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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
사우맹의 총단은 호광성(湖廣城) 대야성(大冶城)에 위치했다.
팔십여 리에 걸쳐 넓게 펼쳐진 대야호(大冶湖) 가에 위치한 호
반(湖畔) 도읍(都邑).
반여량은 길가에 서서 물국수 한 그릇을 사먹으며 귀를 기울였
다.
"그놈이 금산에 또 불을 싸질렀다네."
"죽일 놈... 불에 무슨 원한은 진 것도 아니고..."
"곽가장 무인들이 쫓아오니까 급한 김에 그 짓을 한모양이야."
"구원사를 불태운 털복숭이가 불에 타죽었다네그려."
"하하! 남들은 벌써 알고 있어, 이 사람아."
"그런가! 그럼 진작 말해 주지."
"이런! 알고 있을 줄 알았지."
"장주의 두 딸이 밀옥에 감히 있었다지?"
"에구. 오죽했으면 패주 같으신 분이 그런 조처를 취했을까."
"그 사연이란 계집은 미쳤으니 그런다지만 막내는 양순하다던
데."
"패주가 자식 농사는 잘못 지었어. 쯧쯧! 패주 같으신 분에게
그런 자식이 나오다니. 노후는 편안히 보내실 줄 알았는데 말
야."
"그러게나 말일세. 뭐니뭐니 해도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지.
에잉!"
"둘째와 넷째가 뛰쳐나왔다며?"
"미친년들."
"휴우! 권력이 뭔지. 아, 아무리 권력에 눈이 뒤집혀도 그렇
지. 어떻게 아비에게 검을 들이대나? 배운 것들이 더 지랄한다
니까."
"셋째도 금제 당해 있다네. 패주님은 참 속도 좋지. 나 같으면
그런 년들은 그냥 한 주먹에..."
"그게 속이 좋아서 그러시겠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쩔
수 없이 그러시는 거지."
"그런 년들에게 동조하는 놈들은 또 뭐야?"
"쉿! 그게 바로 날고 긴다는 신계각이라네. 목 조심해, 말조심
하고."
"아차!"
놀라운 말들이었다.
자신이 금산에서 불에 타 죽었다는 말은 원방 감여가들이 퍼뜨
린 헛소문일 게다. 이것이었다. 사우맹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빙그레 웃던 웃음의 의미는 너무 간단했
다.
물론 곽가장은 믿지 않으리라. 산정에서 혈단 무인 세 명의 시
신을 발견했다면 틀림없이 뒤쫓아오리라. 하지만 소문이 사실
이라면... 곽가장에는 정보망이 존재하지 않는다.
곽요연과 곽무연이 곽가장을 나왔다는 말은 놀라웠다. 곽사연
에게 부친을 죽여 달라는 청부를 받은 터라 더더욱 흘려들을
수 없었다.
다섯 딸, 그녀들은 아버지의 과오(過午)를 알고 있음이 틀림없
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부친에게 검을 들이댈 수 있단 말인가.
정의(正義)를 내세워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반여량에게는 실(實)보다 득(得)이 더 많았다.
사우맹과 신계각을 연합시킨다면 정말 곽가장과 한 판 싸워 볼
만한 세력이 된다. 백도와 흑도라는 전혀 판이한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반여량은 국수 한 그릇을 다 먹자, 마땅히 할 일이 없어 성내
를 어슬렁거렸다.
사우맹의 본거지는 극비에 속하는지라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헛
수고에 불과할 뿐이다.
다행히 원방파의 이목은 강남무림 곳곳에 파고들었고, 사우맹
의 위치도 찾아냈다. 그렇다고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정
도무림에 고변하면 몰락시키는 것이야 시간문제이겠지만 만약
생존자가 생긴다면 뒷감당은 오로지 원방파 혼자서 도맡아야
한다.
원방과는 그런 모험을 하지 않았다.
대야성에 오기까지 반여량은 다섯 번의 접선을 가졌다.
