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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陽明學)과 강화학파(江華學派)
양명학은 명나라의 王守仁에 의하여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왕수인(1472-1528)은 중국명나라 중기의 유학자로 호는 陽明이다. 왕수인은 송의 육구연(陸九淵)과 명의 진헌장(陳獻章)의 心學을 계승하고, 주희의 격물궁리(格物窮理)를 추구하는 주지주의적인 理學과 대립하는 간명직절(簡明直截)한 심학을 완성하고 치양지학(致良知學)을 창조하였다.
1. 양명학의 개요
왕양명의 양명학 내용으로는 一元論, 致良知說, 拔本塞源論 등이 있는데 일원론은 왕수인이 28세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고, 중앙정부의 부패와 맞서 싸우다가 龍場으로 귀양가는 등,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깨친것이 바로 그의 心卽理 사상이었다. 朱喜가 존재와 심성을 理氣로 이원화하는 데 반하여 왕수인은 理는 氣의 條理요, 기는 이의 운용이라 하여 理卽氣로 일원화한다. 또 주희같이 마음의 理와 사물의 理를 서로 應하는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마음이 곧 理라 하여 相卽하는 관계로 파악하였다. 이런 결과로 지식과 실천에 있어서도 지식이 선행되고 실천이 뒤따른다는 이른바 先知後行的인 주희식의 주지주의를 배격하고 知行合一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행합일에 대하여 知와 行은 마음을 주체로 하기 때문에 知는 心知가 되고 行은 心行이 된다고 보았다. 지식과 실천은 心을 주체로 하여 성립되기 때문에 知의 주체나 行의 주체가 모두 心에 의하여 통일되는데 그러한 주체를 그는 良知라고 보았다. 양지는 지행의 주체로서 스스로 결단하고 판단하는 칼날이라고 하였다. 그가 格物을 주희처럼 객관적인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고 양지를 실천적으로 바르게 해석한 것도 주체로서 양지가 우리에게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왕수인의 致良知說은 인간의 성품에는 천연의 良知가 있는데 그것을 온전하게 기르고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지는 인간성에 자연으로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확대한다는 것이다. 양지의 現性을 믿고 그것을 최대한 발휘한다면 사욕은 소멸될 것이며, 희로애락 등의 감정은 본래 우리에게 구비되어 있으므로 그것의 자연스로운 발로가 양지의 작용이라 하면서, 양지는 善이라 하고 七情을 惡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단지 칠정에 고착하여 집착한다면 그것은 欲이 되어 양지는 은폐되고 만다고 하였다.
拔本塞源論은 사욕을 근본으로부터 뿌리뽑고 근원으로부터 막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천지만물은 一體인데 그것은 천지만물일체의 仁이다. 둘째, 만인은 양지를 공유한다. 셋째, 양지는 영원하여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왕수인은 仁體로써 천하를 교화하고 사욕을 극복하며, 그 폐단을 제거하여 본래의 마음을 회복함으로써 大同의 세계가 전개된다고 하였다.
