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현근 시 모음 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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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에게
양현근
덜어낸 무게만큼 가벼워진 세상
주고 나서 언젠가 채울 수 있음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고 싶다
넉넉한 마음들이 모여
저만큼 숲이 되어 우거질 수 있다면
비어있음으로 서로의 허물이 된들 어떠하랴
촉촉한 기다림으로
서로의 젖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 또한 작은 행복이지 않겠느냐
사랑이란 정녕 가슴 뜨겁고
오래 기다려도 뒤척이지 않을
이세상 가장
아름다운 기도임을 알기에 노래하리라
푸른 숲에 기꺼이 스며들리라
그 숲에서 어제의 습기를 털어 말리며
내가 외울 수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하나둘 불러내리라
때묻지 않은 풍경 속으로
그리운 이름들을 불러내는 동안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노라고
가만 가만 얘기하리라
사랑하는 이여
오늘은 국어 교과서처럼 너를 읽고 싶다
너를 말하고 싶다
가난한 나의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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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새
양현근
눈발이 날리는 늦은 오후
멧새 한 마리가 가지에서 졸고 있다
새는 꿈속에서도 날아다니는 지
나뭇가지가 수시로 출렁거린다
그 아래 몸을 말리던 낙엽 몇장도
바스락 거리며 잠꼬대를 한다
창문 너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들킨 건지 새가 들킨 건지
부르르 떨며 설익은 꿈을 털고 있는 새
미안하다
꽃잠을 방해해서 미안하다 돌아서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슬픔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거실의 또 다른 새 한 마리
고개를 떨구고 꾸벅 꾸벅 졸고 있다
슬픈 빛깔의 꿈을 꾸는지 어깨가 깊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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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오라
양현근
사는 것이 아직은 물빛이던 시절
이승에 준비 없이 머문 업業의 속죄를 위하여
가슴 한 쪽을 볕바른 희망 쪽에 심는다
더 이상 화려한 슬픔은 없으리라
사랑아,
이제 너는 그 길로 오라
각혈하는 세사世事를 지나
기다림을 끄고
미혹을 끄고
네 마음 안의 허깨비 불을 끄고
늘 만성숙취에 시달리는 밤거리를 끄고
오라, 마음으로 이르라
쉬이 지혈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리움이 촘촘한 하늘은
마음 한 잔으로도 충분히 따뜻하리라
불 꺼진 창이 위독하다
오라, 사랑아 너는
바람소리보다 먼저 아침 창을 두들기는
부신 햇살로 오라
그 길로 이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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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에 가고 싶다
양현근
해종일 제 몸 허물어
그 바다는 자유라 한다
물살은 쉬임없이 제 무게만큼의
노래를 부르고
먼 하늘 돌고 돌아
은비늘 세우는 파도 소리∼
그 바다에 가고 싶다
그 바다가 보고 싶다
온천지 출렁임으로 숨가쁜
가슴 귀퉁이를 지긋이 잡아당기면
모래언덕엔 온통 부음뜬 조개들의
헛기침만 사각대고
아, 파도소리 쉰 바람소리만
팔락파락-파도파도
파파파∼ 도
바다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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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양현근
사는 일이 쓸쓸할수록
우리 살아가는 동안만큼은 파란 풀잎입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아직은 켜켜로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온기없는 손금들만 저리 무성할수록
제 몸을 스스로 밝히는
불땀좋은 사랑
서로의 젖은 어깨 기대며 돋아나는
들풀들의 단단한 노래가 부럽습니다
치렁치렁 내걸린 어제의 훈장과
오늘을 매단 장식이 아니더라도
지상의 엉성한 일상을 빠져나와
젖은 하늘을 다독여 줄
그런 진득한 사랑하나 키우고 싶습니다
부질없는 소주 몇 잔에도
외짝가슴은 이리 따뜻해지는 것을
쉬이 덥혀지지 않는 세상을 지나
오래도록 수배중이던 사랑
이제 그 섬을 찾아 떠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근처의
그런 사랑이면 족할 듯 싶습니다.