'이제야 수인사를 나누게 되는군. 내 이름은 정명이라 한다.
앞으로 내가 연락을 전달해 주겠다.'
그는 반여량이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어 찾아왔다. 객사에
투숙하면 객사로, 다루(茶樓)에서 차를 마시고 있으면 다루로,
야숙(野宿)을 하고 있으면 야숙하는 장소로.
푸른 물결이 찰랑이는 호반에 다다르자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
고 끝없이 펼쳐진 호면을 바라보았다.
지나기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돌아보았다.
반여량의 몰골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를 연상시켰다. 입고 있
는 무명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제 색깔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머리는 새끼로 대충 묶었고, 얼마 동안이나 머리
를 감지 않았는지 하얀 서까래가 득실거렸다.
손톱 밑에는 때가 잔뜩 끼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은 울퉁불
퉁하고 시커매 땅 색깔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수염은 달지 않았다. 햇볕에 그을린 건장한 얼굴 모습 그대로
였다.
"에잉! 거지새끼도 유람을 다니나?"
"쉬잇! 이보게 말조심하게. 혹 개방사람이면 어쩌려고 그러
나?"
"이 사람아! 개방도가 강남에 내려오는 것 봤어?"
"하기는... 정말 요즘 거지들은 배가 불렀다니까."
호반은 선남선녀(善男善女)가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그들 중 절반은 대야성 사람이지만 절반은 유람온 사람이기도
했다.
'연락올 때가 됐는데...'
팔을 포개 머리를 받치고 벌렁 드러누웠다.
거지로 변장하면 행동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눕고 싶을 때 눕
고, 먹고 싶을 때 먹고... 특히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어서 좋
았다.
그때였다.
"비켯! 이 썩을 놈들아! 그래, 너희들은 잘났다. 밤에는 힘도
못쓰는 것들이 뻔지르하게 차려입고는... 꿀꺽! 꿀꺽! 캬아!
술맛 좋다. 누구 나랑 잘 놈 없어? 오늘은 기분 좋아서 공짜로
준다."
유람나온 사람들은 썰물처럼 갈라서며 길을 열어 주었다.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잔뜩 취한 노기(老妓)였다. 등에 메어져
있는 돗자리가 그녀의 침상이었다. 나이는 사십줄에 들어선 듯
하고, 몸은 잔뜩 살이 쪘으며, 얼굴은 사내처럼 우락부락했다.
젊었을 적에도 그리 환영받지 못했을 것 같은 여인.
사람들은 혹여 그녀의 주정을 받게 될까봐 부리나케 물러섰다.
노기의 눈은 자연 벌렁 누워 있는 반여량에게 향했고, 마침 무
슨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눈과 마주쳤다.
"히힛! 그려. 저놈이여. 오늘은 저놈과 힘 좀 써보자."
노기는 몹시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한걸음씩 다가왔다.
순간, 반여량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노기의 걸음걸이... 취한 걸음이 아니다. 취한 척하고 있지만
언제 무슨 공격을 받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몸을 유지한다. 무
인이다. 그것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혈단인가? 혈단에는 여자가 없는데...'
암암리에 공력을 운집시켰다. 살며시 몸을 일으켜 언제라도 퉁
겨낼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러면서 인당을 열고 동기감응을
펼쳤다. 노기가 누구이든 간에 투지를 말살시켜 놔야 한다. 적
이라면 움찔 놀라 스스로 물러설 테고, 아군이라면 계속 다가
오리라.
고오오오...!
노기는 움찔 놀란 듯했다.
누구나 그렇다. 동기감응을 접하면 제일 먼저 애초의 마음과는
또 다른 마음을 발견하게 되고 당황한다. 그것이 처음 목적과
반대되는 경우는 더욱 혼란을 겪게 된다. 반여량이 동기감응을
펼쳤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마음 속어서 일어나는 자
신의 느낌이기에.
그녀는 술병을 힘없이 떨어뜨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곧 다시 취한 모습으로 어기적거리며 다가왔다.
