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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유함 원문보기 글쓴이: 요나단
(지인 한 분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 부탁은 제가 전에 운영자로 섬기던 예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향이 너무 극단적인 부분으로 치우쳐가는 것 같다는 근심에 저에게 예향글들을 한번 보고 글좀 올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예향이란 카페를 논단하게 되는 것 같아 몇번을 거절했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고, 시간도 그리 녹록치 않았지만, 그 정도의 원도 못들어드릴까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예향만의 분위기만을 생각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것은 아니며, 예전과 최근 제가 느꼈던 포괄적인 면들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작년 예향을 떠나면서 스스로가 약속을 했기에 가입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혹시 다시 가입을 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같은 닉을 사용하게 되겠지요. 손님으로 글을 보는데 상당한 불편은 따르더군요^^
오랜만에 찾아 본 예향은 좀 생소한 느낌이었습니다. 주 논객들이 예전 숭사리에서 보았던 분들이 많아진 것 같았고, 저에겐 낯선 회원분들이 많아졌다는점. 며칠동안 틈틈히 게시판 글들을 보았는데, 예전 예향만의 색감이 조금은 변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로서는 예전의 색감을 가지고 있었던 예향이 편안한 것 같습니다.
최근 예향에서 제가 보고 느낀 점들과 이전에 제가 사람들과의 논쟁이나 변론, 혹은 대화를 나누며 느꼈던 점들을 이자리를 빌어 나눠보겠습니다. 분별하여 섭취하는 것은 보는 분들의 몫이므로 제게 또다른 관점으로 충고를 하셔도 좋겠고, 반박을 하셔도 좋습니다. 제 주관적인 글이므로 그에 대한 또다른 반박이나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글 외에 윗글들에서는 존칭을 생략했습니다.-
그에 반한 주장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 자신도 소위 개혁파에 속하는 사람이다. 대화나 글을 나누는 상대에게 내가 본의 아니게 때론 극단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목사교를 따르는 한심한 세뇌교인이 되어버리는 때도 있다. 그 현상이 세 종류의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타나게 되는데,
첫번째로는,
두번째로는,
근본된 이유는 그들에게는 내가 주장하는 말조차 사탄의 주장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세번째로는,
(치우친면)만을 강요하는 이들과 킹제임스성경을 신봉하다시피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이로 인해 많은 고민과 내 자신의 성경적가치관(신학)도 재점검하며 생각해보았지만, 쉽게 그들의
여기서는 내용적인 면(논쟁내용들)보다는 근본적으로, 글이나 대화를 나눌 때 느껴지는 상대의 성향과
(1)할퀴는 사람들의 특징은 배려없는 '자신만의 고집'에 있다.
할퀴는 사람들의 가장 심각한 점은 자신이 정립한 성경적가치관에 있어서 절대 양보란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자신이 최종적으로 정립한 성경적가치관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진리'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는데,
이는 기존교회의 관행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며 참여하는 기존교인뿐 아니라 제2관념이 토착화되어
여기에서 처음가진 고정관념 못지않게 무서운 점이 제2관념의 화석화이다. 이는 처음으로 가졌던 고정관념보다 더욱 고집스러운면이 있다. 가장 큰 이유가 자신이 무언가에서 깨닫게 되어 다시금 얻은 관념이기 때문이다.
제2의 성경적관념이나 사고적관념이 화석화된 사람처럼 세상에서 대화가 힘든 사람은 없다.
대화를 한다고 하지만, 기존교회에서 행해지는 관습이나 예배의식, 주일, 성탄절, 교리등을 파헤치며 성경구절을 찾아가며 오로지 자신들만의 참 됨을 주장한다. 이런 소통의 단절과 고집은 두번째 성경적관념을 여호와 증인의 교리와 그들의 신세계 성경에 최종적으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증인과 같은 완전히 왜곡된 성경적시각은 없다. 개중에는 보다 성경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고, 간단명료하면서도, 확실한 자신만의 성경적가치관을 정립하고 있다.
그런 분들의 글들을 보자면 나의 잘잘못이나 서로다른 주장을 떠나 간혹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시원함만을 따라가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존교회나 모든 사람들을 판단하는 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어디에나 심적인, 영적인 함정은 도사리고 있다.
특히나 형제들을 판단하게되는 일에 있어서.. 이는 아주 두려운 일이다.
