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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곽요연은 신창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비록 힘은 미약하지만 신창윤가가 합류해 주면 두 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힘이다.
신창윤가의 창법은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서 곽가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강서무림을 휘어잡았다. 그러던 문파가 몰락 일
보 직전까지 치달았고, 곽가장이 측면에서 지원해 준 덕에 기
사회생(起死回生)했다. 모두 곽가장 때문이었다. 병을 준 것도
약을 준 것도 곽가장이다.
신창윤가는 곽가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언젠가 기필코
강서무림의 태두라는 자리를 거머쥐겠다고 절치부심(切齒腐心)
했다.
곽가장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면서도 도와주었다.
세인들은 곽가장의 후덕함에 칭송을 보냈고, 곽가장이 칭송받
는 만큼 신창윤가는 모멸을 받았다.
한(恨)을 품은 사람들이 이십여 년 동안 힘을 응축시켰으니 말
해 무엇하랴.
두 번째로 얻는 것은 명분이었다.
장주의 세 딸이 아비의 죄업을 천하에 공표한다 해도 곽가장이
반도로 낙인찍은 사람과 사우맹만 가지고는 무림인의 동조를
얻어낼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설혹 곽가장을 말살시킨다 해
도 곧 무림인의 반격을 받게 뒤다.
신창윤가가 합세해 준다면 상황이 틀려진다.
곽모천이 신망(信望)을 얻기 위해 광창조가와 신창윤가 같은
명문(名門)을 이용할 만큼 오랫동안 쌓아 온 명망(名望)은 두
터웠다.
동생 곽무연은 그런 점에 착안했다.
일심각 무인들을 회유하여 기습하는 데 이용하는 것까지는 좋
다. 설혹 그런 음모가 성공한다 해도 곽무연은 천하의 패륜아
가 되고 만다. 그래서 신창윤가를 끌어들인 것이다. 윤명과 혼
인함으로써.
그러나 윤명은 조역(助役)에 불과하다. 실질적인 힘은 삼화일
지 최신에게 있다. 일심각 무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서려면
오랫동안 피와 땀을 같이 섞은 사내가 필요하다.
곽요연은 동생의 그런 심중을 익히 알았다.
이제 일심각이 무너지고 삼화일지 최신도 죽었다. 동생에게 남
은 것은 오직 하나, 신창윤가뿐이다. 그녀가 윤명과 함께 신창
윤가로 돌아간 것은 너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의 심중이었다.
모든 것을 환히 알고 있을 터인데, 밀옥에 가둬 죽일 수도 있
는데 풀어 주다니. 그리고 모든 음모의 한부분을 차지했던 곽
무연을 곱게 보내다니.
곽요연은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쳐 버렸다.
그런 점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왕중분만 가만히 있었어도 신계각의 일통된 힘으로 곽가
장을 고립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공공연히 나서
지 않아도 벌써 일이 끝나 있을 덴데. 회유나 공갈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동종관과 사공을 떠나보냄으로써 모든 계획이 일
단락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했다.
정대원들은 늘 죽음과 직면하면서 산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그
런 상황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목숨에 대한 미련이 오히려 강하
다. 가족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다.
사우맹의 힘으로 그들의 생각과 육신을 옭아맬 수 있었다. 정
체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의 정대원은 하늘을 놀라게 하지만,
백일하에 드러난 정대원은 분타 무인들보다도 약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희한하게도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을 도와주었다. 사공이 접
촉하려던 자들. 그들은 어떠한 회유나 공갈로도 소신을 굽히지
않을 자들이었다. 그들의 처리 문제로 고심했는데.
아버지는 동종관이 그들을 이용하지 못하게끔 통로를 차단했을
뿐만 아니라 동종관에게 목함을 내려 죽이기까지 했다. 동목과
석수는 참으로 억세게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의 의도
는 함상과 진육처럼 죽여 버리려고 했다.
일이 틀어진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아니, 아버지 때문이었다.
역시 아버지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남편
을 외길로 몰아 자신이 건드리지 않은 정대원을 모았고, 반격
준비를 마쳤으니까.
왕중분이 모은 정대원들은 별것이 아니었지만 정작 아버지를
상대해야 할 왕중분의 마음이 돌아서서는 곤란했다.
아버지를 상대할 수 있는 절대적인 무공을 지닌 자.
그것이 없었다.
