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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8) 성경 이야기 세계 5 – 시점(視點)
복음서 이야기 속 등장인물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개념인 시점(Point of View)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공연장에서 ‘레미제라블’ 뮤지컬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전에 같은 제목의 뮤지컬 버전 영화를 감명 깊게 봤던 터라 실제 극장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역시나 화려한 무대 연출과 현장에서 느껴지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무대와 관람석 사이의 거리는 뮤지컬 버전의 영화보다 인물에 대한 감명을 덜하게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대사와 표정에 집중시키고, 매번 카메라 각도를 달리하여 등장인물의 시점을 부각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좀 더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에도 시점이 존재합니다.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며 각 인물을 묘사하듯 이야기 흐름도 다양한 시점을 드러내며 진행됩니다. 등장인물의 시점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그 시점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먹이신 사건(8,1-10)에서 이야기는 「설화자」 시점으로 시작합니다.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8,1). 이어서 「예수님」은 그 군중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8,2). 「제자들」은 그러한 예수님께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8,4) 라며 반문합니다. 설화자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이어지며 각 인물의 서로 다른 시점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에서 서로 다른 시점을 통해 표현되는 내용(가치)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군중을 가엾게 여기는 착한 목자로, 제자들은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 세계에서 시점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설화자, 등장인물, 수신자의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설화자는 수신자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려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1,1). 반면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제자들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직 알지 못합니다(1,16-20).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수신자는 성경 속 이야기를 보다 넓은 시각으로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고백하는 과정을 궁금해하면서 말입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1) 가나안 정복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집트 탈출 후 40년간 광야 생활을 하다 이룬 결실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모세는 느보 산에서 죽고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죽음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앞까지 도착했다는 이야기로 모세오경을 마무리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온전히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세오경은 요르단 강변을 배경으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모세오경을 읽을 때, 모세오경이 약속된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할 임무를 여호수아에게 맡기면서 요르단 강변에서 끝맺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합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인 예수님의 생애를 요르단 강변에서 시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과거의 약속들이 충만히 실현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 역사 지도」 67쪽 참고)
여호수아기 1-12장에 나오는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도식적이고 이상적인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진 사건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침공 전투가 연이어 빠르게 단시일에 일어난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에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중앙 산악 지역을 쳐들어간 후(1-9장) 숨돌릴 새도 없이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10장), 북부 지역을 점령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11장). 하지만 판관기 1-3장은 여러 사건이 섞여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이 아주 서서히 이루어졌음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과 가나안 원주민들 간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오랜 세월에 걸친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역사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의 구세사를 살펴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과 당시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던 아모리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타이트족, 기르가스족, 히위족, 여부스족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혈통, 곧 서부 셈족계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에 살던 셈족 가운데 이스라엘 12지파 조상 중 일부만 이집트에 내려가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집트 탈출 후 시나이 산에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유일한 신앙 체험을 합니다. 이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반면, 가나안 땅에는 셈족의 성읍들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들 성읍의 백성들은 자신의 임금들뿐 아니라 이집트 파라오의 착취를 당하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피를 가진 사람들이 요르단 강 동쪽에 나타나서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었습니다. 계급 차별이 없고 누구나 평등한 하느님의 십계명은 가나안의 셈족들에게는 ‘복음’이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신앙은 분명히 착취와 억압을 당하던 가나안의 셈족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적극 호응하였습니다. 군사력이 열등했던 이스라엘이 차례차례 가나안의 성읍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을 듣고 하느님의 율법으로 살려고 회심한 가나안 셈족들의 협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기원전 13세기 말엽 곧 기원전 1200년께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집트 공식 문서에는 히브리인들의 탈출 사건이 한 줄도 기록돼 있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람세스 2세의 후계자인 메르넵타 파라오(재위 기원전 1234~1220)가 기원전 1220년께 팔레스티나를 정벌하고 이집트의 옛 수도 테베에 세운 전승 기념비에 ‘이스라엘’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경 이외의 기록물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념물입니다. 따라서 메르넵타 전승 기념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을 알려주는 성경 이외의 유일한 고고학적 자료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12지파에 땅을 나누어 줍니다. 여호수아기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에 선물로 주어진 땅의 진정한 정복자는 ‘주님이시다’라고 이스라엘은 고백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한 후 장엄한 계약 의식을 거행합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온 히브리인들과 예로부터 가나안에서 살다가 이스라엘에 호응한 같은 혈통의 종족들이 동맹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주례한 계약 의식은 모세의 시나이 산 계약과 비슷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우두머리들, 판관들, 관리들을 불러내어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섬길 것을 권고하고 이스라엘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증인이 되어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들은 그 증거로 낯선 신들을 치워버리고 하느님의 율법을 받습니다.(여호 24장 참조) 이 부족 동맹으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7) 성경 이야기 세계 4 - 등장인물
오늘은 이야기의 3요소(인물, 사건, 배경) 가운데 인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등장인물(Character)은 이야기 속에서 사건과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경에서 등장인물은 사람과 사람 집단 그리고 영적 존재들을 포함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체험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일 인물로 행동하는 것처럼 묘사된 부분도 있는데, 가령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마치 한 사람처럼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1,16).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는 성령(1,18), 광야에서 유혹을 이겨낸 예수님께 시중을 들던 천사들(1,13), 그리고 예수님의 등장에 두려움을 느끼는 더러운 영들(1,21-28; 5,1-20)도 이야기 속 인물입니다.
