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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卷
不見舟行處 (배 가는 곳 보이지 않네)
第 一 章. 어깨를 짓누르는 짐더미들
(一)
금산 한 귀퉁이에 세워진 관제묘는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된 듯
거미줄과 먼지만이 가득했다. 어린아이 키만큼 자란 잡초하며,
너무 낡아 바람만 불어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문짝... 귀신이
라도 나올 듯 을씨년스러운 폐허에 빈 바람이 스쳐 지났다.
"사우맹에서 나온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당주님, 호랑이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필
이면 사우맹으로 갈 것이..."
"흐흐흐...!"
차디찬 냉소가 조중과 학구의 말을 갈라놓았다.
"어엇!"
곽소연이 경악을 토해 냈다.
나무껍질이 스르르 벗겨진다 싶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낯선
사람이 불쑥 나타나지 않는가. 놀라운 은신술(隱身術)이었다.
비록 흑도(黑道)를 걷는 사람이지만 비공(秘功)만은 칭찬받을
만했다.
"흐흐흐...! 하필이면 사우맹이라... 맹주님을 대신해서 일을
척결할 권한이 없으니 참는다만... 흐흐흐!"
처음부터 말투가 썩 달갑지 않았다.
학구는 참담한 심정으로 금산까지 마중 나온 무인을 바라보았
다.
키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키만 크다면 그리 특색
있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뼈만 남은 듯 바짝 마른 몰골에 원숭
이처럼 무릎까지 닿는 긴 팔.
"수혼혈마(搜魂血魔) 조사(趙些)..."
신음처럼 터져 나온 음성이었다.
"뭣! 조사!"
"수혼혈마! 저놈이..."
범도와 황백도 놀란 듯했다.
하기야 수혼혈마의 악명을 듣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
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수혼혈마의 악명은 그의 잔
인한 손속에서 비롯되었다.
'죽일 바에는 확실히 죽인다. 어설프게 죽인다면 반드시 후환
이 남는다. 발본색원(拔本塞源). 뿌리까지 완전히 잘라 버려야
한다.'
무인, 양민, 노인, 아이... 길을 가다 잠시 걸음을 멈춘 나그
네까지.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으로부터 반경 십 장 안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리는 가공할 독심의 소유자.
단 칠 인으로 구성된 흑룡방(黑龍 )의 방주로 영락(永樂) 십
년에 사우맹에 입맹하여 서단(西團)을 맡고 있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학구는 첫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학구와 조사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하지만 인연은 오래 전
부터 시작되었다. 학구가 흑룡방을 칠 때부터 시작된 악연(惡
緣)이니까.
일행은 비로소 사우맹에 몸을 의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 깨달았다. 평소 악한(惡漢)이라 부르던 그런 자들 틈에
섞여 지내야 한다는 것을.
학구는 뻐근해진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풍... 하필이면 왜 사우맹이냐. 왜 진흙구덩이에 밀어 넣는
게냐. 왜!'
'사마중달(司馬中達)이 말했습니다. 싸움에는 다섯 가지의 도
(道)가 있다고. 전력이 충분하면 싸워라. 비슷하면 지키고, 약
하면 도주하라. 그 외에는 항복과 죽음뿐이다. 지금은 도주해
야 합니다. 사우맹이 비록 곽가장의 상대가 안 된다 할지라도
지금으로써는 그 정도 세력도 찾기 힘듭니다.'
학구의 눈에서는 기어이 뜨거운 눈물이 반짝였다.
"네 놈에게 진 빚은 잊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조사가 매서운 눈길을 보내왔다.
"잊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학구는 검을 뽑고 싶은 충동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같은 무림에 몸담은 사람들. 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
릴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백도와 흑도라는 나눔보
다 무(武)를 대하는 생각과 행동을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다섯 명이 죽었다."
"일곱 명이었으면 더 좋았을 덴데."
"나도 질릴 만큼 처참하게 난자 당했지."
"겨우 열 군데를 벤 것 같은데 그 정도가 난자라... 후후! 그
럼 너에게 죽은 놈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능공십자... 검을 잘닦아놔. 흐흐흐...!"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잘 닦아 놓고 있지."
눈과 눈이 불똥을 튀기며 부딪쳤다.
