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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롬 5장 1-11)
성경본문: 로마서 5: 1-11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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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로마서 5장은 여러모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본문입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는 위치인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내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 한 번 이 중간 지점에 서서 지금껏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함께 내어다 봅시다.
지금껏 바울의 논지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자랑합니다.
로마인에게 보내는 이 편지의 서두에 나오는 첫 인사와 편지를 쓰게 된 배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 이모저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핵심 구절은 1장 16-17절에 있습니다.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6절 17절은 로마서 전체의 주제 선언과 같습니다.
그리고 1장 18절에서 4장 25절까지는 이 주제의 전반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란 명제의 해설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5장부터 8장까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부분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5장에서 8장까지 세 가지 기본 명제를 가지고 구원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은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게 오늘 살필 5장 1절부터 11절의 핵심 명제입니다.
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실패할 수가 없습니까?
5장12절에서21절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방법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무슨 얘깁니까?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주요 명제가 5장에 나오고,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마지막 세 번째 명제는, 6,7장을 건너뛰어 8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율법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던 그것을 성령이 성취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보장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6장, 7장은 다만 5장 20, 21절에서 내린 결론에 따라 올 수 있는 오해에 대한 답변입니다.
6장은 은혜로 된다면,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느냐?
7장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면 율법,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오늘 설교는 5장 1절에서 11절에 한정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탁월함, 은혜 받은 자의 삶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달리 말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구원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는 첫 째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오늘도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여름날, 아무리 더워도, 진노 중에서 지옥 불에 떨어져 고통당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첫째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립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객관적인 평화이고 하나님과 더불어서 갖는 평화입니다. 만나면 좋은 사람이 있잖아요.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요. 좋은 음식을 보게 되면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면 싫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오면, 그 시원하던 수박도 그냥 쓴 맛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계에 있어 평화가 있지 아니하면 산해진미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진노의 하나님 대신에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을 만나 보십시오.
주님의 피를 힘입어서 하나님 앞에 한번 나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린 자는 먼저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 쉼을 누리는 것이죠.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인해서 쉼을 얻습니다.
지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린 자는 양심의 고발에 대해서 답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고발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잘못했을 때 ‘네가 이런데도 하나님의 자녀냐?’고 고발해 옵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소유한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누린 자는 ‘그래 어쩌란 말이냐? 그래 내가 지은 죄가 여기 있다! 그래서 어째란 말이냐? 그것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피 흘려 돌아가시지 않았느냐?’
‘네가 아무리 그걸 가지고 나를 괴롭히려고 할지라도 나는 내 죄를 생각할 때마다 그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지 아니할 수 없단다.’라고 담대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하고 난 다음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은 가까운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자신도 죽을 것이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십시오.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스도 안의 죄의 용서를 경험하십시오.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줍니다.
죽음이 아직도 두려운 자는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려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린 자는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혹 불시착한다는 기장의 긴급방송이 기내에 울려 퍼지는 순간에도 거기 탄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를 노래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 다음에 오는 심판에 대하여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서부터 벗어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으로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넘어뜨리려 했던 그 손이 아니라, 야곱을 세워주신 그 손이 우리를 붙드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는 자들은 어떻게 이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고.”(2상반절, 표준새번역)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나온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 밝힙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이제는 진노하신 표정으로 우리를 보지 않습니다.
이제는 은혜로운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십니다.
더 이상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불러 보셨습니까?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우리는 담 밖에서 서성대는 자가 아닙니다. 기웃거리면서, 그 잘 먹는 부잣집 사람들 흘깃흘깃 보면서 침 흘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빨리 들어와.”라는 부름을 받고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간 자입니다.
하루, 하나님의 궁궐에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회복된 자녀로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같은 상에서 먹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보여주기 위해서 여러분 성경에는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울의 손자가 왕자들의 식탁에 앉아서 죽는 날까지 함께 그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사울의 손자는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 친구 요나단 생각해서, 하나 남아 있는 그의 아들을 자기 아들과 같이 대우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참 착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끝나면 성경이 기록된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바로 여러분과 제가 므비보셋처럼 대우를 받는 황송한 은혜의 대상인 것을 알도록 합니다.
