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71
12월11일 [대림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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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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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DImteaO-SA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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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콤비 플레이>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결심한 다짐 중에 첫 번째 다짐이 수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일, "집에 잘 붙어있자"였습니다. 집에 붙어있어 보니 너무나 좋더군요. 사실 수도자가 밖으로 다녀봐야 좋을 것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늦게 나마 깨닫게 된 것이 올 한해 제게 있어 제일 큰 수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는 한 사회복지시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두시간 짜리 강의 때문에 오랜만에 집을 비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도 행복한 표정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천국 같은 곳이었기에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강의 두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두 시간 동안 남 앞에 선다는 것,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뭔가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제는 꾀를 좀 냈습니다. 학기말 시험 끝낸 수사님 한 명을 살살 꼬셨지요. 물론 레크리에이션이나 성가반주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수사님이었습니다.
떠나기 전날 두시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의 계획에 따라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결과는 참으로 만족스러웠습니다. 강의일변도로 나갔으면 정말 지루했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부상조해서 강의 시작 전 수사님의 성가연습, 그리고 제 간단한 강의, 휴식, 다시 모여 수사님과 함께 레크리에이션, 마무리 제 강의. 이렇게 진행하다 보니 두시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작은 체험이었지만 팀으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서로 머리 맞대고 계획을 짜고 아이디어를 나누는 일, 고통을 분담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팀플레이로 대응하려는 노력, 공동으로 행하는 사목이 물론 더디고 때로 짜증도 나겠지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릅니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내가 모든 것을 다해야겠다", "나는 죽어도 이 모든 일의 주인공이다. 절대로 남에게 양보 못한다", "내가 이 일의 책임자니 모든 영광도 내 몫이다"는 사고방식처럼 피곤한 사고방식도 없습니다.
찰떡 궁합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께 일을 하면서 서로 양보하고 서로 인내하는 가운데,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서로의 몫을 척척 잘 해내는 경우를 말하겠지요. 이렇게 될 때 진정 일할 맛이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을 것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세례자 요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진정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에 더할 나위 없는 찰떡 궁합이었습니다.
두 분은 각자가 해야할 몫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잘 닦는 역할이 주어졌었는데, 그 역할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잘 마무리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아놓자마자 정확하게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이 전면에 등장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세례자 요한은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무대 뒤로 물러섭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더할 나위 없는 콤비 플레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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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YazCu6Ev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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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이해 못 할 때; 부모도 자녀에게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다>
오늘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볼산에서 변모하시고 내려오는 중에 제자들이 묻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면 당신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율법 학자(모세) – 엘리야 – 메시아’에 관한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율법학자는 타볼산에서 만난 모세이고 모세는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필요하고 마침내 이 두 단계를 거치면 메시아가 구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알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종교 안에서도 하나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약간 교리를 바꾸어 돈벌이하는 사이비들을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은 모세-엘리야-메시아의 순차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우리 종교 안에 스며들어있는 사이비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딸이 어렸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한 탓을 너무 부모에게만 돌린다는 이유였습니다. 물론 부모로서 키우면서 딸에게 부족한 사랑을 준 것은 인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힘든 이유를 지나치게 부모 탓만 하니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몇 년 동안 가톨릭 신자들로 구성된 영성 심리 학회에서 교육도 받고 피정도 하고 상담을 한 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현재의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어렸을 때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저도 모든 심리적 문제는 사랑을 부족하게 받아서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방법에 머물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는 사랑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돌리게 하지 않습니다. 자아와 삼구에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하며 부모의 용서를 받게 하고 스스로를 믿고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역할이 강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모세입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물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이제 초점을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용서를 청해서 그 상처가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그 상처 받은 자아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엘리야의 역할입니다. 왜 이미 성인이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할 만큼 한 부모 탓을 하게 만듭니까? 부모가 부족했어도 부모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세상에 누가 완벽합니까?
엘리야는 우리 시선을 자아로 이끌고 그 자아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가르멜산에서 우상 숭배자들에게 이끄는 예언자들의 목을 쳤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게 하는 시합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우리 문제가 그리스도의 피, 곧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음을 명확히 일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들은 무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자아와 삼구를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돈을 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자신들이 하는 기도회나 상담, 피정,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어떤 방법들을 통해서 어렸을 때의 상처를 치유하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피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자신들이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치장합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입니다. 혹은 자기 존재감을 느끼는 것을 즐깁니다.
