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마르크(1898~1970, 독일)는 이 작품(1929)에서 자신이 겪은 제1차 세계대전의 체험을 1920년경부터 나치가 출현할 때까지의 약 10년간 독일 문단을 지배했던 문예사조인 신즉물주의적인 수법으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이 문예사조는 자아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을 억제하고, 사실에 바탕을 두고 사실 자체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기법이다.
이 소설은 입대한 지 얼마 안 되는 19세의 파울 보이머와 그의 동료들이 운 좋게 한 끼를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어 만족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는 대수롭지 않을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피를 말리는 긴장감 속에서 사는 그들에겐 오래간만의 커다란 행복이다. 그러나 친구 케머리히가 아수라장 같은 야전병원에서 눈물을 흘리며 죽으면서 현실은 냉정히 돌아온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파울 보이머는 허황된 애국심에 들뜬 담임선생 칸토레크의 설득으로 반 친구들인 크로프, 뮐러 5세, 레어와 함께 자원입대하나 모두 전쟁터에서 죽고 만다. 키 작은 알베르트 크로프는 머리가 비상해서 제일 먼저 일등병이 된다. 뮐러 5세는 아직 학교 교과서를 끼고 다니며 특별 시험을 꿈꾸며, 포화가 쏟아지는 중에도 물리 명제를 파고든다. 그리고 얼굴이 온통 구레나룻으로 덮인 레어는 장교 위안소의 아가씨들에게 열을 올린다. 파울 보이머는 바로 작가의 분신인 동시에 전쟁터에 끌려 나간 모든 젊은이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 어떤 건지 잘 모른 채 입대한 이들은 일반 세계와 전혀 다른 광기와 죽음의 세계에 적응해야만 했다. 10주간의 훈련으로 그들은 <병사>로 만들어지고, 서부 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전쟁에게서 인간다움을 빼앗겨 갔다. 젊은이다운 패기와 애국심으로 나선 전쟁터였지만, 그곳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곳이었다. 날마다 포화가 빗발치는 곳에서 파울 보이머는 비로소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기성세대의 허위의식과 전쟁의 무의미함에 눈을 뜬다. 전쟁에서의 긴장감과 불안감,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익숙해져 버린 포탄 소리와 총탄 소리, 이미 일상이 되어 버린 배고픔과 전우의 죽음, 이런 것을 겪은 이들은 술 한 잔, 담배 한 개비, 통조림 하나에도 웃을 수 있지만 그런 웃음 역시 진실은 아니다.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 어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절대적이고 숭고한 이유 따윈 없었다. 독일의 젊은이가 독일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온 것처럼 프랑스의 젊은이도 똑같은 이유에서 총칼을 들었을 뿐이다.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보낸 어른들은 애국심을 강조했지만 전쟁이란 결국 정치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파울 보이머가 자신이 죽인 적군 병사에게 한 말처럼,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병사들은 전쟁이란 괴물에게 깊은 상처를 입은 동지이며 다 같은 피해자인 것이다.
이 작품에는 곳곳에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대립, 허위의식에 가득찬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가 드러나 있다. 학생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전쟁터로 내몬 담임교사 칸토레크 ,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고향 어른들, 이들은 모두 안전한 후방에서 말로만 조국에 대한 사랑을 말하면서, 전방에서 들려오는 진실을 외면한다. 훈련병 시절에 만난 우편집배원 출신의 분대장 히멜슈토스는 부정적인 기성세대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도 막상 전선에 투입되어서는 꽁무니를 빼고 두려워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 힘으로 신병들을 다스리려 하는 히멜슈토스는 권위주의적인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다른 한편으로 군국주의에 빠진 독일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전쟁은 젊은이들의 꿈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짓밟고 인간성마저 빼앗았다. 병사들은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적군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며, 죽어 가는 친구를 걱정하기보다 그의 장화를 탐낸다. 전쟁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생각을 하지 못하는 기계라면 고통은 없을 텐데, 인간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변화에 괴로워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변해 버렸는데 평화가 찾아온다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인공의 말은 자포자기한 병사들의 심정을 잘 보여 준다.
그나마 극한 상황에서 병사들을 지탱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우애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전우들이 하나씩 죽고, 결국 혼자 남은 주인공도 그토록 고대하던 종전을 앞두고 사랑하는 가족 곁으로 가지 못하고 1918년 10월 어느 날 전사하고 만다. 그 날 사령부의 보고서에는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 주인공 파울 보이머의 죽음과 그 날 군 당국이 작성한 보고서는 전쟁의 비정함과 허무함을 절실히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작가는 인간의 생명을 짓밟는 폐해를 보여주면서 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이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줄거리 없이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겪는 일들을 하나씩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 때문에 오히려 텔레비전 다큐맨터리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은 사실감과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물 각자의 개성이 살아 있는 등 소설로서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고 있다. 쉽고 평이하게 쓰인 것도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 소설을 비롯해 레마르크 문학의 진정한 매력은 다른 데 있다. 반전 문학이라고 하지만 그의 소설에는 어떤 이데올로기나 거창한 주장도 들어 있지 않다. 다만 그는 권력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난 전쟁의 참상과 그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실질적으로 그렸을 뿐이다. 그 밑바닥에는 바로 인간의 가치가 짓밟히는 상황에 대한 분노가 숨어있다. 이러한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반전 의식이야말로 레마르크 문학이 단순한 전쟁소설의 차원을 넘어 세계적인 문학으로 인정받는 가장 커다란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서부 전선 이상 없다》,홍성광,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