 차를 타고 태만이 내외가 산정 마을에 다녀왔다. 대구에서 잘 알고 지내는 고향 사람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묘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의 말로는 용구는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고 농사만을 지어 그래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했다. 아내도 잘 지낸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정말 남남이 된 것이다.
아버지 풍호가 발병을 하던 쉰 살 가까이 되어서 태만이 슬슬 자리에 눕기 시작하였다. 몸이 으슬으슬 한기가 돌고 자꾸만 자리에 눕고 쉽게 피로가 왔다. 대구 동산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간암 3기 진단이 나왔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살 수 있는 가망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항암제라고 하면서 몇 번 약을 먹이고, 무슨 방사선 치료라고 하면서 병원 안 여기 저기를 끌고 다니면서 별별 치료용 기구 속으로 처넣고 하더니 결국은 이런 소리를 했다.
“치료효과가 거의 없습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셔서 조용히 계시면서 휴양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휴양하는 것이 좋다니… 그러면 낫는다는 말인가요?”
“그런 뜻이 아니라 치료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죽으라카는 말이군! 죽일 놈들! 왜 그 소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노! 내림병이라 내가 죽을 때가 된기라! 그래 소리 없이 죽어주마!”
태만이는 도계댁의 주장으로 그녀의 친정이 있는 강원도 도계로 가서 산간에 작은 오두막집을 하나 사들였다. 거기서 풀 뜯어먹고 계곡물 길러 마시면 간혹 나았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 짓을 해보지만 태만이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었다.
산간 오두막 생활을 시작한지 석달 쯤되었을 때, 동산병원에서 무슨 전갈이 왔다면서 맏사위가 차를 몰고 강원도로 왔다. 친딸이 아니었으니 사위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녀들은 의붓아비를 깍듯이 모셨다. 그래서 사위도 장인을 잘 모셨다.
“저기 의사가 저한테 전화를 했는데예 아부지가 꼭 살고 싶어하시는가 물어보라고 하입디더!”
“야가 무신 말을 그리 하노! 세상에 꼭 살고 싶지 않는 놈이 어딨노 말이다! 빙신 같은 놈덜! 살리마 도고! 내가 가진 것은 없지만 다 내놓을 끼다!”
“바로 그깁니더. 가진 것을 다 내놓고도 살기를 바라느냐 그것이 알고 싶다 이깁니더!”
“그래 말해 봐라! 무신 소리할라고 그라노?”
“그라마,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카입디더!”
“야, 정서방아, 시원스레 말을 해라! 내사마 속이 타서 못살것다!”
도계댁이 속이 타서 끼어들었다.
“그라마, 아들이, 그것도 피를 받은 친아들이 생… 생… 생간을 절반 정도 내놔야한다 카입디더!”
“친아들이 생간을!”
흰 무명 홑청에 검고 붉은 겉을 한 이불을 제치고 피골이 상접한 몸을 간신히 세우고 있던 태만이가 뒤로 다시 벌렁 나자빠졌다. 아비를 처죽일려고 헛간에서 쇠스랑을 꺼내어 휘두르던 놈이 자기가 살지도 죽을지도 모르는 생간 적출 수술을 허락하겠는가. 게다가 그놈은 아비의 외도를 빌미 삼아 아비의 유산을 가로챈 놈이 아니더냐.
외도를 했다고 상속권을 박탈당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외도는 그냥 외도일 뿐이잖는가. 외도는 헤어지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외도를 했기 때문에 상속권을 빼앗긴 것이 아니라, 죽은 풍호 아버지의 유언이 그렇다고 유언장을 만들고 고인의 손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것은 땅 한 마지기도 물려받지 못한 작은아비 풍국과 아들 태준의 앙심 탓이었다.
“그래도 아버님, 세상에 둘도 없는 친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이것밖에 없다면 그 사람도 이제는 혈기왕성한 나이도 아니고 하니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일 의사의 뜻에 그가 응해준다면 아버님 현재 재산의 절반을 내놓는다고 약조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워낙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아마도 마음이 움직일 것 같습니다.”
