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혈 / 윤미영
보이지 않는다. 어디든 머물면 형체가 드러나고 만물의 심心도 담는다. 핏줄처럼 얽히고설킨 실금에서 일었다가 사그라지는 냉기에, 손끝이 시리고 옷깃마저 여미게 된다. 실구멍마다 바람의 뿌리가 자란다.
풍혈風穴은 찬바람이 나오는 바위 구멍이다. 땅 밑 지하수의 찬 공기가 바위틈으로 흘러나와 바깥의 따뜻한 공기와 부딪히면서, 사람의 혈과 같은 작용을 한다. 산세에도 혈이 있어 산 땅과 죽은 땅을 만들 듯, 더운 여름날에는 주민들의 피서처가 된다. 영하의 겨울에는 깊은 땅속 훈기가 흘러나와 바깥보다 따뜻해져서 사람들이 몸을 녹이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용두산 공원 아래 사십 계단이 있다. 계단을 사이에 두고 아랫동네와 윗동네의 바람이 달랐다. 복병산에서 부는 간새와 용두산 탑을 넘어 온 건들마가 흘러 다니며 사람살이와 손에 잡히지 않는 냄새를 들춘다. 아랫동네는 출근 시간이면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블랙홀처럼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뱃고동을 실은 도새가 골목 사이로 물결치는 오후가 되면 담배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여 끈적거린다.
윗동네는 동 트기 전부터 들썩거린다. 우리 집 2층에 살고 있는 김 할매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자갈치 쪽으로 걸어간다. 3층에 사는 박씨도 매일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력 사무소로 나선다. 식당 허드렛일을 하는 청도 아지매도 가로등이 깜빡거리는 계단 아래로 더듬거리며 내려간다. 가게 문을 여는 어머니는 월세를 제때 못내는 그들을 배웅하며 타들어가는 마음에 바람구멍만 커졌지 할 말을 못하는 처지다.
빨랫줄이 터질 정도로 흔들리며 춤을 춘다. 박씨의 작업복은 문지르고 밟아도 녹물이 빠지지 않는다. 서너 번을 헹궈도 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할매의 앞치마도 마파람에 너울거린다. 할매가 담배에 불을 댕기자 신기루처럼 뽀얀 연기가 하늘로 풀풀 날아간다. 연기는 부딪히고 꺾일 때마다 생살 베이듯 살아온 이들의 외로움이고, 지독한 가난의 무늬처럼 희뿌옇게 피어올랐다.
정오가 지나자 먹장구름이 몰려들면서 하늘언저리가 어둑어둑해진다. 일기예보에 없던 비가 쏟아지고 바람마저 세차져서 빨래들이 마구 흩날린다. 빨래들은 셋방살이의 궁색한 삶을 벗어나려는 듯 훨훨 날아서 낡은 전깃줄에 걸린다. 어머니가 장대로 살살 흔들어 달래면 빨래는 땅으로 하나 둘 떨어진다. 그것을 먼저 본 사람이 제 옷, 남의 옷 가리지 않고 주워 담는다. 그럴수록 더 친친 감기는 게 녹록치 않은 삶인가 싶다. 사람들은 낡은 전깃줄마저 흔들어대는 칼바람이 매정하지만, 사소한 일에도 내 일처럼 동병상련으로 뭉친다. 이들이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따뜻한 인정이 유일하다. 아랫동네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윗동네 사람들이 숙명처럼 안았던 바람 냄새에 배인 정이 아닐까.
실바람이 기분 좋게 살랑거리는 날은 월말이다. 몇 달 밀린 집세를 받은 어머니가 쫄깃하게 삶은 국수 한 소쿠리와 백설기를 푸짐하게 차려낸다. 몸져누웠던 할매도, 아지매도 계단 옆에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 노래 한 자락으로 흥을 돋우면 엇박자의 추임새에도 너울너울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집주인이라는 심리적 갈등을 허문 어머니의 손도 빨라진다. 피난살이의 허허로움은 돈도 높은 자리도 아닌 정情으로 채워졌다.
언젠가 윗동네 아랫동네가 함께 술렁거렸다. 6.25전쟁 후 피난민들의 절절한 애환이 담긴 “사십계단 기념비”가 세워진 날이다. <경상도 아가씨>라는 노래 가사처럼 계단에 걸터앉아 부산항을 바라보던 피난민의 헛헛함이 전쟁을 모르는 세대도 저릿했다. 계단을 배경으로 한 영화도 개봉되자 동네 사람들은 남포동 극장가로 몰려갔다. 단 한 컷만 나오는 아쉬움에도 영상미를 입힌 동네가 멋지다고 운운하며 한껏 들떴다. 수더분하고 질박한 동네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그들의 삶에 활력을 준다. 어쩌면 사는 즐거움이란 더운 바람과 찬바람이 만나는 풍혈의 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도 훈기가 차올랐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뜬 후 애옥살이로 돌던 냉기는 어머니가 쌀가게를 열면서 몰아냈다. 일을 돕던 외삼촌이 걸핏하면 결근해도 원망하기보다 혼자 쌀 포대를 이고지고 배달하며 여장부로 변해갔다. 육남매의 가슴에도 새 바람이 숭숭 들었다. 어머니의 앓는 소리가 사십 계단을 울리고 흘러 다녀도 바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사십여 년 우리 식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 집을 팔아야 할 때가 다가왔다. 바람 잘 날 없던 집은 옛 주인이 쟁여 논 속울음까지 토해내며 웅웅거렸다. 세월의 갖가지 바람이 휘감은 집을 두고 떠나야 하는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짐이 다 빠지자 곳곳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풍혈이 훤히 속살을 드러냈다.
사람의 가슴에 새겨진 실금의 뿌리는 깊이감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실금은 세월이 지나면 틈이 되고 틈은 다시 간격이 된다. 어느새 팔순을 넘긴 어머니는 "나도 느그 아부지처럼 느닥없이 객이 찾아올까 걱정스럽구나."라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애잔하다. 불청객은 몸속 모든 근육이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에 무심코 몸을 떤다. 세월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바람구멍이 자리 잡는다.
기억이 미분되지 않는 곳이 있다. 나에게는 아린 기억들이 옹이처럼 굳어있는 사십 계단이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르내리던 해풍에 계단은 모서리가 깎이고 닳아서 거뭇거뭇하고 가로등을 녹슬게도 하지만 사람들의 올바른 품성을 일깨웠다. 두름길 돌아온 실바람에 꽃을 피우고 까탈스런 삶의 돌개바람이 머물던 동네다.
사는 건 바람이다. 마치 풍혈처럼 거칠고 단단한 바위 사이 틈을 비집고나와 밝고 환한 바깥 풍경을 대할 때와 같다. 산다는 건 땀 흘리고 다치면서 일어나고 울고 웃으며 바람을 타는 일이다. 바람에 몸을 자연스럽게 맡기는 일이다.
사람마다 삶의 무게가 다르다. 그 무게로 굼뜨지만 삶의 결기는 결연하다. 식혀주고 덥혀주는 냉기와 온기가 나오는 풍혈이, 가쁜 삶을 살 수 있는 숨구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