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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원방파에서 본 달빛은
(一)
'교교를 납치한 것은 나 때문이다. 그런데... 곽가장 무인이
사람을 납치하며 흔적을 남기다니. 이건은 일부러 흘린 정보
다. 무엇을 노리고? 교교라면 나다. 나를 노렸어. 그렇군. 장
주는 소문이 껄끄러운 거야. 그래서... 원방파! 원방파가 나선
것을 알고 있어!'
원방파 감여가가 움직인 것뿐 아니라 금산에 들어와 산귀를 만
난 것도 예상했다.
조중 일행도 그렇다. 곽모천은 그들이 사우맹으로 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제약도 받지 않고 금산을 빠져 나
갔으리라. 어쨌든... 장주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사우맹과
곽가장이 만나서 좋을 건 없을 텐데. 오히려 피만 더 흘릴 뿐.
장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알수 없었다. 하지만 교교를 납치한 이유만은 너무도 극명했
다.
반여량과 원방 감여가들은 너무 늦게 만났다.
곽모천이 짜놓은 각본대로라면 흑서채에 있을 때 만났어야 한
다.
그렇다. 곽모천도 이삼재가 발각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삼재가 쏘아올린 천광탄 때문에 움직이는 시간이 다소 앞당겨
졌고, 반여량과 감여가들의 만남은 뒤로 미뤄졌다.
만약 흑서채에서 만났다면? 그래서 교교에 관한 말을 들었다
면? 즉시 곽가장으로 달려갔으리라. 그렇다고 조중 일행을 끌
어들이지는 않는다. 죽을 것이 분명한 곳에 그들을 잡이끌 수
는 없다. 곽모천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알고 있다. 성격까
지 파악하고 짜놓은 함정.
전언(傳言)은 분명하다.
교교를 살리고 싶으면 곽가장으로 오라는 것.
반여량은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을 한 듯 모든 이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중의 덫.
천라지망은 오로지 자신 한몸에 집중되었다.
동기감응으로 읽은 결과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른 산길은
다 비워 놓고 오로지 겸령 부근만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다.
반드시 금산에서 죽이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금산에서 죽지 않고 빠져 나간다 해도 그가 움직일 곳은 드넓
은 중원천지 어디에도 없었다. 곽가장으로 가야 한다. 교교를
납치했다는 것은 한한을 납치할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반여량은 식은땀이 촉촉이 배어나왔다.
혹시나 한한에게 피해가 있을까 싶어 철저히 변장하고 밀옥을
깼다. 그 후로 접촉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장주는 범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교교를 끌고 왔다.
기가 막히게 기민한 사람들이지 않은가.
이제야 비로소 조중이 가문의 멸겁 소식을 듣고도 힘없이 주저
앉은 까닭을 알 만했다.
곽가장.,. 상상한 것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이었다.
혼자 힘으로는 절대 역부족이다. 도움을 받아야 되는데...
반여량은 장주의 생각과 반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교교의 안
위가 염려되지만 서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완벽한 기회
를 만들어야 한다.
감여가들을 돌아보았다.
한결같이 혜지(慧智)가 가득한 사람들이다. 일만여 명의 감여
가들 중에서 고르고 골랐는지 체격도 든든하고 나이도 젊은 축
에 속한다.
하지만 곽가장 무인들을 상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이들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는 정보밖에 없다. 곽모천이 옥
순산에서 저지른 만행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으면 좋은데.
'사우맹으로 가야겠어. 실질적으로 힘이 되어 주겠지.'
그것도 힘들었다. 사우맹도 무림 공분을 의식해야만 한다. 더
군다나 지금 무림은 구원사를 불사른 일 때문에 들끓고 있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
을 부추겨 곽가장과 결전을 벌이게 하고 그 틈에 교교를 빼내
와야 한다.
밀옥과는 또 틀렸다.
호소봉왕 가심은 어찌된 일인지 밀옥에 대한 지도(地圖)를 가
지고 있었다. 외부 구조에서부터 죄수들을 가둬 놓은 뇌옥에
이르는 길까지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
'이곳에 갇혔다면 어떻게 탈출하겠어? 하루 종일 심심할 테니
묘안이나 짜내.'
