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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계신 하나님(행17장24-28)
성경본문: 사도행전17:24-28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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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올 들어 두 번째 이웃 초청 잔치는 지난 월요일 밤으로 막을 내렸습니다만 오늘 설교는 이번에 처음 오신 분들을 마음에 두고 하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말씀에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전파자 사도 바울이 헬라 문명의 근원지인 아테네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그 나름대로의 종교를 갖고 사는 헬라 사람들에게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행전 17장 27절 말미에서부터 읽어봅시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달리 말해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존재하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한다면 거의 틀림없이 여러분은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분일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타락한 다음부터 하나님을 그들의 생각 저 끝으로 몰아내었습니다.
그 후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이라도 한다면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분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가까이 계신 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세상에서 나만 존재하듯이 나를 가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하실 때는 마치 여러분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십니다.
밝은 달이 비취는 물가에 서면 달빛이 마치 여러분에게만 비취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엄청 크셔서 한 부분이 여기 있고 다른 부분은 저기 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의 전부가 여기에 있고 또한 그의 전부가 저기에 있습니다.
아니 모든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여기 한 청소년이 있습니다.
청소년이라기보다는 사실 청년입니다만 그는 자기를 아직 청소년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마마보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 집을 떠나 도망하고 있습니다. 형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길도 없고 시외버스도 없던 시절입니다.
손에 도로 지도 한 장도 없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다만 그 방향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떠오르는 해를 보고 방향을 감지했기에 해가 지면 가던 길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들판에서 잠을 자야하지만 캠핑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텐트도 없고 베개도 없기에 돌을 하나 골라서 베개 삼아 잠들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운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맨 꼭대기에 서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이 청년 야곱은 두려워했습니다.
“여기야말로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구나.”라고 두려워하며 고백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날 이스라엘로 성지 순례를 하신다면 그 지점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그 때 했던 고백을 우리는 어디서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만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지순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다른 성경을 보십시오.
사막의 광야에 한 늙은이가 있습니다. 나이는 꽤 되었지만 노인처럼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나이 80세였지만 아직도 생각과 체력이 젊은이와 같았습니다. 수 년 동안 양을 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과학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실 당대의 최고 학부출신이기도 합니다. 당시 세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과학자로서 그는 멀리서 일어나는 현상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가시덤불에 불이 붙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막에서는 덤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은 가끔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지금 특이한 것은 덤불이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당대의 과학도답게 그 현상을 가까이 가서 관찰하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 덤불로 다가서고 있을 때 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땅은 거룩한 곳이니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어떤 곳이 거룩한 곳입니까?
예배실 가운데 여기 강대상이 위치한 곳입니까?
대사원이나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거기 사막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사막, 그 어느 곳이나 다를 바 없지만 어디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은 거룩한 장소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곳을 살펴보십시오. 한 소년이 장막에서 잠을 자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막이란 텐트로 만들어진 교회당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구조가 조금씩 바뀌기도 했겠지만 그 때는 예배당 어딘가에 봉사자들이 먹고 자는 숙소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배처소에는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았던 시간입니다.
어딘가에 한 늙은 제사장도 막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입니다.
지금 어린 소년, 아직 학교에 갈 나이도 안 된 어린 소년도 거기에서 수종을 들고 있었습니다.
청소를 하고 창문도 열고 닫기도 하는 일을 돕던 소년이 막 잠자리에 누워 잠이 들려고 하는 찰나에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는 늙은 제사장에게로 달려가서 말합니다.
“불렀습니까?”
“아니, 부르지 아니했다”
다시 잠자리에 들어 잠이 들려는 순간 또 한 번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달려갑니다.
성막에는 자기와 엘리 제사장외에는 아무도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불렀습니까?” “아니 부르지 아니했다. 가서 자거라”
또 다시 잠 드려는 순간 세 번째로 “사무엘아, 사무엘아”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서 묻습니다.
“부르셨습니까?”
그 때 늙은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알아채고 “다시 부르거든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하라고 일러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찾아 왔습니다.
소년 사무엘은 잠자리에서 누워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알려주시지 않았던 때의 일입니다.
보십시오.
잠자리, 바로 거기가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전이라고 하면 조용하고 거룩한 곳이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성전은 결코 조용하고 엄숙하고 그럴듯한 분위기가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거기는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장소입니다.
오늘날 대성당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성전 안으로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짐승들은 자기가 죽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들어가지 아니하려고 울고 시끄럽게 떠들며 발버둥 칩니다.
죽은 짐승의 시체하며 뿌려진 피, 게다가 돈을 바꾸며 짐승을 파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범벅이 된 장소가 구약 시대의 성전입니다.
그런 시끌벅적한 성전으로 한 사람이 들어섭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짐승들이 떠드는 곳에서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
천사들의 찬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이사야는 만나 뵙게 됩니다.
그는 절망합니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뵈었으니 죽게 되었다고 탄식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그 입술을 정케 합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는 사죄의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습니다.