검을 찬 무인들은 상대를 자신의 아래에 두려고 한다, 고하(高
下)는 실제로 겨루어 보지 않은 한 알 길이 없지 않은가. 뛰어
난 절기(絶技)를 익혔다고 두려워할 것도 없고, 하찮은 삼류무
공을 익혔다고 경시할 수도 없다. 검에 대한 감각이 얼마나 뛰
어나느냐 하는 것이 승패의 관건이다.
발검과 동시에 열 가락의 자상을 새겨 놓는다는 능공십자, 그
리고 극히 연성하기 난해하다는 낭검(狼劍)을 지닌 수혼혈마.
둘은 서로 자신있었다.
"흐흐흐! 길을 안내하지. 곽가장 놈들이 득실거리는 이곳은 구
역질이 치미니까. 따라오면서 잘 봐. 어떻게 놈들을 따돌리는
지."
조사는 곽가장이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흑룡방을 칠 당시 수혼혈마 조사는 출타 중이었다. 만약 그가
죽은 시신이 다시 살아날 것 같던 음침한 저택에 머물러 있기
만 했어도 학구는 흑룡방을 그리 쉽게 괴멸시키지 못했으리라.
세 명을 죽이고, 세 명을 놓쳤다. 그러나 넓디넓은 강서성 어
디에도 몸을 피할 곳은 없었다.
학구는 차분히 추적을 시작했고, 한 명씩 도륙했다.
마지막 한 명... 그는 곤지룡(滾地龍)이란 작호를 가진 인물로
흑룡방에서 머리 역할을 하던 모사(謀事)였다.
학구도 그놈만은 놓쳤다. 이리저리 추적을 피하는 솜씨가 보통
이 아니었다. 결국 추석을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날 무렵 다음
기회로 미루고 돌아왔는데...
곤지룡이 수혼혈마를 찾아 사우맹에 입맹하라고 권유했다는 소
리는 나중에야 들었다. 풍문으로 그런 일이 없었다면 결코 남
의 밑에 머리를 수그릴 수혼혈마가 아니었다.
원한이 뼛속까지 스며든 사람, 그런 사람이 원한을 접어두고
맹주의 지시를 받든다? 심상치 않았다. 사우맹주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곽가장이 알고 있는 사우맹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그
때,
퍼엉! 펑...!
멀리서 천광탄이 떠올랐다.
"겸령 부근인데? 부영사검(浮影絲劍)이란 작자... 흐흐흐! 잘
된 일이야. 덕분에 우리가 편해졌으니까."
수혼혈마가 음충맞은 웃음을 터뜨렸다.
'부영사검! 그런 사람도 있었나?'
일행 모두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무림에서 도산검림(刀山劍林)
을 헤쳐왔다는 그들이지만 부영사검이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곧 한 사람을 떠올렸다.
'텁석부리... 그 사람이 부영사검인가? 낯선 작호인데...? "
'흑도에서는 추풍을 부영사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반여량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사람과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
의 느낌은 각기 달랐다.
'단신으로 천라지망을!'
곽사연은 광기(狂氣)가 전혀 없는 초롱한 눈으로 멀리 거무죽
죽하게 드러난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텁석부리가 일부러 겸령으로 갔다면 일행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택한 셈이다. 완벽한 성동격서(聲東擊西)다. 일행에게 각기 다
른 분장을 시킨 것도 그렇고, 자신만 정반대의 산길을 택한 것
도 그렇다.
텁석부리의 의도는 맞았다.
일행이 가는 길목에는 목이 다섯 군데나 있다. 그곳을 통하지
않고는 금산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곽가장이 펼치는 천라지망
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염려는 누구보다도
컸다.
수혼혈마 사조.
그의 무공은 놀랍다. 비록 곽가장에서 경시하고 있는 흑도연합
체이기는 하지만 동서남복(東西南北) 사단(四團)의 단주가 되
려면 적어도 곽가장 대주와 비등한 무공을 지녀야 한다.
텁석부리가 사우맹을 선택했고, 사우맹에서 사조를 보냈다면
그만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으리라. 하지만 미덥지 못한 것을
어찌하랴. 현실을 낙관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곽가장 무인들이
피땀 흘리며 수련하던 광경이 너무 생생하지 않은가.
모든 불안은 천광탄 하나가 단숨에 불식시켜 주었다.