모든 것은 나의 문제고 그리스도의 피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알리는 엘리야의 역할을 본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들이 사이비입니다.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하며 그리스도의 역할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대부분의 사이비는 이렇게 엘리야가 와야만 하는 필요성을 무시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사이비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라고 말하는 사이비들을 조심하십시오. 엘리야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표지판과 같은 존재입니다. 요한은 자신 안에 사람들을 잡아놓지 않습니다. 어린양께 자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었고 요한은 그들이 예수님께로 떠나는 것을 기뻐합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자기가 커지며 예수님의 역할을 줄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영화 ‘새크라멘트’(2014)는 마약에 빠진 누나가 어느 종교단체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남동생에게 이곳이 너무 좋으니 한번 오라고 초대장을 보내와 동생이 자신의 친구 두 명과 함께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곳의 교주 짐 존스는 900여 명의 신도에게 에덴동산과 같은 곳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무장한 사람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동생이 떠나는 날이 되자 그곳에서 소란이 일어납니다. 행복하기만 하다고 말하던 그곳에 있던 그들이 자신들도 데려가 달라고 청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짐 존스는 무장한 부하들에게 그곳을 떠나려는 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 당연시되자 남아있는 이들 또한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아이와 함께 900여 명이 자살하거나 피살된 이 일은 911 테러 이전까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일어난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 9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엘리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문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고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마치 자기를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하면 그것은 사이비입니다.
엄마도 사이비 교주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게 되는데 자녀의 종교적 자유를 주지 않는 부모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영성체를 했다면 이제 자녀와 부모는 하느님 앞에서 같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서로에게 무언가를 강요할 수 없습니다. 선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여기서까지 부모가 자녀들에게 종교를 강요한다면 부모가 사이비 교주가 됩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는데 본인도 구원에 들지 못했으면서 본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너희는 나 없으면 어쩔 뻔했니?”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어쩔 뻔했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본인이 예수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항상 자신은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게 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커지면 그것이 곧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지 않도록 ‘율법 – 엘리야 – 메시아의 고리’를 명확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모두 엘리야고 요한입니다. 우리는 작아지고 그분은 커지셔야 합니다.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분에게서 옵니다. 그리스도 앞에 서 있으면서 나의 역할을 줄여가지 않는 사람은 사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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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7,10-13 :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던 것이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소개하시지만, 세례자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의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지 못하고 참수 당했기 때문에 재림한 엘리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오실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메시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재림한 엘리야로 생각하였다(11,14 참조). 그러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헤로데에게 죽음을 당했다(14,3-12). 이렇게 메시아의 선구자가 배척을 당한 것처럼, 메시아이신 예수께서도 배척을 당하셨다는 것이다.(11,16-19 참조)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12절) 그를 감옥에 가두고 처형한 헤로데와 그들이 공범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12절)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그들이 엘리야에게 한 것과 같은 일을 당신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다.”(12절)는 말과 그에 대한 구원자의 설명을 듣고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달았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두 번 오신다고 이야기 한다. 첫 번째 오심은 지금 오심이다. 바오로 사도는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2)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을 잘 맞을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 오심에 대해 바오로 사도께서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티토 2,13)라고 한다. 엘리야나 메시아의 참 모습은 희생적인 사랑과 봉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엘리야가 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이 기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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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캠핑 중에 작은 사고로 왼쪽 발목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물집이 생기고, 연고를 바르면서 조금씩 좋아졌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습니다. 즈음에 오른쪽 발가락에도 염증이 생겼는지 아팠습니다. 지금은 다 좋아졌지만 그렇게 아픈 1주일가량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조금만 조심했으면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평화신문을 보면서 일부러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이야기입니다. 중인 출신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성격이 모났던 이보현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고, 신앙인으로 모범을 보였습니다. 박해의 칼끝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잔치를 베풀어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포졸에게 잡힌 이보현은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드러냈습니다. 매를 맞으면서 웃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끝까지 참아 천국에서 만날 것을 전하였습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어도 옥에 들어가서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예수의 수난을 증언했습니다. 관장은 이보현을 장터에서 조리돌림 하게 한 뒤, 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때려죽이게 하였습니다. 이보현은 27살에 장열하게 순교하였습니다. 며칠 뒤 그의 시신을 거둘 때 마을 사람들이 가서 보니, 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보현은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했고, 난국에 빠져 방향을 잃었던 조선 교회의 명맥을 잇게 하는데 소중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의 현존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고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을 보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두 팔 없는 석창우 형제님은 7년 째 성서를 필사하고 있습니다. 1984년 10월 29일 감전사고로 두 팔과 두 발가락을 잃었다고 합니다. 2015년 환갑을 맞으면서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니 두 손이 있던 30년과 두 손 없이 살아온 30년 중 두 팔 없이 산 30년이 훨씬 행복했다고 합니다. 석창우 형제님은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쁘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감사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두 팔이 있는 저보다 더 기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서는 신앙인들이 따라야 할 ‘이정표’와 같은 분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야’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도 그렇습니다. 구약성서에 엘리야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짓 예언자와 싸워서 이긴 이야기, 사렙다 과부에게 기적을 베푼 이야기,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 하늘에서 불을 내린 이야기, 승천한 이야기 들이 전해집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인 엘리야는 지금도 신앙 안에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고,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는 날은 꿈꾸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오시면 하였을 일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하는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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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나는 지금 겸손한가 교만한가?>
