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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조약돌을 모아 제방을 쌓으니
(一)
사람들은 모두 사우맹을 과소평가했다.
사우맹이 지닌 정보력은 곽가장이나 원방파에 버금갔다. 그들
은 천지유불과 반여량이 대야성에 들어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성계를 준비했고, 도주에 대비한 포위망을 완벽히
갖춰놓았다.
고오오오...!
반여량은 물샐틈없이 좁혀진 포위망을 뚫어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도저히 빈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동기감응이 이토록 무력했던 경우는 단연코 없었다.
동기감응을 공격에 사용하면 투지가 분쇄되고, 응집된 내력을
분산시킨다. 분명 뛰어난 능력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
에서는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사우맹도는 싸울 생각이 없는 듯했다. 비록 검을 쳐오지는 않
지만 물러서지도 않는다. 제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것이
다. 검으로 벨 수 있다면 어떻게든 길을 열어 볼 텐데. 사우맹
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반여량은 그럴 수도 없었다.
천지유불도 사정이 같았다.
산귀 총수는 스스로 사우맹에 몸을 의탁했다. 사우맹에는 어떠
한 잘못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들로부
터 벗어나려면 검을 쳐내야하고, 잡히려면 검을 버려야 한다.
"쳐랏!"
'사우맹 따위가 감히' 하는 생각이 검을 들게 했다.
그들의 검은 달빛을 갈랐고, 어김없이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
했다.
"커억!"
"으윽...!"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사우맹도는 이제 갓 무공을 익힌 사람들처럼 검을 제대로 쳐내
지 못했다.
'이건 이상한데...? 사우맹이 이렇게 약했나?'
앞을 가로막는 사우맹도의 심장을 갈라 버린 천지유불은 반여
량에게 흘낏 눈길을 주었다.
'저, 저것은!'
귀광(鬼光)인가? 땅에 주저앉아 사방을 돌아보고 있는 반여량.
그의 눈에서는 번갯불 같은 신광(神光) 줄기줄기 쏟아져 나왔
다. 눈빛만 보고도 오금이 저려오는 무서운 눈길이었다. 그리
고 그 눈길을 접한 사우맹도는 호랑이 앞에 선 토끼처럼 움직
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과, 곽모천! 그자의 눈길이다!'
손에서 힘이 쭉 빠졌다. 검을 들고 서 있을 기력조차 남지 않
았다. 최초의 패배를 안겨 준, 이십 년의 세월을 두더지처럼
숨어 살게 만든 눈빛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더욱 그
를 현기증 나게 만드는 것은 반여량의 눈빛을 보는 순간, 싸울
의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검을 거두시게. 나, 산귀일세."
어둠 저편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총수..."
천지유불은 힘없이 검을 내려놓고 말았다.
"자네는!"
"사형(師兄)!"
"죽지 않았나! 살아 있었단 말인가? 이게... 이게 꿈은 아니겠
지?"
"사형! 정말 사형이군요."
천지유불은 깡마르고 볼품없는 노인과 손을 마주잡았다. 노인
의 눈은 폐부를 들여다보겠다는 듯 쏘아보는 눈길이라서 자연
몸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이 사림아, 살아 있으면 연락이나 할 것이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두노인은 감회가 새로운 듯 서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
다.
"가세, 들어가서 이야기하세."
"그런데 사우맹 총단에 사형이 왜...?"
"허허! 내가 바로 사우맹주라네."
"네에?"
"사람, 놀라기는... 놀라운 것으로 따지지면야 자네가 원방파
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지. 원방파에서 사람이 파견되었다
기에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인 줄 알았더니. 허허허!"
그러나 누구보다도 놀란 사람은 노인들 주변에 있던 사람이었
다.
반여량, 조중 일행, 산귀까지도... 사우맹주가 천지유불의 사
형이라니. 신비에 가려져 있던 사우맹주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사우맹의 총단은 지하 밀실에 위치했다.
미로(迷路)처럼 복잡하게 설계되어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는 빙
빙 헛돌다 굶어죽기 십상이었다.
천지유불이 양성한 살수들은 실수를 범했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밀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첫 번째 밀실만 둘러보고는 돌아
간 것이다.
