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 지새우고
풀잎바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마음의 설음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1970년대 눈 푸른 청년은 사람보다 머니를 숭상하는 권력이라는 절벽에 부딪혔다가
공포스러운 마음으로 밤을 새우고
허전한 마음으로 동이 튼 후 방랑자처럼 동산에 오르니 잠깐이지만 반짝이는 아침 이슬에 미소를 짓습니다.
눈 푸른 청년 김민기님이 보고 겪은 1970년대 대한민국 모습입니다.
과거 청년이던 김민기도 이제 노인이 되어 떠나갔는데..
아침 이슬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나요?.
아침 이슬을 보며..
누구는 진주처럼 보고..
또 누구는 서러움으로 보고..
또 다른 누구는 자연이 주는 선물로 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각자의 마음이 이슬을 보며 각자의 마음을 담은 이슬을 봅니다.
그것을 석가세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14. 이법경(二法經)
2.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다.
(이 둘은) 비물질[경계가 아님] 이다.
3. 안(眼)과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5.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다."
有二因緣生識。何等為二?謂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如是廣說,乃至「非其境界故。所以者何?
眼、色因緣生眼識,彼無常、有為、心緣生,
色若眼、識,無常、有為、心緣生,
此三法和合觸,觸已受,受已思,思已想,此等諸法無常、有為、心緣生,
所謂觸、想、思。耳、鼻、舌、身、意亦復如是。」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은 일찌감치 주체의 6근과 대상의 6경이 만나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이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석가모니는 그것을 더 깊게 관찰하여..
2법 6쌍이라는 12처가 마음에 생겨 그것이 인식을 만들고 세계가 있음을 본다는 겁니다.
곧 김민기님의 이침 이슬이란 인식은 안과 색 등 2법 6쌍의 12처에 의해 생기는데..
그 12처는 마음을 연해 생긴 것이라는 겁니다.
6근6경과 12처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해나 이슬이 있는 데 그 해는 대상으로 주체와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럴 경우 해가 주체에게 괴로움을 줄 경우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되어 있겠지요.
그런데 보고 있는 해가 마음을 연해 생겨 있는 것이라면..
마음을 어떻게 닦았느냐에 따라 마음에 생긴 해라면 컨트롤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어지지 않습니까..
김민기님에게 아침 이슬은 항상 설음이 맺힌 고통 속의 이슬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어떤 때는 진주보다 더 고아 미소 짓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침 이슬이 마음을 연해 있는 12처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거지요.
여기 또 하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게 있어요.
보통 무상이라 하면 태어나 머물고 변하다 끝내 사라지는.. 생주이멸하는 것으로 아는데..
또 다른 의미의 무상은..
태어날 수 있는 씨앗이 없어 머물고 변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 자체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의 무상이 있어요.
그럴 때 무상을 불생불멸, 불왕불래 라고 합니다.
생주이멸 자체가 일어날 수 없는데..
촛불처럼 우리에게는 생주이멸하는 것처럼 보인는다는 뜻의 무상이 있어요.
그럴 때 무상을 불생불멸, 불왕불래 라고 합니다.
12처는 무상이라 하는데.. 그 경우
안입처는 어디 굴 속에서 쉬고 있다가. 볼 때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불생이면서 마음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해 됩니까?.
그래서 안입처는 보는 마음이요, 색입처는 보이는 마음으로 이해하는 게 얼떨지.^^.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