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일 연중 제8주일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군맹무상(群盲撫象)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외모나 말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그 동안의 행실로 사람을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흔히 '군맹무상'(群盲撫象)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맹인들이 코끼리를 보고 자신들이 만진 부분만으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 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비유적인 말이지 정말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상아를 만진 맹인은 코끼리는 무와 같다고 하고, 귀를 만져 본 맹인은 부채와 같다고 합니다. 또한 코를 만져 본 맹인은 방앗공이와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기둥나무와 같다고 하였으며, 등을 만져 본 맹인은 널빤지와 같다고 하고, 꼬리를 만져 본 맹인은 새끼줄과 같다고 합니다. 이는 불경의 '열반경'에 나오는 우화인데 여기서 코끼리는 부처님을 비유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그렇게 알고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주 보편적인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고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사람들을 판단해서 말을 함부로 하기도 하고 하느님도 그렇게 판단합니다. 물론 판단은 자유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판단한 대로 다른 사람에게 대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되질이나 말질을 해 보셨습니까? 나는 어려서 되나 말로 곡식을 담아내는 되질이나 말질을 많이 해 보았습니다. 이 되나 말로 곡식도 꾸어 보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곡식을 추수해서 가마니에 담거나 섬에 담아내는 것을 보면 얼마나 흐뭇했었는지요. 아마 그 느낌은 직접 농사를 지어보고, 가마니에 담아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입니다. 말질을 하면서 구성지게 헤아리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곡식을 꾸어줄 때는 되나 말에 곡식을 아주 조심스럽게 담습니다. 그리고 홍두깨로 위를 싹 밀어서 꾸어주고 꾸어준 곡식을 되받을 때는 고봉으로 담아 올리고, 되나 말을 손으로 탁탁 쳐서 곡식이 많이 들어가게 해서 되돌려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되질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관찰하시고 묘사하셨는지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베푼 대로 나도 받을 것이라는 말씀에 오싹해집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조금도 빈틈이 없으니 아주 미세한 것도 모두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또한 '천망회회 소이불루실'(天網恢恢 疏而不漏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굉장히 넓어서 눈은 성기지만 선한 자에게 선을 주고 악한 자에게 殃禍(앙화)를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아니한다.”는 말입니다. 失은 一本(일본)에 ‘漏(누)’로 되었기 때문에 天網恢恢疎而不漏(천망회회소이불루).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老子(노자)≫ 七十三章(칠십삼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늘이 미워하는 바를 누가 그 까닭을 알리요. 이러므로 聖人(성인)도 오히려 어려워한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며, 말하지 않고도 잘 대답하며, 부르지 않고도 스스로 오게 하며, 느직하면서도 잘 꾀한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커서, 성긴듯하지만 빠뜨리지 않는다.” 老聃(노담: 노자)이 말하기를, “그 정치가 察察(찰찰)하면 그 백성이 鈌鈌(결결)하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하늘 그물이 크고 커서 성기어도 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찰찰’은 너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을 말하고 ‘결결’은 다칠까 봐 조마조마하여 조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물눈은 엉성한 것 같으나 넓고 넓어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잘못보고 잘못 판단할 수 있으나 하느님은 조금도 잘못 판단하시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선(善)은 번영하고, 악(惡)은 멸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내 기준에 의해서 판단하고 약점이나 단점을 더 크게 본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올바르게 판단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마음에 조심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느님을 가득 담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결점이나 단점은 내가 더 많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내가 색안경을 썼으니 다른 사람도 그렇게 보이고 내가 잘못한 것은 보이지 않고 남 잘못한 것만 크게 보입니다. 그래서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우리 속담이 조금도 틀리지 않습니다. 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말리는 척하면서 더 때리게 하는 시누이의 앙큼한 행위가 더 한이 된다는 말입니다. 능력도 없으면서 큰 소리를 치고 자신의 잘못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라고 단정 지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서 대들보처럼 박혀있는 위선을 빼어버리고,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회개(回改, 悔改)입니다. 우리는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그물망에서 벗어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그물망을 인정하고, 순수하고 착한 성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