다윗의 친구 요나단에 대한 의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실 그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한 번 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들어가서 사랑 가운데서 그를 뵙게 된 이 은혜의 자리에 지금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깨닫는 성도들은 뭐라고 찬양합니까?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라고 찬송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은혜의 자리에 서 있는 신분의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 때문에 가슴이 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로, 하나님과 더불어서 지금 화평을 누리고, 지금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을 뿐 아니라 여기서부터 장차 다가오고 있는 영광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현재 맛보는 축복에서 미래에 누릴 영광의 소망으로 금세 뛰어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이미 선언한 주님의 산상설교를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죄인은 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가까이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날마다 이 영광을 묵상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의 눈은 바라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속한 것이 여러분의 귀에는 귀중하게 들려지고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세상의 반짝거리는 것들에 정신이 홀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헛된 영광 때문에 현혹당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금 바라보고 사는 자들은 그것이 하잘 것 없고, 그것은 순간적으로 끝나 버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을 더 사모하면서 살게 됩니다.
더 이상 세상 친구들의 가치관에 따라서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비록 떨어진 옷을 걸치고 떨어진 신발을 신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답게 한 번은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세상 친구들이 뭘 환호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세상의 것들에 의해서 정신이 홀리지 않습니다.
은혜 입은 자는 그 눈이 하나님의 영광을 응시하고, 하나님 자신의 존재로부터 발하는 영광스런 빛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합니다.
그 영광은 한 날 온 누리에 가득하게 될 영광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실 것을 우리는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우리의 낮은 몸도 그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전능의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소망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썩음에 종노릇하는 온 우주도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동참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스럽게 나타날 날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썩음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충만한 자리에 이르길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공기가 탄식하고, 땅의 흙들이 탄식하고, 땅에 자라고 있는 초목이, 가축이 다 탄식하는 이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연약한 가운데 있고, 지금 병들어 있지만,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치닫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광스런 소망의 내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며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오염과 썩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영광스럽게 회복될 것을 말하는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믿는 집에 태어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 진리를 함께 믿을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함께 기뻐할 때에 한 식구가 되는 것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살고 한 식탁에서 같은 밥을 먹는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의해서, 같은 소망을 가지고, 같은 진리의 생명을 맛볼 때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신앙교육, 가정에서부터!”
이 놀라운 사실이 여러분에게 소망이 됩니까? 위로가 됩니까?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혜성이 충돌한다면 귀를 기울이지만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그 영광스런 소식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습게 듣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이 귀한 진리로 인해서 우리를 기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자랑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겐 이 영광스런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게 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평화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영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이 직면해야 하는 모든 측면은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 반대적인 면도 있습니다.
환난과 질병과 궁핍도 우리에게 아픔을 안겨 줍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사별도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습니다.
더 나아가 악한 세상 자체가 우리의 심령에 고통을 또한 안겨 줍니다.
세상이 주는 시련과 세상이 주는 핍박이 고통을 우리에게 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그 환난 속에서도 그 짓눌림 속에서도 즐거워한다고 선언합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환난이 영광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환난을 통해서 자랑할 만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되어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앎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환난을 만나면 그냥 찬송이 나옵니까?
환난을 만나면 무심코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당할 때 고통스러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기뻐하는 자가 아닙니다.
어려움이 좋아가지고 빙그레하면 그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정신병원에 가야할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는 환난을 기쁨으로 여길 뿐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우리는 알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때문에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 할 뿐입니다.
어떻게 인내를 만들어 냅니까?
시련을 당하면 우리는 더욱 자주 주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더욱 간절히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당하기 전보다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에 내 실상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그걸 가지고 못 참느냐고 말하기 전에 내 문제로써 한번 부딪혀 보십시오.
환난을 통해서 평생 믿어온 우리 자신도 별것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환난당한 것이 내게 복이라 이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우리를 더욱 더 주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서 환난은 우리를 정금같이 빛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가운데 설 때에 은혜 받은 자와 은혜 받지 못한 자가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내는 우리가 성도됨을 입증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고, 인내는 품격을 낳고, 달리 말해서 인내는 우리가 누구인지 그 진가를 드러내게 한다는 것이죠.