곽가장 무인들은 방심하고 있다.
곁을 스쳐 지나도 가벼운 눈길만 슬쩍 보내올 뿐 가타부타 말
이 없다. 전 같으면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텐데. 천라지망
을 습득하면서 받은 훈련 중에는 분장에 대비하여 검문(檢問)
하는 방법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에 젖은 헝겊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는...
모두들 시선이 겸령으로 향했다.
천광탄이 보내온 밀마는 단 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이 더욱 곽가장 무인들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한 사
람... 한 사람이 천라지망을 빠져 나간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
상하지 못한다. 그럴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인이라면 가능하다. 강서무림에서 그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장주라면? 장주라면 모른다.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다른 놈들도 부근 어디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겸령이다. 놈들은 험하기 짝이 없는 겸령
산길을 탈출로(脫出路)로 선택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
는 것이 틀림없다. 움직이는 모습이 그랬다. 곽가장 무인들은
각기 맡은 목을 포기하고 서서히 겸령을 향해 움직였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그네 차림의 일행은 관심거리도 아니었다.
"텁석부리... 그 사람이 누구지?"
곽사연은 낯선 장한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먼저 마차에 올라
타기는 했지만 동생이 낯선 사내에게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
던 광경이 떠올라서 물어본 물음이었다.
무엇 때문에 밀옥을 깼을까? 자신들을 무엇 때문에 구해 주었
을까?
사내가 움직이는 것은 세 가지 때문이다.
돈, 권력, 여자.
그자는 무엇을 바라고 불가능에 도전했을까? 헤어지는 마당에
서도 아무런 요구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 이상했
다. 목숨을 구해 주었으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요구해야 하는
법인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몰라. 나도 몰라. 그보다 언니... 꼭 그
런 말을 해야만 됐어?"
곽소연은 힘없는 눈을 들어 언니를 바라보았다.
'곽가장주 곽모천. 내 아버지야. 아버지를 죽여 줘.'
다음에 무슨 말이 이어졌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언
니가 아버지의 살해를 청부(請負)했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지
는 충격을 받았다.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어쩌면..."
'어려서 잘 기억나시지 않겠지만 대소저가 반항하기 시작한 것
이 열 살. 옥순산 전투를 치른 다음이죠.'
동종관이 찾아왔을 때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아니, 언
니를 위해서라면 그까짓 몸 고생 조금 한들 어떠랴 싶었다.
그래서 남창부를 처음 떠난 여정(旅程).
그녀는 일 년 사이에 십 년은 산 듯한 마음 고생을 겪었다.
싸움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사람이 죽는 모습, 칼로 베어진 상
처, 무정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한 손속. 죽음을 태연하게 받
아들이는 무인들... 처음으로 무가(武家)에서 태어난 것을 후
회했다.
사람이 그렇게 죽는 줄 몰랐다. 피땀을 흘리면서 배운 무공이
그렇게 사용되는 줄 몰랐다.
피가, 죽음이... 모두가 아픔이었다.
동종관과 사공은 바로 따라붙었고, 소지하고 있던 밀마는 사용
해 보지도 못했다. 곽가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치밀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녀에게 최초의 아픔을 주었던 사람은 언니
곽사연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운공 중에 기혈(氣穴)이 뒤틀렸고, 곽가장
은 일급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장주의 거처는 일심각 무인들이
빙 둘러섰고, 외곽에는 비수당 무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
다.
남창부 제일 의원인 성수신의(聖手神醫)가 초빙되었고, 현 무
림에서 내력이 가장 정순(貞純)하다는 소림사의 반월(半月) 대
사(大師)를 모시기 위해 무인이 급파되었다.
한 여름 밤이었다.
사위는 귀뚜라미조차 숨을 죽였고, 찬물을 끼얹어 놓은 듯 싸
늘한 냉기만이 감돌았다.
파앗! 퍼억!
극히 미미한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그 누구의 출입도 허가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공녀 곽사연이 장
주의 거처에 스며들어 기식이 엄엄한 장주를 급습한 것이다.
검날에는 극히 치명적이라는 흑살독(黑殺毒)이 묻어 있어 필살
의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행(幸)일까 불행(不幸)일까.
흑살독에 살갗을 스친 장주는 몸을 툴툴 털고 일어섰다.