자신에게도, 동생 곽선연, 곽무연에게도.
언니도 물론 상대가 안 된다. 아버지의 진신 무공을 알아보기
위한 암습에서 단 일초 만에 꺾이고 말았으니까.
곽가장에 있으면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도주했
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번에도 이상한 행동을 했다. 곽무연을
풀어 주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셋째인 곽무연이 사당을 움켜잡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중에
세력이 강한 비수당, 비화당을 몰살시키면서도 정작 동생은 죽
이지 않은 점도 수상쩍었다. 마치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마
음껏 해봐라! 하는 것처럼.
'치잇! 아무것도 모르는 막대가 따라간다 할 때부터 이상했어.
혈단으로 자신의 살을 도려내는 작업에 막내를 끼어 넣다니.
그때, 오늘의 사태를 짐작했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아무도 믿
지 않는 거야. 아무도. 모조리 죽이기로 작정했어. 그런데 왜
놔준 거지? 죽일 기회는 많았는데...'
"나요. 들어가도 되겠소?"
곽요연은 얼음처럼 냉막한 음성에 깊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들어오세요."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사람은 왕중분이었다.
"아버지를 만났다면서요? 놀라운 일이군요. 원방파에서 무인을
양성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천지유불이 상공의 아버님이라니."
"그렇지. 내 아버지에 불과하겠지. 각설하고... 무엇 때문에
보자고 했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남편과 아내라는 사이지만 둘은 낯선 타인처럼 서로 어색했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요."
"그럴 필요가 있나?"
곽요연은 오랫동안 왕중분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성격은 닮은꼴인 듯 냉막했다. 평소에도 정애(情愛)
의 표시는 낯간지러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곽요연이 관
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말을 한 것도 오랜 생각끝에 꺼낸 말이
리라.
"내 무공이 필요한 건가?"
"우리 사이는... 이제 끝인가요?"
"당신답지 않은 말이군."
"그렇군요. 나답지 않은 말이에요. 그럼 다시 말하죠. 무공을
빌려주세요."
"대가는?"
곽요연의 아미(蛾眉)가 파르르 떨렸다.
"받고 싶은 게 무엇이죠?"
"당신의 혀."
"...?"
"딱 한 번,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지. 곽모천을 죽여주는 대가
로 내 마음을 희롱한 당신의 혀를 갖겠어."
"호호호호...!"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곽요연이다.
그녀는 허리를 부여잡고 웃어제꼈다.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남편이라는 작자도 아비에게 검을 들
이대야 하는 절실한 사정을 모른다. 마음을 희롱한 대가? 마음
을 희롱했다? 그렇게 많은 밤을 같이 보냈으면서도 아내의 마
음을 의심하는가.
"좋아요. 드리죠."
왕중분은 감정 없는 얼굴로, 먼 길을 떠나는 아내에게 웃음 한
번 보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이 싸움에서 빠지겠다는 말을 들었기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거
예요. 천지유불이 아버지를 맡겠다고 했지만 어림없죠. 솔직히
말한다면 천지유불은 큰언니도 이기지 못할 거예요. 당신은...
친아버지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잔인한 사람... 기분은 좋군요. 내 혓바닥이
아버지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니.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세요."
왕중분은 등을 돌린 채 묵묵히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
나자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당신의 혀를 자를 이유가 또 생겼군. 잔인하다? 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군. 잔인하다는 말은 당신네 부녀간을 위해서 만들
어진 말이지. 후후후! 잔인하다! 후후후...!"
왕중분이 방문을 탁 닫고 나가자 곽요연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허리를 꺾었다.
한동안 잔잔한 울먹임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곽요연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수견(手絹)으
로 찍어 닦았다.
"혓바닥... 드리죠. 곽모천만 죽일 수 있다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철천지 원수를 대하 듯 소름끼치는 냉막한 살기가.
* * *
곽소연은 말을 잊어 버렸다. 원래 말이 없던 곽소연이었다. 그
녀의 유일한 취미라면 독서와 사색. 그녀는 반여량이 놓고 간
감룡경에 흠뻑 도취했다.
감룡경에 오묘한 진리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감여가들이나 읽
는 감여서(堪輿書)가 그녀에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무엇인가 정신을 흠뻑 쏟아 부을 것이 필요했다.
조반(朝飯)이 들어왔다.