피안의 언덕은 먼동 트기 전이고
극락정토 예서 멀어도
아직은 모든 것이 극진한 탓입니다
기억하건대
세상은 아직 파란 풀잎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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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통증
양현근
1
길 건너편 똥개가 컹, 어둠을 한입 물면
온 마을의 개들이 일시에 일어나
컹컹, 적막강산 긴긴 밤을 마구 물어뜯었다
그럴 때마다 아랫마을 불빛이
숲을 질러 처마 밑까지 왔다
장독대, 폭설, 고요
등허리가 시린 문풍지는
도란도란 솔바람소리를 베고 잠이 들고
길 잃은 눈발이 개집까지 마구 들이치는 밤
마루 밑 댓돌에는 밭은기침소리 고이고
눈이 침침한 금성라디오가 혼자 칭얼거렸다
2
소년은 꽁꽁 언 잠지를 딸랑거리며
얼어붙은 논두렁 사이를 펄럭거렸다
먼 저녁이 매달리던 참나무에게 돌팔매질을 날려대면
폭설은 마을의 길이란 길 다 지우고
아랫녘으로 가는 도랑의 물소리만 풀어놓았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막히면
오늘의 날씨 큰 눈 왔음, 길이 지워졌음
그렇게 일기장에 적었다
소여물이 끓던 사랑방 아랫목
할아버지의 걸걸한 기침도 화덕처럼 끓고
외롭고 심심한 손가락이
장지문 여기저기 숨구멍 뚫어가며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3
낡은 기와지붕이 고드름을 하나, 둘 매다는 동안
소년도 대나무처럼 몸의 마디를 키웠다
겨우내 눈발을 뒤집어쓴 대숲은
어디론가 보내는 울음 소인을 쿵쿵 눌러대곤 했다
아직 산골의 춘삼월은 멀고
산 그림자는 마을 어귀까지 내려와
밤새 호롱불 깜박거렸다
돌팔매질로 멍든 참나무 껍질이 아무는 동안
눈은 몇 번이고 쌓였다가 녹고
그렇게 겨울이 말없이 오가고
기침소리도 녹았다 풀렸다
4
궁금한 강바람이
구멍 숭숭한 돌담에 휘파람소리를 내려놓고
봄기운이 얼음 계곡에 숨구멍을 냈지만
어느 해부터 할아버지 밤 기침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통증은 소년의 옆구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꿈을 꾸면 왼쪽 갈비뼈가 따라 올라오고
오래 숨겨둔 기침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울음의 마디를 쏟아내곤 했다
아프고 시린 말들이 번식하는 계절이었다
5
며칠 전부터 왼쪽 허리가 시큰거리더니
왼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푸른 말발굽으로 내달리던 시절
드넓은 풀밭을 겁 없이 질주하다 자주 넘어진 탓일까
사랑한다 사랑한다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엎지른 탓일까
등베개를 집어넣으니 비로소 균형이 잡힌다
세상과의 간격에는 적어도
등베개 하나 이상의 거리가 있다는 걸 안다
밤이 되자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마른기침, 눌러 참을 수 없는
왼쪽 허리쯤에 도착한 그 저녁의 폭설이여
차마 그리운 통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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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그리움끼리
양현근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아픔은 제아픔끼리
시린 세월 감아 도는
제 키높이 만큼의 하늘을 열라
차마 말로는 다하지 못했던
남모르게 숨긴 이야기도
이제 세상으로 향한 작은 문 열어
파아란 바람에 방금 헹구어낸
마알간 햇살이 되어라
오래 묵힌 바램과
끝내 아껴둔 눈물로도
넉넉한 사랑이 되어
그러하리라
정녕 그러하리라
그 향기 그 빛깔
그 아픔마저도
우리들의 하늘은
끝내, 가득 채워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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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근처
양현근
밤늦은 시간 버스정류장에서
취객 몇이 비틀거리는 방향을 서로 가누고 있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버스는 올 것인지
기다리는 버스는 대체 오기나 할 것인지
알려주거나 물어오는 이도 없고
누군가는 기다림을 접고 정류장을 빠져나가고
또 누군가는 무작정 기다린다
이를테면 누군가의 환한 이마,
누군가의 서툰 기별이 사뭇 그립기도 한 시간
발을 헛디딘 활엽들이 사그락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불빛을 세우기 위해 차도로 내려선다
목을 길게 늘려도 계절은 아직 제자리
한 계절 돌아와도 다시 제자리
한때 누군가가 그토록 간절했던 시간들
환했던 우리들의 스물이거나 서른하고도 몇이거나
이제는 모두 서둘러 떠나간 정류장에서
세상과 불화한 담배꽁초만 수북하니 뒹구는데
맨발로 서 있던 기다림의 근처
바퀴 울음소리 캄캄하게 젖어가도록
아직도 망설이는 사람들 그믐처럼 깊어가고
가로등 그림자가 어두워진 발등을 베고
고단한 몸을 가만가만 누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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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양현근
1
어제 저녁부터 불어오던 비바람도
어느 사이 조용해지고
그러므로 이제 가벼워져도 된다
너의 푸른 등에 깃들여
슬픈 구멍을 내던 노래가락이며
수상한 발자국들도
이제 묻어두라
사랑한다는 이유로 시도 때도 없이
밑둥 흔드는 일은 없으리라
더 이상 마른 가지에 엉겨붙어