또 하나는, 고집보다는 감정적인 면이 앞서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사고나 관념과 반대되는 이견이나 주장을 대할 때 나타나는 일시적인 분노나 혈기, 혹은
(2)손톱으로 할퀴는 사람들
할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대화글을 보자면, 씁쓸한 면이 있다. 대체적으로 위선이나 가식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그보다 무서운 말씀으로 할퀴거나 조롱하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주로 열혈회원들의 활동이 왕성한 개혁적 마인드를 위주로 하는 카페나 사이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할퀴는 자들이 기존교인들이나 글을 대할 떄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어투를 예로 들어 본다.
'당신 같은 사람을 보니 이런 구절이 떠오르는군요?'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무엇을 개혁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외칠 뿐이지요. 그런데 소경에 귀까지 먹었으니 들릴리가 있겠습니까?' '목사교의 세뇌교인이시군요.'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겁니다. 오해마시길..' '신약에서는 헌금이 아닙니다. 연보입니다. 연보요!!' '바울의 자비량선교만이 작금 교회개혁의 원천입니다. 교인이 봉입니까? 땅을 파서라도 돈을 벌어야지요. 빌어먹으면서 왜려 큰소리치는 직업이 먹사입니다.' '전형적인 로마카톨릭의 관습을 따르고 있군요.' '장로교는 로마카톨릭의 복사판입니다.'등등..
위와 같은 어투에 관하여 아무리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같은 크리스천들은 말을 가려 합시다'라는 권면을 할 경우, 거의 동의를 이끌어내어 본 적이 없었던 기억이 있다.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 외에도 대다수의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투는 당연히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며, 일부 성실한 목회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고들 한다.
일부 극단적이거나 문자주의에 안착한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23장을 통해 바리새파사람들에게 쓰셨던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성경구절인용에 있어, 나는 동의할 수 없다는 점을 예전부터 견지해 왔다. 거기에 대해서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어투는 예수님보다는 교양적이라는 것이다. 난 이러한 그들의 변명에,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본 사람들이 맞을까'란 의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성경구절은 모두 차용해서 상대를 힐난하는데 사용해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거나 아니며, 전혀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패악한 목회자들이나 소경과 같은 교인들에게 향하는 것이므로 그 외 성실하며, 순수하고 지혜로운 교인들에게는 해당이 안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언젠가 안티와 개혁적인 크리스천들이 공존하는 한사이트의 기독교방에서 한 열혈개혁론자와 대화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도 역시나 위와 같은 예를 들며, 상당히 자신감 넘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에게 몇가지를 물었다.
'님의 개혁에 대한 목마름은 알겠지만, 님의 신분이 예수님과 동등된 입장이신가요?'
그에게서 조롱을 당했고, 욕도 먹었다. 그의 요지는 자신을 가지고 장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난 거기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것이라며 답을 했었다. 그리고 또 물었다.
'님은 지금 님의 판단으로 비판하며 욕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부패한 목회자들에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그런 입장이나 위치가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의 어투나 판단에 있어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인용하지는 마십시오.'라며 권면했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돌아 온 말은 나에게 조금은 충격이었다. '너 같이 가증스런 위선자들이 오히려 목사편을 들며, 개혁적인 사람들의 발목을 잡으려고 발악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지만, 마치 주먹에 맞은듯 멍했다. 내가 그에게는 가증스런 위선자로 보였다는 것에 대한 심적충격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를 위한다는 마음에 권면하며 대했지만, 그에게 난, 가증스런 위선자일 뿐이었다. 나의 대화태도에도 문제가 있었겠지.. 하면서 자책을 해보지만 그래도 그 마지막 표현은 쉽게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한 선배님의 글을 보던 중에 다시 '말'과 '글'에 대한 조심성에 대해서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말씀 하신 것도 그냥 소리가 아니라 영이기 때문에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중략- 그래서 미혹의 마음이 발생 하는 것에도 “미혹”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미혹을 하는 일에 해당 하는 생각과 마음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더욱 크게 동감하는 부분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영이라는 사실'이란 내용이다. 개혁을 갈망하는 사람을 자처하지만, 대부분의 표현에 있어 교회나 목회자들에게 거의 안티에 가까운 사람들의 글투를 보자면, 조롱이나 성경구절을 통한 정죄의 글이 거의 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개혁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예전에 어리고, 순수했으며 그저 목사의 설교가 성경말씀인줄로만 알던 때를 기억하면서, 오히려 지금의 '나'를 향해 욕하며, 손가락질하는 같은 교인들을 향해 한발짝 두발짝 뒤로 물러설 줄도 아는 지혜와 인내와 배려와 같은 작은 사랑이 필요한 것은 기본이다.