야채가 주종을 이루었고, 대야호에서 나는 은어구이가 맛깔스
러워 보였다.
그녀는 두어 숟갈 깨작거리다 상을 물렸다.
그로부터 한 시진쯤 지난 후, 동목과 석수가 찾아왔다.
그들은 곽가장에 있을 적부터 마음이 통했던 지기(知己)였다.
거기에 수많은 난관을 겪었고, 사랑하는 벗들을 잃고 말았다.
그런 환경을 이겨내면서 두 사람은 더욱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
다. 지하 암굴에 득실거리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 중 두 사람
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상심(喪心)이 크겠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시오."
동목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했다.
조용하고 치밀한 성격은 천성인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는 석수
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작호는 마른 하늘, 정건이지 않은
가. 그러나 석수는 작호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농(弄)을 건네
왔다.
"하하하! 감룡경이라 좋지. 추풍, 그 녀석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더니 이야기가 잘된 거요? 그렇겠지. 세상에 오공녀
같은 여인을 마다할 놈이 어디 있어?"
'오공녀...'
오랜만에 들어 본 소리였다.
귀에 익숙한 호칭이었지만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아온 세월만큼
이나 지난 일 년은 길었다.
'고마운 사람들.'
곽소연은 그들을 향해 방긋이 웃어 주었다.
아니, 그것은 그녀의 마음뿐이었다. 경직된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목, 이 돌팔이가 내 수족을 다시 만들어 줬는데 굉장히 좋
아. 소저, 내가 무공을 펼쳐 보일 테니까 보쇼. 쇠로 만들어진
것이 몸에 착 달라붙는다니까."
석수는 괴상한 무공을 펼쳐 보였다.
그는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잃었으니 반신이 잘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 동안 익힌 무공은 무용지물이 되
어 버렸다. 그가 가장 자신있던 부분은 수공(水功). 하지만 이
제 영원히 펼치지 못하리라.
"저놈이 자신에게 맞는 무공을 개발한다고 저 난리요. 신법이
자유롭지 못하니 일격필살(一擊必殺)을 노려야 한다나? 삼혼검
법에서 중(重) 수법을 빼내 권법에 응용하는 중이오."
동목은 비웃듯이 말했지만 그의 말 속에는 진한 우정이 배어
나왔다.
"우후후! 그렇게 말하는 저놈은 무공을 수련할 생각은 않고 담
금질로 하루를 보내고 있지. 오공녀, 저놈에게 비밀이 하나 있
는데 말해 줄까? 저놈은 손 풀무질을 안 해. 발 풀무질만 하
지. 창병가의 비밀이 발 풀무질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후후! 오공녀, 내 저놈의 비밀을 꼭 알아내서 말해 주리다."
"쓸데없는 소리."
이들은 마음의 담장을 허물었다. 사공이라는 같은 직위에 있으
면서도 관리하는 대원은 철저히 비밀에 부칠 만큼 비밀이 많았
다. 그런 사람들이 모든 것을 허물고 상대를 받아들였다는 것
은 보이지 않는 큰 변화였다.
동목과 석수는 한동안 너스레를 떨었지만 곽소연의 굳어진 입
을 열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다음의 방문객은 산귀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무공을 모르는 산귀와 무공이 약한 곽소연은
같이 뭉쳐다녔다. 산귀는 딸을 얻은 기분으로, 곽소연은 받아
보지 못한 어머니의 자상한 마음을 받는 기분으로.
"언젠가 왜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
'그랬죠. 반여량, 그 사람과 신분 격차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
을 때... 혼란스러웠거든요.'
"나는 일에 미친 사람이었지. 허허! 명당이 있음직한 곳은 두
루 돌아다녔어. 덕분에 산귀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고 일파의
총수까지 되었지만...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과연 무엇을 했나
후회가 돼."
'들은 적이 있어요. 일벌레라는 소리.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일하신다는 것도.'
"감여가라는 직업...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돼, 가정을 일구
고 사는 평범한 삶이든지, 아니면 감여가의 고독한 삶이든지.
허허! 그렇지 않나? 산세를 보러 천리만리 떠도는 사람이 가정
을 가진다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 걸요.'
"추풍 그 친구... 감여를 택했어."
'...'
"살기 위해서 무공을 익혔지만 감여계로 돌아갈 사람이야. 그
런 사람에게 정을 주는 소저가 안타까웠지. 지켜보기 딱했어."