"히힛! 네 놈이야. 오늘을 네 놈하고 땀을 흘려야겠다. 히힛!"
노기는 거침없이 반여량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반여량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호면을 바라보았다.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원방파에서 왔다. 사우맹으로 안내하마. 조용히 따라와라.'
사내 음성이었다.
여장남자(女裝男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 또한 분장에는 일가견 있다고
자부하던 몸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 사내의 분장술과는 비교조
차 할 수 없었다.
반여량은 무공을 연마하는 틈틈이 교교가 수놓던 내화호를 떠
올렸다. 극히 섬세한 손놀림이 있어야 가능한 내화호 자수. 조
그만 옥병에 들어갈 만한 헝겊이래 봐야 손가락 마디 하나만도
못하다. 그만한 것에 폭포를 수놓고, 산을 집어넣으려면 얼마
나 눈과 손이 예민해야 하는가.
교교의 손놀림을 떠올렸다.
투월채법에 그만한 정교함을 가미한다면...
그 생각은 생각으로 그치고 말았다. 동기감응으로 교정한 투월
채법은 흠잡을 데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골교(骨膠)와 분(粉)과 돼지털만
있으면 어떠한 모습으로도 변화할 수 있으니까. 효과는 대단해
서 천하에 이목이 널려 있다는 곽가장 무인들도 종적을 잡지
못했다.
그런데 이자는...
"히힛!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할 수 없어. 오늘은 공짜
로 놀아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마."
영락없는 여인 음성이었다.
반여량은 새삼스럽게 노기를 바라보았다. 거칠어 보이지만 분
명히 여인이다. 팔뚝도 우람하지만 여인다운 부드러움을 가지
고 있다. 특히 콧수염이나 턱수염은 인위적으로 깎아 버리더라
도 자국이 남는다. 그러나 여인은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어
깎은 흔적이 없다.
'이거야 원...'
방금 전에 들은 사내 음성만 아니라면 도저히 여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퇴기(退妓)에 거지라. 하하!
분수들을 아는군그래."
"이 사람아, 그러다가 자네와 자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응? 설마..."
농을 주고받던 사람들은 노기가 씩 웃으며 돌아보자 꽁지 빠진
강아지처럼 줄달음질 쳤다.
반여량은 침상에 누워 분장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어차
피 원방파 감여가가 소식을 전해 주기 전에는 움직일 곳이 없
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가 막힌단 말야. 그만한 분장술에 무공을
익혔다? 만약 이런 자가 적이라면... 특급 살수다. 원방파는
무인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감여와 무공? 어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원방파 감여가가 살
수비기를 익혔다니. 한 사람만 보고 단정짓기는 일렀지만 원방
파에도 알지 못할 풍운(風雲)이 감도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반여량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은 정명이었다. 그런
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다. 정명에게 무슨 변괴가 발생했거
나, 원방파의 내부에 다른 사정이 생겼으리라.
후자일 것이다. 무인이 나타난 것으로 봐서는.
반여량은 하루 종일 곡기라고는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배가 고
프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들은 복잡하기만 했
다. 그때,
삐이걱...!
방문이 살며시 열리며 시원한 바깥 바람이 몰아쳐 들었다.
"반여량인가?"
속삭이듯이 다정다감한 음성.
"그렇소만...?"
반여량은 특유의 우수 어린, 그러면서도 무심한 눈을 들어 상
대를 바라보았다.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은 고수였다.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정
기(精氣)를 지녔다. 그러나 허리에 찬 검을 뽑는 순간, 정기는
폭풍으로 바뀌게 되리라.
"누구시오?"
"한때는 천지유불이라 불렸네만... 들어 보았나?"
평안객사(平安客舍)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천지유불이었다.
그는 사우맹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반여량보다 이틀 앞서 대야
성에 도착했다. 그리고 반여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우선 들은 바대로 반여량이 놀라운 무공과 지략을 지녔는지 알
아보고 싶었다.