“이미 엘리야는 왔으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 보지 못하였다” 깨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늘 보는 것만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중심에 두지 않을 때 우리는 늘 내가 생각하는 대로만 다른 사람을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뜯어 고치려고 하거나 단죄합니다. 메시아에 앞서 온 요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유대인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갇혀 살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하느님께서는 겸손의 문을 통해 들어 오신다. 그러나 사탄은 교만의 문을 통해 들어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살고 싶은데 참 안될 때가 많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냈다고 생각하는데 겸손하지 못하다고 비난하거나, 때로는 자주 자기 표현을 하는 내가 교만한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나에게 겸손하다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겸손한가 교만한가를 알아보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자신이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 손들어 보십시오. 그럼 이제 “나는 교만하다” 다음으로 “나는 교만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나는 겸손하다” 손들어 보셔요^^
그럼 결과를 알아 보겠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나는 겸손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더 큰 겸손은 “나는 교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최고의 교만은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제불능 교만은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겸손하지 못한 분이 몇몇 분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격지심에서 비굴하게 굴거나, 할 수 있는 것도 못한다고 하며 빼거나 할 때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참된 겸손일까요? 아닙니다. 10달란트를 받았건 1 달란트를 받았건 상관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로운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진정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알고 하늘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며 예수님의 겸손과 하나되어 갈 때 우리는 참된 겸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든 교만한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가령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할 때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게 보이고 그 사람을 향해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갑니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사라졌을 때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밉게 보이고 원망하고 단죄하며 교만의 마음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과 한결같은 사랑은 정비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겸손이란 결국 예수님의 겸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고 사랑하시는 그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그 마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면 기쁘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바로 이러한 겸손의 모범이 되신 분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낮추었으며,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예수님은 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것을 고백한 분이셨습니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러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를 분명히 합니다. 구약의 말라기 예언서의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이를 준비하는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하며 예수님은 바로 예언된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더 분명하게 하여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는 인물로 스스로를 묘사(요한 1,42 참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요한이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주인공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했던 율법학자들은 이러한 겸손한 세례자 요한을 알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심지어 헤로데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세례자 요한을 중요한 인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합니다”(마르 8,28). 이 표현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 중의 한 명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메시아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죠!
복음 사가들은 나아가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예수님과 엘리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위치를 확인해 줍니다. 거룩한 변모 사건에서 예수님 곁에 있던 모세는 율법서를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함으로써 구약이 예수님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것을 확고히 합니다. 엘리야를 예수님 수난을 준비하는 예언자로 둠으로써 세례자 요한 역시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놓을 것이고 그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혹자는 이 대목을 통해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으로 환생했다고 여기기도 합니다. 만약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로 환생했다면 그리스도교 성경 안에도 환생에 대한 대목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야로 환생을 한 것이 아니라 엘리야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회개와 정의를 부르짖으며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라고 말한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진정 겸손할 때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알게 되고 만족하며 주님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만의 영이 우리 안에 자리할 때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예수님도 예수님의 사람도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고 비난과 판단, 불평과 편견으로 자신과 공동체를 제멋대로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주님을 알아 볼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의 눈을 청하도록 합시다. 세례자 요한 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일을 통해 내가 높아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께서 높아지시도록 "교만의 자아가 사라지는 날"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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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엘리야는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 왕이 이교도들이 믿는 바알 신을 숭배하자, 엘리야가 카르멜 산 정상에서 이교 신을 믿는 850명의 예언자와 대결하여 통쾌하게 승리합니다. 그 결과 아합 왕이 회개하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리야를 또 다른 메시아의 상징으로 생각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1열왕 18장 참조)
또한, 엘리야는 구약에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입니다.(2열왕 2,9-11 참조) 따라서 엘리야가 메시아로서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800년이 지나, 엘리야의 모습으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기에 엘리야 예언자를 떠오르게 하였지요.(2열왕 1,3-8 참조)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이 요한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 요한이 헤로데에 의해 참수당하자 예수님께서 탄식하시지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예언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건부 신앙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요구 사항만 나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주님께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이 점을 늘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점을 다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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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님]
<회개와 겸손으로만 회복할 수 있는 마음의 시력>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에서 구약의 대 예언자인 모세와 엘리야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오면서 예수님께 묻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깨닫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줄을 말입니다.