'알... 아요.'
"대공녀를 찾아가게. 대공녀는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어. 진
실을 들으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질지 모르겠군."
'진실...?'
"내가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이. 혹여 원방파에 누(累)가 될
까봐."
'큰언니... 그렇겠죠. 큰언니뿐 아니라 모두 검을 들어야 할
사정이 있겠죠. 듣고 싶지 않아요, 반여량의 말이 옳아요. 부
모는 아무리 천하죄인이라 할지라도 부모인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벌써 곽사연의 방을 향해 치달리는 중이
었다. 왜, 왜...? 아버지에게 검을 들게 된 연유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것이 비록 듣지 않은 것만 못하다 할지라도.
곽사연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크지도 넓지도 않은 석실이 온통 검풍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곽소연을 보면서 생긋이 웃었다.
"올 줄 알았다."
"언니..."
"그래, 너도 컸으니까."
언니는 미치지 않았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은 위장된 행동이다. 곽소연은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는 냄새가 좋아. 꼭 밀옥에 갇혀 있는 기분이야. 소연아,
내가 가장 마음이 편했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밀옥에 갇혀 있
을 때야. 그때가 가장 마음 편했어. 호호호! 곽모천, 그놈...
검을 들이대자 놀라는 표정이라니. 호호!"
곽사연은 의자에 앉아 투박한 옹기에 차를 따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는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 아니,
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곽소연은 울컥 분노가 치밀었지만 조용히 맞은편 의자에 앉았
다.
"너... 어머니의 이름이나 아니?"
"...?"
곽사연은 다짜고짜 이상한 말부터 물어왔다.
곽소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 같지 않은 말에는 대답할 필요
가 없다는 뜻을 얼굴에 떠올린 채.
쪼르륵...!
담녹색(淡綠色)의 맑은 차가 옹기에 따라졌다.
"그럼 우리 다섯 자매... 생김생김도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치고는 닮은 데가 전혀 없단 말
야. 왜인 줄 알아? 왜 그런가 생각해 본 적 있어?"
"..."
곽소연은 봉목을 치켜떴다. 언니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겐
가. 다섯 자매, 물론 생김도 성격도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다른가 하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어머니 이름은 남의봉이야. 맞지?"
"언니!"
곽소연은 꼭 불길한 말을 들을 것 같은 예감에 몸을 잘게 떨었
다.
"그래, 맞아. 네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맞아. 우리는
아버지가 모두 달라. 그 아버지들은 어디 있는지 알아? 지옥에
있어. 모두 죽었지. 호호호!"
"언니! 미쳤어!"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만분동이지
지금 무슨 이야기란 말인가.
"들은 김에 끝까지 들어. 우리는 곽모천, 그 인간과는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그 인간은 고자(鼓子)야."
- 그 인간은 고자야.
천둥소리가 귓전을 후려치는 것 같았다.
언니는 차를 홀짝거리고 있는데 아직도 언니가 한 말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그 인간은 고자야.'
'그 인간은 고자야.'
"마... 말도 안 돼!"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지만 언니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嘲笑)
를 보자 변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달아야 했다.
"곽모천 그 인간은 곽가장을 영원불멸하게 존속시키고 싶어했
어. 당연히 사내자식을 원했고. 하지만 관계를 갖지 못하니 자
식인들 낳을 수 있겠어? 그놈은 근골이 좋은 사람을 납치해서
어머니와 강제로 관계를 맺게 했지. 그리고 죽여 버린 거야."
'아냐, 거짓말이야.'
"호호! 어머니는 참 못난 여자야. 다른 사내의 자식을 낳고도
무사할 줄 알았다니. 그나마 그토록 오래 산 것은 사내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이지. 내가 만일 사내로 태어났다면... 호호
호! 너희들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어."
'언니, 언니! 제발 농담이었다고 말해 줘.'
"어머니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사실이야. 적어도
곽모천 그 인간이 어머니를 죽이지는 않았어. 혼자 살았지. 그
래서 무림인들의 칭송도 듣고. 호호호! 모두가 위선이야. 그
인간은 남몰래 다른 짓을 저질렀어. 무슨 짓인 줄 알아?"
'듣고 싶지 않아. 이제 더 이상은 정말 듣고 싶지 않아.'
