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래가 부처이다 / 청화 큰스님
비록 똑같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나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우리가 외인다 하더라도
우리 맘이 덮어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
우리가 염불을 많이 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 주시겠지,
이런 정도의 이것은 이른바 타력염불(他力念佛)이라.
보통 그렇게 많이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쓰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하면은 그때는 그야말로
참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와서 가호(加護)를 하시고
복(福)을 주고 그렇게 하신다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가장 소박한,
하나의 방편염불(方便念佛)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은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그런 염불법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꼭 하시고 싶은 염불법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실상염불이라,
우주(宇宙) 생긴 대로,
우주진리(宇宙眞理) 생긴 대로 그런 염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소승법(小乘法)과 대승법(大乘法),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서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때그때 중생 근기에 맞게시리
하신 법문이 이른바 소승법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란 것은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고 대승이고 가르는 것도
그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뿐이란 말입니다.
법화경(法華經)을 이른바
모든 경론(經論) 가운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
법화경은 모든 경론 가운데서
통일(統一)된 경이라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도 마찬가지고
법화경, 화엄경 뜻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두가 둘이 있고 셋이 있고 이런 것이 아니라
한결 같이 하나의 진리뿐이다.
일불승(一佛乘)이다.
한일(一)자, 부처불(佛)자 탈승(乘)자, 일불승이라,
모두가 다 부처님 가르침뿐이다.
이런 것이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대승불교의 본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염불(念佛)을 하든
또는 화두(話 頭)를 들고서
의단(疑端)을 품고 공부를 하든
우리 근본적(根本的)인 목표는 어디가 있는고 하면은
우리가 부처님이 돼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돼 가는데 있습니다.
왜 부처님이 꼭 돼야 할 것인가?
부처님이 되지 못 하면은
참다운 행복(幸福)을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어느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구한단 말입니다.
아는 것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아버리고 싶고 말입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 인간은
최선(最先)의 것을 다 구합니다.
제일 부자가 되고 싶고
얼굴도 제일 잘나고 싶고 그런단 말입니다.
한편 생각할 때는 아이참 별스럽게 욕심도 너무 많구나
생각할 란가 모르겠지만은
우리 인간존재는 원래 그런 존재여요.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기 때문에
우리 본바탕이 그렁저렁한 존재 같음사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하겠습니까만은
우리 인간이 본래가 부처란 말입니다.
본래가 부처...
부처란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 아니겠습니까.
자비(慈悲)로 보나 지혜(智慧)로 보나
능력(能力)으로 보나 어떠한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인데
따라서 우리 본 성격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우리가 구하는 것도
항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한단 말입니다.
다 구하나 상대적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것은
어떻게 우리가 다 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상대적인 것은 그런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욕망(慾望)은 한도 끝도 없는 것인데
물질(物質)도 한계가 있고
또는 이런 자원(資源)도 한계가 있고 말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이 물질 한계가 있는
물질을 구한다고 할 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이 안날수가 없단 말입니다.
즉 인간사는 모습이 주로 지금 그런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종교(宗敎)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존재(存在)를 허망(虛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지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제법이란 것은 모든 존재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상(現狀)이 공이라.
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위법이란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상대유한적인 모든 존재가
유위법이란 말입니다.
그 유위법은 여몽환포영이라,
마치 꿈이요 또는 허깨비요 그림자요
거품 같다는 것입니다.
꿈이 있습니까.
꿈 꿀 때는 실제같이 실제로 있는 것같이 보이지요.
꿈을 깨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요 분명히 이렇게 빛이 볕이 비추고
또는 모양이 있으면은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까.
분명히, 분명히 보이지만은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지금 나요 너요 밉다
또는 좋다 이런 것은 사실은 그림자 같고 꿈같은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꿈같고 그림자 같은 것을 이해를 못 하면은
그때는 불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허망(虛妄)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꼭 이해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억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어놓으면
분명히 다 허망하게 여실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꼭 있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미운사람은 꼭 밉게만 보이고
사랑한 사람은 그냥 또 사랑스럽게만 보인단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錯覺)입니다.
중생이 잘못 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 상을 지금 보이고 있단 말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제행이 무상이란 것은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이쁜 사람은 지금도 이쁘고
또 그다음도 이쁘고 미운 사람도 지금도 밉게 보이고
그 다음도 내일도 미울 것이고 이런 생각이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미운 사람도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에
일초동안도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 초의 몇 천분의 일 동안도 그대로 있지가 않습니다.
