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돌아 가신 아버지가 많이 떠오릅니다.자식들에게 고생 시키지 않으시고,너무나 쉽게 떠나셔서,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밤에는 집에서,아버지 생각이 자꾸 납니다.그러다..........문득 원균장군에 대한 글을 적어 보고 싶어지네요.
조선시대,최고 용장중의 한명인 원균 장군,,,,그러나 원균에 대한 기사나 논조는 대부분이 비판적이거나,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대우를 받는 원균장군의 진실을 말해 보고 싶습니다.조선실록을 근거로 주장하는 내용이니,참고 바랍니다.조선 실록이란 아무렇게나 써서 올려진 것이 아니라,사실의 유무를 따지고 따져서,누가 보더라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인 결과를 적어 놓은 책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조선은 왜군의 전쟁준비를 어느 정도 감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선조는 대신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실력있는 이순신을 파격적인 인사이동을 시켜준다.(경찰서장에서 군사령관이라면,대충 비유가 맞을 것입니다.객관적인 현실에서 대신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선조는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전라좌수사에 이순신을 임명하면서,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지시한다.이것이 임란이
일어나기 1년전이다.이순신은 만족스럽지 못한 지원속에서,일년동안 나름대로 배들을 건조하고 수군을 훈련시킬 수 있었다.
상황이 더 안좋은 쪽으로 흐르자,,선조는 이번에는 경상우수사에 원균을 긴급 투입시킵니다.이것이 임란이 일어나기 3개월
전입니다.원균이 부임하고 배들을 건조하고,수군을 훈련시킬 시간이 많이 부족했던 것이 ,이순신과 원균의 차이입니다.
결국,,,임진년(1592),4월13일에 부산앞바다를 통해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준비가 부족한 부산성과 동래성을 쉽게 점령하고,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를 마련합니다.이때,왜군의 수는 거의 20만명이었고,대부분의 농사나 짓던 우리군과는 다르게,
전투의 경험이 풍부한 전사들이었습니다.여기에 우리는 없는 조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이당시 왜군은 신군이라 부를만큼
조선군이나 민간인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군사들은 일본군과 싸우려하기보다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 하는 것이 현실
이었습니다..
포항쪽에 있었던,원균은 승승장구하는 왜군의 육지 진출은 중과부적으로 막기에는 부족해서,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그러나,사리분별이 정확한 이순신은 응하지 않습니다.다르게 말하면,이순신 또한 겁먹고 있었던 거지요.
기다리다 지쳐서,원균의 경상우수영의 수군은 단독으로 전선 10여척을 이끌고,50여척의 왜군과 울산,포항쪽의 바다에서
첫 해전을 벌입니다......자신감이 없었던 수군은 도망가다 죽으나,싸우다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원균의 매서운
명령에 의해 용감하게 왜군과 맞섭니다.우리 수군의 전략은 무조건 정면승부였습니다.수적열세에도 불구하고,분위기가 약간
조선수군의 우세로 변하게 됩니다.원균은 왜군이 조총은 있으나,화포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해서,
더욱 맹렬히 왜선들을 공격합니다..전의를 상실한 왜군은 후퇴하게 되고,뒤쫒던 수군은 왜군의 배를 부딪쳐서,왜선을
침몰시킵니다.여기서,원균은 조선의 전선이 왜선보다 단단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부딪치면 왜선은 크게 손상을 입고,바다에
가라 앉는 것을 직접 본 원균과 수군은 훗날 이순신의 수군에게 이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합니다.그래서,임진왜란 때의 조선 수군의 공격은 화포공격과 직접 부딪쳐서,격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원균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첫 승장이었고,중요한 왜군의 정보를 조선군에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도 했고,그래서,선조는
원균의 이런 공을 아주 높게 본 것입니다.한 번의 승전으로 사기가 오른 경상우수군은 또다시 왜선들을 격파합니다.
이것들이 조선군에 알려지게 되고,그래서 조선군은 해 볼만 하다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이런 중요한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원균의 업적은 너무나 왜곡만 되었지,,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안타깝습니다.