자신을 꺾은 곽모천과 상대할 자격이 있는가.
천지유불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상대할 사람은 오직
자신이어야 한다. 그건 쾌방백 검초를 믿는 자부심이기도 했
다.
만약 그에게 실망을 한다면... 반여량을 대야성에서 따돌려 버
리고 산귀 총수를 자신의 힘으로 보호할 생각이었다.
하후상 부총수의 부탁과는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하후
상은 감여가이지 않은가. 피가 튀는 무림세계를 그가 어찌 알
겠는가. 생존과 도태가 너무도 분명한 세계를.
하후상에게는 고분고분히 대답했지만 그가 판단하기로 이런 일
은 속전속결(速戰速決)이 최우선이었다. 자칫 사단이 벌어진
후에는 누구도 발을 빼지 못한다.
그 역시 사우맹과 곽가장이 싸우는 것에는 찬동했다.
하부세력이 무너진 후라면 곽모천과 승부를 가늠할 수 있겠기
에, 하지만 복수와 총수 중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면 서슴없이
총수를 택하리라. 죽는 순간까지 은원(恩怨)을 분명히 할 생각
이니까.
반여량의 능력은 놀라웠다.
서른두 명의 수하들이 암중으로 뒤따랐음에 불구하고, 번번히
종적을 잃어버렸다. 만약 그와 정명 사이에 약조한 밀마가 없
었다면 엉뚱한 곳을 뒤졌을 터였다.
밀옥을 깬 것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인증한 것이다.
무공은 약해 보였다. 살기를 조금만 드러내도 기민하게 반응했
다.
진정한 강자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무공이 고절해지면 웬만한
살기쯤은 무시할 만한 배짱이 생긴다.
강호 초출의 풋내기가 아니면 애당초 무공이 빈약한자.
천지유불은 그렇게 단정했다. 당연히 반여량을 인정하지 않았
다. 소문이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단 한 가지, 수하들
을 따돌린 능력으로 봐서 원한다면 동참시키겠다는 생각이었
다.
"사우맹으로 가는 목적을 듣고 싶다."
"내가 왜 말해야 하는지..."
"산귀 총수를 구하는 목적 이외의 것이라면 돕고 싶지 않으니
까."
"도움은 필요없습니다. 더욱이 정체조차 모르는 사람의 도움
은..."
"교교를 구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산귀 총수를 구하는 것
이 우선인가?"
"답답한 생각이군요. 흑(黑)이 아니면 백(白)이라는 식입니
까?"
"정명은 원방파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의 목적은 산
귀 어른을 원방파로 모셔 오는 것. 하지만 어르신이 사우맹으
로 걸어가신 이상 그 뒤는 우리가 맡는다."
반여량은 누웠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놀라운 말이었다. 원방파에서 무인을 양성하고 있었다니. 산귀
나 정명은 원방파의 뼈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
들이 무공을 모르는데.
"잘 됐군요. 무거운 짐을 덜었으니."
"제안을 하겠다. 산귀 어르신을 모셔 오는 데 일조를 하든가,
아니면 이 시점에서 인연을 끊는 것."
"산귀님을 모셔 오자는 말은 사우맹에서 빼오자는 말입니까?"
"그렇다."
"죄송하군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반여량은 천지유불이 심각한 갈등에 번민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의 뇌력이 파동치고 있으니까. 그것은 자신의 처리 문제였
다. 죽일 것인가, 살려 둘 것인가.
이윽고 요동치던 뇌력이 안정을 되찾았다.
'휴후!'
반여량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궁산에서 혈갈류와 싸우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천지유
불이라는 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광경을 떠올리게 만들만큼
강자였다. 혈갈류, 그에 버금가는.
"우리는 너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금산에서는 목숨을 살려
주었고, 구원사를 불태운 오명(汚名)도 제거해 주었다. 이름과
신분을 숨기면 한평생 편안히 살 수 있을 게다. 내가 무슨 말
을 하는지 이해하리라 믿는다."
