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 선(善)올 좋아하면 선(善)을 하게 하여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셨다.
* 악(惡)을 좋아하면 악(惡)을 하게 하여 주시고,
그 댓가를 받게 하셨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연꽃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다.
연못속의 선 (향기 좋은 성분)을 취하면 향기 좋은 연꽃을 피우고,
연못속의 악 (악취 나는 성분)을 취하면 악취 나는 연꽃을 피운다고,
그리고 그 방법을 팔정도로 가르쳐 주셨다.
부드럽고 자비로운 말을 하면 마음은 평안하고 삶은 행복하고,
(=정어)
거칠고 난폭한 말을 하면 마음은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산다고.
그리고 팔정도의 기준을 밝은 빛의 세계에 두어야 한다고
반야심경으로 가르쳐 주셨다.
밝은 빛의 세계, 보살의 세계를...
자기의 양심이라는 밝은 빛의 세계를.....
반야심경은 밝은 빛의 세계,,,보살계를 설명한 것이다.
서 문...
반야심경이라 하는 경의 내용을 지금의 문자와 어구에서 이해하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사, 불각, 불단 앞에서 신주(神主)랑 행자랑 승려랑 일반인들까지가
말 그 자체를 독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경(寫經)이라고 해서 붓으로 베껴 쓰는 것만으로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래서 오랫동안 “경(經)”이라는 것에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본래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독송하거나 사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참뜻은 좀 더 알기 쉬운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랜 역사를 체험해 온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불교는
어느새 일상생활 속에서 그러한 형식적인 습관으로밖에 살아 있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화석화하고 만 것입니다.
본래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독송하면 좋다든가, 사경하면 좋다’라고 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의문으로 생각하는데 부처님의 시대에
과연 지금과 같이 철학화된 어려운 것으로서
무학문맹의 당시의 중생을 구제할 수 있었을까 어떠했을까 하고.
현재의 불교는 중국에서 완전히 철학화된 어려운 한문의 경문(經文)입니다.
불교전공의 학자나 승려라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당시의 노예나 상인, 군인들의 마음을 구제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아무리해도 의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문이란 읽음으로써 잘 이해를 하고
나날의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실천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독송하는 것만의 타력본원은
불교의 근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그런 의미에서 결코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떡은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경(經)속에 쓰여 있는 내용을 마음의 지침으로 삼아 실천하는 그것이
진짜 사람의 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승이라든가, 대승이라든가, 무슨무슨 종, 무슨무슨 류파 등으로
분류된 것은 불교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진실된 참된 불교는?
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불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중부 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고타마 붓타가 설파한
붓타 스트라(깨달음으로의 길),
그것이 진실의 불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 있어서도
바라몬교나 요기 스트라, 배화교까지 혼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호마태우기등의 행사는 진실된 불교에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용수 2~3 세기는 고타마 붓타가 설파한 45년간의 가르침을 분류해서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는 버리고 후세에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오류의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매일의 생활에서 동 떨어진 불교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경의 독송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경(經)을 잘 이해하고 생활 속에 활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붓타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타력에 의지한 독송만으로 붓타의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나는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인생을 걸어왔습니다만
인간으로서의 길을 구해 어언 35년의 세월을 보내왔고
그 동안 자연과학과 물리학을 통해 인생의 길을 알고
또 그것을 생활 속에서 활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결과 내가 발견한 것은
반야심경이 자연과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리(神理=신의 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대자연(大自然)』 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스승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교 전공의 학자나 승려가 철학적인 지혜만으로
행동을 떠나 (글귀 해석에 매달려서) 해설한 것과
마음과 행동을 실천한 마음속에서부터 솟아오른 것을 쓴 해설서와
그 어느 쪽이 진실인가는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반드시 어느 누구라도 내가 해설한 내용을 잘 이해하고
생활 속에서 활용한다면
반드시 반야심경의 위대한 불지(佛智=부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
가능할 것으로 믿습니다.
이 책이 그런 의미에서 독자 여러분의 생활의 친구로서 도움이 되어 준다면,
나에게 있어서는 망외(望外)의 기쁨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은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리라’ 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35 년의 구도의 경험을 근거로,
1968년부터 전기사업과 동시에, 이 길을 온갖 장소에서 설(說)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길을 따라 방문해 오시는 분은,
수 만인에 이르고 있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 속에서, 반야 바라밀다.
즉.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체험해 온 스스로의 『과거세』를.
당시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도, 벌써 100 명을 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불교의 화엄경 십지품이나. 성서의 사도행전 제 2 장에 나타난
현상과 같은 것입니다.
동경에, 동북지방에, 관서 지방에,
게다가 아메리카, 브라질. 이집트. 등에서 과거세를 말하는
동료의 현상(실증)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놓칠 수 없는 일입니다.
필시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현대 불교의 본연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는가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 책은 현대의 자연과학을 통해서.
나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전생 윤회』를 설명하고,
그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가르침에 있는 것을 가리키며,
동시에 관자재보살로 되어가는,
고타마 붓타의 출가부터, 성도에의 과정.
정법유포의 역사를, 되도록 알기 쉽게 써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에 의해,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면,
하는 것이 나의 자그마한 희망이고, 거짓없는 마음입니다.
1972 년, 11 월
타카하시 신지...
{ 반야심경을 보는 기준에 대해서 }
반야심경이란, 한마디로,
저승... 영(비물질)의 세계의 법칙과
이승... 육신(물질)의 세계의 법칙을 설명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영(靈)의 세계의 법칙을 모르고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영(靈)의 세계, 비물질의 세계의 법칙이
물질의 세계의 법칙과 같을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수면 아래의 물속은, 물질의 세계로 비유하고,
수면 위의 공간은, 비물질의 세계로 비유할 수 있을 듯 합니다만...
(우리 인간은 물속에 사는 물고기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생각은, 비물질 세계의 법칙이 작용..
육신을 움직이는 행동은 물질세계의 법칙이 작용...
물질적인 손해를 보면서도
양심에 따른 행동을 했을 때의 기쁨과
양심을 저버리고 물질적인 이득을 보았을 때의 찝찝한 기쁨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면 좋을까가 자명해집니다.
이승인 물질계 속에는
저승인 비 물질계의 법칙도 공존하고 있음으로
공존하고 있는 정도만큼만 알 수 있지요.
ㅡㅡ 임마누엘 스웨덴 보그의 "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에서.....
최면술로 영(靈)과 육체의 관계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면, 몸을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습니다.
슬프고 기쁜 감정은 몸에는 없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태어나기 전의 전생의 기억을 해내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린 아이가 가보지 않은 곳을 자세히 알고, 배우지 않은 나라의 말을 합니다.
두뇌에 기억되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태어나고 나서 했던 생각과 말, 행동, 공부하여 얻은 지식은
두뇌에 기억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태어나기 전의 기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몸이 만들어지기 전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세포 분열을 하면서,
두뇌가 만들어지고 장기가 만들어집니다.
두뇌가 만들어 지기 전에,
어디에 기억되어 있는 전생의 기억입니까.
임신하고 나서 입덧이 일어나는 시기가 영(靈)이 몸으로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태아에 들어간 영(靈)과 모친의 입맛이 달라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최면술로서,
영(靈)은 운전기사이고, 육체는 자동차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우리는 마치
차를 탄 운전자와 같이
차 안에서 앞 유리창을 통하여 밖을 보듯이,
몸안에 있는 혼이
몸 안에서 눈이라는 유리창을 통하여 밖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