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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반여량은 거센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오는 작은 나뭇가지를 보
았다.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물 속에 잠겼다 떠올랐다 요동치
는 나뭇가지. 위에서 보면 평온해 보이던 물살,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서 보니 거센 급류가 되어 소용돌이쳤다.
감여로 파악한 지형이 맞았다.
이곳은 악기가 깃든 땅. 거센 물살에 휘말린다면 살아날 자가
드물 것이다.
풍덩!
반여량의 몸이 수천 길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수면에 부딪치는 충격도 적지 않았지만 바짝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물살에 휘말리면 죽는다. 어떻게든 빠져 나가야...'
물이 차가워 소름이 돋았지만 정신을 일깨우기에는 더없이 좋
았다.
몸을 위로 솟구치기 위해서 진기를 발에 모아 힘껏 퉁겨냈다.
슈욱!
몸은 잠시 위로 솟구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소용돌이에 휘말
려 중심을 잃고 말았다.
물살에 휩쓸려서는 몸을 운신하기가 더욱 힘들다. 손발을 놀려
야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엇! 저건!'
귀신 같은 형상으로 시커멓게 드러난 암석!
이대로 휩쓸려 가다가는 영락없이 바윗덩이에 껴안기는 꼴이
되고 만다.
반여량은 몸을 조금이라도 뒤틀어 보려고 발버둥쳤다. 순간,
쿵!
극심한 아픔이 머리에 일었다. 누가 쇠망치로 뒷머리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헉!"
너무 극심한 아픔에 입을 벌렸고 기다렸다는 듯이 거센 물살이
숨통을 막아왔다.
꿀꺽! 꿀꺽...!
얼마나 마셨을까? 한번 물을 먹기 시작하자 곧 눈앞이 노랗게
변하면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을 번쩍 떴지만 보이는 것
은 칠흑같이 검은 물살뿐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해. 정신을... 정... 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여량은 물살에 전신을 내맡긴 채 정처없이
휩쓸려 내려갔다.
* * *
한 무리의 인형들이 강독을 따라 치달렸다. 수풀더미가 나오면
건너뛰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장작더미도 한달음에 뛰어넘
었다.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다.
"헉헉! 여기가 어떨까?"
물살이 처음으로 굽이지는 곳에 이르자 누군가 강심(江心)을
바라보며 의사타진을 했다.
"아니라도 할 수 없지."
그 말이 신호였을까? 처음 물음을 던진 사내가 거침없이 강으
로 뛰어들었다. 그의 허리에는 굵은 동아줄이 묶여져 있었다.
사내의 유영(遊泳) 솜씨는 상당히 뛰어나 보였다. 거친 물살인
데도 그는 유유히 헤엄쳐 나갔다. 그러나 그도 점점 물살에 떠
밀려 제 방형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나아가는 진척도 상당히
느렸다.
"온닷!"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쳤다.
과연 강심 한가운데로 축 늘어진 사람 한 명이 떠밀려 오는 모
습이 보였다.
물 속에 있던 장한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헤엄쳐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손발을 마비시켜 왔다. 거센 물살 때문
에 떠밀려오는 인형과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인형에게 다가가기 전에 힘이 빠진다거
나 물살이 인형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밀쳐낸다면 포기해야 한
다.
인간이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에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일회아(一會兒:잠깐,4~5분)동안 물에 잠겨 있었다면 구해도 제
정신으로 돌아오기는 힘들다. 이미 뇌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
에. 그 이상 경과하면 죽었다고 봐야 한다.
장한은 눈을 부릅뜨고 손발을 놀렸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낸
마지막 기력이었다.
손끝에 옷이 걸리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긴장이
풀려 사지가 쭉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제 부둥켜안고 있기만
하면 된다. 강변에 있는 친구들이 동아줄을 끌어당길 테니까.
이미 그의 몸은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무서운 속도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강변으로 두 사람을 끌어내자 다른 한 사람이 재빨리 인형을
반듯이 눕히고 가슴을 힘껏 압박하기 시작했다.
반여량... 그는 축 늘어져 기식(氣息)이 엄엄했다.
죽었는가? 힘깨나 씀직한 장한이 있는 힘껏 구명조치를 하고
있건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회아가 다시 흘렀다.
모두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드리워졌다. 이 정도로도 소생하
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이다.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던 장한이 체념한 듯 막 손을 거두려
는 찰나, 반여량이 입으로 물줄기를 토해 내며 꿈틀거렸다.
"살았다!"
누군가 기쁜 함성을 토해 냈다.