이순신의 전라수군과 원균의 경상수군이 연합해서,(사실,원균의 경상수군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전선이나 수군의 수가 전라수군에 비해 현저히 부족했다.)..왜군을 수도 없이 격파한다.혁혁한 공을 세운 두 장수는(사실,이순신이 더 많이 전과를 올린다),,
선조에게 인정을 받아 육지에서 성과를 올린 권율과 함께..1등공신에 봉해진다.
저는 여기서,원균에 대한 공과를 더 많이 적을 수 있으나,여러 가지 사정으로 하나만 지적하고 마치려 합니다.
원균이 칠량해전으로 조선수군을 다 전멸시켰다고 알고 있으나,사실은 이렇습니다.
임진왜란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전쟁이 장기화 됩니다.(정유년에 또다시 왜군 십만이상이 투입됩니다)..
왜군은 이제 화포도 가지게 되었고,배도 더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예전의 일본수군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왜군은 부산을 기점으로 아주 정착을 하려 합니다.이런 꼴을 보다 못해 원균은 중대 전략을 선조에게
올립니다.권율장군의 육군과 이순신의 수군을 동시에 출전시켜야 승산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땅을 왜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왜군이 조선수군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감시하는 상황에서는 수군의 혼자 힘으로는
부산포를 공격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이 전략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 선조는 권율에게 출전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권율은 선조의 명을 받들지 않습니다.이유는 조선육군이 아직 전력에서 열세에 있고,열세를 만해 하려면,수군이 먼저
적을 공격해서,적에게 전력손실을 입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그렇지 않고,육군이 진격하다가,만에 하나라도 왜군에 전멸을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면,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이렇게 옥신각신 하다가 시간은 흐르고,파워게임에서
밀린 수사 이순신과 원균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합니다.이순신은 끝까지 조정과 육군 총사령관 권율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왜냐하면,듣고 출전하는 순간 수군은 전멸할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원균또한 자신이 늘 강조하고,주장했던 육군,수군 연합공격이 아니면,안된다는 것을 알았지만,선조의 어명이 있었기에 어명을 받들었던 거 뿐입니다.즉,이순신은 원칙을 중요시했고,
원균은 대의를 중요시 했습니다.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직위해제되었고,원균은 수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많은 수군장교들이 조정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그 중에서 전라수군의 대부분은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악조건에서 출전을 감행한 원균은 안으로는 군기의 문란과 밖으로는 왜군의 준비된 전투대비에 처하게 됩니다.
해안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수군의 움직임을 즉각즉각 보고해,조선수군의 약점을 간파한 후,,,,왜선 600척을 동원해서,100척의
수군을 맞이한다.조선 수군은 왜선의 위용을 보고,전의를 상실,,,,일부는 도망치고,(대부분이 전라수군이다.)...대부분은 전력열세
속에서 전멸을 당한다.원균과 원균의 아들은 이 전투에서 준비된 왜군에 전사하게 된다(물론 후퇴하다,남해의 섬에서 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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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수군의 대패와 원균부자의 전사소식을 듣고,한없이 자신을 원망한다..원균은 충신이로다.
짐의 명령을 받들다 죽은 원균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원균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내 잘못이다.
대역죄인 이순신을 다시 원대 복귀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 칠량해전의 조선수군 대패의 결과이다.
즉,조정과 군수뇌부가 잘못된 오판으로 조선 수군에 치명타를 안겼다는 것이 판명되어졌다는 것이다.
원균이 무리해서,못나서,조선수군이 대패한 것이 아니고,판을 잘못 읽은 군수뇌부에 있다는 것이,조선실록에
기록되어졌다는 것이다.이순신도 훌륭하지만,원균의 업적이 왜곡 되어서는 안되기에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 글을 적어 봅니다.
첫댓글 흔히들 역사적 사실이라고 알려진 많은 이야기들 중에는 특정인의 특별한 목적의식으로 특별하게 왜곡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적지 않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영웅만들기'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면 정당한 평가는 커녕 오히려 억울한 대접을 받는 희생자들이 종종 생기는 거 같습니다. --
자유가 넘치면 방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