왜냐면, 누군가가 주는 젖이 없이도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복음적으로 장성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주관적인 느낌이긴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개혁을 외치던 사람들이 온라인상이나 오프라인상에서 같은 크리스천들과 목회자들을 비판하며 힐난하는 것에 재미와 삶의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은 적이 있다.
'처음 마음이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했지만, 처음 마음은 바로 자신이 처음으로 영적인 교감으로 예수님을 체험하며 만났던 그 때의 마음을 말한다.
조롱과 비판과 판단만이 난무하는 개혁은 솔직히 표현해서 그들이 욕하는 자들과 별다르지 않은 그들만의 '진탕'일뿐이지 그것은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될 수 없다.
내가 예수님과 동등된 입장이 아니라면, 시쳇말로 아무리 '개차반'같은 사람이나 교인들이 있다해도 그들에게 예수님과 같은 독설을 그들에게 쏟을 수 없으며, 진정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쉽게 자신만의 판단으로 상대를 향한 조롱과 독설을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느낀 극단적인 개혁파사람들을 자연으로 표현하자면,
그들은 전체 숲에 수다한 나무가 아닌, 시야에 들어오는 병든 나무들만 보면서 전체 숲을 평가하거나 판단해버리는 사람들이다. 이로 인해 병들지 않은 나무까지 숲이 병들었다 해서 그 나무도 병든 나무가 되어버리는 현상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숲이 병들었기에 다 태워버리고, 새 나무를 숲에 심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여기서 본인은 파스칼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자연은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신학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언젠가 신학을 논할 때 인용했던 글이기도 하지만, 자연은 신학의 근본이며, 신학은 곧 자연이다.
숲은 '돌'과 '흙'그리고 '나무'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무는 '산'이라는 돌과 흙에 뿌리를 둔 가장 뒤늦게 생겨지는 생명의 열매이다.
산과 숲을 이루는 토대가 되는 '흙'이, 울창한 숲에 가려 잘 보여지지 않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성품이라면, 돌은 암석과 같이 가장먼저 눈에 들어오는 성경문자이며, 비로소 숲이라 불리워 질 수 있게 산속에 빽빽히 들어선 나무는, 교회이며 사람이며 신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적잖은 극단론자(신약론자,문자주의자)들은 전체적인 숲을 이루는 조화를 무시해버린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대체적인 개혁론자들은 그 병든나무로 인해 모든 숲이 병들기 때문에 그 나무를 뽑아버리거나 제거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당연해 보이는 주장이 상당수 유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그 와중에 극단적으로 오직 '이것'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다시금 마음과 뇌리 속에 깊게 새겨진 성경적가치관이 오직 한쪽만으로 치우쳐 정립된 사람들이다.
나무도 전염병이란 것이 있다. 그 병에 걸리게 되면, 수 많은 소나무들이 말라 죽어가듯이 숲도 병들 수 있다.
숲을 지키는 산림원들은 그런 나무를 찾아내어 비싼 약물까지 투여하며 치료를 한다. 치료가 불가하면, 나무전문가의 의견을 물어 베어버리거나 뽑아버린다. 그것이 그들이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개혁자들이 바로 이러한 산림원과 같은 사람들이다. 개혁은 청소부와는 다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의 어투나 행위에서 인내와 배려나 정성을 느끼기 보다는 그들은 마치 청소부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고 청소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열심히 빗자루를 들고 길거리를 쓸고 다니는 것 같은 모습.. 그럼에도 길은 전혀 깨끗해지지 않은 느낌? 뭐 그런 비유로 말할 수 있겠다.
갈수록 병든 나무들이 많아지자 그런 나무들을 뽑아 태우고자 하는 자처하는 산림원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병든 나무를 찾아 팔벗고 나서며, 병든나무나 메마른나무들을 마구 베어내며, 뿌리를 뽑으려하지만, 뿌리는 쉽사리 뽑히지 않는다.
뽑히지 않는 나무는 화김에 도끼로 한번 내려치고는 곧 다른 메마른 나무들을 찾는다. 그 병든 나무로 인해, 주변에 조금이라도 메말라 보이는 나무가 있으면, 저 나무도 병들었다며, 도끼나 톱을 들이대기 일쑤이다.