곽소연은 자신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녀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푸른 귀광을 뿜어냈고, 입술도 파
랗게 질려 보기가 안쓰러웠다. 그러나 곽사연은 그런 얼굴을
슬쩍 흘겨 보았을 뿐 잔인하게 뒷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염기(艶氣)가 가장 강하다는 여인을 물색했지. 동기
감응 감여가가 항시 문제야. 삼혼검법의 오의(奧義)를 누가 가
르쳐 주었는지 알아? 아버지가 옥순산에서 죽인 혈조수의 후인
들이야. 아! 그들이 무고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잘 알지? 무공
의 '무'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삼혼검법을 만들어 줬어. 동기감
응으로. 대가는 혈조수의 후인이라는 오명. 그런데 동기감응을
익힌 감여가가 또 나온 거야. 안철주라는 사람이지."
'추풍의 사부!'
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곽사연이 하는 말은 그
녀를 계속 놀람으로 이끌고 갔다.
"곽모천이 안철주에게 원한 것은 잃어버린 성기능을 되찾게 해
달라는 것이지. 안철주는 대답했어. 세상 만물은 음양의 조화
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또 죽어 버린 양기를 북돋는 것은 지
고지순한 음기라고. 음갈마희 초초를 찾아내게 된 배경이야."
"음갈마희 초초?"
오랜만에 곽소연의 입이 열렸다.
"음갈마희의 성욕은 대단했던 모양이야, 죽었다고 생각했던 성
기능을 살려 놓았으니까. 곽모천은 그녀에게서 원하던 사내자
식을 얻었어. 이름은 혼(魂), 곽혼이야. 그놈을 구궁산에 은폐
시켜 놓고 무공을 수련시켰지. 호호호! 하늘은 무심하지 않아.
혼이는 어미 핏줄을 타고나 사내자식이면서도 음기가 강했거
든. 음기지맥(陰氣地脈)인 구궁산에서 무공을 수련해야 할 팔
자였지. 그런데 그놈을 반여량이 죽인 거야."
'혼... 그러면 구궁산에 있던 괴인이... 그가 탈명화검을...'
"우리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어. 자, 이래도 우리가 나쁜 거
니? 호호호! 곽모천, 그놈은 우리가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
어. 그때, 혼이란 놈이 주화입마에 걸려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
고. 곽모천 그놈은 자식을 치료할 겸, 우리도 제거할 겸 죽음
의 여행을 시작한 거야."
곽소연은 아찔한 충격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석실 바닥이 빙글빙글 돌았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빛이 노랗게
보이고... 그 다음은 잊어 버렸다. 쿵! 하는 울림과 함께 거친
바닥에 넘어졌다는 것만 기억할 뿐. 맨정신으로 듣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말이었다.
"이리 오시죠."
건장해 보이는 사우맹도가 길을 안내해 주었다.
이리 휘어지고, 저리 꺾어지고... 산지사방으로 수십 개씩 뚫
려 있는 암굴들. 안내하는 무인이 없다면 돌아가는 길조차 찾
지 못할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반여량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잊지 않았다.
지하에 암굴을 파기 위해서는 버팀목이 필요하다. 아무리 미로
가 복잡해도 버팀목 특유의 형상이 있는 한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여기입니다."
"수고했소."
길을 안내해 준 무인에게 사의를 표하고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반여량은 예의에서 벗어난 줄을 알면서도 문을 밀치고 들어섰
다.
통로와 마찬가지로 퀴퀴한 냄새가 제일 먼저 반겨 주었다.
사우맹 총단은 많은 인원이 은신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지하
에 이만한 규모의 암굴을 뚫으려면 불철주야로 작업해도 일 년
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유통되지 않고, 빛이 없
어 사람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곽가장 사람들에게 배정된 방은 신경을 썼는지 사방이 석벽(石
壁)으로 둘러쳐졌다. 하지만 오래 묵은 습기가 어디로 가겠는
가.
반여량은 콧등을 찡긋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칠흑같이 어두웠다.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곳이라 어두운 것이 당연했지만 광
장에서 나온 후 피곤했던 몸을 푹 쉰 끝이기 때문에 작은 등불
이라도 밝혀 놓았어야 하거늘.
반여량에게 어둠은 문제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지는 동기감응은 어둠 한구석에 웅크
리고 앉아 있는 작은 동체를 발견했다.
"후우!"
