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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보덕사 주지 동욱스님 | |
스님은 찰라의 순간을 포착하는 사진처럼 인생도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늘 바른 행동, 바른 생각을 지녀야한다고 강조한다.
지금도 어깨가 몹시 아프다. 눈 많이 오고 춥기로 유명한 청암사 수도원에서 한겨울 14시간씩 서서 기도하다 동상이 걸려 다친 뒤부터다. 그 때가 스무살이 채 되기 전이었다. 1981년부터는 연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불교 꽃’이라고 하는데 사진 한 장이 없어 당신이 직접 찍기로 한 것이 몇 차례 전시회를 열 정도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 8시간씩 땡볕을 참는다. 팔공산 보덕사 주지 동욱스님이다.
“어떤 조건을 달성시켜야만 얻는 행복은 없다”
빛과 순간의 예술 사진, 때 지나면 그것으로 그만
인생도 마찬가지…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어
평소 바른 생각 갖고 긴장하면 찰나 놓치지 않아
미래 기약하는 대신 매순간 최선 다하고 행복해야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북 칠곡이지만 대구권역이다. 송림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지나 팔공산 일주도로 초입에 보덕사가 너른 들판을 내려다 고 섰다. 몇 해 전 절을 창건하기 위해 장소를 찾다가 발견했다는데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명당이다. 스님은 “사찰이 들어설 자리인지 집이 없었다”고 했다.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50년간 관음기도 정진 중이다.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하면서 중노릇 잘하게 해달라고 시작한 관음기도가 50년이 됐다”며 “특출나게 잘 한 것은 없지만 남 하는 만큼은 해온 것 같다”며 웃었다. 스님은 늘 성실하게 그리고 열정을 다해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청암사 수도암에서 기도를 할 때도 그랬고, 연꽃 사진을 찍을 때도 최선을 다했다. 해인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대강백 고봉스님, 고산스님이 공부하는 청암사로 옮겨 공부를 했다. 수도암에서 8개월을 살면서 14시간씩 서서 기도를 했다.
“해발 1150m인 수도암은 추운 날은 영하 29도까지 내려가고 눈이 와도 녹지 않아 무릎이 빠지게 쌓이곤 했다. 새벽에 도량석을 끝내고 먼 곳까지 가서 약수를 길어와 부처님 전에 올리고 혼자 기도를 올렸다. 열네 시간 동안 기도를 올린 적도 있었다. 발 한번 옮기지 않고 서 있다 보면 관절이 굳어져 절을 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이 남기신 말씀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저 남만큼만 공부하게 해 주소서. 부디 부처님 슬하를 떠나 살지 않게 해 주소서 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발목과 어깨 등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듬해 봄 청암사에 정식으로 방부를 들이고 고산스님 아래서 경전을 배웠다. 고산스님이 범어사 강주로 초빙을 받아 가자 따라가 범어사에서 강원을 마쳤다. 동욱스님은 강원을 마치고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하고 다시 해인사 율원을 1기로 마친다. “해인사 도서관장을 하며 해인사에서 대중생활을 하는데 강주를 하시던 보광스님께서 힘을 써서 율원을 개원했다. 그 때 참 열심히 공부했다. 매일 아침 하루 공부 분량을 정해 외워 토론을 했다.”
스님은 “내 힘으로 모든 것이 극복되지 않으면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서라도 해결하겠다는 의지로 부처님 법을 공부했는데 그 때는 진짜 밥 먹고 공부만 하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좁쌀과 콩과 시레기뿐이고 쌀알은 헤아릴 수 있을 만큼만 넣고 지은 밥을 삼이레 동안 먹어도 공부만 할 수 있다면 만족해하던 때였다. 해가 저물도록 울력을 하고 나면 천근으로 몸을 덮는 잠을 떨치려고 누각에서 잠을 자곤 했다. 초겨울 같은 쌀쌀한 날씨에도 담요 한 장 덮고 자고는 일찍 일어나 또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출가 후부터 줄곧 공부와 기도로 보내던 스님은 어느 해 <삼국유사>를 읽다가 충담스님이 차를 공양하는 부분을 읽고는 전국의 석불에 차공양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스님은 14kg에 달하는 차와 다구를 걸망에 지고 전국을 일주했다. 그 전에 3년간 자료를 찾아 전국의 노천 불상 소재와 역사를 파악했다. 1984년 스님은 통도사 보궁에서 기도를 올리고 입재를 한 후 경북 강원도를 거쳐 다시 충청도 전라도 나주로 내려왔다. 그리고 회향은 통도사처럼 봉정암 보궁에서 했다. 차를 올릴 때 과일도 사서 올렸다. 과일은 은행에서 늘 신권을 바꿔서 샀다. 신권을 주면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산 과일을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작은 일 하나에도 세심히 신경 쓰고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배웠다. “버스를 타고 걸으며 모르는 사람과도 만나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한번은 물 끓이는 도구가 없어 식당에서 밥을 먹고 따뜻한 물을 넣어달라고 부탁하고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주인이 정색을 하며 ‘약 드시는 것까지 돈을 받는 줄 아느냐’며 화를 내더라. 절집 공양주도 일부러 끓는 물 달라면 짜증을 내는데 기쁜 마음으로 남을 위하는 것을 보고 역시 복 짓고 사는 사람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차를 올리면서 가장 좋은 일은 내가 기분이 좋다는 점이다. 그 이후에도 가끔 석불에 차를 공양한다.”