왕수인은 만물일체의 仁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주체성 존중과 만민 평등의 대중적인 학문이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존중사상 또는 민중존중사상은 혁신적인 유교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양명학좌파들에게 실천적으로 계승되어 서민층인 목수, 나무꾼 등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이러한 良知學의 대중화는 중세적인 신분주의에 대해 타격을 주었다. 양명좌파에는 徐越이 있고 그의 문인에 안균(顔鈞)이 있으며,그의 제자에 何心隱이 있었다. 하심은과 그를 숭배한 이지(李贄)의 사상은 우리나라 양명학파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하심은은 공동생활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원리를 信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지의 {童心說}도 우리나라 양명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동심설}에서 "동심은 거짓을 버리고 순진한 것이고, 최초 한 생각의 본심이다" 라고 하여 絶假純眞을 주장하였고, 그것은 양지를 의미하므로 假人, 假言, 假文, 假道學을 철처히 배격하였다. 또한 {焚書}에서 "남자의 정신능력은 모두가 훌륭하고 여자의 능력은 모두가 졸렬하다고 어찌 말하겠는가?" 라고 한 것은 남녀평등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2. 양명학의 수용과 전개
우리나라에 왕수인의 {傳習錄} 이 전해진 것은 이미 왕수인이 살아 있을 때인 1521년(중종16)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양명학은 자유주의, 개성주의 경향과 주자학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이황(李滉), 박세채(朴世采), 한원진(韓元震) 등에게 계속 배척을 받았으나 남언경(南彦經)과 이요(李瑤) 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허균(許筠)과 이수광(李수光) 등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허균은 양명학, 특히 좌파인 이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지의 {焚書} 를 읽고 이지처럼 유교적인 禮敎를 반대하며 이지의 {동심설}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허균이 "남녀의 정욕은 천성이며 성인의 예교는 천성보다 높지 않으므로 어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나 {遺才論} 에서 "하늘이 부여한 재주란 모두 고르게 되어 있는데, 양반과 과거로써 사람의 등용을 한정하니 늘 인재가 없는 병통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며, 나는 고금에 걸쳐 서얼이라 하여 어진이를 버려두고, 어머니가 개가하였다 하여 인재로 등용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 라고 한 것과 또한 그의 {홍길동전} 등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명학을 수용한 사람은 장유(張維)와 최명길(崔鳴吉)이다. 장유의 {谿谷漫筆}은 우리나라 양명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계곡만필}에서 "양명과 백사를 평론하는 자는 아울러 禪學이라 한다. 백사학은 진실 정에 치우쳐 적(寂)으로 흐른 흠이 있었으나, 양명의 良知訓은 실지의 공부를 오직 성찰과 확충에 두어 늘 고요함을 즐기고 움직임을 싫어함은 배우는 자가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백사학과는 절대 다르다. 단지 궁리와 격물을 논한 것이 정주(程朱)와 아주 다른데 이것은 그 학문의 길을 다르게 세웠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라 하고, "우리나라는 志氣라고는 없고 단지 정주학만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고 존중할 뿐이다"라고 하여 實心 있는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학문을 한다고 공격하였다. 또 {계곡집}의 人心道心說에서 "대체로 인간의 본성도 이 마음이요, 감정도 이 마음이요, 육체도 이 마음이요, 생명도 이 마음이요, 천리도 이 마음이요, 인욕도 이 마음이다" 라고 한 것은 마음이 곧 천리라는 말이며, "마음이 인식하는 바는 理이다" 라고 한 것도 철저한 心學의 처지를 견지한 것이다. 최명길은 장유와 사상과 행동을 같이한 사람인데, 그는 아들에게 "학문하는 데 말 많이 할 것 없고, 스스로의 마음 참된 것과 망령된 것을 제 스스로 알라"고 한 것은 良知獨知를 노래한 것이다. {寄後亮書} 는 그의 양명학설을 가장 뚜렷하게 표명한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은 정제두에 이르러서 우리나라 양명학파가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정제두(1649 - 1736)는 조선의 후기의 유학자, 양명학자이며, 호는 하곡(霞谷)이다. 20여세 때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당시의 도학은 정통주의적 신념에서 양명학을 이단으로 배척하였으나, 그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으로 양명학의 이해를 체계화시키고 양명학파를 확립하였다. 당시의 학자가 주자학을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것으로써 파당을 짓는데 이용하였으므로 정제두는 {存言}에서 "오늘날에 와서 주희를 말하는 이는 주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희에 기탁하는 것이고, 주희에 기탁하는 것이 아니라 주희를 附會하는 것으로 자기 생각을 성취하는 데 주희를 끼고 위엄을 짓고 그 私計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정제두의 학문은 주자학처럼 이원적인 相應論理에 의거하지 않고 相卽論 理의 일원론이었다. 이 일원론적 사고는 理氣와 性情, 人心과 道心, 知와 行, 心과 理, 모두가 서로 상즉하는 관계로 설명되며 그 모든 것은 心體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理란 주희처럼 사물의 조리나 이치가 아니라, 그것은 내마음의 양지라는 것이다. 사물의 이가 그에게는 생명적이며 주체적인 것이었다. 그는 "氣 또한 理요, 理 또한 氣이다. 그래서 왕수인은 양지가 이른바 天理라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정제두는 理氣 역시 일원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그것은 마음이요, 마음은 氣이므로 心에 의하여 통일되고 있다고 하였다.