씨알 굵은 슬픔을 내모는 일도 없으리라
2
간밤에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공사한다고 파헤쳐 놓은 골목 어귀에는
뻘밭같은 삶의 이력들이
가득 넘쳐나고
그 옆에서는 잘못 내디딘 발걸음이
신열 오른 풍문들을 방목하고 있다
아직은 헐거운 인연의 뿌리여
한 잎의 푸른 사랑이여
꼭 너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사는 일이 말의 다짐일 뿐
3
저녁이 조금씩 두꺼워지자
새떼들이 노을을 물고 어디론가 날아오르고 있다
갈 곳이 있기는 한 것일까
저녁답은 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기 마련이고
창가에 오두커니 물러앉아 있어도
오늘은 흔한 전화 한 통화 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그럭저럭 잘 버텨온 셈인가
가라, 멀리 뒤돌아 가라
알 수 없는 예감이 먼저 사막을 건너고 있다
4
돌이켜보면 세상의 언약이란
그저 말의 약속이라는 것
이제 말을 말로서 벗어놓기로 한다
밤새도록 창 밖에서는 느티나무가 게으르게
이파리를 흔들어대고
잠깐 한 눈을 파는 사이
모기 한 마리가 남루한 어둠속으로
훌쩍 투신하고 있다
내가 무심코 쏟아내었던 음표들이여
사는 일도 저렇게 덜어낼 수 있는 일이라면
5
한 때는 둥근 음표가 밤새도록
만조의 깃발을 세운 적도 있었지
나무 한 잎에 불던 바람이여
나무 한 잎을 연모하던 푸른 조바심이여
밤새도록 나를 연주하던
악보같은 한 여자여
오늘 밤에는 차마 너를 들여다 보지 못하고
커피포트 가득 물을 끓인다
그 옆에서는
새벽 세시를 알리는 시계추 소리가
낮은 포복으로 착지하고 있다
6
너에게로 가는 길에는
늘 별들이 반짝인다
다가갈수록 왈칵 쏟아지는 속살이다
너는
기억의 먼발치에서
세상의 가장 밝은 빛을 깜박이며
그 어둠을 빛나고 있다
오늘밤에는 너에게 가겠다
그러므로 밤늦도록 잎잎의 창문을 열어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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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양현근
우리는 너를 기꺼이 사랑이라 부른다
가슴이랑까지 들이찬
풋풋한 노래와
단단한 뿌리내림으로 아름다운 하늘
그 뜨거움으로
살아있었구나, 진정 살아있었구나
그리하여 면벽의 시간들
지친 햇살들이 마음놓고 꺾어 쉴 수 있는
나무가 되어
넉넉한 숲이 되어
저리도 가슴 따뜻한 온기와
오래 변하지 않을 풍경들을 구워내고 있구나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이 어두울수록
든든한 믿음 하나로
오래 변하지 않을 말씀의 잎맥과 실뿌리와
오래 싱싱할 부름켜를 세워
다박솔 향기 무성하도록, 너른 가지 휘도록
한량없이 피워내는 초록빛 희망들
저리 속마음을 풀어내고 있구나
발뒤꿈치 높이 들고
새벽을 부르는 단단한 외침들
숲이라 부른다
결 좋은 사랑이라 이름한다
떨리는 몸짓으로
그 숲에서 노래하리라
오랫동안 너의 이름을 부르리라
그리하여, 오래 참아 둔
저 웃음소리마저 짙푸르도록
단단한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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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양현근
기다림의 섬돌 위에
오늘은 예기치 않은 눈이
소락소락 내려
미처 여물지 않은 마음자리
다잡지 못한 여린 동심은
댓바람에 달려나가고
만산편야에 지천으로 쌓이는
순백의 설편雪片 그 빛부심에
가슴끝 적셔오는
하마득한
그리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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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침에
양현근
푸르른 날
올곧은 양심과 눈어림만으로도
한 세상 떠돌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시절
현기증 나는 공전을 지나
그 시절들의 열망은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키 작은 날부터 키 큰 날에 이르기까지
가슴복판을 지나도록 뒤척이는 풍경들이여
눈을 뜨라 눈을 뜨라
나무들아 등 시린 잎맥들아
어디서고 빛나는 희망들아
우리가 닿아야 할 길은 아직도 머언 날들
오늘은
우리에게 남겨진 날들의 바로 그 첫날이라는데
창 밖의 그리움들 조심스레 꿰매어가며
풍금소리 은은한 꿈의 광맥으로
가거라 가거라
빛나는 희망하나 갖고 싶거든
세상의 온갖 것들이 숨죽일 무렵
천지사방 따뜻한 물소리로
당당하게 흘러내리거라, 이제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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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귀가
양현근
쑥뜸, 링게르, 가쁜 호흡, 기침소리
아버지를 정의하던 낱말들이 파랗게 질린다
링게르 수액이 똑똑 떨어질 때마다
아버지가 평생 길러 온 가쁜 바람도 들락날락거린다
담당 의사는 곧 꽃대궁이 질거라 했다
한 번 진 꽃은 다시 피지 않을 거라 했다
바짝 마른 혀끝이 천수답처럼 갈라지던 날
꿈속에서도 나뭇단 한 짐 야무지게 묶으시는지
못자리 적당한 물때라도 봐주시는지
젖은 들판이 철벅거리고 거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오랜 간병에 지친 어머니 한참을 흐느끼신다
아버지 그 울음소리를 밟고 높은 계단을 신으셨다
허공을 놓친 새소리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온기를 잃어 가는 손바닥에 바람이 지나간 길이
깊게 패여 있다.