성수신의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이란 말로 장주의 완쾌를 표현
했다.
'호호호! 하늘의 뜻이야. 호호호!'
곽사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음...! 제정신이 아니기에... 너무 방치해 두었다. 모두 내
탓이지. 구원사 운종스님에게 보내라. 불심(佛心)으로 마음을
정화시켜 보도록...'
장주는 비통한 표정으로 명을 내렸다.
비수당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낙엽 떨어지는 소
리조차 놓치지 않는다는 일심각 무인들은 의문이었다. 장주는
호법(護法)을 제대로 서지 못한 그들에게 어떠한 문책도 내리
지 않았다.
곽소연은 압송되다시피 곽가장을 떠나는 큰언니를 보며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어미와 목숨을 맞바꾼 곽소연에게 곽사연은 어
머니 역할을 대신 해왔지 않은가.
'언니... 꼭 나아야 돼. 그래서 예전처럼 밝고 활기찬 언니로
돌아와야 해. 알았지.'
아버지를 죽이려 한 언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마음을 멍울
지게 만든 사건이었다.
'언니가 미친 것과 관계 있다고? 그래서? 네가 가서 무얼 하겠
다고? 이상하군. 아버님이 동행을 허락했다니.'
곽요연은 섭섭할 만큼 냉정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찌 보면
그리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언니였으니 당연하다 여겼고.
'네가 할 일이 없을 것 같은데... 휴우! 답답하게 방 안에 있
는 것 보다는 낫겠지. 가봐라.'
언제나 포근한 웃음을 잃지 않던 셋째언니 곽선연도 흔쾌한 얼
굴이 아니었다. 왜들 이럴까? 왜들 천명(天命)인 양 받아들이
는 것일까.
'호호호! 항상 궁금했는데...'
'...?'
'요연 언니와 아버님의 뜻이 일치하는 부분도 있었군. 잘 가
라.'
'...? 잘 가라...?'
사내같이 활달한 무연 언니가 한 말도 마음에 걸렸다.
언니들이 한 말. 그것이 곽소연으로 하여금 발길을 돌리지 못
하게 한 원인인지 모른다. 이번 일 안에는 커다란 무엇이 꿈틀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모두들 알고 있는데 자신만 모르는 무
엇이...
추풍 반여량.
그는 여리디 여린 방심(芳心)을 여지없이 뒤흔들었다.
신분과 생활방식에 너무 깊은 골이 있어 쉽게 다가가지 못했지
만 그런 의식(意識)을 비웃기라도 하듯 걷잡지 못하게 빨려 들
어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한순간의 불장난일지 모른다.
곽가장에 돌아가 현실을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피와 살이 허공에 난무하
는 지금은 그의 안위가 염려되었다.
그래서 떠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따라다녔다.
윤명과 비화당주가 수하들을 이끌고 혈단을 치러 갔을 때, 남
아있는 자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뜻밖에도 혈영일검이었다.
"할아범...! 할아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단숨에 뛰어가 품에 안겼다.
부모의 정을 모르고 자란 곽소연에게 유일한 말벗이 되어 준
원로(元老)이지 않은가. 어떤 투정이든 간에 진지하게 들어 주
던 혈영일검. 이미 은거하여 무림을 떠난 줄 알았는데.
"허허허! 말만한 처녀가 이렇게 철이 없어서야..."
혈영일검이 옳았다. 너무 철이 없었다.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숨골을 막아 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게... 천지가 빙그레 돌고 노란 불통이 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의식을 차린 것은 밀옥에 갇힌 다음이었다.
대접은 융숭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그녀는 옷깃 하나 상처입지 않았다.
그런 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혈영일검이 혼혈(昏穴)을 짚었다
는 것, 그리고 악한들이나 가두는 밀옥에 갇혔다는 것이 충격
이었다.
'반란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혈영일검과 밀옥 고수들... 그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
적어도 밀옥을 빠져 나올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언니, 곽
사연을 밀옥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형부의 가문을 곽가장이 쳤
다는 말을 듣기까지는. 곽가장 모든 무인들이 자신을 추격한다
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오히려 아버님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곽가장에 아무 변고도 없었다는 말을 듣기까지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다른 사연이 있을 거야. 곽가장으로 돌아가야 해. 아버
님을 직접 만나 뵙고 연유를 따져봐야해.'