정제두는 心卽理에 바탕하여 양지는 천리요, 천리는 양지라는 良知論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기의 理가 주희의 理처럼 객관적인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이른바 卽物窮理가 아니라, 내 한마음은 사물에서 나가는 것이므로 나의 주체적인 양지를 객관적인 사물에서 실현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두의 양지가 현실화된 것이라 보고 그 본래성이 곧 양지라 하였다. 그는 "마음의 본질은 마음의 본연이요, 양지의 체이며, 마음의 감정은 마음의 발현이요, 양지의 현실성이다. 따라서 性은 양지의 體요, 情은 양지의 用이다" 라고 하였다.
정제두는 주희의 理를 物理 혹은 헛된 條理라고 반대하면서 자기의 理는 삶의 이(生理), 삶의 도리(生道), 삶의 에너지(生氣)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性이란 곧 이의 본체요. 삶의 주인이다. 우주의 근원이요. 사람의 생명이며, 궁극에 모인 것이며, 만유의 통일이다. 이른바 命이요. 性이며, 神이요. 心이다" 라고 하면서도 "仁이란 삶의 이치의 주인이며 능히 발현하는 것이다"라 하여 生理의 발현이 인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그의 生理란 이목구비라는 육체와 양지로서의 정신적인 것을 통일한 인간본성의 규명이라 하였다.
중국의 양명학파가 신분주의를 타파하고 일반 서민대중에게 파급된 것과는 달리 정제두에게서는 그러한 혁명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이 점은 그가 만든 家法의 몇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비첩의 무리는 천대하고 첩의 예로 대하지 말 것. 둘째, 양반 친척은 한당이 되고 아랫것들이나, 잡된 무리가 이간시키지 못하도록 할 것. 셋째, 주인을 높이고 노비를 억압할 것 등이다. 이와 같이 그의 가법은 왕수인이 내세운 인간의 평등과 존엄사상을 부인하고 오히려 본질적 신분주의를 옹호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당시의 정주학적인 허위는 미워하였으나 사상적인 혁명성은 없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수용된 양명학의 사상은 실학에서도 그 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실학파 가운데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 등 이른바 북학파 혹은 利用厚生파의 중심인물들은 양명학에 의하여 사상적으로 무장한 것이라 간주된다. 홍대용이 {의산문답}에서 虛와 實의 대결에 관하여 말한 것이나 그의 사상중에 대동사상과 시민평등관에 근거한 교육제도의 주장도 왕수인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다. 박지원의 한문소설에 일관된 것은 이지와 공안파 문장이론이며, 일상용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장법도 이지가 이미 {동심설}에서 주장한 것이다. {양반전} 혹은 {허생전}에서 허위가 탈을 벗기고 지도자들의 假心을 폭로하고, 신분주의를 배격한 것은 모두가 {동심설}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다. 박제가는 그의 {북학변}에서 理學보다는 誠意가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명나라말 유종주의 愼獨·性宗心學과 연결되고 있다.
3. 강 화 학 파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학문을 하며 양명학을 천명할 때 그의 자손과 이광사(李匡師)·이광려(李匡呂)·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등의 종형제와 심육(沈육)·윤순(尹淳)·이진병(李震炳) 등이 모여들어 하나의 학파가 형성되었고, 200년간 계속되었다. 역사학에 있어서는 이종휘(李鐘徽)가 良知史觀에 입각하여 역사를 파악하였다. 그들은 왕수인의 양지학·심학을 기초로 하여 史學과 正音·서예·시문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양지·정서· 의지를 함께 통일한 것이었고, 참된 것을 구하고 헛된 것을 버리는 양지학이지만 정치관으로 나타날 때에는 眞과 假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老黨의 假大義 배격을 특색으로 하였다. 그들은 모든 학문에서 양지를 상징화하고 이미 비인간화한 사회에 도전하면서 실학파와 제휴하였는데, 특히 실학파 중에서 북학파는 양명학을 받아들인 자취가 뚜렷하다. 그들의 학문경향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주체적인 양지사관은 이종휘로부터 이광사의 큰아들인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과 이광명의 아들 이충익(李忠翊)의 {君子之過}와 이면백(李勉伯)의 {감서}·{海東惇史}, 그의 아들 이시원(李是遠)의 {國朝文獻} 과 그것을 토대로 한 이건창(李建昌)의 {黨議通略} 등의 업적에서 빛나고 있다. 신채호가 이종휘의 사관을 "노예사상으로부터 주체적 사관을 수립하였다"고 한 것처럼 그들은 獨知·良知사관에 근거하고 공명을 원칙으로 하였던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의 언어인 정음의 연구 또한 주체성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는데, 이광사의 정음연구를 이영익(李令翊)과 이충익이 계승하고 정동유(鄭東愈)와 유희(柳僖)가 더욱 발전시켰다.