이야기에서 인물을 설정하고 성격을 묘사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들려주기(Telling, 혹은 직접적 제시)로 설화자가 수신자에게 인물에 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요약하고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듣고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설화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그분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3,21). 설화자가 수신자에게 예수님의 친척들에 관한 정보를 직접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보여주기(Showing, 혹은 간접적 제시)로 인물들의 됨됨이가 그들의 언어와 행동을 통해 수신자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은 들려주기와 달리 수신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합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시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8,31-33). 이는 그가 생각했던 그리스도 이미지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모습이 아님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보여주기 방법은 수신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에 관한 정보가 맞는지 살펴보게 하고, 다양한 증거들을 서로 비교 평가하게 합니다.
수신자들은 성경 속에서 여러 인물들을 만나며 다양한 반응을 갖게 됩니다.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공감(Sympathy)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에 대해서는 반감(Antipathy)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때로는 공감의 감정을 넘어 등장인물과 공통점을 발견하며 감정이입(Empathy)을 하기도 합니다. 수신자가 복음서 인물들에게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복음서 속 이야기의 재미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이야기 (6) 성경 이야기 세계 3 – 내부 실화와 외부 실화
앞서 마르코 복음서가 이야기 Story로서 지닌 특징인 이상적 수신자와 설화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을 정리하면서 내부실화와 외부실화라는 두 가지 설화적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 것은 설화자와 이야기, 그리고 이상적(혹은 함축적) 수신자로 구성된 성경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것입니다. 설화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야기를 이해하도록 정보를 제공하고, 이상적 수신자는 설화자가 주는 정보를 통해 복음서의 메시지를 얻습니다. 설화자와 이상적 수신자가 이야기를 매개체로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야기 세계는 내부실화와 외부실화로 구분됩니다. 실화(Diegesis)란 이야기 안에 펼쳐지는 시공간의 세계로, 내부 실화(Intradiegesis)는 이야기 내부 세상을 가리킵니다. 카라바조의 ‘토마스의 의심’ 작품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첫 번째 단계는 그림 속 등장인물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입니다. 토마스의 눈빛과 주름 접힌 이마, 예수님 옆구리로 향하는 손이 그의 불신을 드러낸다면 예수님의 인자한 얼굴 표정, 제자를 인도하는 손은 그분의 자상함이 드러납니다. 제자에게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스승님을 대하는 토마스의 모습이 극적으로 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그림 내부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잘 파악하는 것을 내부실화적 이해라고 합니다.
외부실화(Extradiegesis)는 이야기 밖 세상을 가리킵니다. 카라바조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의 두 번째 단계는 그림 속 이야기가 관람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 찾는 것입니다. 화가는 그림을 감상하는 이 또한 예수님의 ‘제자’로서 토마스 사도 옆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바라보며 주님의 부활을 믿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그럼 밖에 위치한 관람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핀다는 점에서 이러한 감상법을 외부실화적 차원의 이해라고 합니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처럼 성경 이야기를 읽는 데에도 이 두 가지 차원을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내부실화적 차원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전개되는지 살펴야 합니다. 등장인물은 누구이며 어떤 사건이 어떤 과정으로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 사건의 배경은 무엇인지 묻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다음 단계는 외부실화적 차원으로, 이야기가 수신자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설화자가 수신자에게 직접적으로 해주는 표현은 없는지, 그리고 그러한 표현을 통해 수신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앞으로 마르코 복음서를 읽어가며 이러한 두 차원을 구분하며 복음서의 메시지를 찾아보겠습니다.
[사도들의 기쁨과 삶을 담은 사도행전 읽기 05] 초대교회 몇몇 문제들
신약성경의 말씀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말씀이면서도, 초대교회가 처한 문제나 제기한 질문,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런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위협할만한 문제를 꼽는다면, 재림 지연에 대한 문제, 유다교와 결별하면서 제기된 신원의 문제일 것입니다.