호소봉왕 가심은 무엇 때문에 밀옥지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아무려면 어떤가. 곽가장 무인이 혈단에 습격받고, 혈단은 곽
가장 무인으로 변신하는 요지경 속이 아닌가.
교교가 갇힌 곳은 곽가장.
조력자(助力者) 없는 구출이란 꿈에 불과하리라.
호방, 정현, 상방, 귀계 분타주는 머리를 바짝 맞대고 숙의를
거듭했다.
항우장사도 견디지 못할 급류에 휘말렸으니 죽음은 불문가지였
다. 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천라지망, 그것은 시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거둘 수 없는 지옥의 망(網)이었다.
"물길 수색은 끝났소. 놈의 생사여부는 반반으로 보는 것이 옳
을 것이오."
분타주들은 귀계 분타주의 실수를 탓하지 않았다.
"놈은 아직 금산을 빠져 나가지 못했소."
귀계 분타주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다 잡은 월척을 눈앞에서 놓친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
큼 분통이 터졌다.
"날이 밝는 대로 망을 좁혀 갑시다. 놈은 빠져 나가지 못할 것
이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발견되겠지."
"언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립니까? 지금 당장 움직입시다."
귀계분타주가 이를 부드득 갈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세 겹이오. 세 겹이 훑어 나가는데 빠져나갈 구멍이 있겠소?"
"음...!"
"노옴...!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어."
다른 세 분타주는 귀계 분타주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다.
으르릉! 꺼엉...!
적막한 산이 맹수의 울음 소리에 놀라 화들짝 깨어났다.
겸령을 둥글게 에워싸고 산기슭부터 샅샅이 뒤져오는 일단의
무리들이 만든 걸작이었다.
왼손에는 횃불을, 오른손에는 병기를 들고 한 걸음씩 차분히
다가오는 모습은 질서정연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했다.
"없다. 가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좁다 싶은 동굴을 살펴본 무인이 말
했다.
그러자 잠시 걸음을 멈췄던 무인들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잠깐!"
행렬이 다시 멈췄다.
일갈을 토해낸 무인은 검과 횃불을 옆의 무인에게 건네 주고
등에서 활과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쉬익! 깨깽...!
날카로운 파공음과 여우의 처절한 울음 소리가 어우러졌다.
화살을 날린 무인은 횃불을 건네받아 동굴 안을 샅샅이 훑어보
았다. 그 동안 다른 무인들은 긴장을 풀지 않은 채 움직이고
있는 무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만약 변고
가 일어난다면 즉각 반응할 기세였다.
"없다. 가자."
똑같은 말이 나오자 무인들은 다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는 태도였다. 지나가는 길목에 풀뿌리 나
뭇가지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행동이었다.
천라지망을 펼친 무인들은 여산에서 반여량이 빠져 나간 방법
을 뼛속에 각인시킨 사람들이었다.
"금산에 있는 동물들의 씨를 말려도 좋다. 아무리 조그만 굴이
라도 샅샅이 뒤져라. 들쥐가 파놓은 굴까지 샅샅이..."
귀계 분타주가 한 말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곽가장의 천라지망은 목을 지키는 데서 효
력이 발휘되는데..."
안전한 곳에 숨어 있다고 자신하던 감여가들은 사색이 된 얼굴
로 조금씩 좁혀 오는 횃불 행렬을 바라보았다.
다가오는 속도로 보아서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무사히 넘길 것 같았다. 그러나 발각되는 것 또한 시간문
제였다.
"이보게, 분장을 하면 어떨까?"
누군가 답답한 나머지 말을 꺼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전과는 다르다. 분장을 한다고 속아넘
어갈 무인들이 아니었다. 이곳은 천라지망의 심처(深處)이니
까.
"지금 빠져 나기야 합니다."
"응? 지금 말인가?"
"날이 밝으면 움직이기가 더 곤란합니다. 내일 저녁까지 기다
렸다가는 포위망 세 겹이 열 겹으로 늘어날 겁니다."