그 길 위에 당산나무 한 그루 쓰러진다
잎에 묶여 있던 바람이 쏟아져 나온다
참, 외로우셨구나 그 바람을 몰고
아버지, 환한 언덕을 넘어
맨 처음 나선 그곳으로 훌훌 귀가하셨다
그 날 밤 당산나무에서 풀려 난 바람이
아버지가 벗어놓은 흰 고무신의 신발문수를 재고 갔다
낙엽이 길바닥을 끌고 가는 소리가 밤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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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만수리의 書
양현근
소쩍새 소리가 소년의 밤잠을 빼앗아 가던 겨울밤이면
장독대 위에는 수북하니 폭설이 쌓이고
마루 밑의 개집에는 바람소리만 가득 고였을 테지요
외양간의 암소가 긴긴 밤을 되새김질하는 사이
허연 입김은 겨울 콧구멍을
허락도 없이 들락거렸을 테지요
산발치에서 수꿩이 지극하게 제 식구를 불러내노라면
밤나무골 서마지기 옥수수밭에는 농무가 자욱하게 번지고
뒷마당 병아리떼는 노란 목숨을 삐약삐약 쏟아내었을 테지요
안산에 혼자 번지던 진달래 꽃불은 또 어떡하구요
논고동이 맨발을 가만 내밀던 순간의 고요와
졸음에 겨운 못줄이 수굿하니 논물에 잠기는 한 때라니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감자와 심부름하다가
몰래 맛 본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와
양조장의 구수한 술밥은 그새 누가 다 먹었을까요
감나무에 쓰르래미 앉아 비로소 여름은 팽팽해지고
작은 손이 덮치는 순간 휑하니 빠져나가는 빈 허공을 보았지요
꼴베러 나갔다가 흠뻑 비맞고 고무신 철퍼덕거리는데
토란잎을 또르르 말던 물방울이 눈가에 와락 엉기는 겁니다
그 품새에 놀라 일제히 논물로 뛰어드는
개구리의 혼연일체며 서늘한 가을색이 막 번지는 산능선을
오래 건너다 보았습니다
호랭이가 물어갈 놈 하면서 홀로 되신
할머니의 긴 곰방대가 재떨이를 연신 탕탕거리면
콩꼬다리에서 토닥토닥 어린 콩알들이 터져 나오고
엄마를 찾는 새끼염소의 울음이
긴 저녁을 끌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굴뚝에서 밥짓는 연기가 고물고물 피어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외진 저수지처럼 풍경을 가득 담아두던
소년의 눈망울은 이제 어디로 간 것일까요
필사본도 없이 사라진 두툼한 그 책은
도대체 누가 훔쳐간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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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양현근
키큰 나무와 키작은 나무가 어깨동무하듯
그렇게 눈 비비며 사는 것
조금씩 조금씩 키돋음하며
가끔은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게
하늘 바라보는 것
찬서리에 되려 빛깔 고운
뒷뜨락의 각시감처럼
흔들리지 않게 노래하는 것
계절의 바뀜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채는 것
새벽길, 풀이슬, 산울림 같은
가슴에 남는 단어들을
녹슬지 않도록 오래 다짐하는 것
함께 부대끼는 것
결국은 길들여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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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양현근
눈 부셔라
저 아침
새벽길을 내쳐 달려와
세세년년의 산과 들,
깊은 골짝을 돌고 돌아
넉넉한 강물로 일어서거니
푸른 가슴을 풀고 있거니
이슬, 꽃, 바람, 새
온통 그리운 것들 사이로
이 아침이 넘쳐나거니
남은 날들의 사랑으로
오래 눈부시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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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양현근
쑥부쟁이며 들국화가 우거진
길을 따라 먼 길 떠나신 당신의
그림자가 고인 울음을 퍼 올리던 날.