넓이가 십여 장에 이르는 지하 광장.
길을 달리하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모여 있었
다.
조중, 학구, 동목, 석수, 범도, 황백은 복수의 일념으로, 곽사
연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하여, 산귀는 원방파의 보존을 염려해
서, 천지유불과 삼십이 명의 무인들은 산귀를 모셔가기 위해
서, 그리고 반여량은 교교를 구출하려고.
목적은 각기 달랐지만 사우맹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점은 다르
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일행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람은 다른 사람
들이었다.
곽요연과 신계각.
그들이 사우맹과 손을 잡고 마주 앉았다. 아니 그들은 누구보
다도 먼저 사우맹과 연계한 사람들이었다. 천지유불의 사형이
자 사우맹주인 노인의 작호는 한담거사이니까.
사우맹이 원방파 못지않은 정보력을 갖춘 것은 신계각이 합류
했기 때문이었다. 정대가 취합한 모든 정보는 곽가장과 사우맹
이 공유했다.
소중분과 정대원 여섯 명의 모습도 보였다.
정대원들은 동목, 석수와 정담을 주고받았지만 소중분은 창백
한 안색으로 눈을 허공에 걸어 두었다.
요와 역시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무슨 일 때문인지 깊은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눈물을 떨구기도 했다.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은 신계각원 오백여 명과 사우맹도 천여
명이었다. 그들이 일제히 곽가장을 들이친다면 오! 이건 싸움
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그리고 둘 중 한쪽은 무림사에서 이름
이 지워질 것이고, 설혹 이긴다 할지라도 재기할 수 없는 타격
을 받게 되리라.
그런 점은 사우맹 무인들이 더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어부
지리(漁父之利)를 노릴지언정 앞장서서 먼저 죽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이렇게 모두 모였으니 잘됐군요. 흐흐! 이제 곽가장을 어떻게
요리할지 상의해 봅시다."
말문을 연 사람은 서단주 수혼혈마 조사였다.
곽요연과 사우맹주가 손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중 일행에
게 뿐만 아니라 사우맹도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아무도 몰랐다.
곽요연과 사우맹주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그런 것이 이제는 모두 곽가장을 상대해야만 할 입장이 되고
말았다. 곽가장의 반도를 받아들였고, 그 소문은 중원 각지에
퍼져 나간 상태이지 않은가.
"사람이 많다. 그 일은 차후에 논의하자."
한담거사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맹주님, 이것보다 시급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조만간 곽가
장놈들이 물밀 듯이 밀려올 텐데."
수혼혈마 조사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시기를 아주 잘 선택했다. 사우맹도 모두가 불안해 하고
있는 지금이 맹주에게 대들 수 있고, 사우맹 내에서 입지를 강
화하는 유일한 기회였다. 더군다나 천지유불과 서른두 명의 무
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우맹도 오십여 명을 도륙하지 않았는
가. 불만이 한참 팽배해 있을 시기였다.
조사는 성격이 급한 반면 치밀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절묘한 시기를 선택하여 맹주를 진퇴양난(進
退兩難)으로 몰아붙인 것은 곤지룡이란 모사가 있기에 가능했
다.
"맹주님, 저희도 같은 생각입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인간들과 한솥밥을 먹게 됐는데 일을 분담해야 할 것 아닙니
까."
동단주 비폭노검(飛爆怒劍)이었다.
이렇게 멍청하니 있다가 곽가장 놈들이 쳐들어오면 우리만 싸
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 비록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백도(白道)는 의협(義俠), 흑도는 명령(命令).
널리 알려진 말이지 않은가. 백도인들을 움직이려면 의와 협에
호소하고, 흑도인을 움직이려면 그들을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
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흑도인에게 명령불복(命令不服)은 있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상하관계가 형성되면 눈앞
에서 검을 뽑아 심장을 찔러온다 할지라도 반항해서는 안 된
다. 그렇게 되게끔 세뇌당했다.
우두머리보다 무공이 더 강한자가 나타난다면 흑도 질서는 다
시 편성된다. 약한자는 도태되고 강한자가 권위를 차지한다.