반여량은 말을 하면서도 동기감응으로 파악한 탈출로와 횃불이
움직이는 방향을 유심히 살폈다.
"빠져 나갈 공산은 얼마나 되나?"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던 감여가들은 빠져 나가자는 소리를 듣
자 오히려 차분해졌다. 반여량이 어떻게 밀옥을 깼고, 여산에
펼쳐진 천라지망을 어떻게 뚫고 나왔는지 잘 아는 까닭이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죠."
"특별히 조심할 일은...?"
"발바닥을 조심하십시오. 썩은 나무 하나라도 밟아서는 안 됩
니다."
반여량은 자신있었다.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았고, 곽가장 무인들의
수준도 알았다. 동기감응이 어느 정도 소용되는지도 파악했다.
수림(樹林) 뒤에 숨어 있다가 번개같이 치달아 두어 명을 베어
낸 후 산 밑으로 치달린다면 그 다음은 아무리 신법이 빠른 자
라도 쫓아오지 못하리라. 산세를 이미 파악해 놨으니까. 그러
나 그것은 혼자 빠져 나갈 경우였다. 일행이 열 명으로 늘었으
므로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 이들이 비록 건장하고 수많
은 산을 오르락내리락한 사람들이지만 무인들이 펼치는 신법을
능가할 수는 없다.
'병법에 이르기를 고야전다화고(故夜戰多火鼓)라 했다. 야전
(夜戰)에서는 불과 북을 활용하라... 불과 북...'
곽가장 무인들의 이목을 잠깐만 돌리면 된다. 불은 눈을 북은
귀를 현혹시킬 것이다.
"잘 들어요.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
다."
감여가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가까이 모여들었다.
쏴아아아...!
맑은 물줄기가 허옇게 드러난 바위들을 씻어내리며 흘렀다. 가
느다란 은사(銀絲)를 토해 내다가는 다시 소(沼)를 만들고, 고
였다 싶은 물은 다시 흘러내렸다.
반여량은 바위가 널찍하게 드러난 부분에서 방향을 틀어 산으
로 올라갔다. 잡목이 너무 우거져 짐승들조차 다니지 않는 산
등성이였다.
우직! 뚝...!
썩은 가지가 부러지고, 돌맹이가 발길에 채이고...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소리는 바람소리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그만한
소리면 곽가장 무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횃불이 잠시 일렁거렸다.
무인들 중 일부가 동요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뿐, 횃불은
제자리를 지키면서 이제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다가왔다. 어차
피 울 안에 갇힌 짐승이니 천천히 사냥하자는 심산이리라.
'됐어.'
신경을 건드렸으면 됐다.
곽가장 무인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자신이 움직이는 곳
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으리라. 이제 멧돼지나 너구리
같은 산짐승이 아니라는 것만 확신시켜 주면 된다.
발 밑에서 풀잎을 뜯어 허공에 날려 보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정확히 탐지하려는 행동이었다.
산에서는 굳이 방향을 논할게 못된다. 산곡풍(山谷風)이 불기
때문이다. 낮에는 골짜기에서 산정(山頂)으로, 밤에는 산정에
서 골짜기로 바람이 분다. 그러나 산곡풍이 어느 정도의 세기
인지, 다른 풍향이 섞이지 않았는지 정확히 알아야 산불을 놓
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제멋대로 미쳐 날뛰는 불길을 감당
할수 없으리라.
'남서풍(南西風)...'
불길이 가는 쪽은 감여가들이 숨어 있는 방향이었다. 자칫 잘
못하다가는 감여가들을 불에 태워 죽이는 결과가 되리라. 하지
만 반여량은 감여가들을 믿었다. 천지를 집 삼아 떠도는 사람
들이니 산불을 피하는 요령쯤은 지녔으리라.
품에서 화섭자를 꺼내 불을 당겼다.
화왁...!
빨간 불꽃이 어둠을 밀쳐내며 피어올랐다.
"적이닷!"
누군가 힘껏 내지른 고함이 들려왔다.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리 없다. 과연 그렇다. 곽가장 무인들은
천라지망을 급속히 좁혀왔다.