가을볕은 여전히 곱고
당신이 남기고 간 시간 위에 잔뜩
길어진 그림자만 들녘을 쓸고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당신은 없고
풀억새가 키를 넘도록 온통
가도가도 오르막인 돌자갈길을 걸으며
아버지.. 그리움이란 얼마나
깊어져야 하는 일인지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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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양현근
그대 깊은 잠속을 헤매일 때
제가 부르던 노래소리 들렸는지요.
오늘은 아침부터 까치소리가
삼태기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늘을 버티고 선 느티나무
꼭대기에서는 그대에게 부칠 전언들이
마구 나부끼고 있습니다.
세상 소식들 무장 무장 넓어지고
어제 저녁 그대가 무심코 부려둔 소식들이
안마당 가득합니다.
온 세상이 매미 울음을 앓으며
진초록을 헹구고 있습니다.
깊어질 수록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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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양현근
어찌 모진 눈발 속
굳굳한 견딤 없이 저 아침이겠습니까
막차마저 떠나버린 대방동 근린공원을
터벅터벅 혼자 걸으며
물푸레나무며 층층나무
꽝꽝나무의 낮은 목소리에 귀가 열립니다
단정한 고백에 발밑의 마른 풀잎이 푸득거립니다
비울 것 다 비워내고
가벼워진 몸피로 오래된 귀가를 기다리는
저 단단한 몸짓을 보세요
밤새워 저 뒤편을 가로질러 가노라면
세상의 달빛들은 풍금소리처럼 깨어있겠지요
그리움이 깊을수록 내 풋사랑도 이슥하거니
저녁이면 따순 불빛으로 귀순하던
밤늦도록 내 오랜 중심의 나무가 있어
오늘 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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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양현근
이 가을에는 젖은 음표들을 말려야지
지난여름 욕망의 이깔나무 숲을 건너오는 동안
무심코 자라난 귀를 맑게 씻어야지
노역의 상처들을 말리는 동안
아다지오의 여백 속은 참 넉넉하리라
때때로 쉼표를 찍어가며
촉촉한 노래들을 오랫동안 흥얼대리라
지상의 세간들이 따로 노래가 될 수 있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 것인가
물빛만 출렁이는
내 발자국 길어 올리는 이 없어도
이 가을에는 당당하게 웃어야지
깊은 뿌리내림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지
곱지는 않아도 넉넉한 음색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흔들림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열꽃의 아열대
아, 그 아득함을 건널 수 있다면
이 가을에
☆★☆★☆★☆★☆★☆★☆★☆★☆★☆★☆★☆★
잘 가라 내 청춘
양현근
청보리 출렁이던 파란 바람결을 기억합니다
남실거리는 바람의 이랑따라
생의 마디마디 푸른 빛이 깊어가고
그 불멸의 빛이 깊을수록
어린 시절의 꿈빛도 하염없이 파래졌을 겁니다
보리밭 사이로 보름달이 뜨면 참 좋겠다고
지상의 밤길과 사막의 여름을 함께 건너보자던
그녀의 달뜬 목소리가
캄캄한 밤기슭을 환하게 밝히던 날도 있었다지요
산수유꽃 머문 자리에 연분홍 철쭉이며
노오란 유채 꽃은 제 몸 허물어 저리 바삐 피어나는데
홀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쓸쓸한 청춘의 뒷그늘
뒤돌아보니 당신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고
수양버들 휘감아 돌던 파아란 낱말들만 귓가에 가득합니다
아직도 춘사월 꽃 핀 자리는 저리 환한데
함께 나눌 꽃말은 저리 무성하게 돋아나는데
꽃 핀 자리, 꽃 아픈 자리
부질없는 위로의 말은 독주처럼 쓰고
무심한 바람 한 점 제 무릎을 내어주며
돌아갈 자리 없는 붉은 마음을 등 떠미는데
가여운 내 청춘, 부디 잘 가라!
어디든 잘 가시라!
☆★☆★☆★☆★☆★☆★☆★☆★☆★☆★☆★☆★
첫댓글 늘..

되시길 바랍니다.
넉넉함으로
좋은글 채워주신 그도세상김용호님..감사 드립니다..
사랑과
행복의 열매 가득맺는
보람찬 10월 한
늘 건강하세요,.....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