“아이고 이 사람, 정서방! 물어보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네! 재산 절반이 아니라 재산이랄 것도 없지만… 전재산을 준다고 하게! 어서 떠나게! 어차피 이년 때문에 벌어진 부자간이 아니던가!”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로는… 물론 그 사실이 가장 큰 요인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행히 나는 그 사람과 그런대로 대화는 트고 지내는 사이입니다. 된통스런 사람이지만 아주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던데요. 문제는 친어머니 그러니까 장인어른의 본부인의 마음이 완전히 돌아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 꿈쩍을 못해요. 아들의 생환이 백 프로 보장되지 못한 수술을 그분이 허락을 할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서라, 정서방, 그놈이…내가 작은마누라 뒀다고 그래 장가가는 날, 아비에게 전갈도 안한 그놈이 어디 인간이냐! 세상에 첩 데리고 사는 놈이 어디 나 혼자뿐이더냐! 어리석은 놈! 옛날 조선 시대에는 소실이란 것이 있어서 삼정승 육판서도 전부 소실을 두었고, 나랏님도 소실 출생이 많았다 카드라! 고만 둬라! 내사 마 너 장모와 평생 잘 살았다. 나도 그런 인간이 내 피를 받았지만 더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죽을란다! 내비둬라! 될 일이 아이다!”
태만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허공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정서방, 저 양반 말 곧이 듣지 말거라. 어서 떠나라카이! 아들 보고싶어 저런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마누라는 잊어버리고 나 하나만을 보고 살 수 있는 양반이다. 하지만 아들은 다르다! 부끄러버서 말은 안해도 아마 조선에 없는 내 아들 용굴끼다! 우리가 소송을 하자캐도 아들한테 전 젠지 다 주는 게 뭐가 나쁘노 하는 양반이데이…”
태만이가 요양하는 도계 초막과 봉화 산정 마을이 멀지 않았다. 강원도와 경상도라서 그렇지 같은 생활권이었다. 요사이는 길이 좋아 정서방은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하루도 안돼 정서방이 돌아왔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 말을 전하러온 날 처죽이겠다고 모자가 낫을 들고 설치는데 혼이 났습니다.”
“내가 뭐라 카드노! 가지 말라고 안카드나! 될 일이 아이다! 생간을 못구하마 죽는다카이 이제는 죽는 도리밖에 없다. 아이고 내 팔자야,… 우째 이런 내림병이 대대로 흘러내릴꼬! 으흐흐흐흐… 할배 아부지 나… 우째 이렇게 한 대도 뛰넘지도 안하노… 으흐흐흐흐…”
집안은 헤어날 길이 없는 깊은 절망과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도계댁은 혼자서 집안 이구석 저구석에 처박혀 너무도 서럽게 울어댔다.
시집 간 두 딸과 집에 있는 막내딸까지 와서 울어대는 통에 집안에 벌써 초상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런 상태에서 한 일주일이 지날 무렵이었다. 정서방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장모님요! 아버님요!”
“이 사람 무신 일이고? 산정에서 무신 기별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거기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현금 한 일억 이천 정도 마련할 수 있느냐고 묻습디다. 내일 정오까지 회답하라고 했습니다. 장인어른의 간과 혈액형이 같은 간이 생겼는데… 누가 트럭에 갈려서 죽었는데 생간이 지금 냉장고에 있답니더. 혈액형만 같으면 친자식 아니라도 수술이 될 수 있답니다. 성공률은 떨어지지만…”
“일억 이천이라… 내가 죽으마 그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마 내가 죽겠다마는…”
도계댁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을 했다.
“제가 한 삼천은 될 것 같고… 동서가 한 이천을 하겠다고 했습니다만… 그런데 문제는 내일 정오까지랍니다. 현금을 가지고 와서 다음번 대기자에게 보여줘야 한답니다. 지금 서른세 명 가량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리고 간도 시간이 흐르면 질이 떨어지고요…”
“그래… 내가 우리한테 고기 대주는 고깃간 사장한테 한번 매달려 볼란다… 살려주겠지… 저거 고기를 그렇게도 많이 팔아줬는데.… 삼 년도 넘게… 내 때문에 저거 부자됐는데…”
집을 뛰쳐 나간 도계댁은 다음날 9시 은행문이 열리자마자 현금 7천만 원을 빌려가지고 나오는데 성공하였다. 맏사위와 둘째 사위가 현금을 5천을 가지고 와서, 합계 일억 이천을 병원에 넘기고 드디어 태만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수술 성공의 희소식이 전해지지도 않았는데, 장모와 두 사위 그리고 세 딸이 수술실 앞 나무의자 위에 엎으러져서 울어댔다.
장장 다섯 시간 가량이 흐르고 나서, 수술문이 갑자기 휙 열리더니 피투성이의 가운을 입은 늙은 의사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일단은 수술이 성공입니다. 간은 살려놨습니다!”