인화분(引火粉)을 꺼내 바닥에 흩뿌리고 불을 지피자, 더운 날
씨에 바싹 타버린 수림은 한지에 먹물 배어들듯 불길을 빨아당
겼다.
타타탁...!
"놈이닷! 높이 불을 질렀다!"
불길에 환히 드러난 육신을 보지 못할 리 없다.
곽가장 무인들은 황급히 신법을 펼쳐 날아왔다.
"모두 제자리를 지켯! 움직이지 마라!"
누군가 내지른 고함소리가 쩌렁 산곡을 울렸지만 이미 움직이
기 시작한 곽가장 무인들은 메뚜기 날아들듯 뛰쳐올랐다.
'무너졌어. 천라지망. 이제 내 몸 하나만 피하면 돼.'
파앗!
반여량은 신법을 펼쳐 감여가들이 숨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
로 뛰쳐 나갔다. 산정으로 향하는 방향이라 불길을 피하려는
의도로 비춰지지만 기실은 금산의 생기가 가득 고인 산등성이
였다. 애초에 생각했던 방향과는 정반대로 뛰쳐 나간 것이다.
산 전체가 화염지옥(火焰地獄)처럼 활활 타들어갔다.
곽가장 무인들은 두세 명만 불길을 건너왔을 뿐 나머지는 산기
슭으로 도로 내려가고 말았다. 그렇다고 감여가들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감여가들은 반여량이
일러준 대로 신속하게 움직여 금산을 벗어났다.
'이 죄를 무엇으로 갚나... 천지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린
죄...'
타닥거리며 타들어가는 소리가 수목들의 비명 소리처럼 들려
못내 가슴 아팠다.
벌써 두 번째다. 두 번이나 산에 불을 놓았다. 사부님은 자연
의 기운을 북돋워 주라고 하였거늘, 자신은 자연을 죽이는 일
만 되풀이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러한 방법이 아니면 살
길이 없는 것을.
반여량은 우울한 기분으로 사검을 뽑아들었다.
곽가장 무인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그들은 산기슭을 에워싸고 불길이 잡히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
리고 다시 천라지망을 펼쳐 오겠지. 그때는 하늘을 나는 신선
이라 할지라도 벗어날 방도가 없다. 불길이 산을 훑고 있을 때
빠져 나가야한다.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그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불길은 캄캄한 산곡을 대낮처럼 환히 밝혀 주었다.
산 아래는 아수라장이지만 정상 부근은 아직도 푸르른 초목들
이 싱그러움을 내뿜고 있다. 그 사이에서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감정을 극히 억제한 살기... 후훗! 나도 이제는 제법 무인 흉
내를 낼 줄 아는군. 그대들 마음이 어느 정도나 정제되어 있는
지 읽을 수 있으니 말야. 뭐라고 불러야 하나? 혈단? 아니면
곽가장?"
불길이 크게 번지기 전, 몸을 날려온 무인들이었다.
파앗!
한 줄기 검은 선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왔다.
"검공은 훌륭한데 거리가 너무 멀었어."
쉬릭!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는 줄기가 휘둘러지고, 공격해 오던 무인
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것도 잠시, 곧 육중한 몸뚱이는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투월채법을 연구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지. 바로 능공십자
학구의 검법과 비슷하다는 거야. 그것은 모두 삼혼검법에 뿌리
를 두어서 그렇지. 너희들이 익힌 무공은 삼혼검법과는 완전히
상극이야. 문제는 내공수위인데... 동귀어진으로 부족한 부분
을 메웠지. 무공은 혈영일검이나 이하극륜에게 배웠을 테고...
어디인가? 무공을 익힌 곳이?"
파앗!
다시 한 줄기 검은 선이 날아왔다.
노리는 곳은 지겹게도 사대요혈이었다. 이들은 마치 한곳 아니
면 공격할 곳이 없다는 듯 죽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사대요혈
만 공격해왔다. 동귀어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까지 박혀
버린 무인들이었다.
반여량은 한 발 물러서며 다시 사검을 휘둘렀다.