구세주가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해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던 세례자 요한이 바로 오셔야 했던 엘리야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나머지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표징을 표징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의 무지몽매함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마음의 밝은 시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연유에서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음의 시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회개와 겸손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도 회개의 겸손으로 표징을 투시하며,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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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막 가는 자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殘忍無道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잔인하다는 말을 순 우리말로 바꾼다면 눈 깜짝하지 않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무도하다는 말은 도가 없다는 말로서 인간관계에서 막(無) 가는(道)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도한 사람은 도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는 인간의 길이 있는데 무도한 사람은 그 길을 포기하고 막 가기로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도를 얘기하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능멸을 합니다. 또한 도 보다 힘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얼마나 도가 있는지, 얼마나 품위가 있는지 힘으로 시험을 합니다.
돈의 힘으로 가난한 선비의 지조를 꺾으려 하고 폭력으로 점잖은 사람을 짐승처럼 기게 만들고, 진실을 살고자 하는 사람을 권력으로 회유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무도한 자는 사람의 길을 포기하고 군자와 지혜로운 사람을 능멸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길을 포기하였으니 성인의 길을 포기함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늘나라를 파괴하고 하느님을 능멸하려듭니다.
이세벨과 거짓예언자들이 엘리아를 거꾸러트리려 하였고 헤로데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주님의 길을 닦는 세자 요한을 죽였으며 그럼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아마도 자기의 길을 가는데 주님이 방해된다고, 하느님 자녀를 자기 똘마니로 만드는데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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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그리고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않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오늘 우리가 우리들 가운데 서 계시고 형제들 안에 계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고 제멋대로 다룬다면, 바로 우리에게 구세주께서는 고난을 받으실 것입니다.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리고,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13) 또한, 바오로 사도는 ‘고난’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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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하오니,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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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17,12)
<또 하나의 엘리야가 되자!>
구약성경의 마지막 권(46권)인 말라기 예언서 3장 1절과 23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이처럼 엘리야는 주님 앞에서 길을 닦는 사자로서 주님의 날이 오기에 앞서 오는 예언자로 여겨졌습니다.
때문에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 앞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구약의 엘리야와 주님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런 세례자 요한을 주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멋대로 다루었고, 그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의 재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자 요한을 마구 다룬 것처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그렇게 마구 다루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성탄)'과 '두 번째 오심(재림)'을 기다리고 있고, 그 기다림에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맞이하게 될 주님에 앞서 파견된 엘리야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의 선포를 잘 받아들이면서 대림시기를 잘 준비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는 이들,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이들은 모두 '엘리야'입니다.
또 하나의 엘리야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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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태오 17,10-13 (엘리야의 재림)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평화방송 TV 미사 강론>
찬미 예수님,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오늘은 대림 제2주간 토요일이며, 사회교리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사회교리주간을 보내시면서, 사회교리에 조금이나마 맛들이셨는지요? 아니면 여전히 생소하고, 나와는 관계없는 무엇처럼 느껴지시는지요? 교회는 사회교리를 강조하지만, 아직도 많은 교우 분들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리면 교리지, 사회교리는 뭐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교리면 교리지, 굳이 사회교리라는 말이 필요할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교리라는 용어를 사용해야만 하고, 이렇게 특별히 사회교리주간을 지내야 하는 현실이 조금은 안타깝게도 느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신의 서간에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과 실천은 나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믿음 따로, 실천 따로, 그래서 실천 없는 믿음이 가능한 것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믿음의 실천, 실천하는 믿음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서 ‘사회교리’를 선포하고 가르칩니다.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 그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사회교리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교리’가 ‘믿을 교리’라면, ‘사회교리’는 ‘행할 교리’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믿을 교리와 행할 교리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분리되어서도 안 되고요.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에는 실천, 곧 삶이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회교리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머리로만 사랑하지 말고, 입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면서,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예수님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이라고 모든 이에게 환영받으신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니, 부자들이 싫어했습니다. 작고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니,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낮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하니, 높은 양반들이 짓눌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는 환영을 받고, 누군가에게는 고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환영을 받고, 누구에게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일까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사람들을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 아닐까요.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벗님들, 사회교리주간을 마무리하면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믿음을 굳게 실천하리라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다짐을 작은이들, 버려진 이들, 억눌리고 짓밟힌 이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으며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일상 안에서 이루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이신 주님,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저희가 당신을 닮아
지금여기에서 가장 작은이들에게