이들은 그런 질서와 힘을 가지고 무고한 양민을 약탈한다. 범
죄(犯罪)라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고, 인정(人情)
이라는 말도 잊어 버렸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떠한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흑도의 세계였다.
수혼혈마와 비폭노검이 말한 것은 단순한 의견 피력이 아니라
맹주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백도인들에게는 이해되지 않
지만.
"그 일은 차후에 논의하자고 했다."
한담거사의 말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허허거리며 웃을 적에는 그저 날카롭게만 보이던 인상이 부아
가 치밀자 금방이라도 살인을 저지를 듯한 공포감을 심어 주었
다.
"사람이 많다 하셨으니 저희는 물러갑니다. 저희 북단(北團)은
서단주의 의견에 전적으로 지지를 보냅니다. 북단의 모든 결정
권을 일시적으로 서단주에게 일임하겠습니다."
북단주 무영퇴(無影腿) 임대하(任岱 )였다.
그는 강남 무림인으로서는 드물게 퇴법의 달인이었다. 그림자
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무영퇴, 그도 수혼혈마의 의견에 동참했
다. 곤지룡이란 모사가 사전에 철저히 준비했으리라.
실제로 무영퇴 임대하는 수하 십여 명을 이끌고 지하 광장을
빠져나갔다.
그것이 시발이었다.
남단주, 동단주뿐만 아니라 사우맹도라고는 수혼혈마와 곤지룡
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조용히 물러갔다.
암중으로 정도인과 손을 잡은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한 모양이
었다.
"후후후! 좋다. 그럼 이 자리에서 논의를 하지. 대신... 수혼
혈마! 너는 대가를 지불해야 돼."
"존명(尊命)!"
수혼혈마는 비로소 수하로서의 예를 갖췄다. 하지만 언제든지
태도가 돌변할 수 있는 인물이란 것을 광장에 모인 모든 사람
들은 피부로 느꼈다.
"방주님, 저희도 물러가 있겠습니다."
천지유불이 데려온 무인 서른두 명이 공손히 읍을 해 보인 후
물러갔다. 사우맹도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그들이 있는다는 것
은 격식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냐, 나도 같이 간다. 우리는 원방파 무인들이다. 총수님이
계신데 밑의 사람이 있을 수 없지."
천지유불은 사우맹주가 사형인데도 불구하고 물러갔다.
곽요연은 남았다. 신계각을 대신해서.
조중도 남았다. 그는 곽가장을 이탈한 여섯 명의 대표였다.
산귀가 남고, 반여량이 남고, 곽소연... 그녀는 샛별같이 맑은
눈망울을 굴리며 반여량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 * *
"제 이름이 무엇입니까?"
소중분은 배멀미를 하는 듯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간신
히 입을 열었다. 이상했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속이 영 거
북했다.
어쩌다 가끔씩 친부모가 누구일지 궁금한 적이 있었다. 오늘
상상속에서만 접하던 아버지를 만났다. 그런데 왜 속이 울렁거
리는 것일까. 가슴에 납덩이를 달아 놓은 듯 답답한 느낌에 뛰
쳐나가고픈 마음은 왜 생기는 것일까.
"내 이름은 왕급간(王給諫), 네 에미 이름은 옥... 정(玉晶)이
라 한다. 곽모천이 금표방을 칠 때... 이하극륜이라는 자에게
죽었다. 너희도 같이 죽은 줄 알았는데."
"후후! 그럼 내 이름은 소중분이 아니라 왕중분이로군요. 후후
후... 우하하하핫!"
"호호호! 그럼 뭔가요? 제 이름은 왕요와인가요? 호호호!"
왕중분과 요와. 그들은 남매간이었다.
왕중분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무공을 익혔고 곽가장에 들어가 헛
된 야망을 불태웠다면, 요와는 사우맹의 세력을 바탕으로 강서
제일염(江西第一艶)으로 성장했다.
왕중분은 숨이 막혀 왔다. 답답했다. 가슴을 조금 열어 놓으면
시원해질 것 같아 옷섶을 제쳐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목에
올가미를 씌워 놓은 듯 견딜 수 없을 만큼 숨이 차올랐다.