“아이고 고맙습니더… 아이고 고맙습니더… 아이고…”
도계댁은 의사의 가운 자락을 잡고 바닥에 꿇어앉아 울어댔다. 세 딸도 울어댔다. 사위들도 기뻐서 펄쩍 뛰었다.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닙니다. 간이 워낙 상해놔서 어려운 수술이었습니다. 큰 걱정은 안합니다만… 부작용도 살펴보아야 하고… 일단은 안심하십시오… 환자의 연세가 그리 높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의사는 피묻은 가운을 문지르면서 이 유난스런 환자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태만은 이렇게 정말 어렵게 생명을 구했다. 그의 회생은 의사들도 믿지 못하겠다는 식이었다. 그는 석 달 가량 입원생활을 하다가 퇴원을 했다. 그리고도 그는 매일 열 가지 알약을 복용하면서 한 달에 한번 꼴로 병원에 들러 상태를 점검 받았다.
만 삼 년이 지나서야 병원에서는 이제는 더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했다.
“간이 이제는 완전 정상화 되었고 모든 수치들이 정상으로 나옵니다. 정상 기능을 하는 간을 가지시게 되었습니다. 섭생에 조심하시고 특히 절대로 술과 담배를 하셔서는 안됩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더.”
태만과 도계댁은 사위들과 함께 코가 바닥에 대일 정도로 절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무신 말씀이라도 하이소… 다 들어드리겠십니더…”
“혹시 아드님이나 따님들께서도 조기진단을 한번 받아보시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김 선생의 경우도 모체감염이라 한 5십 년간 균이 잠복하고 있었습니다. 조기 발견하여 철저하게 치료하지 않으면 이 병은 발병합니다…”
“…”
의사의 이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의사가 하는 말에 해당하는가를 생각해보는 것 같았다. 의사의 말은 결국 태만의 본 아내의 출생으로 나이가 50세 가까이 된 사람이 해당한다는 뜻인데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아니니까 다들 모인 사람들을 가늠해보는 눈치였다.
“아입니더… 그런 사람은 없어예…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집으로 돌아온 태만은 도계댁의 철저한 조력으로 빈틈없는 요양생활을 했다. 그리고 도계 골짜기에 옛날에 마련해 두었던 초옥을 수리하여 그리로 가서 휴양생활을 했다. 피골이 상접하던 몰골이 점점 좋아졌다. 살도 붙고 근육도 붙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래도 도계댁은 태만이를 가게 일을 하게 하지 않았다.
셋째 사위를 봐서 그에게 바깥 일을 맡기고 주방일은 여전히 자신이 했다.
사업은 썩 잘 되어 태만이가 수술을 받고 십 년 세월이 흘렀을 쯤에 도계댁은 대구 동성로에 작은 빌딩을 하나 샀다. 마침 그해 태만은 회갑을 맞았다.
그래도 도계댁은 한번 혼이 크게 난 탓이었을까, 태만에게 가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냥 조선 팔도를 유람하면서 놀고 지내라는 것이었다. 편해야 병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계댁은 남편의 회갑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도계댁은 아무리 해도 태만의 정식 아내가 아니었다. 그냥 같이 붙어사는 가짜부부에 불과한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피붙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좌우간 이렇게 같이 살고 있으니 그들은 부족함이 없는 부부였다. 도계댁은 남편의 회갑 같은 큰일을 당하면 그 오랜 세월 동안 잊고 살았지만 그래도 고향에 알리는 것이 도리라고 알고 있었다. 이것이 조선의 여자들이었다. 자신의 운명에 복종한다 할까.
그녀는 정서방을 시켜 남편의 회갑을 남편의 고향 산정 사람들에게 기별했다.
이것이 큰 실수였다.
내일이 회갑 날인데, 바로 전날이었다.
불에 벌겋게 달군 인두를 두 손에 꼬나쥔 여편네와 도끼를 한 손에 거머쥔 촌 사내가 가게에 들이닥치더니 다짜고짜로 도계댁을 타고 앉아 몸 여기 저기를 지져대고, 말리는 셋째딸까지 마구 지져댔다. 그리고 그녀들의 허벅지와 젖가슴을 쑥밭으로 만들었다.
이들 침입자들이 한결같이 힘이 워낙 장사라 당할 도리가 없었다. 마침 가게 안에는 남자가 없었다. 셋째 사위도 시장에 장보러 나가고 없었다. 먼 데서 가게 안을 살피다가 들이닥친 것이 틀림이 없었다. 인두를 달군 것으로 보아 조력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심술이 뚝뚝 흐르는 남자 놈은 도끼를 휘둘러 건물 전체를 마구 들쑤셔 놓았다.
한 2, 3십 분을 그 짓을 하더니 무슨 알 수 없는 분이라도 풀린 듯 가게 바닥에 널부러진 여자 둘을 사정없이 발로 짓밟고서는 황급히 사라졌다.