특별한 장소가 아닌 삶의 현장에서 존귀하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순례의 길을 걷다가, 여행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해서 가르치는 바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묵상하고 적용해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웃 초청 잔치가 인연이 되어서 오늘 다시 예배당을 찾은 사랑하는 구도자 여러분, 이 진리를 묵상해 보십시오.
이 동일한 진리를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이전과 동일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시는 여러분,
이 사실은 여러분이 짓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짓는 모든 죄악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한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내어 뱉는 말들, 여러분의 행동으로 짓는 죄들은 모두 하나님의 눈앞에서 행해진 것들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한 거짓말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행한 죄악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그 분의 눈앞에서 행한 죄악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어떻게 보내십니까?
그날을 기억하여 안식하며 거룩하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그 분의 면전에서 행한 행동의 사악함을 기억하십니까?
선생님이 없을 때는 아수라장이 되는 초등학교 교실 상황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오시면 한 순간에 조용해지는 아이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어린아이들도 선생님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달리 처신합니다.
떠들다가도 선생님이 오시면 조용해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보시는 그 분의 목전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팔을 펼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숨결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무관심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를 인식하기 바랍니다.
천국을 상상해 보십시오.
모든 천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칭송합니다.
수천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서 환호합니다.
모든 천사들이 그 서열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40년 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보십시오.
생명을 주시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알기를 거부하는 죄악을 생각해보십시오.
팔 벌리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죄악이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보십시오.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60년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기를 거부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심장의 모든 박동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찌 나이든 사람뿐이겠습니까?
개구쟁이 소년을 보십시오. 그에게 재능과 활력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불경건이며 사악한 죄의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속이려고 듭니다.
“누가 나를 지켜보랴?”고 죄를 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양심이란 감시 카메라가 없으면 더욱 악을 행하기에 담대해 집니다.
인간의 양심은 너무 부패해서 가까이 계신 하나님조차 감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의 호흡을 주관하시며 먹고 입을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속이려드는 사악한 인생을 보십시오. 그러나 모든 인생은 펼쳐진 책과 같이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 기록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읽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의 행동과 생각, 그 동기를 보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도피할 곳은 천지간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놀라운 진리이지만 동시에 무척 감격적인 진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모은 돈을 들여서 소위 성지에 가서 특정한 복장과 음악과 분위기에 접하면 하나님을 보다 손쉽게 만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을 내려오게 할 필요도 없고 모셔 올릴 이유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특정한 장소에 가서 특별한 복장을 하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특별한 음악과 예식에 동참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웃 여러분에게 지금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합니까?
특정 지역이나 거리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무감동한 여러분 자신의 마음자세입니다.
마음을 바꾸면 즉각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감정이 바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여러분의 심령을 감찰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가 바로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언제나 여러분의 숨결보다 더 가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사면장을 들고 다가서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복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통해 여러분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우리가 움직이며 생존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가까이 계신 하나님께 지금 부르짖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단번에 응답하십니다. 그는 단번에 구원하십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단번에 주십니다. 단번에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예수께서 처벌받으셨기에 단번에 용서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삶을 사셨기에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됩니다.
부르짖기만 하면 그 어떤 사악한 죄인이라도 용서를 받습니다.
진실로 믿고 부르짖는 순간에 용서하십니다.
그 어떤 죄인이라도 사면장을 받게 됩니다.
복음은 진실로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가까이 계신 하나님에 관한 소식은 이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삶의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성도답게 고상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세상을 사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꼭 한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경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을 가까이서 보고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삶은 바뀝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 말하는 모든 것들, 세우는 모든 계획들을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세상 사람들의 삶과 다를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광채가 우리 삶에서 비췰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특별한 사람만 드릴 수 있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컴퓨터에 몰두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람들을 다루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그 무엇에 몰두해 있어도 여러분의 의식은 다른 것에 빠질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현장에서도 누군가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일에 빠져 있어도 누군가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다는 의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 생애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단순한 것입니다.
그 분을 언제나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환난 날 우리가 만날 도움이십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 것입니다.
일반적인 주부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크게 많이 바깥을 나가 다닐 일도 없습니다.
대부분 집안에서 반복적인 일을 할 것입니다.
청소를 하고 밥을 짓고 그릇을 씻고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집안 손질을 하곤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사입니다.
도대체 이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꼭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망각했을 때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이란 하나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거기에서 만나셨습니다.
성소의 문을 열고 닫고 마루를 청소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사무엘을 만나셨습니다.
가장 평범하고 무료하고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을 감동으로 몰아가는 놀라움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도 기대와 감격으로 낙관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을 특별한 감격과 기대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가 우리의 영혼을 환희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전하는 복음이 복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전하는 설교가 기쁜 소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도 위로가 됩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 무엇이 여러분의 위로가 될 수 있습니까?
죽음 다음에 무엇이 펼쳐질 지 아무도 말해줄 수 없을 때 진정한 위로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 외에는 무엇이 우리를 위로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를 힘입어 살며 그 분 안에 움직이며 그 분을 통해 생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는 놀라운 사실만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위로가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