첫째, 재림 지연에 대한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도래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자, 사람들은 점차 재림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2테살 2,2)고 선동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사도행전도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부활 후 발현하신 예수님과 사도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재림의 시기가 아닌, 교회 존재의 의미를 밝혀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교회는 재림의 시기를 알아맞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이 아니라, 복음 선포의 사명 안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직무를 수행합니다.
둘째, 신원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이라든지, 부활의 기대, 종말에 관한 생각 등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종교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교는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가르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메시아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결국 유다교의 박해를 촉발하게 되었고, 스테파노의 순교(사도 7,60)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때 초대교회에 대두되던 문제가 구세사의 계승 문제입니다. 옛 이스라엘로부터 내려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구원 역사를 우리 교회가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관한 논란입니다. 이 문제는 겉으로 별거 아닌 듯 보이지만, 구약성경을 부정했던 ‘마르키온’이라는 이단까지 연결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루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루살렘에서 형성되었고(사도 1,12), 줄곧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며, 교회의 지도자들조차 유다교적 신앙을 버리지 않고 회당과 성전에서 유다교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리스도교는 유다교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며 유다교를 완성하는 것이라 제시합니다. 또한 저자는 나자렛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구원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고통 없이 평화롭게 탄생한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 문제와 역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를 깨닫고 고뇌하면서 생겨난 교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풍파와 시련은 신앙을 꺼버리는 도구가 아닙니다. 고뇌하던 교회가 굳건한 믿음의 교회로 성장했듯, 시련과 고심의 시기는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될 수 있습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10) 시나이 산 계약
야훼 하느님과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광야 생활을 하다가 시나이 산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신비로운 신앙 체험을 합니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의 신앙 체험에서 가장 주도적이고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가 없었다면 하느님께 대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없었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모세는 압도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신비로운 신앙 체험을 했다는 것은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야훼는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있다’는 의미는 단순히 철학적 존재 의미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분’ ‘지금 바로 여기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야훼는 ‘있게 하는 분’으로도 해석됩니다. 있게 하는 분은 ‘창조 활동을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 조건은 하느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여 율법인 ‘십계명’을 지키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약을 잘 준수하면 종살이에서 ‘해방’ 시켜 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에서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계약으로 이스라엘은 ‘유일하신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탄생합니다. 주변의 다른 민족들은 자연 현상이나 동물을 숭배하는 종교의식을 행한 것에 비해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역사적인 실제 사건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보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축제를 중요한 종교 의례로 지내게 됩니다.
이 축제는 사실 하느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전부터 모세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의 백성이 내 앞에서 축제를 올리도록 광야로 내보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라오는 ‘야훼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느냐? 나는 야훼를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스라엘을 내보낸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말이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들은 말하였다. ‘히브리인의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리도록 허락해 주십시오.”(공동번역 「성서」출애굽기 5,1-3)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유목민들의 봄 축제를 뜻합니다. 해방절인 파스카 축제는 바로 유목민들의 봄 축제에서 기원한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것을 이집트 탈출 사건과 결부시킨 것이지요. 또 이스라엘 민족의 무교절과 주간절, 초막절은 농사와 연결된 축제인데 이것 역시 이집트 탈출 사건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축제가 바로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파스카 축제인 무교절(해방절)은 탈출기 본문에 이미 나온 것과 같이 종살이에서의 해방 순간을, 수콧이라 하는 초막절은 광야에서 머무른 것, 주간절이라고도 하는 오순절은 시나이 산 계약 체결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 축제들은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시기’(예레 2,2; 호세 2,14-15)와 ‘시험과 유혹의 시기’(신명 8,2-3)를 기념하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신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념하는 거룩한 제사 곧 축제를 통해 거룩한 민족,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관계는 ‘신명기 시대’부터 시작해 갈수록 점점 더 이스라엘과 그들 하느님의 관계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리고 이 계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계약’ 곧 신약(新約)으로 표명됩니다.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 산 계약은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치적 해방’의 의미가 있습니다. 곧 새로운 질서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보장돼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종살이에서 해방과 자유라는 새로운 질서로 들어가기 위해선 ‘신앙의 정화’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바로 ‘광야 생활’입니다. 광야를 떠돌면서 히브리인들은 많은 고생을 하고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가끔 하느님께 대한 신앙도 저버립니다. 광야는 고난과 시련이 끊이지 않는 인간의 현실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 있다면 인내와 희망으로 이 고된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특히, 광야 생활에서 ‘만남의 천막’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의 샘이었습니다. ‘성막’이라고도 하는 이 만남의 천막의 계약 궤 안에는 야훼 하느님과 맺은 십계명 증언판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떠돌면서도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성막 안에서 현존하신다는 확신하고 모든 시련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