왜일까? 다른 나무들도 병걸린 나무처럼 메말랐기 때문이다. 나무가 메말랐다는 것은 부적합한 산림원들에게는 당연히 베어버리거나 뿌리뽑아야 할 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무전문가도 함부로 도끼를 데거나 뿌리를 뽑는 것은 자뭇 숲을 헤칠 수 있다고 만류해도 그들에겐 도통 통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무들을 함부로 찍어대는 부적합한 산림원들의 잘못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그들은 '겨울'이란 계절을 잊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메마른 나무들만을 찾아 헤매이다 보니, 겨울이어서 숲이 모두 메말라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계절을 잊어버린 부적합한 산림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들의 모습은 자신이나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만이 나무와 숲을 최고로 잘 아는 사람이라며, 나무전문가의 글을 인용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내세우며, 숲을 걱정하기도 하면서, 어떤 숲은 아예 없애자고까지도 한다. 그 숲은 이미 모두 병들었기에 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므로 불을 놓아 숲을 다 태워버리자는 주장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적잖은 부적합한 산림원들로 인해 저 산山뿐아니라 앞 산의 숲도 뒷 산의 숲도 언제부터인가 모두 병든 숲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산은 아직 그 나무의 뿌리를 토해내지 않고 있다. 어떤 숲은 전염병으로 인해 나무가 메말라 죽어가고 있는데도, 산은 그 나무들의 뿌리를 토해내지 않는다. 계속적으로 영양분을 공급한다. 어떻하든 살아나라고.. 간혹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매하다 못해 답답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답답하게도 산은 숲을 포기하지 않는다.
로마카톨릭에서 계승된 절기나 교회적 관행에 대해서 '음녀'라는 표현으로 대다수의 교인들을
'음녀'라는 표현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 같은 크리스천들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 음녀라는 표현은 극단적인 개혁론자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로마카톨릭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일지라도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단어이다.
그 곳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으며,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무시하는 영적 판단이나 말씀인용을 통한 정죄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할퀴는 사람들은 극단적인개혁론자이건, 일반기존교회의 모든 관행을 따르는 교인이건 쉽게 표현하자면 '글에서건, 관계면에서건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만큼 고집스럽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라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주장하며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율법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예는 예수님과 바리새파들과의 논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연 누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는가이다. 관계면에서 혹은 어떠한 학식이나 지식을 받아들이는 면에 있어서 오직 자신의 마음에 맞는 것만을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융통성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란 우유부단의 의미가 아니다.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알고, 특히 크리스천은 거기에 복음을 알고, 배려를 알고, 포용을 안다는 의미이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히 율법을 준수했다. 특히 그들은 안식일엔 어떠한 개인적인 움직임도 삼가했다. 그러나 예수는 손오그라든 여자를 고쳐주셨고, 이삭을 따먹는 제자들을 나무라지 않으셨다.
여기서 보자면, 바리새인들이 잘못한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철저히 모세가 남긴 율법조항인 안식일을 준수했음을 알 수있다.
그들이 몰랐던것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임을 모른 무지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중하냐, 날이 중하냐, 사람이 중하냐, 전통이 중하냐, 사람을 중히 여긴 예수는 그들에게 이단시되었다. 여기서 극단적인 개혁론자들이하는 말이 '내가 말하려 하는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있어 자신들도 기존교인들에게 '이단시'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성경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문자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복음이란 포괄적인 말씀에 조금이라도 다른 부분?이 첨가되는 것을 보면 사람의유전이나 장로의 유전을 쫓는 사람들로서 그 단체는 음녀나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집단이 되어버린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경외하는 말씀으로 인해 문자보다 더 중한 존재자체의 사람들을 영적으로 판단해버리는 율법적인 정죄를 서슴없이저지른다. 그것은 사람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기존교회나 교인들이 개혁파 사람들을 이단시하며 마귀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과 성경문자가 우상이 되어, 오직 거기에 매여 더 넓은 '사람'이란 존재를 보지 못하는 극단론자들도 내 관점으로 보기에는 같은 사람들로 보이기만 한다.
