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춘덕, 가족 23-11, 부모님 산소 벌초
오전에 농원 일을 마치고 점심 식사 후 고제로 출발했다.
묘가 산 중턱에 있기에 목장갑과 장화, 풀을 베어낼 낫을 챙겼다.
읍내를 벗어나기 전 잠깐 마트에 들렀다.
아저씨는 생각나는 대로 바나나 한 꾸러미와 소주, 과자 두 봉지를 골라 담았다.
“여기는 떡은 없어요?”
“예, 없습니다. 빵은 있는데.”
“아, 그라만 됐어요.”
월천을 거쳐 고제로 향하는 길은 온통 꽃길이다.
가로수와 꽃이 어우러져 마치 파스텔톤 그림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한참을 달려 좁은 농로로 들어섰다.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려니 겁이 났다.
끝까지 가면 돌아 나오는 곳이 있다 하니 믿고 달렸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주차하고 준비한 것들을 챙겨 산소로 향했다.
“아저씨, 길을 아신다고 했으니까 앞장서 보세요. 우리가 따라갈게요.”
“나, 길 알아요. 여기 오니 찾겠어요.”
동행한 이상화 선생님 말에 아저씨가 대답했다.
몇 해 전 임우석 선생님과 동행했을 때, 결국 산소를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설마 했다.
하지만 가던 길을 멈춘 아저씨는 “여기가 산소라요.” 한다.
“아저씨, 여기는 아무것도 없는 걸요. 가시덤불만 가득한데요?”
“여기라요. 여기 맞아요.”
장갑을 낀 아저씨는 낫을 들더니 보란 듯이 덤불을 한 움큼씩 잘라낸다.
가시에 찔릴까 걱정되었지만, 이 정도쯤이야 싶을 정도로 낫질이 자연스럽다.
잘라내어 다듬고 버리기를 여러 차례, 덤불 속에 숨었던 묘 하나가 봉긋 나타났다.
“여기가 어머니 산소고, 여기가 아버지 산소라요.”
부모님 산소가 아저씨의 손길로 온전한 자태를 드러냈다.
두 곳을 벌초한 아저씨는 힘이 드는지 산소 옆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쉰다.
“요기 밑에 형님 산소도 있는데.”
“형님 산소가 있다고요? 정말이죠? 전혀 알아볼 수가 없는데요.”
“나도 형님 묘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럼 온 김에 형님 묘도 벌초하셔야죠.”
“그래야지요. 언제 올지 모르는데.”
음료수 한 병을 다 비운 아저씨는 부모님 산소 아래쪽에 있는 덤불을 또 자르기 시작했다.
형님 묘는 부모님보다 더 나지막했다.
아저씨의 손길이 닿으니 이곳이 묫자리였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농사꾼의 손길은 정말 대단하다 생각했다.
엄두가 나지 않던 일을 뚝딱 해결하는 걸 보면.
아저씨는 세 곳을 말끔히 벌초했다.
포장 벗긴 바나나를 산소 앞에 두고 소주를 주위에 둘렀다.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막내아들이 다녀간다고 공손히 절했다.
둘째 형님마저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남은 아들은 아저씨 한 명뿐이니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님을 챙기는 것은 어쩌면 아저씨에게 당연한 일이리라.
가족이 묻힌 산소 옆에 앉아 남은 소주 한 모금을 들이킨 아저씨는 바나나 하나를 툭 떼어 안주 삼는다.
“아저씨, 부모님 뵙고 가니 좋아요? 원래 제사나 벌초 끝에 음복하는 것이 도리라고 하니 아저씨도 술 한잔하시는 게 맞아요. 이렇게 부모님 산소 벌초하고 다녀가시니 부모님이 좋아하시겠죠?”
“그렇겠지요.”
아저씨는 이상화 선생님의 물음에 긴 대답은 아니어도 마음 한편의 숙제를 다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언제 또 오겠노? 고모님이 벌초했다고 좋아하겠네.”
“고모님 찾아뵐 때 오늘 찍은 사진 보여드리면 어떨까요?”
“좋지요. 산소에 나무뿌리가 깊어서 다음에는 약을 좀 써야겠어요.”
“다음번에는 벌초하러 오기 전에 어떻게 하면 뿌리를 없앨 수 있는지 두루 알아보고 와요.”
해가 한 꺼풀 꺾인 오후, 집으로 차를 돌렸다.
산을 내려오던 아저씨는 부모님과 형님 묘를 한번 뒤돌아보았다.
마치 내가 올 때까지 잘 계시라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처럼.
2023년 4월 13일 수요일, 김향
아저씨 삶은 참, 뭐랄까. 늘 동화 같고 소설 같습니다. 애처롭고 부럽고. 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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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마음 한 켠에 숙제처럼 안고 있던 일이었을텐데 김향 선생님, 이상화 선생님 도움 받아 말끔히 정리하셨으니 아저씨 마음이 얼마나 편해지셨을까요? 애쓰셨습니다. 고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