그는 가늘게 한숨을 내쉰 후, 방 한가운데 놓인 다탁(茶卓)으
로 걸어갔다.
방의 구조는 똑같았다.
일곱 평 규모의 크기에 한쪽 벽면에는 침상이 붙어 있다. 한가
운데는 다탁이 있고, 그 위에 탁상등(卓上登)이 놓여졌다. 의
자는 모두 네 개. 침상 옆으로는 병기대가 있고, 병기를 손질
할 수 있도록 마포(麻布)와 숫돌도 있다.
반여량은 다탁 위에 놓인 화섭자를 들어 불을 켰다. 순간,
"켜지 마욧!"
째지는 듯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여량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개의치 않고 탁상등에 불을 옮
겼다.
실내가 환해졌다.
반여량에게는 이미 소용이 없어져 버린 불빛이지만 밝음과 어
둠의 차이는 컸다. 인간은 가능한 밝은 곳에서 생활해야 한다.
밝음은 양(陽)이다. 생기(生氣)다. 슬픔, 고통, 좌절을 물리쳐
주고 의지를 심어 준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는 곽소연이 보였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소?"
"..."
"눈을 붙이지 않은 거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한잠 자두라니
까."
"..."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던 사람답지 않게 곽소연은 깊은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속알맹이가 전부 빠져나간 빈 껍질처럼 비쳐졌
다. 옆에서 톡 건드리기만 해도 와스스 부서져 버릴 것 같았
다.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부여잡고 일으켜 세웠다.
곽소연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시뻘겋
게 충혈되었고, 눈두덩은 퉁퉁부었다. 지금도... 그녀는 울먹
였다.
"흑!"
갑자기 격정을 토해낸 곽소연은 무너지듯 반여량의 가슴에 고
개를 기대왔다.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그녀가 당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어느 가정보다 단란한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라니.
반여량도 이런 절망감을 맛본 적이 있다. 한한이 떠나가자 세
상 모든 것이 미웠고, 세상 모든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았다. 혼
자 있고 싶었다. 곁에 누가 다가와 말을 걸으면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번민에서 벗어나는 데는 죽음의 여행에 덕 입은 바가 컸다. 끝
없이 다가오는 살수들, 변화하는 판국(版局)...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워야 살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만 본다면 오히려 곽
모천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리라.
반여량은 곽소연이 겪고 있을 혼란을 충분히 이해했다.
곽모천이 성불구자라는 사실은 이제 비밀이 아니었다. 곽사연
이 미친 듯이 떠들고 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
다.
실로 놀라운 말이었다.
성웅(聖雄)으로 알았던 곽모천이 그런 짓을 했다니. 곽가장을
공격하려 하면서도 천하의 공적이 될 것을 염려했는데 이제 그
럴 필요가 없었다.
곽요연이 신창으로 떠나면서 자신만만했던 이유도 알았다.
그만한 사연이라면 신창윤가도 팔목을 걷어붙이리라. 어쩌면
벌써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넷째 곽무연이 신창에 가 있
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성격에 얌전히 있을 리는 없으니까.
사우맹도들까지 치를 떨게 만든 일.
곽가장 자매를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들
편에 서서 그 동안 마음속에 혼자 끓여왔던 고통을 어루만져
주었다.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왕중분과 조중이었다.
그들은 그렇지 않아도 번뇌에 시달리는 사람들인데 패륜적인
사실까지 드러나자 눈에 띄게 안정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들
은 엄밀하게 말해 타인이다. 시간이 걸릴 뿐, 그 문제에 대해
서는 곧 정상을 회복하리라.
역시 가장 충격이 큰 사람은 곽소연이었다.
다른 자매들은 일찍이 겪었을 충격을 이제 겪는 것뿐이지만 세
상천지에 홀홀단신으로 추락했다는 심정은, 혈육인 줄 알았는
데 오히려 원수라는 기막힌 현실은 그녀를 깊은 나락으로 떨구
어 버렸다.
"저 어쩌면 좋죠?"
"훌훌 떨치고 일어나시오."
마음으로 한 말이다. 말이 쉽지 참으로 하기 힘든 행동이지 않
은가. 특히 그것이 정해(精海)에 관련된 일이면 더욱 벗어나기
어려웠다.
곽소연은 더 이상 흐느끼지 않았다. 반여량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편히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이다
오랜만에 취한 안식.
반여량은 한동안 그녀를 안아 주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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