"정명과의 약조는 깨진 겁니까?"
"그렇다. 어차피 그는 죽었으니까."
"뭐요?"
"곽가장은 눈이 밝다. 네 놈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발각된
이상 살 길이 없지."
"보고만 있었습니까?"
"그게 정명의 운명이니까. 산귀 어른의 생명에 우선하는 것은
없다. 정명도 편히 눈감았어."
천지유불은 사우맹의 본거지를 알려 주지 않을 게다. 뿐만 아
니라 옥순산 전투를 치르기 전에 곽모천이 무슨 짓을 했는지
도.
"대야성까지 헛걸음을 했군요."
그는 사우맹이 대야성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중원이 너를 잊게 해준 것만도 큰 은혜가 아닌가."
천지유불은 기분이 엉망으로 변해 버렸다.
놈은 침착하다. 지고한 수련을 쌓은 무인도 터득하기 힘든 부
동심(不動心)을 지녔다. 이러한 침착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
가.
"나머지는 모두 잊어라."
쉬익!
어느새 반여량의 뒤쪽으로 신형을 날린 천지유불은 손가락을
곧추세워 뒷골 밑 천주혈(天柱穴)을 강하게 찔렀다. 순간, 반
여량은 밑동 잘린 고목처럼 힘없이 무너졌다.
"기분 한번 더럽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기분이 왜 엉망으로 변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가 지력
(智力)을 뻗어내는 순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고, 진기가
풀렸다. 십성(十成)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천주혈에 손가락
이 닿는 찰나, 그는 무의식중에 오 푼의 힘을 빼버렸다.
껄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반여량은... 누구나 신체에 위해가 가해진다는 것을
알면 순간적이나마 움찔하기 마련이다. 자연현상이었다. 하지
만 반여량은 그렇지 않았다. 천주혈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까
지, 강철같은 힘이 천주혈을 누르는 순간에도 그는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신체의 모든 근육이 나른할 정도로 이
완(弛緩)되었다.
이런 자는 둘 중 하나였다. 바보이거나 아니면 정신을 조절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자이거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반여량이 동기감응 감여가란
사실.
쉬이익...!
야공(夜空)을 흔들어 놓는 바람소리는 노기로 변장한 낯선 사
내가 흘리는 소리였다. 그는 대야성 지리를 잘 아는 듯 인적이
드문 곳만 골라서 신법을 전개했다.
불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골목에 도착해서야, 사내는
신법을 거뒀다.
"비밀을 너무 많이 아는 자..."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순간, 반여량은 자칫 몸을 꿈틀
거릴 뻔했다. '위험하다!'고 본능이 소리친 것과 동시였다.
사내의 뇌력이 파랑을 일으켰다.
그 역시 천지유불과 같은 이유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
했다.
"휴우! 너의 운명... 감여가라니 살려 두마. 제 명대로 살려면
입조심해라."
그는 반여량이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도 그
럴 것이 천지유불이 직접 제압한 자가 아닌가. 혈도는 눈 감고
도 짚을 수 있고, 죽일 자와 살릴 자 그리고 살릴 자라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깨어나게 할지 정도는 기본이지
않은가.
쉬익!
반여량을 골목 한 귀퉁이에 눕힌 사내는 신속히 몸을 날려 어
둠 속으로 사라졌다.
'재미있군. 원방파에 무인들이라. 곽가장만 해도 골치 아픈
데.'
쉬익!
이번에는 반대로 반여량이 사내의 뒤를 밟아나갔다.
길을 오는 도중에 뒤를 밟는 자들의 정체가 수상쩍었다. 곽가
장 무인이라면 벌써 천광탄을 쏘았을 덴데, 그들은 끈질기게
뒤만 밟았다.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원방파무인이라
니.
감여와 무인.
곽가장과 원방파 무인들 간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
다. 그래야 사우맹과 곽가장 간에 싸움이 벌어졌을 경우 발생
할 수 있는 변수를 제거할 수 있다.