81년부터 카메라에 연꽃 담아
2년 전 처음으로 전시회 개최
“불교와 사진의 공통분모는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 1981년부터는 연꽃을 촬영했다. “불교 꽃이라고 하는데 어디 잡지에 한 장 실으려 해도 사진이 없어. 그래서 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기 시작했다. 자연모습 그대로 담아 표현하는 것이 나름의 철학이다. 그래서 일체 편집을 하지 않는다. 출품도 하지 않는다. 출품을 하면 연출과 편집을 하게 된다. 심사위원 신경도 쓰게 된다. 그러면 내 진정한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 출발이 그러했듯 누구라도 즐기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스님은 지금도 편리한 디지털카메라를 쓰지 않고 필름을 쓴다. 이 역시 스님의 확고한 철학이 담겨있다.
“사진은 빛과 순간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 순간 지나면 끝이다. 내가 못 보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이러한 사진은 지금 이 순간을 중시 여기고 강조하는 불교 사상과 똑 같다. 사진뿐만이 아니다. 인생 역시 지나가면 고칠 수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내가 이것만 달성하면 그 때부터 행복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달성되고 나면 행복해지느냐, 그렇지 않다. 고시를 합격해서 판.검사가 되면 행복하겠다, 1등을 하면 그 때부터 행복하겠다, 집을 사고 나서 그 때부터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야겠지 하며 미래를 기약하는데 어떤 조건의 달성을 통한 행복이란 없다. 그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하고 순간순간이 행복해야한다. 아날로그 즉 필름은 지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찰나의 그 순간, 그 형태를 잡지 못하면 그만이다. 그러므로 평소의 바른 생각 바른 사유가 굉장히 중요하다. 늘 바른 삶 바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 매 순간 긴장하고 최선을 다할 때 제대로 된 찰나를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디지털은 지나간 과거를 얼마든지 고친다. 틀리면 되돌리게 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순간에 집중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디지털의 삶은 진지하지 못하다. 사진은 디지털이 가능하지만 인생은 아니다.”
스님은 당신이 조건을 거부하고 맨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바 그대로 드러내고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듯 신도들에게도 강요하지 않는다. “신도들이 살면서 늘 돈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데 절까지 와서 돈에 매여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자율기도’를 하도록 했다. 봉투를 만들지 않고 모두 복전함에 돈을 넣게 했다. 등 값도 매기지 않았다. 금전의 많고 적음은 결코 비교 대상이 아니다. 적든 많든 그 무게와 가치는 같다. 등을 법당 안에 달면 복을 많이 받고 밖에 달면 적게 받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향한 마음은 똑같다.”
스님은 법문을 해서 모든 돈과 당신 앞으로 나오는 국민연금을 모아 신도 자제들에게 장학금을 준다. 공부나 학교가 기준이 아니고 신심이 기준이다. 장학금을 수여할 때도 절대 학교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장학금을 받지 않은 학생들에게도 상품권을 사서 보시했다. 신도들에게는 책을 보며 신심을 키우고 불교를 배우도록 책을 선물한다. 통장도 모두 보덕사 이름으로 하고 사찰도 해인사로 등록했다.
2년 전 처음으로 연꽃 전시회를 했다. 보덕사 창건 10주년 기념이었다. 스님들로부터 받은 돈을 모아 절을 창건해 그 은혜를 갚아야하는데 창건 기념일이라고 하면 안 올 것 같아 연꽃 사진전을 계획한 것이다. “남에게 좋은 일은 못하더라도 피해를 입히는 사람은 되지 말자”고 노력했다는 스님은 인상마저 남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2년간 거울을 보며 연습했을 정도다.
칠곡=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동욱스님은…
1947년생인 스님은 1961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정도원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청암사에서 강고봉스님, 고산스님으로부터 경전을 배웠으며 범어사 강원을 마쳤다. 이후 스님은 동국대 승가학과, 해인사 율원을 졸업했다. 1980년대 해인사 재무를 맡아 처음으로 흑자를 남겼다. 남해 보리암 주지, 제12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30년 째 연꽃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연꽃 사진집 <꽃을 드니 미소짓다>가 있다.
[불교신문 2665호/ 10월23일자] 2010-10-20 오후 2:22:47 / 송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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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동욱스님 사랑합니다...치열히 수행정진 해오신 모습 찬탄드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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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순간 최선을 하는 일!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오직 지금 이순간........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