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분연히 나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선비들의 의무이자 대의였습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위인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경북 성주 출신의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선생은 단연 돋보입니다. 매일신문은 항일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애국지사이자 반독재 통일운동가, 교육자로서 민족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심산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시리즈물을 싣습니다.
1) 왜 김창숙인가 -나라가 어려울 때 행동한 지성
얼마 전 한일 축구경기장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대형 걸개가 내걸려 화제가 됐다. 일본을 겨냥한 것이지만 우리 스스로에 대한 질책일 수도 있다. 일본의 침략행위야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망국을 자초한 것은 우리였다. 역사는 과거의 잘못을 오늘에 되살려 전철을 밟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부끄러운 역사도 소중한 것이다. 과거를 망각한 채 오늘의 이해득실에만 매달린다면 미래는 기약하기 힘들다.
망국의 원인은 나라 전체가 무능하고 나약했기 때문이다. 바깥 흐름에도 어두웠고 나라 안은 부패한 지도층과 빈궁한 서민들이 극과 극의 생활을 이어갔다. 물론 선각자, 애국지사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자취는 미미했다. 대한제국 말기까지 나라를 지배한 사대부들은 끼리끼리 어울려 공리공론에 몰두하거나 자신의 영달에만 골몰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에게 민족이란 대의는 기대할 수 없었다.
100여 년 전 당시는 이제 과거사가 됐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모습은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유한 사회지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재벌은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는다. 대화와 이해가 사라진 정치판은 국민의 행복 추구라는 정치의 요체를 망각한 채 패거리 싸움으로 날을 보내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이 넘쳐난다. 양극화 사회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대의를 행동으로 실천한 선비였다. 양반지주로서 누릴 수 있는 편안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후 여든이 넘어 타계할 때까지 사생취의라는 유교의 근본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대의에 어긋나는 일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심산에게 독립투쟁 당시 대의는 민족수난의 극복이었다. 일본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앉은뱅이 신세가 됐지만 변호를 거절하고 항소를 포기했다. 포로를 자처한 그는 재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한 사람으로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고 했다. 당연히 일본 법률가에게 변호를 맡기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해방 이후 그의 대의는 통일정부의 수립이었다. 민족의 분열을 막아야 했다. 그가 정당을 극도로 기피한 이유다. 정당의 당수 자리를 거절하고 당을 같이 하자는 백범의 제안조차 거부했다. 끼리끼리 어울려 작당하고서는 통일정부는 요원하다고 여겼다. 타협을 거부하고 일체 정파들을 멀리한 것은 지나친 결벽증일 수도 있지만 통일정부의 수립과 민족번영이란 대의를 소중히 여긴 때문이다.
파리평화회의에 대한독립 호소문을 전하려고 해외로 나갈 때 그의 어머니는 나랏일을 하려면 가정 일은 잊고 온몸을 바치라고 훈계했다. 독립투쟁의 길은 형극이었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나 상하이까지 가는 길도 험하지만 그곳에 간들 굶어 죽을지, 얼어 죽을지, 맞아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심산이나 그의 어머니인들 왜 아쉬움과 두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고통받고 신음하는 나라와 민족 앞에 가정은 뒷전이었다.
어머니의 의연한 훈계와 심산의 망설임 없는 선택은 나라 잃은 선비의 갈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조선을 이끌어 온 선비 곧 사대부의 길은 무엇인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일이 손꼽히지만 배운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사회지도층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야말로 선비 정신의 요체였다. 특권을 누린 만큼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는 앞장서 피 흘리며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이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였다. 현실을 외면한 채 고담준론을 하기보단 대의명분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서 참된 선비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이다.
독립운동에 나선 분들 모두 그랬겠지만 심산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독립투쟁의 길에 나섬에 있어 따지고 말 것이 없었다. 선비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에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가족의 안위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버렸다. 유교 국가 조선이 망한 것도 지배층 유림이 먼저 부패하고 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선비로서 부끄러울 뿐이었다.
나라의 위기에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은 선비들의 의무이자 대의였다.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는 선비 정신은 김창숙의 삶을 일관해 온 대의였다. 사생활이든 사회생활이든 부끄러움과 어긋남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은 그의 평생을 이어왔다. 대의에 벗어나면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호 심산(心山)은 그런 정신의 상징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은 바로 그의 삶이었다.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의는 상대가 일본이든 미군정이든 이승만 대통령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나랏일을 할 때는 사심이 없어야 했다. 당대의 귀감이었지만 그에게 닥친 만년의 고독과 고난은 타협하지 않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독립운동 당시는 물론 해방 조국에서 누구보다 존경받던 그가 지금 다소 생소한 이름으로 남겨진 것도 대의명분에 집착한 탓일 수도 있다.
덕망과 재능을 갖춘 영재가 나라와 겨레의 원동력이 된다는 믿음으로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앞장서고 초대 학장으로 취임한 심산은 신입생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어떤 분야의 학술을 전공하고 터득하는 것보다도 먼저 사람다워야 한다.” 교육의 목표가 앎에 있음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는 말이었다. 선비 정신은 행동할 때 빛난다는 말이기도 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훈시이기도 하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심산 김창숙 연보
1879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에서 출생
1905 스승 이승희와 대궐 앞에 나아가 을사오적을 성토함
1909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일진회 성토문 작성 배포로 연행됨
1910 사립 성명학교 창설
1919 파리평화회의 장서 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 주동. 상해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피선
1920 상하이에서 사민일보 창간
1925 독립운동 기지 개간자금 모금차 국내로 잠입
1926 상하이로 돌아감. 나석주 의사의 의거 추진 성사
1927 상하이 공공조계의 병원에서 치료 중 일경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
1928 징역 14년 선고받고 수감
1934 병이 위독 형집행정지로 출감
1939 울산 백양사에서 요양
1945 건국동맹 남한 총책으로 추대됐다가 체포돼 수감. 해방. 민중당 당수직 거절
1946 신탁통치 반대. 성균관대학 초대 학장
1948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7인 성명서 발표
1951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 발표로 수감
1952 부산국제구락부사건으로 옥고
1953 성균관대학 초대 총장
1956 성균관대학 총장 사임. 자유당에 맞서 각종 성명서 발표
1960 백범기념사업회 회장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1962 건국훈장 받음. 노환으로 서거. 수유동 선열 묘소에 안장됨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발간 심산 김창숙의 사상과 행동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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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내용 이미 퍼갔습니다 , 그러나 정치인들에게는 마이동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