그는 어느새 치밀하고 조심성 많은 무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 * *
대야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붕어, 잉어, 곤들매기, 쏘가리, 송어, 뱀장어를 비롯하여 조
개, 새우까지 대야호는 그야말로 하늘이 준 천연의 보고(寶庫)
였다.
마을마다 고기 말리는 냄새와 굽는 냄새가 버무려져 바닷가의
어촌을 연상시켰다.
천지유불과 서른두 명의 사내는 대야호를 끼고 형성된 마을 여
섯 개를 지나쳤다. 한밤중이지만 마을을 지나칠 때는 멀리 빙
돌아갈 만큼 세심했다.
컹! 컹!
가끔가다 잠들지 않은 개가 요란하게 짖어댈 뿐 마을은 짙은
어둠속에 새근새근 잠들었다.
한쪽은 호수, 다른 한쪽은 너른 벌판.
몸을 은신할 곳이라고는 마을 주변에 있는 송림(松林)밖에 없
지만 캄캄한 어둠이 모두를 가려 주었다.
천지유불의 신형이 뚝 멎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이십여 호
의 가옥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다른 무인들도 일제히 땅에
엎드려 사방을 예의 주시했다.
천지유불이 손을 들어 오른쪽으로 열 명, 왼쪽으로 열 명이 가
라고 지시하자 무인들은 다람쥐처럼 날쌔게 신법을 펼쳐 어둠
한가운데를 유영해 갔다.
천지유불도 움직였다.
그는 지붕 끝만 희미하게 보이는 마을 정면을 향해 기어가듯이
나아갔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 순식간에 십 장을
이동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바짓단과 옷소매를 굵은 끈으로 묶었고, 병장기는 등
에 단단히 고정시키거나 입에 문 상태였다.
마을은 깊이 잠든 아이처럼 깨어날 줄 몰랐다.
천지유불이 뒤따라온 무인 열두 명에게 손짓을 하자 그들은 재
빨리 마을을 파고들었다. 어떤 무인은 흙담벽으로, 어떤 무인
은 지붕위로, 또 어떤 자는 마당 한가운데로 뛰어가 넙죽 엎드
렸다. 그들은 움직인 곳이 각기 달랐지만 발걸음소리 하나 흘
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았다.
일 각 정도의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마을로 스며들어간 무인들은 좀처럼 나올 줄 몰랐다. 한밤중에
소리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막대한 인내를 요구했다. 어찌된 일
인지 밤은 낮보다도 더욱 지루하니까.
하지만 천지유불은 마치 몸이 굳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쪽도 마찬가지였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스며든 무인들도
제자리를 지킬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일의 사태
가 발생할 경우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가하리라.
이윽고 밤고양이처럼 날쌘 그림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
다. 그들은 마을로 스며들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없이 돌아왔
다.
천지유불이 턱짓으로 무엇인가 물었다.
무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가 있다. 두 명. 적어도 그들 중 한 명
은 고개를 끄덕이리라.
또 한 명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고개도 가로저어졌다.
무인들은 소리없이 병장기를 꼬나쥐었다.
싸움이 벌어지지 않으면 그것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차후 사우맹은 무시해도 좋으리라. 제 집 안방
을 마음대로 휘젓는 무리가 있는데도 전혀 몰랐다면.
틀림없이 싸움은 벌어진다. 곽가장과 대적할 마음을 품은 자들
이라면 만만치 않으리라.
마지막 한 명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고개도 '없다'라는 망
을 했다.
'함정!'
천지유불은 즉각 손을 들었다.
신속히 빠져 나기야 한다.
허름해 보이는 마을이 실은 사우맹의 본거지였다. 어촌으로 위
장하여 정도 무림의 이목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
쳐 온 여섯 마을도 사우맹의 일부분이었다.
적의 세력 한가운데.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그것이 함정이든 아니든 일
단 벗어나야 한다. 더욱이 지금 천지유불은 강한 불안감을 느
꼈다. 평온하기만 한 마을이 악마의 숨결을 토해 내는 것 같았
다.