막 손을 거두려던 장한도 기쁜 표정을 띠며 다시 가슴을 압박
하기 시작했다. 전보다는 조금 약하게.
소생의 기미는 뚜렷해졌다. 반여량은 추운지 몸을 덜덜 떨었
다. 그러자 일행 중 한 명이 미리 준비한 모포를 덮어 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일제히 달려들어 손발을 주물럭거렸다.
몸에 온기(溫氣)가 돌기 시작하자 반여량은 서서히 깨어났다.
'죽었구나.'
첫 번째 의식이었다.
몽롱하게 보이는 저 너머로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는 것은 죽
은 영혼들이리라. 눈꺼풀이 떠지고 낯선 사람들이 두세 겹으로
겹쳐 보였다. 그들은 부지런히 전신을 주무르고 있었다. 하지
만 반여량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눈꺼풀이 다시 감겼다.
'살았어. 정신을 차려야 해.'
두 번째 의식이었다.
억지로 눈을 떴지만 눈자위가 빙그르 돌아가며 다시 감기고 말
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눈을 떴다. 그러기를 얼마
간, 이제는 얼굴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낯선 사람들... 곽가장...'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자면 이들로부
터 도망쳐야 한다. 곽가장 무인들에게 잡힌다면 죽음밖에 돌아
오는 것이 없다. 결코 살려 주지 않으리라.
허우적거렸다. 자신은 투월채법을 전개한다고 생각했지만 장한
들에게는 그저 넋 잃은 사람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살아서 다행이다. 곽가장 무인들이 곧 쫓아올 터... 힘들더라
도 잠시만 참아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고 판단했는지 무리 중 한 사람이 반
여량을 등에 걸머지었다.
'곽가장이 아니군. 그럼 누구...?'
장한들은 사전에 지형답사를 해놓았는지 능숙하게 길을 잡아
달려나갔다.
'무인이 아니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반여량은 제일 먼저 동기감응을 펼쳐 무
리들을 살펴나갔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무공을 익히면서부터
본능적으로 펼치기 시작한 동기감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을
뿐이다. 감각으로 느껴진 기운은 평범하기만 했다.
"우리는 원방파 감여가들이다."
무리는 스스로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원방... 파! 여기는 어떻게?"
"총수님이 실종되었는데 그럼 우리들이 가만히 손 놓고 있으리
라 생각했나? 총수님은 감여가가 무림에 개입하는 것을 만류하
셨지만... 실제로 우리의 정보력은 곽가장을 능가한다."
자부심이 물씬 풍겨 나오는 말이었다.
정보력(情報力).
그것은 고하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놓치는 정보가 있고,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우연
찮게 주워들은 풍월이 있기 마련이다. 필요한 정보, 살아 있는
정보를 어느정도 취합할 수 있느냐로 고하를 나눌 수도 있지만
무의미한 일이다.
이들은 지금 그 동안 곽가장에 눌려지내야 했던 한(恨)을, 다
른 감파로부터 당한 멸시를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산귀는 금산을 빠져 나갔소?"
"산귀? '님'자를 붙여라. 어린놈에게 능멸당하실 분이 아니
다."
"내가 실수했군. 좋습니다. 사과하죠."
비로소 굳어졌던 장한들의 안색이 풀렸다.
"총수께서 사우맹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너를 찾
았듯이 총수님도 찾았으니까."
"여기는?"
"금산이다. 천라지망이 풀릴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지낸다. 하
루고 이틀이고, 일 년이 지나더라도."
이들은 그것이 최선이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곽가장 무인들
이 쳐 논 그물망을 어찌 빠져 나가랴.
반여량은 달랐다. 무공을 시험해 볼 요량이 아니었다면 금산을
빠져 나갔어도 백 번은 빠져 나갔을 게다. 하늘의 날씨를 알
고, 땅의 지형을 알고, 적을 아는데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으
랴.
'오늘은 기력을 회복하고... 내일 움직인다.'
원방파 감여가들은 선승(禪僧)들처럼 벽곡단(쒀穀丹)을 씹어먹
었다. 곽가장 무인들로부터 철저히 몸을 감추려는 행위였다.
그리고 그러한 준비는 수많은 감여가들이 목숨을 버릴 때마다
하나씩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이른 새벽에 산천초목의 싱그러운 공기를 들이키는 것은 상쾌
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고오오오...!