또 하나의 사랑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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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작년에 어머니께서, 그리고 올해에는 아버지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한동안 커다란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감에서 오는 슬픔, 또 하늘 나라에 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이 세상 삶의 무상함도 크게 제 마음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죽을 텐데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묵상을 하게 됩니다. 삶은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들고, 순간의 만족을 통해 만족스러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최신형 스마트폰을 구입 한 직후는 만족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그 만족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를 들어봅니다. 멋진 노을을 바라보며 감탄합니다. 그런데 이 노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까요?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 찰나의 즐거움이 모여서 내 삶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어야지만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으로 허무한 인생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있기에 오히려 지금 순간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며, 삶 자체를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그러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엘리야 모습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세례자 요한이 엘리야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도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관은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재림도 영광 속에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는 메시아관은 고난과 부활이 함께 있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만 바라보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메시아의 모습이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이 메시아이신 주님을 느끼는 소중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막연한 영광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특별한 시간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순간의 즐거움과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 전부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님의 사랑을 과연 어디에서 느끼고 있습니까? 특별한 상황, 나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우는 상황만을 요구하지 말고, 매 순간에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이 모여 행복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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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줍기(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위험에 처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그 고통을 이겨낼 강인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삶의 전장에서 함께 싸울 동지를 찾는 대신 나 자신이 힘을 지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불안한 마음으로 구원을 갈구하는 대신 내 힘으로 자유를 쟁취할 인내심을 갖게 하소서.
오직 성공에서만 당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는 대신 실패에서도 당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시성 타고르의 멋진 시입니다. 솔직히 이런 기도를 잘 바치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멀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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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에 앞서 그가 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전령이요 선구자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예언서인 말라기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말라 3,23-24)
이 본문은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례자 요한이 바로 메시아에 앞서 오기로 되어있는 엘리야인데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루카복음 1장16-17절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하고 천사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느님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준비시킨 마지막 때의 예언자로서 엘리야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대의 표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헤로디아의 딸에게 헛된 맹세를 하여 결국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마르6,26) 그러나 헤로데만이 그를 죽였는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잘못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요한의 외침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동생인 필리포스의 아내입니다. 그러나 헤로데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나 봅니다.
사실 헤로디아의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길을 거부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욕심과 똥고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도 요한을 죽인 공범자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언자도 메시아도 결코 만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5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태1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언자 엘리야의 역할을 한 요한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죽인 그들이 결국은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악하기보다도 자기 안에 갇힌 무지의 탓이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요한의 죽음이 단순히 한 왕의 방자한 변덕과 경솔한 맹세의 결과가 아니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12,24) 메시아적인 구원의 죽음이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온다는 진리를 알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 고통의 길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예수님께서 살아간 삶을 살아가는 기회가 됩니다.”(함께야)
그러므로 막연히 내가 그려놓은 주님을 기다리지 말고 주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당신을 몰랐나이다. 다만 지상의 일들을 알고 맛보려 했나이다. 주 하느님! 모든 것을 바꾸어 주시어 당신 안에 편히 쉬게 하소서”(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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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ljsM5ngm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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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 12)
신앙은
소모품이
아니다.
우리의
빈약한 사랑을
감출 수는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기에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 우리에게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배우는
마음의 대림이다.
알아보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는 거기에
아파하시는
주님이 계신다.
또 아파하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성탄의 길은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사랑이다.
목숨을 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욕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들의
뻣뻣한 교만이었다.
하느님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애타게 오시는
예수님을
늘 배척하는
우리들이다.
끝끝내
우리를 향한
이 사랑을
알 턱이 없다.
우리자신에게는
너무 관대하고
하느님께는
늘 야박하다.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우리들 삶을
하느님께로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고난을
동반한다.
아픈 것과
더 아픈 것
사이에
우리가 있다.
가장 아프고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이다.
엘리야도
요한 세례자도
아파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아픈
시간이다.
신앙은
소모품이 아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사랑해야 할
인격이다.
그래서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의 대림은
누굴 탓하는 것이
아닌 버려지는
신앙을 되찾는
한줄기 간절한
마음이다.
먼저 와야
할 것도
마침내 와야
할 것도
하느님을 사랑할
마음이다.
마음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음을 제멋대로
다루는 아픈
마음을 위해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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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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