곽가장 무인들은 쾌.환.중을 삼혼으로 알고 있다. 남저명은 상
단전.중단전.하단전의 통합을 삼혼이라고 말했다.
반여량은 투월채법을 교정(矯正)하면서 남저명이 말한 대주천
을 염두에 두었다. 그렇기에 장주가 익힌 삼혼검법과 반여량이
익힌 투월채법은 맥을 같이 한다.
혈단 무인들은 쾌.환.중 삼혼을 파해(破解)하는 데 주 목적을
둔다. 그런 검법이니 반여량에게 통할 리 없었다.
혈단 무인들과 최초로 검을 섞어 본 것은 겸령에서였다. 밀옥
무인들은 순수한 삼혼검법을 사용하는 데 반해 그들은 사대요
혈만 노리는 극단적인 무공을 전개했다.
지금 이곳에는 상극의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섞여 있는 것이
다. 만약 무림 명숙이 옆에 있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고개를 갸우뚱 거렸으리라. 워낙 검법이 틀리니까.
쿠웅!
공격하던 무인은 잠시 주춤하더니 거칠게 무너졌다.
'아직 한 명이 더 남았다.'
"지켜봤으니 알겠지만 상대가 되지 않아. 물론 포기하지 않겠
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내가 궁금한 것이 바로 그
점이야. 죽으면서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도대체 어디서 무공을 익혔길래 그런
독심(毒心)을 유지하지?"
파앗!
여지없이 검이 날아왔다. 단지 몸을 옆으로 약간 틀었을 뿐인
데 틈을 잡고 공격하는 것, 그것은 혈단 무인을 따를 집단이
없으리라. 그런 자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쉬릭!
날카로운 파공음이 터지며 공격자는 무너졌다.
이번에는 반여량도 약간 손해를 보았다. 귀밑머리가 살짝 베어
져 밤바람에 흩날렸다. 약간의 틈을 보여 준 것, 그것으로 이
만한 손해라면... 조중이나 학구는 최선을 다했다. 혈단 무인
들은 독심만큼이나 손속도 날카로우니까.
반여량은 죽은 무인에게 다가가 입을 벌려 보았다. 그리고,
"이런!"
탄식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혓바닥이 잘렸다. 뿐만 아니라 소리를 낼 수 있는 성대(聲帶)
가 시커멓게 타버려 독성이 강한 극약을 복용한 것 같았다. 그
러니 작은 신음소리조차 흘리지 못할 수밖에.
'이게 정말 곽가장주가 한 행동이란 말인가!'
반여량은 곽소연을 떠올렸다.
그녀의 해맑고 싱그러운 웃음 속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상상하
기는 쉬웠다.
헌앙한 풍신(風神)에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사람.
누구라도 곽소연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단 두 번
밖에 보지 않았지만 곽모천의 풍모는 더없이 광명정대했다. 그
런 사람이 이런 패악한 짓을 저질렀다니.
'혈단과 곽가장 무인들이 뒤섞여 있다. 이것은 혈단을 양성화
하겠다는 뜻. 하지만 무공이 너무 다르다. 검을 집은 무인이라
면 원류(原流)가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낼 텐데."
반여량은 몸을 일으켜 겸령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 * *
하후상(夏候尙)은 초라한 몰골로 부복하고 있는 열 명의 사내
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총수께서는 기어이 사우맹으로 가셨단 말인가?"
"네."
"으음...! 그분의 심중을 헤아릴 수 없네그려."
가슴까지 늘어진 하얀 수염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었다.
백미(白眉), 백발(白髮), 백염(白鹽) 덕분에 선학(仙鶴)이라는
작호를 얻었지만, 실제 나이는 산귀보다 훨씬 젊어 육십대 초
반이었다.
산귀와 마찬가지로 감여에만 평생을 쏟아온 인생.
감여가들이 무인들과 접촉하는 면에서는 단호히 반대하는 보수
적인 성향이었고, 원방감여에 동기감응을 접목하자는 부문에서
는 개방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산귀가 떠나면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나 같은 폐물은 쓸모가 없는데 동행을 해달라는군."