모든 것이 다 잘될 때는 미소를 띠고 누구라도 다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어려워지고, 아무 것도 내게 없는 그 때에도 나는 그리스도를 인해서, 구원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2-37)
“무화과나무에 실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고 나귀가 없을지라도 밭에 식물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구원해 주신 그 여호와 한 분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는 자가 신앙의 성숙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시련은 우리의 실상을 밝혀줄 것입니다.
시험 자체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인 것을 입증할 뿐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2장의 논지입니다.
또한 시련은 하나님께 대한 내 사랑이 입증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첫 편지에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뭐라고요? 믿음의 시련은 우리에게 장차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부르셔서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시 고난을 받는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준만큼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데 있어 그리스도만큼 빚으실 것입니다.
“다만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노니.”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지극한 하나님의 기쁨을 맛보게 하는 장을 열어 주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 여러분, 많은 신앙의 사람들이 지극한 고통의 환난 속에서 그 마음에 부어지는 성령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환난은 우리를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황 속에 우리가 이르게 될 때에, 사람의 생각을 초월한 위로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맛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우리의 소망이 실망하지 않을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부은 바 됨이라고 밝힙니다.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한 부분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 여러분,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슴에 부어졌던 적이 있습니까?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써 하나씩 꼽아보는 것이 아니라, 말로써 표현할 수도 없고 내 삶 속에서 입증되는 것도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부어진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 중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가슴 속을 벅차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누가 아무 말하지 않아도 내가 느끼는 사랑이고 그 사랑에 녹아드는 사랑입니다.
하늘 영광 뒤편에서 우리가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의 가장 극치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빛을 잃고 말 것입니다.
지극히 감격스런 체험을 넘어서 여기 사도는 지극히 분명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증거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사건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환난 가운데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속 사랑을 더욱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어떤 처지의 우리를 사랑하셨나요?
여기 오늘 우리 본문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맛보는 은혜의 체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사건임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2천 년 전에 입증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가 대책이 없었을 때에, 여전히 죄인 되었을 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제 10절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
대책이 없고 죄만 지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원한을 품고 살았던, 하나님에 대해서 적의를 가지고 있었던 우리를, 하나님은 그 사랑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의 사랑하시는 자 삼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를 그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삼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면 이제 하나님과 화목 된 우리가 그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이죠?
역사 속의 십자가를 통해서 심령 속의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인 사랑과 주관적인 사랑이 여기 융화되고 있습니다. 과거와 현재가 조화되고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그가 죽으실 뿐 아니라 환난 중에 있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은바 되는 이 영광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전에 아들의 죽음으로 그의 사랑을 입증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성령의 증거를 통해서 그의 사랑을 쏟아 부어 주셔서 확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받은 성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을 알기에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제 9절과 10절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금 받은 자는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을 것을 내어다 보고 있습니다.
여기는 미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장차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는 또한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이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면, 이제 화목케 된 우리에게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서 얼마나 더 풍성한 놀라운 축복을 주시겠느냐고 바울은 논증합니다.
아들의 죽음을 치루고도 구원하셨다고 하면 이제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은혜 받은 백성을 장차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화목된 자로서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있을 때에 그 분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5장 전반부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최종 묘사를 1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롤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현재의 고통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바울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영광의 소망 가운데서 기뻐하는 것을 바울은 앞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기쁨을 우리가 누릴 영광의 극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2, 3, 11절은 다 같이 즐거워 한다는 말 기뻐서 뛴다는 말을 합니다.
은혜 받은 자의 최종 특징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 자신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영광을 보고서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입은 자의 큰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더불어서 평화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은혜 안에 있는 특권을 누려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하십시오.
환난 가운데서 즐거워하십시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장차 구원받는 것을 내어다 보십시오. 하나님으로 인한 즐거움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하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평강과 기쁨의 삶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이 병 낫고 고침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서 화목하게 되는 평강을 여기에서 누리고, 결과로 기뻐하는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영광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