아버지가 자식을 버렸다. 그렇게까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희망을... 천붕(天崩)과 같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
날같은 희망이라도 부여잡을 수만 있다면 한아름 부둥켜안고
싶었다.
그런데 언니가 아버지를 청부하다니.
'부모는 아무리 잘못해도 역시 부모인 것이오. 대역무도한 죄
인이라 해도 자식만은 부모를 저버려서는 안 되지.'
반여량이 그토록 믿음직스럽게 보인 적도 없었다.
모든 게 혼돈(混沌)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아버지를 청부하고... 이제
뉘 앞에서 얼굴을 떳떳이 들고 살 수 있으랴.
곽소연은 어제까지만 해도 내 몸처럼 친근했던 사람들이 마치
딴 세상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몰라? 아는 것 같던데?"
"알면 어쩌려고? 아버지를 죽일 수 있나 없나 따져 보려고?"
"호호호...!"
곽사연은 다시 몽롱한 눈길로 돌아갔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
이 미친 것 같다.
"감여가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인 것을.. 초롱 안에
갇히면 이미 목숨을 잃은 게지. 깃에 윤기가 사라지고 목소리
도 구슬프게 들려. 허허허!"
산귀가 흘리듯 말을 받았다.
"감여가...? 호호호! 그렇군. 추풍 반여량. 그 사람이군,"
산귀와 곽소연은 놀란 눈으로 곽사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
난 세월 동안 밀옥에 갇혀 있지 않았던가. 어찌 일 년 전에 벌
어진 일을, 어떻게 반여량의 존재를 안단 말인가.
"추풍이었어. 호호호!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던 자가 일 년
만에 절정고수로 탈바꿈했다? 호호호! 모두 주사위를 잘못 던
졌어. 이렇게 되면 누구의 승리가 될지 모르게 된 셈인데...
잘됐어. 호호호! 모두 결정적인 변수를 예상하지 못했어. 정말
잘된 일이야. 이제 싸움은 유희(遊戱)가 끝나봐야 알게 되었
어. 호호호!"
곽사연은 광기에 사로잡힌 듯 미친 듯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언니!"
"이런...!"
곽소연과 산귀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곽소연은 단지 놀랐을 뿐이지만 산귀는 무엇인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그의 안면에 서린 기색은 어린아
이가 봐도 알아볼 만큼 경악스러웠다.
"호호호! 산귀 노인. 도박을 한다면 어느 쪽에 걸겠어요?"
곽사연의 음성이 다시 또렷해졌다. 극과 극을 치닫는 변덕스러
운 태도에 그 누구도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하지
만,
"나는 도박사가 아니오. 무림인도 아니지. 우리 원방파는...
오래 전에 무림에서 손을 떼었소."
무엇인가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그럴 줄 알았지.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진행시켜도 산귀 노
인, 당신의 이목은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았어. 호호호! 늙은 귀
신이 하나더 생기겠군. 호호호!"
산귀는 눈을 감았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안색은 여전히 풀리
지 않은 상태였다.
천라지망을 너무 쉽게 벗어났다.
경계가 풀어진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뻥 뚫릴 것이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허점이다. 천라지망을 만들면서 그 누구도 예상
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였다.
수혼혈마 조사는 일행을 유유히 인도해 나갔다.
그는 곽가장의 천라지망을 철저하게 분석한 듯했다. 지형도 손
바닥 들여다보듯이 알아 목이 있을 만한 곳에서는 빙 돌아갔
다. 나중에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태
연히 드러내놓고 걸었다. 그만큼 곽가장의 경계는 소흘했다.
"미친놈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
데."
범도가 날카로운 인상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의 안위와는 상관없이 그토록 자신하던 천라지망이 보기
좋게 무너진 데 대한 분노였다.
"흐흐! 전부터 문제가 많았어. 분타주들의 위치가 상승되지 않
았다면 뜯어고칠 수 있었는데..."
황백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심사도 범도 못지않게 불편했다.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수혼혈마의 안내를 받는다는 것이 영 께름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우맹은 워낙 적이 많은 관계로 그들의 총단(總
團)을 아는 사람은 사우맹도 가운데도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석수 몸은 정말 괜찮은가?"