세째 백하(白下)의 서예는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圓嶠體)로 창조되고, 이긍익·이충익과 특히 정문승의 서화는 산수화에 뛰어나 {근역서화징}에 소개되어 있다.
네째 이광려·이충익·이건창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의 性靈文學에 기본을 두고 있다. 신대우의 {이참봉문집서}에 의하면 이광려의 글은 성령을 발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충익의 {이참봉집서}에 의하면 문장됨이 선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도 바로 공안파의 문장론의 기본이었다. 그는 또 글은 반드시 慧識을 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혜식은 양지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할 수 있다.
다섯째 강화의 양명학은 실학과 제휴하였다. 이상학(李象學)은 정약용을 연구하였고 신작(申綽)은 정약용과 교우하였으며, 정문승은 농서에, 정후일(鄭厚一)은 수학연구에 조예가 깊었다. 이들은 양지를 상징화하여 문학·언어연구·서예·시화에서 혹은 실학에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4. 양명학과 광복운동
이 양명학은 강화도에 뿌리내리면서 문예 혹은 실학 및 사학으로 상징화되거나 그것들과 제휴하면서 한말에 이르러서는 광복운동과 유교신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양명학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는 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송진우(宋鎭宇) 등이다.
박은식은 {왕양명선생실기}와 {유교구신론} 등을 지어 양명학을 천명하였다. {유교구신론}에 의하면, 첫째 유교가 종래 민중사회에 보급하는 정신이 부족하였고, 둘째 유교는 교화에 소극적이며, 세째 주자학은 너무 번거러워 이해하기가 어려우므로 간단절요한 양명학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는 과감한 실천을 더욱 강조하여 한국적 양명학을 창조하였다. 그의 {왕양명선생실기}는 양지설과 발본색원론, 교육론 등의 이론적인 개설이 아니라 실천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서술하고 소개한 우리나라 초유의 양명학 연구서이다. 그는 양명학적 처지에서 과학의 비도덕화에 의한 근대과학의 병폐를 지적하였다. 정인보의 {陽明學演論}은 우리나라 양명학 연구에 있어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저술이다. 이 책의 근본 내용은 조선혼의 환기에 있었다. 한갖 양명학 연구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조선혼인 '우리의 얼'을 고취하여 광복을 꾀하자는 것이다. 그는 과거 수백년간의 학문은 오직 유학이었고 또 程朱만을 신봉하여 그 결과로 하나는 그 학설을 받아 자기의 편의를 꾀하려는 사영파가 생겼고, 다른 하나는 그 학설을 배워 중화적전을 이 땅에 드리우고자 하는 존화파가 생겨나는 폐단이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평생을 몰두하여 심성을 강론하였으나 실심과 얼러볼 생각이 적었고, 일세를 휘동(揮動)하여 도의를 표방하였으나 자신밖에는 볼 줄 몰랐기에 세상풍습이 쇠미함에 따라 그 학은 실학뿐이었고 그 행동은 假인지라 온 세상에 가득찬 것은 오직 허학이요, 假行 뿐이었다고 단정하였다.
그는 또 강화학파를 계승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으며, 양명학의 주장은 致良知라 하고 사물에 나아가 그 理를 궁구하는 방법을 배척하였다. 정인보의 공적은 처음으로 조선 양명학사를 밝혀 놓았다는 데 있다.
[출처] 양명학(陽明學)과 강화학파(江華學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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