사사삭...! 사삭!
무인들은 숨소리 한 올 흘리지 않고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때,
화아악...!
호수가에 정박해 놓은 배에서 일제히 횃불이 피어올랐다. 뿐만
아니라 마을 너머 들판에서도 횃불이 일렁거렸다.
"공성계(空城計)!"
천지유불은 아득한 절망감을 맛보았다.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이십여 년을 곽가장의 턱 밑에서 숨
죽이며 살아왔다. 원방파가 은자와 양식을 대주지 않았던들 지
금 거느리고 있는 서른두 명조차 양성하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강호에 나오자마자 이렇게 당하다니.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마라. 나는... 살수업을 할망정 흑
도인과는 손을 잡지 않았다."
"존명(尊命)!"
무인들은 비장한 기색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아직 일렀단 말인가. 그토록 고련(苦練)을 시켰건만...'
긴장하고 있는 수하들은 반여량에게서 느낀 점을 그대로 묻어
냈다.
애송이, 한마디로 애송들이었다.
무공은 잔혹한 무공을 익혔으되 실전 경험이 전무했다. 그렇기
에 싸움을 앞두고 긴장하는 것이다. 살수는 어떠한 상황에 부
닥치더라도 냉정해야 한다고 그렇게 누누이 일러 주었는데.
냉정을 잃은 무인, 이들은 이미 살수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무인에 지나지 않았다.
'힘들겠군.'
그는 텅 빈 마을에 눈길을 주었다.
산귀 총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지하 밀실? 살수들에게는 지
하 밀실이 통하지 않는다. 숨은 자를 찾아 죽이기 위해서 살수
가 필요하지 않은가.
쉬이이익...!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이놈은 강해도 너무 강하다. 횃불은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데 기척도 없이 다가왔다면.
"내가 한다!"
천지유불은 고함을 목청껏 내지르고 성명절기 쾌방백을 전개했
다.
쉬릭!
검날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비늘을 토해 냈다. 순간,
"잠깐! 반여량이오."
'반여량?'
검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쾌방백이란
검초는 '넋이 빠져 나가는 것을 기뻐한다'라는 뜻으로 그만큼
쾌속하게 죽음을 선물한다.
전신전력을 다해 땅에서 하늘로 그어올리는 단 일 초.
몸은 검날을 따라 둥글게 말아 올라졌다.
서걱!
검을 잡은 손에 감촉이 느껴졌다. 옛날에 한번 느껴보았던 감
촉. 옷자락이 베어지는 촉감이었다. 그 다음 곽모천은 텅 비어
있는 옆구리에 일검을 가해왔고, 단 일초 쾌방백을 실수한 자
신은 피를 쏟으며 무너졌다. 지금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
졌다. 절대 피할 수 없는 쾌검, 쾌방백이 또 다시 허공을 가르
다니.
"으음! 무섭게 빠르군요. 모든 내공을 검에 응축시켜 터뜨리는
검법. 필살입니다. 나에게나 적에게나."
반여량은 반격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검법을 평하기까지 했
다.
"여기는 웬일이냐?"
천지유불은 자신의 일검이 파해되었다는 점보다 반여량이 사우
맹 본거지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는 방금 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뒤따라 왔습니다."
"뭐라고? 뒤를... 밟았단 말이냐?"
살수가 뒤를 밟힌다? 그것도 서른두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전
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곽모천 이외에는 적수가 없다고 생
각한 자신까지 있었는데?
그는 너무 어이가 없어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야기하고 우선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반여량은 재빨리 신법을 펼쳐 어둠을 질주해 나갔다.
그의 말이 옳다. 지금은 무조건 자리를 벗어나고 봐야 한다.
흑도인들은 사리를 따지는 성품이 아니라서 침입자는 요절을
내고 만다.
"따라가자."
천지유불은 명을 내림과 동시에 신법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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