"옛날 같기야 하겠어. 하지만 어줍잖은 놈 몇 놈쯤은 상대할
수 있지. 의수와 의족을 쇠붙이로 만들어서 병기도 따로 필요
없고. 후후!"
동목은 일그러지려는 안면근육을 특유의 부동심으로 붙잡았다.
석수에게 동정의 빛을 보이면 안 된다. 그런 행동은 오히려 석
수를 나약하게 만들 뿐이다. 좀더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험한 무림에 계속 몸담고 있으려면.
"동목, 석수. 정대원과는 전혀 연결할 수 없나?"
조중이 감정 없는 물음을 던졌다.
그는 아직도 원방파보다는 정대원들이 한 수 높다고 생각했다.
정보를 취합하는 능력에서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물에 빠져 죽은 내 아들... 마누라가
유일하게 남겨 주고 떠난 놈을... 죽인 자... 장주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신무귀부와 제가 창병가의 후손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주뿐입니다."
동목은 천애사시라는 별호답게 말하는 듯 말하지 않는 듯 극히
조용조용했다. 덜그덕거리는 마차 소리와 말발굽 소리에 묻혀
자세히 귀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다른
사람이 엿듣는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좋았다.
조중은 동목을 따라 극히 낮은 소리로 다시 물었다.
"곽가장을 적으로 돌릴 셈인가?"
"어차피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까요. 장주... 후회할
겁니다. 이판사판으로 나간다면 목숨을 던질 수하들이 몇 명
있습니다."
"후후! 그건 저도 마찬가지. 혈단이 곽가장의 분신이라면...
키키! 장주가 우습군요. 왜 저를 살려 줬는지, 이렇게 의수와
의족까지 마련해 주고. 이건 마치 '살아 남아라. 그래서 심장
에 비수를 꽂아봐라.' 하고 놀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동목은 불현듯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말을 하고 난 석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적!"
"우리 중에!"
동시에 튀어나온 소리였다.
장주에게는 언제든지 일행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비장의 패
(牌)가 있다. 그것은 간자(間者)였다.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드넓은 중원 한 구석에 숨어 검을 간다면 무슨 수로 찾
아낼까. 하지만 장주는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 일행 중
에 간자가 있다면.
"이거야 원... 엎친 데 덮친 격 아닌가? 가만... 반여량은 우
리에게 사우맹으로 가라고 했다. 자네들 말대로 우리 중에 간
자가 있다면 사우맹의 본거지도 알게 될 터..."
누구인가? 또 누가 장주의 간자인가? 이삼재가 죽었는데 또 있
단 말인가? 반여량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마음이 천근만
근 무거웠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한 가지를 생각해 냈다.
"차도살인(借刀殺人)!"
"가도벌괵(假途伐성)! 후후! 추풍... 무섭게 컸군. 잠시 못 본
사이에 절정 고수에다가 뛰어난 병법가(兵法家)까지 됐어. 아
무래도 사우맹과 곽가장은 한판 승부를 벌이게 되겠군."
"음...! 이제야 알겠어. 우리의 힘을 비축시켜라. 나는 그 말
을 '사우맹도 가운데에도 우리와 듯을 같이하는 자가 있을 테
니 포섭하라' 그렇게 알아들었는데..."
"후후! 저도 그렇습니다."
"쑥스럽지만 저도 그렇게 알아들었죠."
조중, 동목, 석수는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반여량의 계획대로라면 자신들은 미끼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흑도로 몸을 피신하는 못난이들. 그
러면서도 곽가장과 철천지 원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곽가장
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천라지망을
쉽게 풀어 준 것은 이번 기회에 사우맹까지 없애 버린다는 일
석이조의 심산이리라.
그렇다. 천라지망이 뚫린 것은 허점 때문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틈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천광탄이 떠오른 것은? 반여량이 성동격서의 계를 사용했을 수
도 있고, 우연일 수도 있으며, 곽가장 무인들이 사전에 세워
준 계획의 일부인지도 모른다.
미련한 놈늘은 사우맹이다. 그놈들은 제 몸집도 생각하지 않고
너무 큰 먹이를 물었다. 몇 명 안 되는 그러나 강서성의 판도
를 뒤바꿀 수도 있는 먹이를.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드립니다
따끈따끈한 밤 보네시길요...
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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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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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합니다! 즐독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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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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