'못났군요. 제가 상공을 버렸다고 생각했나요? 저와 한 약조가
있을 텐데요. 그때 뭐라고 말씀하셨죠? 설사 아버님이라 할지
라도 죽여 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남창부를 벗어나 사십 리쯤 나갔을 때,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
낸 곽요연은 여전히 차디찬 표정으로 힐문(詰問)부터 던져왔
다.
'따라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한담거사가 모든 이야기를 해준다
고 하셨으니까.'
왕중분은 영원히 남남이라 생각하며 잊으려 했던 아내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천부적인 무골이다. 근육, 감각, 정신... 어느 한 군데
나무랄 곳이 없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중에
곽모천을 상대할 자는 너밖에 없다고 믿었으니까. 네가 오로지
무공에 전념해 주기를 바랐다. 부친을 죽인 원수를 꺾으려면
그의 무공을 소상히 알 필요가 있지 않겠니?'
'곽가장의 무공이라면 요연이가 자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구태여 나까지...'
'네 아내는 곽모천을 상대하지 못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검을
겨누는 것은 흑도인도 삼가는 일이라 이해가 안 된다만... 곽
모천과 직접 검을 겨룰 자, 네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
과만 놓고 보자. 지금의 너는 누구보다도 곽모천의 무공을 소
상히 알고 있잖니.'
'내가 금표방의 소방주였다는 사실... 아내도 알고 있었습니
까?'
'내가 사우맹주다. 흑도 거물의 제자인데 아무런 사연도 없다
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신계각을 통해서 알아냈을 수도, 그
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정내리지 못하겠구나.'
'아내와는 왜 손을 잡았습니까?'
'우리는 복수를 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 요원했다. 네 아내는
야망이 있지만 자신이 없었다. 서로 이해가 맞은 거지.'
'이해가 맞으면 패륜도 용납하십니까?'
사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던 시절에는 자신이 익힌 무공으로 약한 자를 도와
주는 상상을 곧잘 했다. 그때마다 남몰래 한숨짓던 사부. 내용
이 이것이었나. 강서제일패주라는 곽가장을 향해 검을 들이댈
팔자였단 말인가.
하지만 왕중분의 답답한 심정도 요와만은 못했다.
그녀는 구슬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온 삶이었던가. 마음에도 없는 사내를 유혹하고,
뱀처럼 징그러운 혓바닥이 온몸을 핥을 적에도 간드러진 교소
(嬌笑)를 발하며 살아온 삶이었다.
사내들의 모든 재산을 갈취하고 무사할 수만은 없었다.
어떤 자는 죽이겠다고 칼을 들이댔고, 어떤 자는 그까짓 재산
없어도 좋으니 같이 살아달라고 간청했다.
'호호호! 병신... 사내자식이 계집에게 칼이나 들이대고..."
가슴 밑에 흉하게 난 상처를 볼때마다 서른 나이에 자살한 그
사내가 떠오른다.
"호호호! 풋내기처럼 왜 이러실까. 이런 장사 한두 번 해본 것
아니잖아? 내가 다른 계집들처럼 은자 몇 푼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나? 말해봐. 계집을 품은 게 내가 처음이야? 그렇다면 살
아 줄게. 말해 보라니까."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그 사내를 봤다는 사람이 있었다.
복건성(福建省) 청루(靑樓)에서 상거지가 되어 떠돌더란다.
그들에게 갈취한 은자는 사우맹을 포동포동 살찌웠다.
사우맹에는 자신과 같이 어렸을 적부터 색녀(色女)로 길들여지
는 여인들이 있다. 사우맹은 그녀들의 피와 고름을 먹고 살찐
다. 요와는 그 중에서도 가장 특출한 여인이었다.
그동안 거쳐간 사내는 열 손가락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이게 뭔가? 맹주로만 알고 있던 분이 아버지의 사형?
아버지는 금표방의 방주? 아니, 원방파의 호법무인?
"사형께서 너희들을 구하셨을 줄이야... 천만다행이다."
"왜 죽지 않으셨습니까?"
"...?"
"차라리 곽모천의 손에 죽지 왜 살아나셨냐는 말입니다. 왜!"