그들에겐 성경에 나타난 '주의 날'은 전부 마지막날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성탄절은 미트라신의 명절이므로 절대 성탄절이란 날을 있어서는 안되는 날이며, 일요일은 로마태양신의 날이기 때문에 그 날도 당연히 예배해야하는 날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날은 거룩히 지켜지는 날이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그들은 바울이 날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의 구절을 통해 어떠한 날도 의무적으로 강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거기엔 나도 동의한다. 어떠한 날을 신성화시켜 강요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모두가 쉼을 얻는 날, 그 날이 역사적으로 석가모니탄생일이건, 미트라신 명절이건, 태양신을 위한 날이건.. 그 날이 어떠한 날이 었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날이 이젠 주님을 예배하며 찬양하는 날이 되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것이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진정 복음적인 관점이며, 보다 자유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내 자신도 십일조나 주일을 성수하라며 강요하는것과 그 제도가 율법화 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십일조와 주일성수란 단어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정도로 거부반응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자신의 성경적가치관에 대해서 한번쯤 깊이 고민하며 생각해 보아야한다.
내가 진정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인지.... 율법의 근본의미는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었다. 예식법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성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엄밀히 말해서 죄성가득한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십일조 또한 사람을 위한 법이었다. 십일조에 대해서 그 용도가 부적절하게 사용되어지는 점에 대해서 충고하며, 권면하며, 때론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십일조라는 제도자체를 범죄행위로 보는 극단론자들의 관점은 '사람보다 자신들의 성경적인 법'을 위에 두고 사람을 정죄하기에, 그 자신이 같이 판단받거나 정죄된다 하더라도 사실상 억울해 할 수 없다. 그 자신이 사람들을 향해 율법에서 자유하라고하지만, 스스로가 성경이 법이 되어 자신과 다른 제도를 따르는 교회와 형제들을 심판하는 율법의 주인이 되었기 떄문이다.
그것은 곧 다른 모든 형제들을 당연히 자신이 가진 성경적가치관으로 정죄할 수 있는 정죄권이 발동한다는 의미이다. 또하나의 그들만의 율법이 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율법의 주인이다. 그 분도 육체(보여지는 행위나 사람의 방법)따라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신다는 자유함을 우리에게 주셨것만, 기존교인이든, 극단적인 개혁론자이든 서로를 향한 비판과 정죄의 화살은 늘 아슬아슬하다. 너는 이것때문에 비성경적이고, 너는 저것때문에 비성경적이라며 말씀을 가지고 '내가 옳다며'서로 설득하기 위해 열심이거나 열을 올린다.
설득하다 못해 구절인용을 통해 형제들을 정죄하는 것도 스스럼없이 한다. 왜냐... '당신은 비성경적이다'란 성경적관념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날을 신성화하거나 사람을 신성화하는 것은 분명 비성경적인 것이다. 로마카톨릭은 분명 그러한 행위를 저질렀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은 지금까지 행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개신교가 비록 안타까운 점이 많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 많은 교회들이 사람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명목회자들을 마음에 새겨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주인이된 교인들의 모습이 안타까운 것이지 일반적인 개신교 모든 교회는 사람을 신성화시키지 않는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
만일 예수께서, 미트라신의 명절을 예수님의 탄생기념일로 탈바꿈하여 세계가 지정하고 그 날 모여 예배하며 주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찬양하는 것을 보고 '이교도의 잘못된 관행의 계승'이라고 말하며 성탄절에 모여 예배하는 모든 사람들을 무지한 백성들이라며 비난하시거나 음녀라며 정죄하시겠는가이다.
거기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로 결론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다. 여기에도 구절인용을 통해 답을 찾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는가?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날의 역사적의미'보다는.. '그 날이 지금은 어떻게 변모되었는가'가 중요한것이다. 성탄절에 미트라신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에 모여 예배하며 나누는 자들은 없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그것을 깨닫게하려 했음에도 그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지켜온 그 문자적인 조항에 대한 고집을 놓지 않았다.
그 모세가 남긴 문자조항이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를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은 정죄하기 바쁘고, 틀렸다 말하기에 발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날'의 의미보다 '선한 행실'에 중점을 두었다. 선한행실이 꼭 가난한 자를 돕는 것에만 국한시키는 것도 옳지 못한 생각이다. 예배도 선한행실이며, 믿는 자들끼리 친목이나 즐거움, 혹은 기쁨을 서로 나누는것도 모두 선한 행실에 속한다.
말씀인용은 '아'다르고 '어'다를 수 있다. 그만큼 어떠한 성향의 글에서건 구절인용은 그 빛을 발한다.