기이한 것은 그래도 도계댁이 파출소에 전혀 신고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 투의 술주정꾼들이 많아 파출소에 신고하는 것이 몸에 밴 도계댁이었다. 그런데 이번만은 유구무언 꿀 먹은 벙어리였다.
그날 밤, 다음날이 자신의 회갑이라고 태만이 도계 계곡에서 내려왔지만 도계댁은 남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당신 얼굴이 와 그 모양이고?”
“화덕에 넘어졌구마… 딸아 하고 같이…”
“정말이가? 누구한테 세게 두둘겨 맞은 것 같은데?”
“두둘겨 맞다이? 말도 아이구마! 내가 무신 죄를 지었다고 두둘겨 맞는교!”
“그러마 병원에라도 가지 와!”
“병원에 갈 정도는 아이구마… 내일이 그날인데 병원 갈 시간이 어딨능교!”
도계댁은 남편 회갑 날 살짝 얼굴을 내비쳤을 뿐 하객들 앞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모양을 하고서는 하객들을 제대로 맞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도계댁은 술값을 안낸 놈들이 돈을 떼어 먹을 요량으로 행패를 부린 것이라고 여러 번 남편에게 말했다. 그러나 태만은 반신반의했다. 아내의 그런 말을 듣고도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당신 그 개 같은 인간들 낯짝을 잘 봤나? 기억할 수 있겠나? 어떠케 생겨먹었더노?”
“아 와 내가 그놈들을 모르겠능교! 맨날 들리갖고 고기 처묵고 술처묵고 행패부리는 놈들인데!”
“그래도 그놈들 손찌검은 안하는데… 혹시 그 인간들, 무신 원한 맺힌 말은 안하더나? 내 추측으로는 산정 사람하고 용구란 놈 같은데…”
“아이고 말도 마소!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원한이 맺혔다캐도 지아비 회갑 날 전날 밤에 그 지랄하는 아들은 이 세상에 없십니더! 절대로 아이라예!”
“으음, 당신 말을 내가 믿기로 하지… 하지만 용구란 놈이란 게 밝혀지는 날, 내가 날도끼 들고 산정으로 가서 요절을 낼끼다! 내 말을 믿어라! 이노오어엄―”
그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어서 주먹으로 화덕을 내리쳤는데, 도라무통을 짤라 만든 화덕이 종이장처럼 우그려졌다. 그가 아무리 회갑을 맞은 노인이지만, 그는 지난날 온 군의 씨름계를 휘어잡던 장사가 아닌가. 쇠로 된 절구공이 같은 두 주먹과 솥뚜껑 같은 어깨는 아무도 당할 자가 없는 것이다.
태만의 회갑을 치르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도계댁은 남편에게 가게를 부산으로 옮겼으면 하는 소리를 여러 번 하였다.
“갑작스레 무신 부산이고… 고향에서도 멀고… 낯선 곳이다… 거기 가서 뭐할라꼬?”
“대구 장사 옛날 같지 않구마. 매상이 안 오르는 거 보마 모리는교! 서울 아이마 부산이라예! 서울에는 보기 싫은 인간들이 사니, 부산으로 가입시더! 해운대라 카는 데가 그리도 사람이 많이 모인답니더… 부산에 아는 사람이 없다이! 무신 소린교? 내 하나밖에 없는 동생 영자가 자갈치시장에서 회 장사하는 거 이자뿌 능교! 지도 마 해운대로 옮길라 카는데 지가 점찍어놓은 가게 옆에 작은 회집이 통째로 매물로 나왔다고 내보고 사라고 해서 내가 벌써 두 번이나 당겨 왔잖능교! 둘째와 셋째 사위가 부산으로 올 것 같다는 말도 하고예! 벌써 우리 건물이 장사 잘 된다고 찝쩍거리는 작자도 있고예… 그 원수 같은 고향 가까우마 뭐 하는데예? 이 양반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기라.”
“장사는 니가 하는 거… 맘대로 해라마… 내사 모리겠다!”
이렇게 해서 태만이는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고향에서 떨어져 사는 게 도계댁의 소원이었다. 이렇게 되니 자연 고향 사람들과는 왕래가 끊어지고 소식도 감감무소식이 되어갔다. 다만 누가 어디서 산다더라 하는 말만이 아주 드물게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할 뿐이었다.