왕중분은 미어터지는 숨통을 고함으로 풀어냈다. 그러나 요와
는 그렇게 소리칠 힘조차 없었다. 아버지를 만났건만 전혀 반
갑지 않았다. 마치 이상한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설기만 했다.
사람도, 기물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 * *
"천지유불의 힘은 강합니다. 그들이라면 곽가장 분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 틈에 우리는 남창부 본장을 급습하는
겁니다. 전면전을 벌여 분타의 밀집된 힘과 맞닥뜨린다면 승산
이 없습니다."
곤지룡은 혀에 참기름을 발라 놓은 듯 매끄러운 말솜씨를 발휘
했다.
수혼혈마는 자리에 참석한 것에 의미를 둘 뿐 별다른 말을 하
지 않았다. 역시 모든 계략은 곤지룡이 꾸민 듯했다.
"곽가장을 너무 크게 생각하는군요. 그럴 필요 없어요. 확실히
천지유불의 등장은 뜻밖이네요. 우리 쪽에 좋은 쪽으로... 원
방파와 신계각의 정보를 합한다면 분타의 모든 것을 손바닥 보
듯이 알 수 있죠. 그럼 이렇게 할까요? 분타는 저희 신계각이
담당하고, 본장은 사우맹이 맡는다. 어때요?"
느릿하게 말하는 곤지룡과는 달리 곽요연은 시원했다.
두 사람의 결론은 같았다. 전면전을 포기하고 장주만 치자는
이야기. 적에게 이기려면 왕을 잡아라. 금적금왕(擒賊擒王)의
계(計)였다.
곽소연은 정신이 나간 듯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
까.
그녀는 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 믿어지지 않는 듯 봉목(鳳目)
을 치켜 떴다.
누구보다 적의가 불타올라야 할 조중은 무슨 일 때문인지 시무
룩 했고, 산귀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반여량은 무림이란 세계에 환멸을 느꼈다.
무림에는 도의(道義)가 없다. 무림에는 혈연(血緣)이 없다. 무
림에는 정(精)도 없고, 협(俠)도 없고, 자아(自我)도 없고...
있는 것도 많다. 살인, 배신, 계략...
사우맹의 악명은 일찍이 들어왔다.
그 누가 되었든 그들 눈 밖에 나면 죽음뿐이라는 사실 정도는
어린아이도 잘 안다.
여아가 실종되면 기루에서, 남아가 실종되면 싸움판에서 찾아
라.
사우맹이 맹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납치극을 벌이면서 회자된
말이었다.
흑서채 녹림도에게 사우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연계를 시작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우맹처럼 인간에게 해를 끼
치는 무리들은 진흙탕에 발을 들여놔도 괜찮다는 심정에서. 곽
가장이나 사우맹이나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무엇이 정도이고
무엇이 흑도인가.
'여기 올 필요가 없었어. 어차피 이들은 곽가장과 싸우려 한
다. 곽모천의 죄과를 천하에 알리려 했지만 그럴 가치도 없다.
교교를 구한 다음... 그래, 신분을 속이고 살지. 그렇게 살아
주지.'
정명과 한 언약도 지킬 필요가 없다.
천지유불과 한담거사가 사형제간이라면 그들이 잘 알아서 할
터였다. 보아하니 산귀 총수에게는 모두 호감을 갖고 있는 듯
하니 크게 염려할 일은 없었다.
반여량은 갑자기 졸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이틀간 눈 한 번 붙이지 못했다. 천지유불의
뒤를 밟느라고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운 탓에 잠이란 것을 잊어
버렸다.
그는 서로 물고 뜯는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 않아 슬그머니 몸
을 일으켰다. 그때,
"가지 마세요.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옆에 앉아 있던 곽소연이었다.
다소곳이 앉아 두 눈을 내리깔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러나 그녀의 두 손은 평온하지 못했다. 오른손을 왼손 위에 포
개 놓고 있지만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 만큼 부들부들 떨렸다.
"호호호...!"
무엇이 우스운지 곽사연이 깔깔거렸다.
반여량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곽소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내 다시 주저앉았다.
'맑다.'