순간순간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변화해간단 말입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그때는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가 제일 강한 다이아몬드 같은 금강석도
역시 정밀(精密)한 현미경(顯微鏡)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순간순간 마멸돼 간단 말입니다.
존재(存在)하는 것은 다 그런 것입니다.
같은 것이 언제 어느 시간(時間)대에도 없고
어느 공간(空間)대에도 없단 말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보기 때문에 중생은 뚜렷하게 못 봅니다.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우리 육안(肉眼)의
참다운 실성(實性)을 회복해서 천안통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는 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의 한계 내에서 보는 것이지
물질을 떠나버린 저쪽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정신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그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또는 거품이요 그림자 같다.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이것을 깊이 생각해 두셔야 됩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며서 산다는 것도
얼마나 참 좋은 일입니까.
얼마나 이것이 좋기는 좋은데,
이것도 사실은 허망(虛妄)한 거란 말입니다.
이것도 다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신부가 있고 수녀가 있고 우리같은 비구가 있고
비구니 스님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성자(聖者)의 길이란 것은 꼭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것이 별로 소중한 것이 아니어요,
그것이...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우리가 꿈을 깨어서 꿈같은 모든 것을
우리가 깨서 참다운 진리(眞理)로 가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결혼 안하신 분들은
가급적이면은 안하시면 참 좋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아까 제 말씀마따나
그야말로 참 실상염불(實相念佛)이라.
실상염불, 염불하실 라면은
기왕이면 제일 고도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은 우리 마음으로
그냥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바탕을 그대로 생각하시면서 하신단 말입니다.
그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부처님뿐이다.
이 사람 보나 저사람 보나 이것 보나
또는 우리가 길을 가다가
하나의 독사를 보나 뭘 보든지 간에
그렇게 모든 존재가 본래로 부처님이니까,
부처가 아닌 것을 억지로 보라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부처인 것을 우리 중생이
지금 잘못 봐서 부처라고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저는 지리산서 조금 살았습니다만은
저 지리산 천왕봉 밑에 거가 부도암 이란 암자가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몇 철을 좀 지냈는데
거기 옆에 집에 가서 처사가 살아요.
처사님 한 분이, 근데 그 처사님이 불교도
독실하게 믿지만은 굉장히 강직한 분입니다.
강직한 분이어서 산에 다니면서
가다가도 독사를 만나면 독사보고 서라고 말합니다.
아주 호랑이같이 독사보고 서라고 말하면은
독사가 꼿꼿이 서요.
독사가 말입니다.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은
사무치면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중국에 들어와서
법을 펼칠 때에 달마대사 법을 반대한 사람들이
굉장히 달마대사를 중상모략도 하고
달마대사를 독으로 죽일라고 말입니다.
독살 할라고 독을 여섯 번이나 드렸어요.
그러나 다섯 번째까지는 독이 닿지를 않아요.
독이 말입니다.
정말로 사무치게 모든 것이 다 부처다.
천지 우주가 다 오직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렇다고 생각할 때는 독도 내내야 부처 아닙니까.
독도... 우리 중생이 독은 독이고 약은 약이고
우리 중생은 이렇게 분별하니까
중생이 독 먹으면 그때는 죽습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상에서 독도 저것도 내내야
저도 본래는 불성(佛性)이 아닌가.
이렇게 바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독이 사람을 중독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우리의 본래 성품은 그렇게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염불 하실라면 바르게 이른바 실상염불이라.
실상염불 해야 그래야 참다운 공(功)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글쎄 그것은 어떠한 것이나
모두가 좋은 사람보나 나쁜 사람보나
장사할 때 고객이오나 인상이 나쁜 사람이 오나
다 부처님같이 생각하면은
그때는 또 서로 상통(相通)이 됩니다.
내외간 같이 살 때도 남편을 부처님같이 대하고
또 남편은 아내를 부처님같이 대해보십시오.
그보다 더 훌륭한 부부관계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집니다.
여기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지만은
교단에 서서 학생들 70명, 80명 앞에다 두고서
저들 모두가 다 부처님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때는 얼마나 귀엽게 보이고
그야말로 참 좋은 말씀을 많이 하실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면으로 보나
실상염불로, 실상식으로 하는 것이
참다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
출처: 淸華 大宗師 법문마당『金剛輪』
첫댓글 청화스님 법문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