동기감응을 펼쳤다. 공기를 코로 흡입하는 대신 인당으로 빨아
들인다. 생각하고 몸과 마음의 기운을 하나로 합일시켰다. 의
념(意念)이라는 것은 어차피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히 존재한다. 마음이 이끌리면 몸도 따라 움직인다. 상단전인
인당을 마음의 통로로 사용하고 난 다음부터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있어 좋았다. 스님이 이런 마음을 얻
기 위해서 참선(參禪)에 몰입하는 것이 아닐까? 도인(道人)이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수련을 거듭하는 게 아닐까?
반여량은 극히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아직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는지라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곽가장 무인들이 천라지망을 펼쳐 놓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들은 그물망을 좁혀 온다. 일 년이
고, 이 년이고 철수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원방파 감여
가들은 아직 곽가장 무인들을 모른다. 지난 이십여 년간 무림
에 개입하지 않은 소치겠지.'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 순간에도 곽가장 무인들은 좀
벌레처럼 한 치 두 치 갉아들어오고 있으리라.
고오오오...!
다시 동기감응을 펼쳤다.
이번에는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금산의 용맥(龍
脈)을 읽기 위해서였다.
용맥을 알아야 한다.
금산에서 가장 강한 정기(精氣)는 어디에 잠들어 있는가. 그리
고 어느 산맥을 타고 흘러왔으며 어디로 빠져 나가는가.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모두 생기를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산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길들은 그래서 생
겼다. 가장 감각이 예민한 동물이 꿈틀거리는 지맥(地脈)을 따
라 움직이면, 사람도 자연 그 길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지감(地感)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산에 올라서 기분 나쁘다는 사람은 없다. 그럴 수밖에
산의 정기가 스며든 용맥에서 지기를 흠뻑 받았으니.
이미 무녕 분타에서 확인해 봤다.
무인들은 생기가 깃든 곳에서 경계를 섰고, 자신은 사기가 깃
든 곳을 골라 움직였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만약 중문 밖의
지형을 명확히 알았다면 결코 무녕 분타 무인들에게 발각되는
일이 없었으리라.
밝은 대낮에 육안으로 관찰하듯이 산줄기가 드러났다.
생기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나뉘어진다.
음기가 가득한 곳은 골을 형성하고 양기가 깃든 곳은 산등성이
를 만든다. 사람은 개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음기와
양기를 모두 지녔기 때문에 생기라면 무조건 감응을 느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내는 양기에 여인은 음기에 민감하다. 사
내는 산을 타기 좋아하고, 여인은 골짜기를 좋아하는 까닭이
다.
산세를 파악하고 음기와 양기를 골라내자 곽가장 무인들이 어
디쯤 있을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드러났다.
일목요연이라는 표현이 적당했다.
상단전인 인당에 둥그런 원이 형성되고, 모든 광경이 선명하게
보였다.
무녕 분타에서는 낮과 밤이 현실 그대로 나타났다. 낮에는 밝
게 밤에는 어둠과 마찬가지로 어둡게. 하지만 지금은 좀더 발
전했다. 밝은 별들이 떠 있지만 산세를 알아보기는 어두운 밤,
그런데도 반여량은 희미하게나마 모든 산세를 명확히 보았다.
마치 옅은 안개가 낀 산에 올라온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태극도해와 동기감응을 연마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상단전과 중단전을 분리시켰다.
내공과 뇌력이 섞일 때마다 극심하게 다가오는 두통을 감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순리(順理)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부님
과 남저명이 비참하게 죽지 않았는가.
하지만 태극도해를 수련하는 과정에서 내공과 뇌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았다.
내공이 강한 사람은 당연히 정신력도 강하다.
육체가 건강하면 정신도 맑듯이 검에 생명을 건 무인들의 육신
은 지독하리만치 강인해서 범인들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맹수보다 날쌘 몸놀림, 새보다 빠른 신법은 우연히 얻은 게 아
니다. 하나같이 극고의 정신력을 바탕으로 '참을 인(仁)'을 수
천 번도 더 외쳤기 때문에 그만한 몸놀림이 나오는 것이다.
내공이 강해질수록 뇌력도 따라서 움직이려 했다.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막으려는 행동. 너무 힘든 나
날이었다. 만약 절대고수가 옆에 있어 그러한 행동을 봤다면
대번에 고개를 내저었으리라. 주화입마 당하기 꼭 알맞은 행동
이었으니까.
당시에는 이런 점을 몰랐다.
치솟아 오르는 내력을 중간에 제어하고도 주화입마에 걸리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마침내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 찾아왔다.
거침없이 독맥을 타고 솟아오른 진기는 백회혈(百會穴)을 거치
면서 모든 뇌력을 끌어내 버렸다. 그리고 상단전으로 치달리고
니 묘한 현상은 그때 벌어졌다.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던 두통이 씻은 듯이 가셨다. 편안했다.
