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보다보면 공민왕이 명나라를 선택한 것을 두고 원간섭기의 치욕을 벗어버리고자 실시했던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실행한 '과감한 모험'으로 설명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물론 중원의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어떤 왕조를 선택해야하는지 결정하는 일에는 어느정도 과감성이 수반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민왕이 그냥 감으로 모험적인 선택을 과감히 결정하였다 라고만 설명을 한다면 그건 국운을 건 도박을 했다는 것이고 그건 한 나라의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죠.
명나라 코인 떡상 가즈~아! 라는 식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한번쯤 들어보셨거나 교과서에서 읽어 보셨겠지만, 공민왕초기 원나라에서 강남한족이 반란을 일으켰을때 원나라가 고려에 파병을 요청했고 이때 최영등의 고려 장군들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갔다가 돌아와서 원나라가 이미 망해간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그 이후 공민왕은 기철제거와, 쌍성총관부 공격, 인당의 파주참 공격 등의 일을 해 냅니다.
다만 그 이후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문제, 내부 반란사건 등 문제로 인해 원나라에 직접적으로 반항하는 행동은 한동안 자제하지만, 그렇다고 명나라가 건국되기 이전까지 고려가 다른 문제 해결하느라 국제관계에 있어서 손을 놓은 상태 였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로 '강남의(정확히 말하면 현 강소성과 절강성 등의 화동지역일대) 한인 군웅' 들과의 접촉이 그것 입니다.
원말 군웅들의 세력도.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현 강소성 절강성 등 화동지역
장사성, 방국진, 그리고 황제 즉위 이전 주원장에 이르기까지 강남의 군웅들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고 고려도 공식적 그리고 비공식 사신을 파견하기까지 하는 등 고려는 잠시 반원정책을 쉬고 있는 기간에도 꾸준히 중원의 정세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특히 신돈 집권시절에는 중국에 달마의 법을 전파하러 가는 승려에게 서신을 들려보내 장사성동생 장사신에게 파견하는 등 공식적이건 비공식적이건 통교하려 노력했던 것이죠(그리고 갔다온 승려는 국사(國師)에 임명 됨).
그리고 원나라가 상도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해 11월 오왕 주원장(근데 이미 그 시점에 주원장은 황제로 등극했으나 아직 황제 등극소식은 접하지 못함)에게 장자온을 사신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명나라에서도 역시 11월에 회회인이자 고려에 귀화한 인물인 설손의 동생 설사를 출발시켜 다음해 4월에 고려에 주원장의 황제즉위 소식과 더불어 공민왕을 책봉하는 교서를 가지고 와서 공민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사신을 파견함으로서 조공 - 책봉관계를 정식으로 맺게 됩니다.
즉 공민왕이 원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를 선택한 것은 국운을 건 도박이 아니라, 주원장을 포함한 한인 군웅들과 통교하며 혼란한 중원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입수하면서 파악한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내린 합리적 결정이었던 것 입니다.
다만 이 공민왕의 조치에 반대파들의 반격이 이루어지고 공민왕은 시해되었으며 이후 약 12년간 명나라가 다시 고려에 책봉사신을 보낼때까지 고려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오죽하면 중간에 왕태후의 명의로 외교문서 보내면서 '이 늙은 할미와 손자를 불쌍히 여겨 책봉해 주세요'라고 할 정도...... ㅜㅜ
한편 공민왕이 등극직후부터 키우기 시작한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한인군웅들과의 외교관계에서 답서를 쓰는 등 실무를 담당하였고, 그리고 그 목은이색이 배출해낸 학자들 또한 강남 한인군웅들과의 외교에서 하급 관리로 실무를 담당하며 점차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외교 실무를 통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국제정세를 바탕으로 공민왕 시해사건이후 조정의 친원정책 기조에 격렬히 저항하여, 고려가 원나라와 공식 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막아내었고,
이러한 기조는 훗날 저들 중 일부가 '이성계 캠프' 에 합류하여 (내치는 물론)외교에 대한 국정운영방침을 설계해주는 역할을 하고 조선건국 이후 핵심세력이 되었기에, 조선 건국 이후 조선 외교의 기본 방침이 됩니다.
첫댓글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엌ㅋㅋㅋ 이성계 캠프ㅋㅋㅋ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