그녀의 눈은 절망을 담고 간절한 애원을 토해 냈다. 곽소연을
처음 만난 날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반여량은 단연코 그녀와
같은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심연(深淵) 밑바닥에 떨어져 내
린, 그러면서도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절망의 눈빛.
앉아 있기가 힘든 게다.
'가련한 여자.'
반여량은 그녀 곁에 있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그녀는 많이 변했다.
강풍이 몰아치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나약하게 보았는
데, 실제로 강풍과 맞닥뜨리니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하지만 조만간 쓰러질 게다. 언니들이 아버지에게 검을 들이대
는 광경을 언제까지 지켜보겠는가.
"넷째가 신창윤가에 가 있어요. 제가 신창에 다녀오죠. 아마
큰 힘이 되어 줄 거예요."
결론은 금방 났다.
사우맹주는 처음부터 곽가장과 일전을 겨룰 생각이었고, 사우
맹의 안위 따위는 염려하지도 않았다. 재기불능이 되더라도 공
격을...
그것이 사우맹주의 생각이었다.
천지유불이 살아 왔으니 복수의 핵이 없어진 셈이다. 그래도
그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곽모천, 그를 꼭 죽여야 한다. 너
무 많은 세월을 복수에 매달리게 한 장본인이니까.
사우맹도들에게도 적합한 결론이었다.
수혼혈마는 자리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 곤지룡의 말에 반박할
줄 알았다가 순순히 승낙하자 맥빠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
났다.
"맹주 저는 그럼 이만... 형제들이 기뻐할 겁니다."
한담거사의 강팍한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가려고?"
"...?"
"사우맹의 율법을 알고 있을 텐데?"
순간 수혼혈마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그러졌다. 곤지룡도 마찬
가지였다. 조그만 머리에 실눈을 하고 있어 잔꾀깨나 짜냈음직
한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버렸다.
"매, 맹주!"
"분명히 말했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곽가장을 치는
주역은 우리다. 여기 계신 이분들은... 후후! 모두 곽가장의
반도지. 이 분들은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지만 우리는... 저
변을 넓히기 위해서 싸운다. 사우맹을 더 키우기 위해서. 그런
데 수하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어떻게 싸우겠나?"
한담거사의 의사는 분명했다.
"좋습니다. 맹주의 명을 받들죠."
수혼혈마는 원독어린 눈으로 한담거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말투만은 공손했다. 이것이 흑도다. 잘잘못에 상관없이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는 것.
"한 팔을 드리겠습니다."
한담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자르기 전에 청이 있습니다."
"귀찮군."
"능공십자 학구와 비무를 하게 해주십시오."
수혼혈마의 청에는 일리가 있었다. 팔을 잘리고 나면 한동안
운신하기 어렵다. 검도 전처럼 날카롭지 못하리라. 당연히 서
단주의 직위를 내놓아야 한다. 팔 한 개가 의미하는 것은 사우
맹을 떠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학구 대신 내가 상대하리다. 그는 이 자리에 없으니까."
조중은 많이 참았다. 가문이 몰락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치솟는 울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지금은 터뜨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죽여 달라는 곽사연, 그리
고 아버지를 음해하려는 곽요연. 모두 처형들이다. 처형이 장
인에게 검을 들이대고, 장인은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키고. 그
럼 곽선연과의 인연은 어찌되는가. 그는 아내의 청초한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지하에 계신 어머님이 들으면 불효자식이라고
꾸짖겠지만 그는 아직도 아내를 사랑했다. 그런 모든 울분을
터뜨리고 싶었다.
"흐흐흐...! 그렇지. 옛말에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지. 흑룡
방을 치라고 명령을 내린 놈은 너겠지. 흐흐흐!"
수혼혈마는 음충맞은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직 맹주의 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수혼혈마와 조중의 눈싸움을 지켜보던 한담거사는 마침
내 명을 내렸다.
"좋다. 허락한다."
슈슈슛!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혼혈마의 검이 짓쳐들었다.
그의 검은 낭검(狼劍)이다. 어찌보면 검을 전혀 수련하지 않은
듯 질서 없이 휘둘러지는 검법. 하지만 그런 검에 죽은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타앗!"