마치 대기 중에 흩어져 있던 생기가 인당을 통해 물밀 듯이 밀
려오는 기분이었다.
'생기가 몸 안으로 들어온다.'
의념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맑고 시원한 생기가 체내로 들
어와 단전에서 진기와 합류했다. 진기는 다시 일주천(一周天)
하며 정(精)과 신(神)을 쌓아주고, 뇌력은 더욱 강성해지고...
상호보완(相互補完), 상호화합(相互和合).
서로 밀치는 관계에서 끌어당기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제서야 알았다.
인체에 음양이 존재한다는 것은 일찍이 배웠지만 실제로 자각
하는 사람은 전무한 편이다. 반여량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육체와 정신은 고루 발전해야 한다.
육체만 강건하게 만들고 정신 발달을 게을리 한 사람은 화기
(火氣)가 치솟아 성정이 폭급하게 된다. 반대로 정신을 중시하
고 육체를 경시한 사람은 수기(水氣)가 침잠해 단명한다.
내력은 육신이었다. 대기에서 받아들인 생기가 단전을 휘돌아
올라온 살아 있는 힘이다.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의념이다. 임
독양맥(任督兩脈)을 타고 흐를 적에는 생각이 움직여 줘야 한
다.
어느 한 쪽도 불균형이 이루어져서는 안 뒤다.
반여량은 뇌력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발전했다. 거기에
비하면 뇌력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만한 힘은 너무 미약했다.
건강 삼아 펼치는 태극도해로는 가뭄 탄 논에 이슬비 내리는
격이었다.
당연히 단명한다.
사부님과 남저명은 심법이 탁월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익숙해져서 억지로 참은 것이다.
반여량... 그는 무공을 익혀야 할 팔자였다.
태극도해와 동기감응은 나날이 발전했다.
그래서 자신만만했는데... 너무도 간단히 당한 참패(慘敗). 전
에는 보이지 않던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듯이, 전면(前面)
으로 고정된 시야를 팔방(八方)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 다
수의 무인들에게 동기감응을 펼칠 수 있다. 공격적 동기감응
을. 그것은 반여량이 깨달아야 할 새로운 세계였다.
'맥이 보인다. 흑백(黑白)은 본래 하나, 생기와 사기도 하나에
서 출발한다. 생기 곁에는 사기가 있기 마련...'
"휴우!"
생기가 몸에 들어와 정과 신으로 화(化)하고, 대신 걸러진 사
기가 몸 밖으로 토해졌다.
'길이 험하다. 산을 족히 네 시진은 타야 한다. 지금은 늦었
고... 오늘밤 출발한다.'
그는 동기감응으로 읽어들인 산맥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총수는... 무림의 일에 끼여들지 마라는 엄명을 내렸다. 특히
이번 일에는... 만약 당신께서 참변을 당한다면 사적인 원한으
로 치부하여 복수하지 말라는 말씀도 계셨지."
눈이 부리부리한 장한이 벽곡단을 어적거리며 말했다.
"지금 원방파는 누가 관장하고 있습니까?"
반여량도 고소한 맛이 나는 벽곡단을 씹어먹었다.
"부총수... 뛰어난 분이시다. 명당(明堂)을 열두 군데나 찾아
내신 분이야. 하지만 우리는 총수님이 필요하다. 그분은 일생
을 감여에 몸바쳐 오신 분. 개죽음 당하시는 모습을 이대로 지
켜볼 수 없다."
"저쪽은 무인입니다."
이들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 무인들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일방적인 도살을 당할뿐이다.
"알고 있다.'
눈이 큰 장한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이번 일에 나서는 사람은 우리 열 명뿐이다. 모두 목
숨을 버리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우리 뒤에는 원방파가 있다.
총단에서 취합한 모든 정보는 우리에게 전달된다."
원방파 전체가 움직인다는 말이었다. 단지 무인들 일이기에 비
공식적으로 활동할 뿐.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몸을 틀기도 비
좁은 동혈에 땀내 풍기며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당
하리라.
"그런 이야기를 왜... 저에게 합니까?"
"같은 감여가이니까."
"..."
"그리고 너는 무공을 익혔으니까."
"나보고... 앞장서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말은 안 했다. 산귀 어르신과의 옛정을 생각해서 죽음만
벗어날 수 있게... 부탁한다."
"..."
반여량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정보를 주겠다."
"정보라면..."
"강서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보... 곽가장을 쳐달라는 말이
아니다. 산귀 어르신을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만 해주면 된
다."