"무림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동기감응 감여가... 그 젊은
이의 능력은 놀라웠어. 허허! 칠감로가 보내온 서찰도 한결같
이 칭찬 일색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미 승낙했네."
"네에?"
"이번 길은 심상치 않아. 복수치고는 너무 어려운 복수야. 그
리고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무림인들과는 항상 일정한 거
리를 두어야 하네. 가까이 다가섰다가는 죽음뿐이지. 그런데
이번에는 동행이야."
"안 됩니다. 가시면..."
"뒷일을 부탁하네. 반여량이라는 친구와 동행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지. 혹여, 심득(心得)을 얻으면 서신을 보내 주겠네.
아! 정보가 필요한 경우도 생길 거야. 나는 당연히 요청하겠지
만... 너무 깊숙이 개입한다 생각되면 답을 안 줘도 좋네. 자
네 원망은 하지 않으이. 나보다는 원방파 전체를 생각하란 말
일세."
"총수!"
"오랜 숙원이었지 않나. 안철주를 그렇게 생매장시킨 후 얼마
나 가슴아파 했나? 중원 감여계는 동기감응을 받아들여야 해.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위험부담이 너무 큽니다."
"이 늙은 목숨 하나 버려서 감여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면 오죽 좋은가."
하후상은 산귀가 보내온 서신을 받은 상태였다. 간단히 '무
(無)' 한 자만 달랑 적힌 서신. 원방감여에 동기감응을 접목시
킬 수 없다는 서신이었다. 그렇다면 산귀는 개죽음을 당하는
것이지 않은가.
하후상은 어떻게 하든지 총수를 살리고 싶었다.
곽가장 정대의 정보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감여가들이 취합하
는 정보 역시 그에 못지않다. 그 동안 취합한 정보에 의하면
곽가장 내부에 문제가 일어났음이 틀림없다. 곽요연, 곽무연을
필두로 신계각 전원이 이탈했고, 비수당 등 일부 세력이 전멸
하여 기세가 반으로 꺾인 상태였다. 그렇지만 무서운 살공(殺
功)을 전개하던 무인들이 분타에 합류하여 빈 공간을 보충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그들이 누구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니.
하후상이 판단하기에 사우맹과 곽가장이 부딪친다면 곽가장의
완승(完勝)이었다.
산귀는 원방파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스스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혈단에 관하여 알고 있기에, 곽가장 내
부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기에, 그리고 곽가장은 그런 사람을
살려 둔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사단은 벌써 발생했다.
후지가 없어졌으니까. 그리고 혈영일검으로부터 어떠한 움직임
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았으니까.
"추풍 반여량을 만났습니다."
"응?"
비로소 하후상은 찌푸렸던 안색을 폈다.
"밀옥을 깬 자... 반여량이 맞는가?"
"맞았습니다. 바로 그자였습니다."
"으음...! 허허! 그것 참...! 어떻게 일 년도 안 되는 기간에
절정무공을 익힐 수 있을까?"
"귀계 분타 무인들에게 걸려 익사(溺死) 직전에 있는 것을 간
신히 구출했습니다."
"목숨의 빚을 남겼단 말인가?"
"서로 상계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죠. 총수님의 목숨을 구해 달
라고 부탁했으니까요."
"뭐라고 하던가?"
"승낙했습니다. 한데 묘한 조건을 내걸더군요. 옥순산 전투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 달라고."
"뭣이!"
하후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란 까닭이다. 생각
하기도 싫은 옥순산 전투... 산귀가 원방감여가들에게 일체 무
림에 간여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 것은 원방파 정보력이 곽가
장에 뒤져서가 아니라 곽가장의 행동에 치가 떨려서이지 않은
가.
"부총수님, 왜...?"
"모두 물러가서 나전식(羅傳式)을 준비해라. 자네만 남고."
하후상은 다른 감여가들이 모두 물러나고 눈이 큰 감여가 정명
(鄭 )만 남자 극히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정명, 총수를 위해 죽어 줄 수 있겠는가? 동반자가 필요할 거
야. 아직 감여를 해보지 않은 풋내기로."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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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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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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