사도바울만이 최고의 사도라고 여기며, 그 분의 삶만이 최고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극단론자들은 자비량선교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선교가 되는 것이며, 헌금이 아닌 연보라는 단어적용이 되어야만 올바른 교회이며, 십일조를 의무화하고 있는 대다수의 교회들은 그들에게 순식간에 범죄행위를 강요하는 범죄집단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주장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수많은 목회자들이나 교인들과 함께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충고나 권면, 분별을 넘어선 형제들을 향한 거침없는 판단때문에 그러하다.
또한 일부 극단적인 개혁론자나 재침례교파, 혹은 킹제임스성경신봉자등이 침례가 아닌 약식세례는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못박으며, 전체적인 교회들을 거리낌없이 비판하며, 말씀구절을 통해 판단하기도 한다.
의식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 의식적인 잘못에서 벗어나라 말하는 사람들이 세례는 분명 침례가 아니므로 그 '세례'를 받거나 행하는 사람들을 비성경적이다라 말한다면, 그들도 비성경적인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왜냐면, 세례라는 의식의 기본은 그것이 침례이건, 약식세례이건, 로마카톨릭에서 내려져온 전통이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한 마음에서 참여하는가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의식이나 성경에 남겨진 문자가 중요하다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주님을 향한 마음가짐이 더욱 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존교인이나 목회자들이 자신이 한번도 갈아입지 않고 지금까지 입어온 옷(성경적가치관)이 '절대 복음'인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한 기존교인들에게 같은 성경문자를 인용하며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일부 극단론자들 또한 자신이 갈아입은 옷이 '절대 복음'처럼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기존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은 그로 인해 쉽게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날린다. 주먹은 아주 작은 확률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대부분 그 주먹에 맞은 부위는 멍이드는 경우외에 좀처럼 지울수 없는 상처를 남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할큄을 당하면, 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 할퀴는 사람들은 힘으로나 숫적으로 약해보일 수도 있지만, 언제든 할퀴려고 준비된 사람들이다.
주먹보다 약해보이는 손톱이 더욱 무서울 때가 있다. 손톱이 없다면 할큄은 주먹보다 못한 하찮은 가려움만이 남을 것이다. 같이 정죄하기를 두렵게 여기지 않는 기존교인들은 자신의 관념과 부딪치는 사람들을 향해 뭉텅거린 주먹으로 친다. 이는 자의식의 상실이나 총제적인 신학의 부재, 혹은 관행의 관념화가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반면에, 극단적인 개혁론자들은 여타 사회인들과 같이 사회적자의식도 갖추고 있고, 배운 지식이나 성경적 가치관 또한 넓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교인들이나 목회자를 향해 주먹이 아닌 잔뜩 구푸려 힘을 준 손톱으로 할퀴어 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는 준비된 자세이기에 더욱 쓰리거나 간혹 사라지지 않는 상처를 남길 때도 있다.
기존교인들은 성경이나 교회적 관행을 모두 뭉텅거려 하나로 보는 반면, 극단적인 개혁론자들은
따라서 그들은 공격을 하더라도 손톱으로 한다. 주먹으로 하지 않는다. 주먹은 마음에 들지 않기
나의 경험으로는 소통이나 대화를 가짐에 있어서 기존교인들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상당히 논리적이며 차분한 것 같지만, 한 면으로만 치우쳐 점철된 성경적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극단적인개혁론자나 성경원리주의에 파묻혀 바울사도나 문자가 우상이 된 사람들이었다.
'시'는 위대하다.. '詩'라는 장르의 분야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나는 시인이 신학자보다 위대하다는
자신의 고뇌나 일상, 작은 감동이나 분노, 혹은 깊은 절망, 또는 기쁨이나 희망등을 지식에 옮기는 힘겨우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작업이기에 그렇다.
비판론적인 신학자와 시인은 다르다.
나는 차라리 이름없는 시인이 될지언정, 논객(혹은 비판론적인 신학자)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예향을 떠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른 개인적인 이유(안목사의 일)보다 비판논객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지난해에 극과 극을 달리는 일을 겪어 보았고, 결국엔 험하게 넘어졌다.
넘어지면서도, 멀어지면서도 '나'를 배운다. 개혁은 결국 '너'가 아닌, '나'와의 전쟁임을 근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말하지만, 늘 듣거나 말해도 모자람이 없는 부분이 이 점이다.
'좋다'라고 말하면 그만입니다.