그게 그 말이었다.
지금 산귀는 곽가장에서 반도라고 낙인찍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무엇보다 밀옥에 갇혔던 사실이 그를 죽음과 입맞추게
한다. 곽가장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밀옥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모두 죽이려 할 게다. 그런 사람을 구한다? 곽
가장과 부딪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죠."
반여량은 다시 벽곡단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고소한 밤맛과 쌉쌀한 솔잎 향기가 입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왜 밀옥을 깼나?"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네가 밀옥을 깨기 전까지 우리는 움직일 생각을 감히 하지 못
했다. 곽가장과 싸울 입장도 아니고, 밀옥을 깰 만한 고수도
없었으니가. 궁금해서 묻는 말이다. 곽가장과 정면승부를 각오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인데... 밀옥에 갇힌 사람들이 친
인척도 아니고..."
'꼭 구해야 할 만큼 의리가 깊은 것도 아니고.'
눈이 큰 무인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반여량은 그의 마음을 읽
었다.
"내가 무슨 일에 휘말렸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 정보를 주신
다니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와 함께 출
발했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죽음이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좋습니다. 그들은 무인들이니 어떤 싸움을 하든 간에 상관없습
니다. 더러운 싸움에 휘말렸다고 생각하면 간단하니까요."
반여량은 표정 없는 얼굴로 벽곡단을 꼭꼭 씹어삼켰다. 말을
하는 과정에 약간의 흥분이라도 치밀 법한데 그의 얼굴에는 어
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은 제쳐 두더라도 죄 없는 마부 왕기 노인. 그의 일가
족을 죽인 일은...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인
것은 힘있는 자가 할 행동이 아닙니다. 도의(道義)가 타락했어
요."
"그것뿐인가?"
눈이 큰 장한은 조금 놀란 듯했다.
왕기 일족이 몰살당한 일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만궁직전의 터.
사당에서 집 안으로 몰려들던 귀기(鬼氣)는 결국 곽가장의 검
을 불러왔다. 하지만 아무런 증거가 없는 한 함부로 말할 성질
이 아니었다.
마부 일가족의 죽음. 그것이 변수를 몰고 왔는가? 변수치고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곽가장은 못된 짓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장주 곽모천은 제 손에 죽습니다. 나쁜
짓을 하고도 발을 편히 뻗고 잔다면 말이 안 되죠."
"못된 짓?"
"정보를 주신다 했습니까?"
"음... 주겠네."
"옥순산 전투를 알아봐 주십시오. 혈조수가 저지른 만행이 어
떠했는지. 그가 이끌던 살수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조사해 주
십시오."
"이, 이십 년 전의 일을 말인가?"
"원방파도 관여한 일입니다. 원방파가 무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것이 그때부터 아닙니까? 당시에는 많은 정보를 취합해
놓았을 겁니다. 그냥 손을 떼지는 않았을 테니까."
"음...!"
"산귀 어른은 무엇인가 알고 있겠죠. 하지만 지금 입장이 저러
니... 원방파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십시오."
"알겠네."
반여량은 남저명을 떠올렸다.
그는 남가 일족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몰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실이 그렇게 드러나고 있다. 혈단, 그들이 진정
한 혈조수의 후인들이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 애꿎은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파렴치한
행위.
만약 곽모천이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면 강호의 모든 무림인이
개탄(慨歎)해야 한다.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징계해야 한다.
곽가장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곽가장과 정면승부를 결
심하게 된 큰 이유였다.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동굴 안에서 죽은 혼이라는 사람은 곽모
천의 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곽가 자매는 그런 사실을 왜 몰랐
을까?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당연히 다를 것이다.
음갈마희 초초.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복동생이 있다는 사실쯤
은 알았어야 옳거늘.
장주의 아들을 죽였다.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곽가장이 없어
지거나 자신이 죽거나 둘 중에 하나는 요절나야 마무리가 되리
라.
조중 일행을 구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곽가장을 무너뜨리는 초석
이었다. 곽가장과 원한진 사람이 많을수록 반여량에게는 유리
했다.
이제... 원방파도 정보를 준단다.
든든한 힘이었다.
"참! 자네가 가까이 하던 여자 이름이 한한이었지? 동생이 교
교. 그 교교라는 여자 말일세, 곽가장이 손댔어. 지금 상황으
로서는 생사를 확인할 수 없지만 곽가장으로 끌려간 것은 확실
해."
"뭐라고요?"
참으로 충격적인 소리였다. 교교가 곽가장에 끌려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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