파도가 모래밭과 청석바위에 철썩거리는 부산이라는 데에 가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 딸들 중 두 명이 부산으로 이사를 가서 살 것 같다는 소식은 태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이제 자신의 성씨인 경주김씨는 자기의 주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도계댁의 성씨인 오천오씨만이 득시글거렸다. 그러면 어떠랴, 어차피 한세상인 것을…
부산에서도 장사가 잘되어 태만이는 그야말로 떵떵거리면서 살았다. 도계댁은 외제 승용차를 태만에게 사주었다. 게다가 운전사까지 붙여주었다. 해운대 회집거리에서는 태만을 보고서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적으로 고향 아버지 할아버지 묘소 성묘도 빼먹을 때가 허다하였다. 가봤자 아는 사람도 없고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서울 사는 삼촌네와도 소식이 두절되어 버렸다.
고향집 하고는 남남처럼 살았다. 하도 오랜 세월 그렇게 사니 남보다 더 멀어진 것 같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모자는 옛집에 그대로 산다는 것이었다. 아들놈이 자식을 여럿 두어 대구와 서울로 보내 공부를 시킨다나. 그 자식들이 누구인가. 결국 자신의 손자들이 아닌가.
그래, 지 놈은 지 애비의 취첩 때문에 뒤틀어졌다 하자, 그래 손자 놈들까지 할아비한테 안 보낼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러자니 도계댁은 부산으로 이사간 것만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지 남편의 몇 년만에 한 번씩 있는 성묘길을 막으러 들었다. 회갑을 넘긴 태만은 아내의 적극적인 만류로 맏사위인 정서방을 보내 자기 대신 벌초를 하는 등 고향길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대구에서만 해도 고향이 가까웠는데, 부산에 가니 고향이 아득히 멀어진 기분이었다. 잊어버려도 될만한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인가 작은아버지인 풍국 어른이 세상을 버렸지만, 기별이 오지 않았다. 서울 산다는 말만 들었지 주소도 모르고 전화번호도 몰랐다. 어릴 때는 가까이 지내던 사촌인 태준이도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그나마 소식이라도 전해 듣는 것은 정서방이 장인인 태만의 요청으로 드물게나마 고향 출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지긋해지니 세상만사 아내의 말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젖은 낙엽 같은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루하루 으스대면서 사는 재미가 적지 않았고, 이것이 사는 참다운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가을이던가. 한밤중에 정서방이 들이닥쳤다. 태만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갑자기 죽어 사람을 놀라게 할 어른이란 이제 아무도 없는데, 자신이 왜 이렇게 놀라는지 태만은 자신을 진정시켰다. 솔직한 말이지만, 도계댁이 달고 들어온 딸년들이나 사위 그리고 외손녀들이 무슨 변고가 있어도 자신은 애석해는 하지만 그렇게 놀라지는 않으리라 태만은 평소에 자신을 늘 달래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죽는 일만 남았다고 자신을 달래곤 하던 태만이였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건강하고 수술받은 후 십 년이 넘게 흐른 간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지 않는가.
“장인어른… 장인어른…”
“이 사람이 와 이 카노! 세상에 무신 어려운 일이 있다고 이 모양이고! 내가 니 장모가 다 해결해주꾸마 걱정하지 말거라. 무신 일이고? 전화로 하마 되지 뭐 할라꼬 이 먼 길을 왔노 말이다…”
“장인어른, 전화로는 좀 어려운… 그래서 달려왔습니다. 대단히 화급해서…”
“세상에 화급한 일이라카마 돈밖에 더 있겠나! 무신 일이 생겼길래? 걱정말라고 말했잖나!”
“그게 아니라… 저기 용구가…”
“용구라… 용구가 뭐꼬?”
“이 양반은 용구도 모리능교? 아들넴이 말입니더!”
옆에 앉았던 도계댁이 거들었다.
“으음음――”
태만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헛기침을 한번 크게 했다.
“그래 용구가 우쨌단 말이고? 처죽일 놈!”
“용구가 간암 3기로 죽게 생깄습니더! 지금 대구 동산병원에…”
“가, 가, 간, 간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태만은 비실비실하더니 소파에 가서 쿡 처박혔다.
“아이고 저 양반이… 정서방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그리도 말했는데…”
“그래도…”
온 식구들이 달려들어 그를 바로 눕히고 뜨거운 물을 먹이고 사지를 주무르고 해서 그는 정신을 차렸다. 도계댁이 병원으로 가 자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내가 어때서였다. 두 눈과 얼굴에 생기가 돌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입을 씰룩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자, 대구로…”
“예? 지금 이 밤중에?”
“지금 당장에 떠나자! 그때 그 의사가 아직도 살아있다 카드나…”
─『시에』 2012년 봄호
정소성
경북 봉화 출생. 197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아테네 가는 배』. 장편소설 『여자의 성』, 『악령의 집』, 『바람의 연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