천주교와 비교하며 십일조를 당연히 의무적으로 하는 사람들이나 주일성수를 목숨처럼 지키려는 사람들이나, 일천번제를 당연히 하는 교인들을 향해서, 심지어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을 향해서도 굳이 정죄하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다른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라며 영적으로 심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제도나 관행을 나로서는 따를 수 없거나 인정할 수 없다'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너는 틀렸다'와 '나는 옳다'가 되어버리면 그것역시 흑백논리가 되어 버림과 동시에 정죄권이 발동됩니다.
모든 관점을 '나의 생각'이라는 일인칭 관점으로 표현할 때 불특정 다수를 향한 심판자가 되는 우를 조금은
기존교회의 십일조제도나 주일성수제도를 '범죄행위'라 심판할 권이 우리에겐 없으며, 마찬가지로
비판과 판단은 복음서를 통해 귀가 아프게 보고 들었습니다. 분별과 포용(품는 마음)은 뗄 수 없으며, 비판과 판단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비판만이 있다면, 그 열매는 결국엔 판단(심판)으로 나타납니다.
온, 같은 부패를 보았다면, 그들을 왜 포용하며 나아가야하는지를...
분별은 근본적으로 내 자신을 위한 것이며, 포용은 서로 다른 성경적가치관을 가진 모든 크리스천을
또다른 율법주의.. 그것은 포괄적적으로 말해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만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문자안에서만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전 우주를 아우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성경적인 지식과 식견으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분이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판단치 않으십니다.' 우리의 숨이 멎는 날까지.. 하나님은 '나'나 '당신'을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며 따르는 형제들을 향해 단지, 나의 성경적가치관과 대치된다 해서 원수화 시키는 행위는 분명 하나님과 원수된 행위입니다. 누구도 서로를 영적으로, 그것도 성경구절을 통하여 정죄할 수 없습니다.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뿐입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온라인 상에서 눌러대는 키보드의 결과물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이는 예전 내 자신의 모습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스스로가 느꼈던 일입니다.
이는 개혁을 말하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요8:15)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12:47)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두어야 합니다.
관점을 어떠한 관행적, 문자적인 것에 대한 행함에 두는 것이 아닌, 그것을 초월한 '존재' 그 자체에 두는 것입니다. 그 존재가 이 땅에서 소멸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가진 판단(심판정죄권)이 발동되는 것입니다.
나와 당신이 이 땅에서 주 예수그리스도를를 믿고 있다는 그 동질적인 존재적가치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 부수적인 교리적인 다름과, 은사적인 부주의와 같은 것들은 '충고'나 '돌아서라'는 권면이외에 더한 말이나 성경인용을 통한 비교나 판단권한은 없습니다.
성경적인 분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별을 동반한 권면과 같은 포용함이 아닌, 문자적인 다가감의 인용비교는 주님도 판단치않는 형제를 판단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진리를 나타내고자 할 때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단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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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물나도록 기쁘고 감사한 글입니다. 이 글이 많은 이들에게 은혜가 되기를 빕며 감사히 읽고 옮겨갑니다. ^^*
근디 왜 스크랩이 안될까유? 할 수 없이 복사해 옮겨갑니다.^^*
회원님들 글이 좀 길지만 꼭 읽어보셔요~~^^;;
옳으시고 돌아보게 하는 말씀인데 양복입은 신사가 몆칠 굼은사람에게 안녕하십니까?하는 소리로 들리니 제가 님이 말한 사람정도 이거나 현실의 절박성이 약해진 말씀인지 성령님안에서 분변하겠습니다. 아무튼 많은 부분 지켜야 할 부분인것 같고 돌아보게하는 글입니다. 단지 글쓰는 사람의 본심은 글과는 다르게 따뜻 할 수 있씁니다. 강조가 지나쳐서 그렇지요. 속으로는 눈물을 흘린답니다.
흠이 있다면 글이 너무 긴 거... 또 님 직업이 전도사라는거(커플방에서 봤음)... 제가 철 없던 중 3때 전도사한테 맞아 본 기억이 있어서리... 그 후로 쭈욱 목사, 전도사 보는 내 눈이 확 바뀌고 이들도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판단, 정죄, 삐딱?선을 타게 되더라고... 근데 예향의 운영자였소? 예전 닉이 뭐였나요?