조중도 마음껏 일갈을 내지르며 마주쳐 갔다. 그는 조가봉법을
펼치지 않았다. 수혼혈마와 마찬가지로 마구잡이식 봉법을 전
개했다. 승부를 가름하는 것에는 관심없었다. 미친 듯이 휘젓
는 몸짓으로 마음속에 자리잡은 울분을 토해 내고 싶을 뿐이
다.
카앙! 텅텅텅!
검과 목봉이 둔탁하게 부딪쳤다.
"형부의 봉법이 아닌데? 감정에 치우쳤군."
곽요연은 한눈에 조중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투로(鬪路)를 벗어난 봉법은 이미 봉법이 아니었다. 반사적인
몸놀림으로 살검을 피하고 있지만 조중의 의복은 피에 절어버
렸다. 모두의 예상을 단번에 깨버린 기변(奇變)이었다.
조중은 웃었다.
살을 저미는 촉감이 기분 좋았다. 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살
점이 떨어져 나가고, 머릿골을 둔중하게 울리는 아픔이 좋았
다.
"흐흐! 비수당주, 허울만 좋았군."
수혼혈마 조사는 자신감을 얻었는지 여유를 부렸다. 그는 고양
이가 생쥐를 희롱하듯이 필살절기를 펼쳐내지 않았다.
'여보... 나를 사랑한다면 그 더러운 소굴에서 벗어나 광창으
로 돌아갑시다. 장원이 무슨 소용있겠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 둘이 오손도손 삽시다.'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무엇인가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깊은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수심에 찬 얼굴... 이것이었다. 자신과 부친간의 골
육상쟁(骨肉相爭). 얼마나 가슴아팠을까.
'복수는 어떻게 하시구요?'
'당신의 아버지 아니오. 무림이란 피의 윤회(輪廻), 모두 잊어
버립시다.'
'그러실 수 있어요?'
'당신만 따라온다면.'
'따라갈게요.'
조중은 환하게 웃었다.
할말을 마친 아내는 어슴푸레하게 사라져 버렸다.
환상, 그것으로 좋았다. 그에게는 희망이 생겼다. 복수를 하지
않은 대신 평생 부모님 묘를 지키며 살아가리라. 세상 사람들
이 호로자식이라고 욕하는 것은 상관없다. 여리디여린 아내를
더러운 소굴에서 빼내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타앗!"
"타앗!"
맞고함이 터졌다.
목봉에서 퉁겨 나오는 반탄력이 갈수록 강해진다고 생각한 수
혼혈마는 필살절기를 펼쳐 조중의 허리춤을 베어갔다.
조중은 조중 나름대로 전신의 모든 기력을 목봉에 모아 쳐냈
다.
눈앞에 있는 상대, 그는 수혈혈마 조사가 아니었다. 곽가장주
곽모천이요, 한담거사요, 처형이요... 세상 모든 사람이었다.
따악!
검이 퉁겨 나갔다. 낭검은 강한 내력을 바탕으로 앞을 가로막
는 것은 무엇이든지 베어내고 짖쳐가는 특징이 있다. 강검(强
劍) 부류의 검법이었다. 거기에 공격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만
드는 환술(幻術)이 가미되었다. 그런데 손아귀를 찢어 버리고
멀리 퉁겨져 나간것이다.
"허억! 크아악...!"
비명소리는 처절했다.
죽음도 그에 걸맞게 처절했다. 가슴을 뭉개 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심장을 뚫고 들어간 혈봉(血棒)은 다시 머리를 으스러뜨
렸다.
"그만!"
반여량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일갈을 내질렀다.
조중은 이미 뇌수를 흘리며 쓰러져 버린 수혼혈마의 등을 후려
치는 중이었다.
그의 혈봉이 뚝 멎었다.
"이제 됐습니다."
차분한 음성, 조중이 반여량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쳤나?"
반여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미쳤나?"
반여량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후! 나도 미치지 않고 사람들도 미치지 않았다? 후훗! 후후
후!"
조중은 툴툴 웃으며 혈봉을 던져 버렸다.
"맹주, 그만 돌아가서 쉬고 싶습니다만."
"그러시오."
조중은 수혼혈마에게 일별을 던진 후,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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