저보고묻는말인가요? 전 예전의 운영자가 아니라 글을 퍼온 일반회원일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워낙에 글이 길어 읽다가 질려서 댓글을 단다는 것이 이런 실수를 하고 말았네요... 요나단JP란 닉은 제가 본 기억이 있네요... 쥬빌리님 이 곳의 공지글만이라도 다 읽어 보시고 전도사의 직분 잘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도둑놈들도 자기들을 도둑놈이라고 부른 것을 달갑게 생각 하지 않습니다. 할킴을 당할 만한 사람들이나 할킴을 당하지 아무나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셨으면 합니다. 아무나 보고 도둑놈이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도둑놈 보고 도둑놈이라고 하면서 나쁜놈이라고 할키지요. 아셨습니까 ? 할킴을 당했으면 왜 할킴을 당했는지 반성해보는 것이 먼저지 할켰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 합니다. 차라이 말이나 하지 않은 것이 중이라도 갑니다. 그렇게 좋은 소리만 듣도 싶으시면 좋은일을 하세요. 그것이 먼저 입니다.
쥬빌리님 덕분에 요나단님의 글을 다 보게 되는군요^^* 글을 보니 반갑습니다. 여전히 건강하게 잘 계신 것 같군요. 이렇게 긴 글을 쓰려면 체력소모는 물론이고, 꽤 긴 시간이 걸렸을텐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참 오랜만에 보는 글입니다. 오랜만에 들렸다가 반가운 벗을 만난 느낌이랄까.. 아무튼 늘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깊이 감사드랍니다.
아주 큰 외침인데요.저는 고향에 시골교회 목사님이 명절에 갔더니 집사님 예향 카페 아주 자랑 하여 몇번 들어 갔더니 거칠고 복음보다 모두 비판이나 하고ㅎㅎㅎ~~이단 아녜요?그 질문에 마음 아팠어요.위와 같은 글에 공감 하고서 저에게 은근히 물어 본 기억이 나네요.더 분발 하여야 하겠습니다.모두가 회개 하시면 주님은 기뻐 하시겠죠.대신 글을 쓰시는 경우보다 직접 동참 하십시오.더 적극적으로 ~~~ㅎㅎㅎㅎ
좋은 본문과 ...좋은 댓글들을 통하여 ...몇가지 의문들과 ..의무가... 풀리어나는... 좋은 시간입니다...^L^
비판이 곧 복음일수 있는 상황입니다. 원래 선지자들의 말이 당시 위정자나 제사장들에게는 거칠게만 들렸죠. 쓰죠. 그러나 쓴게 약입니다. 회개가 쉽습니까? 회개하기위해 영혼은 쓴맛을 볼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달콤한 말을 원한다면 망합니다. 감언이설만 좋아하다가 망한 왕조가 많다는것을 역사가 말하고있지않습니까?
이 글 역시 개혁자에게 완벽한 수준을 원하고 있습니다. 완벽한 수준의 인격을 갖추고 믿음을 갖추고 교리를 갖추어야만 개혁을 말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쇄살인마 강호순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딸교육 잘했으면 이런일도 없었을것 아니냐면서 탓하는 상황과도 비슷합니다. 적반하장이란 말이죠. 도둑이 피해자에게 문단속 잘못한다고 탓하고있는 것입니다. 개혁자가 완벽할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완벽하지 못한 개혁자가 수두룩 합니다. 완벽한자만이 개혁을 외칠수 있는게 아닙니다. 좀 할퀴면 어떻습니까? 개혁이더 시급합니다. 칼부림 하는 자에게 따귀좀 때렸다고 화를 내는겁니까?
옳습니다.거짓된 사랑 때문에 기독교는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이제 이 땅의 기독교는 만신창이가 된 말기 암환자와 같아서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그러데도 여전히 부패하고 악한 자들을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감싸는 자들은 도데체 어디에 속한 자들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자들로 보입니다.그러한 자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더 이상 개혁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요나단님! 예향을 자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혁의 결과를 사모 하시면 그 과정 또한 너무 소중 합니다.할큄이라 하여 그 단어에 썸찟 하였습니다.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바라보면 어느 정도는 내려 놓게 되겠지요.모두 주 안에서 평안 하시길 ~~~
내용 좋습니다. 많은 것을 생각한 글로 읽었습니다. 샬롬!
JP님 반가워요. 님의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있게 풀어가신 반가운글을 잘 보았습니다. 저도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다보니 공감하는 가운데 조금은 공감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JP님(제가 간혹 이렇게 호칭했었죠?)의 사려 깊은 글을 다시보는 기쁨을 얻습니다. 이제 앞으로도 좋은글 많이 부탁해요~~~
아주 좋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